울진 왕피리의 왕피천
▒▒풍경이 있는 한국여행
정연휘 시인의 포토에세이·3-166
오지 왕피리 왕피천王避川
-삼척三陟의 옛나라 실직국悉直國의 마지막 왕 안일왕安逸王 유적을 찾아서
2016,4,24.
유람이든 답사이든 여행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자동차로 왕피천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상류쪽은 36번 국도에서 금강송면 왕피리 속사마을로 가야하고, 하류쪽은 7번 국도에서 근남면 구산리 굴구지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두 마을간 거리는 왕피천 물길로 불과 5km 남짓이지만 연결 도로가 없다. 차로 돌면 50km 거리다. 왕피천의 비경은 바로 이 두 마을을 연결하는 생태 트레킹 코스에 숨어 있다. 왕피리로 찾아가는 길은 울진읍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울진 안에서도 왕피천 유역은 오지 중의 오지 이다.왕피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통고산(1,067m)의 박달재는 실직국 안일왕이 통곡하며 넘어간 고갯길로 한恨이 서린 곳이다. 왕피리의 왕피천王避川은 양쪽이 절벽인데다 외길이고, 외길 끝은 찻길이 없어 세상의 절벽,세상의 끝이여서 결국에는 오던길로 되돌아 세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오지 중의 오지로의 도전은 힐링이고 건강한 정신과 열정이 깔려있다.
왕피리 왕피천으로 가려면 울진 불영사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금강송면 소재지 삼근리에 도착한다.그곳에서 왕피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차례 밖에 다니지 않는다. 왕피천 상류인 왕피리 가는 길은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연결된 도로는 임도林道 같은데 시멘트 포장이 잘 돼있을뿐 마을을 잇는 길로는 보이지 않는다. 면 소재지만 해도 산골 중에 산골인데 거기서 또 산을 넘어 민가가 있으리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다. 차 한대가 비껴가기 힘든 길을 구비구비 돌아 오르면 박달재(566m) 정상이다.
박달재에서 남쪽 산록을 내려가면 안골마을이 나오는 데 여기서 부터가 왕피리다.동수골에서 한천마을까지는 6Km 그 구간은 무인지경의 원시림이 펼쳐진다. 산천어양어장이 길가에 보인다. 사철 물이 풍부하고,수온이 낮아서 산천어 양식에 적지로 치어는 산천어축제에 전량 납품한다. 왕피리의 본 마을은 안골마을에서 내려가는 지류가 왕피천과 마주치는 지점에 있는 거리골이다. 오지마을의 전형은 통고산 동쪽 기슭에 있는 원래 주석광산촌이였던 장재터 이다. 능선위로 올라서 고갯마루를 넘으면 장재터가 시작된다.
왕피천王避川이라는 이름 자체가 왕이 전쟁이나 국난을 당해 피신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왕피천은 삼척三陟 지역에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소국인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安逸王이 마지막으로 피신한 곳이다.기원 후 50년경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되고,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안일왕산성]인데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에 산성의 형태가 지금도 잘 남아있다.안일왕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 일명 박달재는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병위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다.
왕피리는 오지이면서도 물이 풍부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왕피천은 은어가 뛰놀고 연어가 회귀하며 쉬리가 사는 1급수 청정지역이자 생태계의 보고로, 이곳은 생태계보전이 잘 돼 있어 환경부에서 가치를 인정한 곳이다. 자연환경 정밀조사 결과 왕피천 유역은 산양, 하늘다람쥐, 담비,사향노루, 수달, 삵 등을 비롯해 까치살모사, 꼬리치레도롱뇽, 물두꺼비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1107종의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그 일대는 노랑무늬붓꽃, 애기송이풀, 고란초 등 희귀식물과 곧게 뻗어 으뜸 종으로 꼽히는 울창한 금강소나무숲, 측백나무 자생지까지 어우러저 있는 마지막 남은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나타났다.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의 젖줄이자 동해안 최고의 생태하천인 왕피천은 생태레저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2000년 전 실직국 시대 안일왕의 스토리를 '왕피천생태탐방로'에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하고 있으리라 본다. 삼척이 1500년 전 신라시대 [수로부인 헌화공원]으로 스토리텔링에서 진화해 스토리두잉Storydoing 하여 힛트 창조관광명소가 된 예도 있다.
왕피리의 왕피천1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울진군 금강송면과 근남면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총 연장 68km의
긴 하천이다. 삼척의 옛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安逸王이 마지막으로 피신한 곳이 왕피리여서 흥망성쇠의 역사
가 보여 애닳다.
왕피리의 왕피천2
왕피리의 왕피천3
왕피리의 왕피천4
왕피천의 야생화|철쭉꽃1
왕피천의 야생화| 철쭉꽃2
왕피천의 야생화| 철쭉꽃3
왕피천의 야생화| 매화말발도리
왕피천의 야생화| 야광나무꽃
왕피천의 야생화| 양지꽃
왕피천의 야생화|돌단풍
왕피천의 야생화|조팦나무꽃
왕피리의 왕피천에서 조관선 소설가
왕피리의 왕피천에서 정연휘 시인
왕피리의 왕피천에서 김진광 시인
왕피리의 왕피천에서 점심|강복순,정금자,김진광, 조관선
왕피천의 야생화 |금낭화
왕피천의 야생화|고추나무꽃
왕피천의 야생화|병꽃
왕피리 마을1
왕피리 마을2
왕피리 마을3
<참고자료|삼척三陟의 옛나라 실직국悉直國 관련자료>
실직국悉直國의 마지막 왕 안일왕安逸王
잃어버린 왕국 - 실직국(1)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하였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腸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기지화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고 한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삼척지역의 실직국시대 유적으로는 원덕읍 노경리 및 근덕면 맹방해수욕장의 초기철기시대유적과 북평항만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 및 돌톱 구슬 토기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관동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 3월 29일 삼척시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 시립박물관 제1전시실(선사·역사실)에 전시되어 있다.
□실직국悉直國 : 청동기-철기시대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장국가 ㆍ 실직 = 쇠직이. 쇠=悉, 직=지킴이(문지기, 창고지기 등) ㆍ 삼척은 사철과 철광석 산지. 군사요충지.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 ㆍ 삼척⇒쇠직⇒사직 ㆍ 고구려에서는 실悉을 삼三으로 표현(실직⇒삼직) BC4세기말-BC3세기초 : 중국 연나라-한반도(서북부) 철기유입 ㆍ 위만조선( BC194- BC108). 한사군 - 한반도 전역에 철기문화확산 ㆍ 동해안북부; 임둔군 통치-BC82년 폐지, 낙랑동도위부, AD30 ㆍ 원삼국시대(BC100-AD100) 다양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 생산. 철을 화폐처럼 사용, 변한 진한에서 낙랑,
대방, 왜에 철 공급
잃어버린 왕국 - 실직국(2)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이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경북 안강)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인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한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박씨),사량(김씨),본피(정씨),모량(점량부.손씨),한지(잠탁부. 배씨),습비(석씨.안강지역)-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漢祗部,또는 한기부漢岐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 간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통치를 받는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덕,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실직국 관련 참고자료 :
[울진군지]. [울릉군지]. [삼척시지]. [삼국사기], [울진문화]제6호(울진문화원,1991), [실직문화]제3-4집(삼척문화원,1992-3)
삼국사기(지리지) : 죽령현은 본디 고구려의 죽현현으로 경덕왕이 죽령현으로 개명 동국여지승람 : 남쪽 109리 죽령현(옥원역이 죽령현의 옛터) 대동지지(김정호) : 죽현.죽령은 부 서쪽 50리. 고구려 때 奈生於 척주지 ; 태조2년(1393) 송곡宋谷은 옥원 동쪽에 있고, 송곡 북쪽은 부신당이 있으며, 연못 앞에 해망산이 있고, 부신당 남쪽에 죽현이 있다. 조선시대 여관인 죽원竹院이 하장면 원통(원동-1995년 태백시로 편입)에 있었고, 미로와 하장의 길목을 댓재라고 함
실직국의 부흥운동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동해남부 고속도로를 타고 울진쪽으로 향하다가 보면 죽변 외곽도로인 간이비행장이 나오는데, 그 비행장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봉평신라비와 비각이 있다. 이 봉평신라비에서 “실직국의 부흥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봉평신라비는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 15일자 대구 매일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졌으며, 문화재관리국(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흥왕순수비보다 훨씬 이른 법흥왕 11년(524년)에 제작 건립된 봉평신라비는 1988년 11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의 재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4각을 이루고 있으나 글씨가 새겨진 1면만 약간의 다듬질을 했고 다른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2미터 높이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총 10행 399자이며,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로서 치졸한 편이고,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문단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신라인 13명이 갑진년 정월 15일에 종묘에서 조상신으로부터 게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둘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13명의 일행이 거벌모라 남미지에 순행하여 벌교령(오늘날의 비상게엄령)을 내린 것으로, 셋째 문단은 신라 6부(部)가 상의하여 정한 바에 따라 집행관인 대인에 의해 지방관 및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이며, 넷째 문단은 총지휘 감독한 실지군주와 석각한 사람 등의 인적사항으로 파악된다. 이 비문에 의하면 50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던 실직국 백성들은 524년 거벌모라성을 불태우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신라측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실직국으로서는 국권회복운동 또는 부흥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만다. 신라의 법흥왕이 친히 출병하여 난을 평정하고 지방관인 실지군주와 그 아래 실지도사와 거벌모라 도사에게 장형의 벌을 내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그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비석을 세워둔다. 비문을 보면 거벌모라의 남미지라는 노인촌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데,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칭하며 이들은 다른 지역주민들보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리라 보며, 거벌모라도사는 실지도사와 함께 삼척의 실지군주의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이것은 곧 신라에 정복당했던 실직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비문을 통해 “실직”은 법흥왕 대에 “실지”라는 지명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지방행정제도가 오늘날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군주 아래, 시장 군수급의 도사가 지역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주의 경우 군주 아래 삼척의 실지도사와 울진의 거벌모라도사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실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거벌모라의 호족이었던 진(秦)씨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일본 경도지방의 전역에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계 주민들을 장악하고 그 지방의 가장 힘있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호오류사라는 절을 하타 가와가츠가 세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힘을 짐작하게 한다. 진(秦)은 일본어로 하타, 울진의 옛이름 파단(波但) 또한 일본어로 하타이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 때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일본의 나라현 교토후 인근의 우즈마사촌(太秦村)에는 진씨(하타)의 종가가 살고 있으며, 진씨의 호수는 7,100여 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1988년 7월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하끼박사가 일본학자로는 최초로 봉평신라비를 연구하기 위해 울진을 방문했고, 1989년에는 하타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일본 나가오카교오市 요오쿠사(寺)의 주지 구사카 다이코씨가 울진을 방문했으며, 1990년 봄에는 일본 영화감독 일행 5명이 봉평신라비와 마을 전경, 봉평해안과 북면 상당리의 진씨가(家)를 찾아 가대(家垈;집터)를 촬영해 갔다. 모두가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이들 모두 울진의 봉평신라비에 새겨진 “파단(波但)”이라는 글자를 보고 하타(秦)씨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라고 확신했다. 일본의 사료에 진씨와 한씨, 하타우찌와 아야우찌 이 2대 씨족의 시조는 모두 응신왕 대인 4세기 후반에 귀화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실직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추정되는 진씨 일족의 일본망명설은 향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울진문화] 제4호(1989) 제6호(1991), [삼척시지]. KBS1TV 역사스페셜 신라는 통일 전 6정停이라는 6개 군단軍團을 각 지방에 설치하여 국토를 진수하였는데 실직주에도 실직정悉直停이라는 군단을 설치하였다가 무열왕武烈王 때 이를 파하고 북진北進을 설치하였다.
|
첫댓글 대단하시네요~자료 올리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