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탐방>
새 교회운동을 이끌 호서신학의 선구자
-호서대학교 서용원 부총장
박은자(예은교회 사모)
세상이 온통 가을빛이다. 들판에 널었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농부의 손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그 가을빛 끝자락에는 겨울바람이 숨어있다. 그 바람은 머지않아 몸을 일으키고 눈부시도록 하얀 세상을 열 것이다.
아침 일찍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로 출근을 서두르는 서용원 교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캠퍼스 곳곳에서 겨울이 느껴진다. 겨울은 산에 먼저 오는 것일까? 천안캠퍼스보다 아산캠퍼스에서 먼저 가을이 물러나는 것이 보인다.
서용원 교수는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한다. 벌써 몸이 아프다. 찬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병, 그건 그리움이다. 아직도 김활란 박사의 간곡한 당부가 귓가에 쟁쟁하다.
“잘 하우. 잘 하우. 잘 하우.”
서용원 교수는 아직도 김활란 박사의 유언을 잊지 않고 있다. ‘잘 하우’를 세 번씩이나 거듭 말하던 김활란 박사는 젊은 서용원을 볼 때 마다 환하게 웃었다.
“서용원 선생, 당신이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이 아주 많이 모이고 있소. 정말 훌륭하오. 청년들이 살아야 이 나라가 사오. 우리 서용원 선생은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이오.”
젊은 날, 서용원 교수는 마음을 다해 주님께 헌신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그에게 미국 필립스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피츠버그대학 유학도 가능했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는 그가 이 땅에서 젊은이를 양육할 사람임을 발견하고 붙들었다.
70년대 한국 사회에는 소외계층이 많았다. 거리에는 넝마주이가 넘쳐났고 공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윤락여성의 신음도 깊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생조차 소외계층이었다.
서용원 교수의 가슴에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살려야한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청년사역은 이 세상의 어떤 공부보다 귀중했다. 그가 이끄는 다락방에 연일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성서대학아카데미를 열자 청년들은 통로까지 비좁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청년들에게 성경공부는 물론 저녁에는 글쓰기 훈련까지 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기도하며 도시문제와 범죄, 그리고 가정문제에 대해 다양한 토론을 거듭하며 강도 높은 리더십 훈련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던지 교수들이 찾아와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청년들의 진정한 힘은 농어촌교회를 찾아 봉사하고, 중랑천과 청계천의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도왔을 때 더욱 더 빛이 났다. 그를 부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연초공장의 공원들은 옥상에 예배당을 마련해 놓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일은 전국의 연초공장으로 번져가는 기독모임이 되었다. 전방의 백골부대를 비롯한 군부대를 찾아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서용원 교수는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름방학에는 목회자 재교육 프로그램의 디렉터로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목회신학적 노력에 일조하였다. 7년 동안 교파를 초월해서 목회자들이 천 명이상 거쳐 갔다. 그것은 연세신학이 한국의 중심에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서용원 교수는 한국의 교회와 신학을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종으로 서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호서대학교로 보내셨다.
20년 전에 호서대학교는 입학정원이 80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다. 당시 호서대학교는 후기에 학생들을 모집하는 학교였다. 전기에 낙방을 경험한, 그래서 의기소침하고 좌절을 겪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서용원 교수는 그런 학생들에게 복음과 신념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었던 무한한 영감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 그리고 농촌목회와 다락방전도를 통해서 쌓은 모든 경험과 지적 재산을 송두리째 호서대학교에 쏟아 놓았다. 우선 학생들의 정신이 똑바로 서야 한다는 것에 집중했다. 호서대학교 출신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정직하다. 실력 있다’라는 평가를 듣기 원했다. 호서대학교 출신들이 이 나라 신학계에 거룩한 인물로 쓰임받기를 소원했다. 학생들은 서용원 교수의 열정에 감동했고, 자기 비하감을 극복하고 커다란 비전을 품기 시작했다.
서용원 교수는 다시 열정을 가다듬어 호서대학교에 헌신했다. 교무처장을 거치면서 호서대학교의 시스템을 기독교대학 시스템으로 바꾸고 학교의 모든 행사를 기도로 시작했다. 호서대학교에서 발송하는 모든 공문에 성경말씀이 기록되는 것은 물론 교책 과목으로 <성서와 인간>, <성서와 경제>, <성서와 문학>, <성서와 현대과학> 등 다양한 교양기초과목을 개설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신학과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과는 교파의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서신학에는 교파적인 배경이 없다. 특별한 신학적 색깔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학교이다. 기존 교회나 교파가 접근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역은 교단 배경 없이 세워진 신학교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호서신학은 한국교회에서 ‘새 시대, 새 교회, 새 목회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 또한 ‘복음과 영성 그리고 치유와 변화를 지향하는 전문화목회’를 교육이념으로 하여 실사구시하는 학풍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많은 목회자가 몰려오는 이유가 있다.
서용원 교수는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20년간 단 한 번도 안식년을 보내지 않고 오직 죽을힘을 다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는 동안 반백의 머리, 그리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러나 흰머리도, 깊은 주름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서용원 교수는 ‘하나님이 제일이시다’ 라는 확고한 믿음에 선 고백, 경건과 기도운동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영적인 신비를 체험하고 은혜를 체험한다.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었던 목회자가 호서신학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볼 때 서용원 교수는 감격한다. 하나님의 영적인 신비를 체험하고 다시 목회현장으로 돌아가는 젊은 신학자, 목회자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히 나를 바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유이고 변화임을 서용원 교수는 날마다 되새긴다. 여기에 2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교수기도회를 여는 이유가 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용원은 없다”라고 말한다.
호서대학교에서 가장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호서신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놀랍도록 향상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용원 교수의 가슴을 뛰게 하는 부분이다.
호서신학이 새 교회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헌신해 온 서용원 교수, 학교는 그에게 인문대학장, 신학대학원장을 거쳐 부총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겼다. 사실 지방대학은 생존 자체가 어렵다. 교수들은 물론 교직원 모두가 하나님의 심정으로 합심해야 하는 일임을 날마다 절감한다. 이에 하나님께 순종하듯 서용원 교수는 자신이 맡은 직분에 순종한다.
20년의 세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느 것 하나 후회되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다시 시간을 주신다고 해도 똑같이 살 것이다. 그런 서용원 교수에게 ‘연세신학을 빛낸 동문상’, ‘현대아산 직원봉사상’ 등을 비롯한 많은 상들이 주어졌다. 그러나 서용원 교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옛날 예수의 젊은 피로 함께 전도했던 동역자들, 그리고 제자들이 마련해준 골드패가 가장 자랑스럽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를 인정해주시는 것 같아 기쁘다.
한국신약학회 회장을 맡으며 다시 한번 한국 신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서용원 교수, 그는 오늘도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긴장을 풀지 않고 기도한다. 호서대학교의 발전과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서용원 교수는 그렇게 학교사랑, 제자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서용원 교수 저서>
<생존의 복음- 초기기독교의 신앙과 복음해석에 관한 탐구>,
<마가복음과 생존의 수사학>,
<사도행전과 초대교회의 부흥운동>,
<하나님 예수 말씀> 등이 있다.
(크리스챤신문, 2007.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