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동반자 6.
‘엄마의 가슴이 아플까봐 쓰지 않았지만, 아버지 또 첩을 얻었어요. 내 나이보다 열 살도 더 안 들어 보이는데, 지금 아버지가 사는 집이 그 여자의 부모네 집이래요. 아이도 세 살 정도쯤 먹은 남자애가 있고, 그러니까 집에서 떠나오면서 이 여자하고 살림난 것 같아요. 다른 것 해보다가, 아버지하고 같은 고향 사람이 이곳에서 사업을 해 보라고 권하고, 또 여자의 집이 이곳이라니까, 거기 처분 해 가지고 이쪽으로 와서, 빚도 좀 갚고 다른 사업을 하다가 생각 같이 안 되니까, 처리를 하고 배우신 기술을 살려서 할 수 없이 취직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엄마! 이 말은 끝까지 나만 알아야겠지요?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곳에서는 취직도 하기 어려운데, 여기서 나이를 좀 올려서 속이고라도 취직 시켜달라고 아버지께 말해야겠어요. 그래야 아버지에게 돈을 더 달랠 수 있고, 나도 벌 수 있으니까요. 하여간에 집에 가서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거짓말은 정말, 엄마에게 만은 하기 싫거든요. 엄마하고 멀리 떨어져 살아 본적 없어서 나도 힘들겠고요. 장남이니 어쩌겠어요. 내가 고생하더라도 엄마 정옥이 정필이가 고생하지 않으려면 이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기회를 봐서 이 여우 하고도 헤어지게 만들어야 하겠고요.
참! 큰 문제가 있지, 여자와는 헤어지더라도 저 꼬맹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거야? 어쨌든 그 놈이 내 동생이라는 거잖아? 이걸 어째야 하지? 그래도 친 동생인데 내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엄마가 알아서 하라고해야지. 우선 엄마에게 돈을 전해줘서 생활의 걱정을 덜어주는 게 급하니,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이번 월급을 타신 연후에 가라고 했으니 옷과 구두도 찾아오고 서서히 준비 해야지, 얼마나 주시려는지 모르겠네.’
출근하던 진혁이 경비실 앞에 웬 잘생긴 청년이 서 있어, 그 순간 우리 아들도 저만큼 컸겠구나, 하는 생각이 별안간 들어 마음에 찔림이 오는 순간, 자세히 보니 자신의 아들이었다. 헤어져 있던 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아들 앞에서 진혁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가족을 내 몰라라하고 몇 년을 버려두었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여자와는 일시 간 같이 사는 것이지 집으로 돌아간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지만, 살다보니 환경에 적응이 돼서인지 아내와 자식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또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르며 여자의 친정집에서 생활하는 까닭에, 그 가족들의 생활에 동화되어 그런 것 같았다. 시멘트는 항시 물량이 달리는 건설 품목이었다. 국내 외로 건설 붐이 일어나서 회사가 더 바빠져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을 내서, 진혁이 그 여자와 같이 정길을 데리고 삼척 시내에 나가 정길의 속옷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사고 양복점에서 양복도 맞추어 주었다. 정길에게 진혁이 은근히 그 여자와 친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은 눈치가 보인다. 그 여자도 괜스레 나서서 이것저것을 흥정한다. 이곳에 온지 한 달여, 동네 처녀들이 때도 없이 진혁의 집을 기웃거린다. 머슴 같은 동네 청년들에 비해 정길은 귀공자 같았기에, 처녀들의 가슴에 사모의 불을 지핀 것이다. 이윽고 때가 되자, 집에 갈 준비를 마친 정길이 양복을 입고 외투까지 걸치자 정길의 숨어있던 몸의 맵시가 드러났다. 동네의 어귀까지 걸어 나가는 동안에 백 여 호 되는 동네의 여자들이 모두 나와,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흘깃 거리고 있었다. 덩치도 있고 사색에 젖어 살아서인지 조숙해 보여 삼 사년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데다, 선천적으로 잘생긴 얼굴에 흰 살결이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그동안에도 정길의 주변을 기웃거리던 처녀들이 정길이 아주 떠나는 줄로 잘못 알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배웅해주려는 것이다. 서로모여 수군거리더니 정길이 택시를 타고 떠나자 곧 이어 와, 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여자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특히 처녀들 중의 한 무리가 정길의 뒤돌아보는 눈에 잡혔다. 정길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줄 선물과, 돈이 담겨있는 가방을 다시 한 번 품에 추슬러 보고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좋아할 모습을 그리며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정길과 식구들의 고생은 끝난 것이다. 집에 가는 동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내내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사십 여 일 남짓해 돌아 온 정길은 그 새 몇 살은 더 먹어 보였다, 옷차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간 진혁의 사는 모습으로 인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착잡해진 정길의 얼굴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진혁과 같이 사는 여자가 그동안 살며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고 한다. 진혁이 사업을 접으며 은행에 넣어두었던 것 중의 일부를 자신의 월급과 함께 정길에게 주었는데, 자신의 무심했었던 것을 얼마만큼 희석시키려는 마음이 있었다. 정길이 처음으로 만져보는 많은 돈이었다. 가져온 돈으로 우선 양철지붕의 초라한 삯 월세 단칸방에서, 방이 작은 방까지 세 개인 기와집으로 전셋집을 얻어 집을 옮겼는데, 이사 짐이 없어서 두 시간도 안 걸려 이사가 끝났다. 몇 가지 가구와 집기들을 사자, 두 달 정도의 생활비 밖에 남지 않는다. 이제야 사람이 사는 집 같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 사람들과 함께 집들이를 했다. 정길이 온지 보름 만에 다시 간다고 하자 모친 정자가 눈물을 쏟는다. 정길의 가족들이 버스 정류장까지 와서는 배웅을 하고는, 가지 않고 버스의 창을 향해 정길을 바라보며 했던 말을 다시하고, 다시하며 또 창밖으로
내민 그의 손을 번갈아 만지작거린다. “오자마자 간다니 섭섭하구나. 그래, 가서 일 잘해라. 아버지가 네 일을 구해 준다고 했다니 정말 잘 됐다. 다음에 올 때는 아버지하고 같이 오는 것 맞지? 밥 거르지 말고, 건강해라.” “엄마, 명절 전에 올게요, 정옥아 너 미용학원 빠지지 말고 잘 다니고, 학교도 잘 다녀야 돼, 정필아 엄마 말씀 잘 듣고, 내가 집에 없으니 네가 잘 해야 해 그리고 엄마 누가 훔쳐가나 잘 지켜라 알았지?” “오빠! 잘 가. 내가 편지 할게, 오빠 학교는 어떻게 할 거야? 거기서 다녀 우리만 하라고 말하지 말고.” “모르겠어! 몇 년이나 쉬었는데, 할 수 있을까? 나중에 강의록이라도 해서 검정고시라도 봐야지 뭐.” “형! 공부해야 돼. 그래야 나중에 직장도 그렇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던데, 아버지에게 잘 말 해봐.” “그래 알았다. 엄마, 그만 들어가 보세요, 엄마가 여기 있으면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옥아, 정필아 엄마 모시고 얼른 가라. 버스도 이제 곧 갈 거니까, 엄마를 잘 부탁 할게.” ‘쳇!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같네. 내가 영화 주인공 같고, 친구 놈들아 잘 있어라. 시간이 없어 얼굴들도 못보고 그냥 간다. 나중에 보자, 너희들은 학교 다니고 난 안 다녀서, 별로 만난 적도 많지 않지만, 너희와 내가 이 후,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먼저 성공할지 경쟁해 보자.’ 송탄에 다녀온 후, 취직자리를 알아 봐 달라고 졸라대던 정길과, 진혁은 회사 앞 오리온 다방에서 만나 부자간에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했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도, 또 정길의 장래를 생각해, 어딘지 모르게 침착해보이고 듬직해 보이는 정길의 나이를 속여서 취직시키기로 진혁은 아들과 모의했다. 진혁이 다니는 회사의 공원으로 취직시키기로, 그러나 여자와의 살림 차린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 여서, 기억력과 손재주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그동안에 사회에서 여러 직장 경험도 했고, 장남인데다 어려서 남의집살이를 해서인지, 말투부터 틀려 조숙한 것을 모두가 인정해 주는 것이라 별 어려움 없이 해 결이 되었다, 당시에는 입사 서류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물입니다. 얘가 좀 어려 보입니다. 공고는 졸업 했는데, 놀기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해 그냥 졸업장만 받았지, 무얼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과장님이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하하 나도 농땡이였는데, 이 녀석도 그런가보군요. 뭐! 이 과장님이 곧 회사를 차리신다고 했으니 잠시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서류는 알아서 할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 참 이름이? 아! 정길이라고 했지? 공고 출신이라! 용접을 배우고 싶다고? 쉽고도 어려운 것이 바로 용접이다. 여기서 마음껏 배우도록 해. 일 일부터 출근해라. 저기가 용접부이니 일 일 아침에 저기서 만나자. 소개는 그 때 정식으로 부원들과 하지. 그 날 저녁에 환영식을 해 줄게.” 돌아오는 길에 진혁이 정길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자기로 인해 한창 배움의 길에 있어야 할 아들을 일찍 삶의 현장에 내어보내 고생을 시킨다 생각을 하며, 자신의 무능과 바람기를 탓해본다.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없는 아들 정길이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가 용접에 관한 책을 네 방에 갖다 줄 테니, 내일 출근하기 전에 한 번 살펴보고 어렵겠지만 외울 것은 외워둬라. 특히 공구나, 재료 이름을 잘 외워둬야 탄로 나서 망신당하지 않겠지?” “아버지 공장 하실 때, 본 것이 많아서 공구나 재료 정도 이름은 외우지 않아도 잘 아니까 염려마세요.” ‘별 걱정 다 하시는 구만요. 남의 집 살이 자그마치 삼 년이 넘었답니다. 에이! 어른들 마음 읽는 것은 제 특기거든요. 하여튼 취직 한 번 쉬워서 좋네. 열심히 벌어 엄마에게 보내야지.’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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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