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꼬의 정원, 후계자가 나타난 것 같다.
9시 경, 저녁 산책을 나간 땅꼬를 데리러 가면서 음식물 쓰레기와 배변 모래를 버릴 겸 들고 나섰다. 산책을 마친 땅꼬는 보통 공동현관을 마주한 자전거 거치대에 놓인 자전거들 사이에서 공동현관을 바라보며 나를 기다린다. 잘 보이지만 쉽게 손길이 닿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고 키 큰 벗나무 그늘이 드리운 곳이라 시원하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중정의 불빛 아래 자전거 거치대 앞 아스팔트에 편하게 엎드려 식빵을 굽는 냥이가 보여 땅꼬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두어달 전부터 어디선가 흘러 들어 온 치즈냥이다. 낯선 고양이를 허락하지 않는 땅꼬는 그럼 어디에???? 어라. 이게 왠일인가? 치즈냥이랑 1m 거리의 늘 그 자리에서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치즈냥이를 바라본다. 둘 사이엔 긴장감은 없었다. 기꺼워보이지는 않지만 치즈냥이의 존재를 허락한 듯 담담해 보였다. 둘은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저놈, 끈질기게 이 구역에 스며들더니 드디어 땅꼬의 묵인을 얻어냈구나. 치즈냥이 대견하고 떵꼬가 기특했다.
반가워 인사를 건네는 나를 치즈냥이 올려본다. 손가락을 내미니 도망가지 않고 멈칫멈칫 고민한다. 나는 또 "기다려"하고 버릴 것들을 잠시 놓아두고 집으로 올라가 사료를 담아 내려왔다. 하지만 치즈냥이는 보이지 않는다. 공동현관 앞 소방도로에 주차한 차 밑에 사료를 놓아두었다. 이제는 나를 보면 냐옹~~~ 아는 척을 하는 아이.
작고 마른 몸, 황망한 눈빛을 한 치즈냥이는 늦은 봄 땅꼬가 나를 기다릴 때 몸을 감추고 쉬던 회양목 덤불 속에서 땅고를 찾던 나와 처음 마주쳤다. 그 자리는 땅꼬 자린데... 이러다 또 한바탕 붙을텐데... 어쩌나... 고민하다가 말을 붙였다. "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돼. 땅꼬한테 혼나." 지치고 불안한 눈길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면서 쉬 자리를 뜰 기색이 없는 이 아이의 눈빛에서 막막함이 읽힌다. 쓱 자리를 옮기더니 역시 맞은편 1층 아파트 화단 안으로 옮겨 앉았다.
땅꼬의 영역인 중정 중에서도 우리 동 공동현관 주변, 자전거 거치대를 둘러싼 화단은 더욱 안온한 곳이다. 뒷산 비탈면을 깍아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높은 시멘트 담벼락 아래에 자리한 화단은 이젠 제법 키가 커진 나무들과 덤불들의 은페 하에서 깃들기 좋은 곳이고, 아파트 바로 앞이라 사람을 경계하는 뒷산과 101동 뒤 주차장 냥이들이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이 곳이 바로 땅꼬의 체취가 가득한 앞마당이다. 어린 치즈냥이는 이 공간의 평화를 알아본 것이다.
뒷산 냥이들은 101동 주차장에 마련된 길냥이 급식소에 밥을 먹으러 오가면서 중정을 지난다. 중정을 오가는 냥이들 중에서 땅꼬보다 여려보이는 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다. 어디서 왔을까? 고양이 어미는 다시 발정기가 오면 새끼들을 독립시킨다. 자신의 영역 밖으로 멀리 데려가 혼자 떨어뜨리고 냉정하게 돌아서버리는 것이다. 이 치즈냥도 막 그렇게 어미와 이별하고 독립했을 것이다. 땅꼬도 그렇게 이 중정에 자리잡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얼마나 막막할까? 그러고 보니 며칠전 땅꼬와 뒷산 산책을 다녀오던 중 다세대 주택 사이 높은 장독대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그 아이다. 이 구역 모든 냥이들의 아버지인 검은 대장고양이 무리의 고양이들 틈에서 자리잡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직 무리를 이루지 못한 채로 홀로 다니는 어린 것. 어디서 먹고 마시고 자고 기대고 있을까? 이 아이는 이 곳에 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밤마다 주차된 차 밑에 혼자 앉아 땅꼬의 눈총과 하악질을 견뎌냈다. 그럴 때면 나는 츄르와 사료를 가져다 먹였다. 그런 나를 땅꼬는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그렇게 2달이 흘렀다.
어제 오전, 막 비가 시작되는 중정에서 고양이 싸움 소리가 들려 땅꼬와 치즈가 싸우는가 해서 서둘러 나가보았다. 뒷산에서 중정으로 내려오는 고양이가 다니는 길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치즈냥이는 내려오지 못하고 있고 상대냥이는 수풀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땅꼬야~~~ 불러도 나오지 않아 또 급하게 집으로 올라가 사료를 들고 내려와 치즈냥이를 찾았는데 용케도 자전거 거치대 뒷편 덤불로 나를 찾아 내려왔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절실하다. 그 눈빛이 또 안스럽다. 사료를 내밀자 맛있게 먹는다. 상대냥이는 땅꼬가 아니라 뒤편 주차장 무리 중 한 놈인 고등어냥이였다. 이놈은 영리히고 붙임성이 좋고 두려움이 없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놈인데 중정, 땅꼬 영역에 자주 출몰한다. 그 사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땅꼬는 이 해프닝이 끝난 한참 후에 미끄럼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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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다투는 소리의 주인공이 이 치즈냥일까해서 늘 마음이 쓰였지만, 이 아이는 잘 버티고 있다. 그렇게 마르지도 않고 쫒겨나지도 않고 크게 부상을 입지도 않고 잘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친구가 없는 외톨이 치즈. 늦은 밤 산책을 마치고 공동현관을 향할 때마다 땅꼬는 자전거 거치대 쪽 화단을 주시하고 한바퀴 휘 돌면서 덤불 안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면 공동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멈칫 멈칫 주차된 차 밑을 주시한다. 그 한바퀴의 탐색과 멈칫거리는 발걸음에 담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계일까 기다림일까? 둘 다일까? 산책냥이지만 치즈가 땅꼬에게 기대면 땅꼬는 참 잘해줄텐데... 땅꼬는 그루밍을 엄청 꼼꼼하게 잘 해주는데... 밖에선 늘 외톨이인 땅꼬에게도 치즈에게도 좋은 일일텐데...
그런데 어쩌나? 우린 9월 안에 이사를 갈 것이다. 그래, 그럼 이 고즈넉한 정원을 네가 물려 받으면 되겠구나. 이 곳에서 평화롭게, 땅꼬를 추억하는 주민들의 아쉬움을 채우면서, 대신 사랑받으면서 살아가면 되겠구나. 대신 뒤편 주차장의 고등어냥이와 겨뤄야할거야. 그 아이도 이 정원을 탐내고 있거든.
난 치즈편이다.
고등어냥이는 친구들도, 영역도, 밥자리도 있고 간식 조공하는 펜들도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