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인간의 진보에 관한 현대이론 및 결점
우리가 도달한 바 있는 결론이 정당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 결론들은 거대한 법칙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광범위한 분야를 개관(槪觀)할 수 있도록 보다 고차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재개(再開)하기로 한다.
인간의 진보에 관한 법칙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심정으로 처리하여야 하는 가장 고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제한된 지면으로 이 문제를 간단히 평론하는 것이 퍽으나 주저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연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내린 결론이 인간발전의 규범이 되고 있는 대법칙과 일치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조화를 잃고 있는가?
이 법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들은 이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이 이러한 법칙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고는 있으면서도 마치 정치경제학이 부가 증가하는데 결핍이 완강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현대 철학도 이러한 법칙에 대하여서 만족할만한 설명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사실에 대하여서 확고하게 근거를 두기로 하자. 사람이 동물로부터 점차적으로 발달하였는 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인간에 관한 문제와 인간의 기원(起源)에 관한 문제 간에 아무리 긴밀한 관계가 개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둘째 경우의 문제는 첫째 경우의 문제에 의하여서 비로소 계발(啓發)이 되는 것이다. 무지에서 기지(旣知)로 추리가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지(認知)하고 있는 사실에서 비로소 인지 이전의 사실에 대하여 추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원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는 역시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 즉 현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여하한 기록이나 여하한 유적을 살펴보아도 인간의 현재도 생존하고 있는 야만족 이하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인간과 야수를 구별하고 있는 광대한 간극(間隙)에는 어떠한 다리가 놓여 있었는 지에 대하여서도 아무런 형적이 남아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하급야만인과 최상의 고등동물 간에는 정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종류에 있어서도 도저히 조화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여러 특징들과 행동들과 감정 등은 하등동물에 있어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떠한 하등의 위치에 처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동물에게서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 한가지 만은 결여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인식되고 있으면서도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발전하는 힘을 제공하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진보적인 동물로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비버는 댐을 만들며 새들은 깃을 만들며 벌은 둥지를 튼다. 그러나 비버의 댐과 새의 깃과 벌의 둥지가 항상 동일한 모델로 세워지고 있는 반면에 인간이 세운 집은 나뭇잎과 가지로 만든 조잡한 오두막집으로부터 모든 현대적인 이기를 갖추고 있는 대저택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개는 어느 정도 인과의 관계가 있으며 어떤 기교를 습득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점에 대한 능력이 발전적인 인간과 결합한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조금도 증대된 것도 아니며 또한 문명시대의 개는 유랑하던 원시시대의 개보다 조금도 더 숙달된 것도 아니며 더 지적으로 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옷을 입고 있는 동물과 식사를 요리하고 있는 동물과 무기나 도구를 만들고 있는 동물과 먹고 싶은 다른 동물을 사육하고 있는 동물과 음절이 있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화에서는 모를까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없거니와 들은 일도 없는 것이다. 환언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은 이와 같은 힘을 인간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보충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육체적인 능력이 너무도 열등하기 때문에 태평양 상의 몇몇 작은 섬들을 제외하고서는 이와 같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든지 이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며 발휘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한에 있어서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취하여 놓은 일의 정도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즉 조잡한 카누와 증기선 간이나 부메랑과 연발단총 간이나 조잡하게 나무로 만든 우상과 그리스 예술의 생동하고 있는 조각 간이나 야만인의 지식과 현대과학 간이나 야생적인 인디언과 백인 정착자 간이나 호텐토트족의 여인과 상류사회의 미인들 간에는 광대한 차이가 개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차이를 본원적인 능력의 차이로 귀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가장 최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민족들도 유사시대에 있어서는 야만족이었으며 또한 동일계통의 민족 간에도 대단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다고 물리적인 환경의 차이에다 전적으로 귀결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과 예술의 기원은 대부분 야만인에게서 힘입었으며 몇해 안 가서 대도시들은 야생족의 사냥터에서 건설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러한 차이는 사회적인 발전과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초보적인 단계를 지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동료들과 생활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과 상태로 이루어 놓은 이 모든 개량을 우리들은 문명(文明)이라는 용어로써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하게 됨에 따라 향상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에서의 협력(協力)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개선의 법칙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떤 일반법칙(一般法則)으로 상이한 사회가 도달한 상이한 문명단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문명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어디에 존재하고 있기에 변화 많은 사회적인 조정에 대하여 이것은 문명의 발전에 적합하고 저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며, 한때는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다른 때에 가서는 문명을 도리어 퇴보케 하는 제도나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문명의 진보란 현재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나 후천적인 자질의 형질유전(形質遺傳)과 같이 종의 기원을 설명할 때 인용되고 있는 원인과 유사한 원인의 작용으로 인간의 힘을 증가시키고 인간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있는 방향으로 나가는 일종의 발전(發展)이나 진화(進化)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 일종의 진화라는 것 즉 허버트 스펜서의 말을 인용한다면 불확정하고 지리멸렬한 동질(同質)에서 확정적이며 수미일관한 이질(異質)로의 진화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문명을 발전시키거나 퇴보케 하고 있는 원인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며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현상을 물질과 힘이라는 용어로 설명해보고자 하는 스펜서의 전반적인 법칙이 이 모든 원인들을 적절하게 이해하면서 얼마나 포함시켰는 지에 대하여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같이 이 발전철학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서 명확하게 해답하여 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견해의 발생과 정당성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통속적인 설명은 저자의 생각으로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부의 불균등한 분배의 원인에 대해서 자연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만일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벌 수 있는 돈은 풍족하게 있다는 것과, 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간에 차이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지와 게으름과 낭비라는 이론일 것이다. 그리하여 문명의 차이도 능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문명화한 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며 문명의 발전은 이와 같은 우수성에 기인한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일반적인 영국인의 견해에 의한다면 영국의 승리는 개구리를 먹는 프랑스사람에 대한 영국사람의 자연적인 우수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까지 미국사람들의 견해에 의한다면 인기있는 정부와 활기있는 발명, 대규모의 안락 등은 “양키 국민의 똑똑함”에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의 서두에서 검토하고서 반증(反證)한 바 있는 정치경제학의 학설이 자본가가 임금을 지불하며 경쟁이 임금을 감소시킨다는 사람들의 일반견해와 일치하며 또한 맬서스 이론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현존하고 있는 편견과 일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진보를 점차적인 종족의 발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종족의 상이로 문명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현재 유포되고 있는 견해에 대하여 신빙성을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식(公式)도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윈이 “종의 기원”으로써 세상을 처음으로 놀라게 한 이후의 이러한 견해의 경이적인 전파력은 정복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견해에 동조한 것이다.
현재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생존경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그만큼 인간으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고 발명하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러한 향상과 향상에 대한 능력은 형질유전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적합한 개인이나 가장 향상된 개인이 개인 간에서 생존하여 번식되는 것이며, 가장 적합하고 가장 향상된 종족과 국민과 민족이 투쟁을 거쳐서 전체사회 간에서 생존함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한다면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와 인간의 상대적인 발전의 차이 등은 조금 전에 이와 같은 차이들이 특수창조론과 신성한 간섭론으로 설명되었던 것과 같이 확실하게 그리고 거의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결과는 현대문학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일종의 희망적인 숙명론(宿命論)의 결과와 같은 것이다.(주1)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진보란 인간의 향상을 위하여서 점진적으로 착실하게 그리고 냉혹하지도 않게 작용하고 있는 힘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진보란 인간의 향상을 위하여서 점진적으로 착실하게 그리고 냉혹하지도 않게 작용하고 있는 힘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전쟁, 노예, 전제, 미신, 기근, 흑사병, 현대문명을 부패케 하고 있는 결핍과 빈궁 등은 빈약한 형태를 제거하고서 고차적인 형태를 확대시키려고 인간이 강요한 강압적인 원인들인 것이며 형질유전이란 발전을 규제하고 있는 힘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이루어진 발판은 새로운 발전에 대한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란 이런 형태를 지니고 과거의 개인과의 장구한 연관을 통하여서 영구화되고 있는 변화의 결과인 것이며 사회조직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에게서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허버트 스펜서가 말한 바와 같이(주2) 한편으로는 이 이론이 인간의 성격 그 자체의 변화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급진주의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급진적”이면서도 이와 동시에 이 이론은 인간의 성격에 있어서의 점진적인 변화 이외의 변화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현대보수주의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보수적인 것이다.” 예정론(豫定論)을 가르치고 있는 신학자들이 구원을 위한 투쟁에 대한 모든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철학자들도 이 이론은 불합리를 개혁하려는 노력에 대한 의무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당하게 평가한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무엇을 하던 신의 맷돌은 우리의 도움이나 방해에는 무관심하면서 계속해서 돌고 있는 것이다.”와 같은 숙명론인 것이다. 저자는 다만 현재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으며 일반사상으로 침투하고 있는 견해를 설명하려고 이것을 언급하였을 따름이지 진리탐구에 있어서 진리의 효과로 마음이 편협하게 되는 것을 허용하려고 언급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문명에 대한 현대적인 견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의 성격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며 또한 인간의 힘을 향상시키고 승화시키고 있는 것은 지정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여러 힘들의 결과라는 것과 문명인과 야만인 간의 차이는 정신적인 조직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장기간에 걸친 종족교육에서 오는 차이라는 것과 그리고 이와 같은 향상은 보다 고차적인 문명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진보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다가오는 종족들의 위대한 성취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과학의 발달로 종국적으로는 영생불사하여서 유성뿐만 아니라 항성(恒星)에도 몸소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태양과 천체(天體)들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던 것이다.(주3)
그러나 별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선진문명에서 그렇게도 자연스러운 이러한 진보이론이 세계에 보급된다면 고정되고 화석화된 문명이라는 거대한 사실과는 대척(對蹠)적으로 될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인간종족들은 진보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선조들도 그렇게 살아왔지만)과거를 인간완성의 시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야만인과 문명인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이론 즉 야만인은 너무 불완전하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진보가 거의 명백하지 않다는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진보가 일반적이고 계속적인 원인이라는 이론을 가지고서는 상당히 진보하였다가 중단된 문명을 어떻게 설명하려는 것인가? 힌두족이나 중국인에 대하여서는 야만인의 경우와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들의 우위성이 장기간의 교육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소위 자연에서 성장한 사람들인데 저들은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힌두족이나 중국인들은 우리가 야만인이었을 때 문명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대도시와 고도로 조직된 강력한 정부와 문학과 철학과 예절과 상당한 노동사업과 대규모적인 상업과 섬세한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때 우리들의 선조들은 유랑적인 야만인이어서 초막이나 가죽텐트 속에서 생활하는 등 아메리카 인디언들보다 조금도 앞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야만적인 상태에서 19세기의 문명으로 진보하는 동안에 저들은 정지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진보가 불가항력적이며 영구적인 고정된 법칙이며 이것이 전진을 강요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발전철학의 유명한 해석가인 월터 배젓은 자기의 “물리학과 정치학”이라는 책에서 이와 반대되는 힘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하였다. 즉 인간을 문명하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을 길들인다는 것과 인간이 법을 준수하면서 자기동료와 합동(合同)하여서 생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법률과 관습의 형태 즉 “체재”(體裁)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자연도태(自然淘汰)에 의하여서 강화되며 확대되므로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종족이나 민족은 그렇지 못한 민족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관습이나 법률체재가 너무도 완고하여져서 토론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향상하는데 필요한 자유와 가동성을 허용하고 있는 환경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진보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말했다는 배젓 씨의 이와 같은 설명은 일반이론을 희생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되지 못하므로 이 점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무가치한 일은 아닐 것이다.
배젓 씨가 말하고 있는 경화경향(硬化傾向)은 발달의 초기에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예설(例說)은 야만 내지 준야만인의 생활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정지상태의 문명은 장기간 지속한 후에야 정지되기 때문인 것이다. 야만사회와 비교한다면 상기의 문명은 상당히 전진하고 있으면서도 융통성이 있고 자유스러우며 전진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정지상태의 문명은 열등하다고 생각되기는 고사하고 여러 점에서, 예를 든다면 16세기나 15세기의 유럽문명보다도 우위한 지점에서 정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지되는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토론이 있는 것이며 새로운 것에 대한 찬양과 모든 종류의 정신활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건축업을 수행하고 있는 건축가가 존재하고 있는데 발명과 개량을 통하여서 필연적으로 고차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가들도 발명에 발명을 거듭하여서 마침내는 헨리 8세 호와 같은 훌륭한 군함을 건조하였다. 발명가들은 우리가 가장 중히 여기는 개량과 동수준에 있으며 이들로부터 우리는 아직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사(技師)도 있는데 이들은 거대한 관개사업을 경영할 뿐만 아니라 운하도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철학에는 각 학파들이 경쟁을 하고 있으며, 종교의 관념에 대하여서도 논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와 여러 점으로 비슷한 위대한 종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낡은 종교를 추방하면서 중국으로 침투하였는데 중국에서도 전국을 석권하였던 것이며, 마치 기독교가 처음에는 배척을 당하였던 것 같이 이 종교도 나중에는 다시 배척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활을 그것도 활동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개량을 초래하는 발명이 있은 지 오랜 후에야 단체생활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나 중국의 양국은 상이한 관습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민족을 정복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고정되어 있으며 화석화된 문명은 이집트 문명인데 여기서는 예술까지도 마침내는 인습(因習)적이고 완고(頑固)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의 배후에는 약동하며 생동하고 있던 시기가 있어서 현재의 우리의 문명과 같이 생신하고 발전적이며 확대되어 가는 문명이 존재하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예술과 과학이 이러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발굴로써 초기 이집트는 정적(靜的)이었다는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지식에 새로운 광명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즉 동상이나 조각은 경화된 일정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표정으로 충만되고 있다. 이것은 예술이 투쟁적이며 열열하며 자연적이며 자유스러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생활이 활동적이며 확장적이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비(非)진보적인 문명도 한때는 활동적이며 확장되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발전에 관한 현대이론이 설명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지상태의 문명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인간이 진보의 도정(道程)에서 많이 전진하다가 정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란 진보의 도정에서 많이 전진하다가 후퇴를 하는 것이다. 이 이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은 고립된 경우뿐만 아니라 보편율이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였던 모든 문명들은 약진하는 시기와 정지 및 침체의 시기가 있었으며 또한 쇠퇴기와 멸절기가 있었던 것이다. 발생하고 번영하였던 모든 문명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문명은 정지상태의 문명과 우리들의 문명뿐인데, 우리들의 문명은 아브라함 시대의 피라미드와 같이 오래되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이면(裏面)에는 20세기간의 기록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이 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문명보다도 광범위한 기반 위에 서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속히 움직이며 높이 승화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점으로 볼 때 그리이스-로마의 문명이 아시아적 문명보다도 더 전진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에 존재하였던 문명을 완전히 몰락케 한 원인이 되고 있는 사물(事物)에 있어서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우리들의 문명이 영속적으로 전진한다는 것을 보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이론은 여기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세계사의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문명은 인간의 힘을 발전시키고 승화시키고 있는 자연도태과정에서 오는 결과라는 이 이론보다 거리가 먼 것은 없을 것이다. 문명이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한 시간에 발생하였으며 상이한 속도로 진보한다는 사실은 이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강압적이며 반항적인 힘에서 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지 시작된 진보가(심지어는 최하층 종족 간에도 얼마간의 진보는 있다) 계속적인 곳은 한 곳도 없으며, 모두 정지되거나 그렇치 않으면 퇴보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이 이론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진보가 인간의 성격의 향상을 고정(固定)시키는 것이어서 더욱 진보를 촉진시키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장애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진보는 계속해야 하는 것이며 전진은 전진을 초래시키며 문명도 고차적인 문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율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반대야말로 일반율이며 보편율이 되는 것이다. 이 지구는 사멸한 제국의 무덤이며 죽은 사람의 무덤인 것이다. 인간이 위대한 진보를 하는데 있어서, 진보가 인간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한때는 우리의 문명과 같이 생동적이었으며 전진하였던 모든 문명은 자연적으로 정지되어 버렸던 것이다. 몇 번이고 반복하여서 예술은 쇠퇴하였고 학문은 침체하였으며 권력은 약화되었고 인구는 희소하여졌다. 마침내 한때는 대사원과 대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강을 만곡시켰고 산맥을 관통하였고 토지를 정원과 같이 가꾸었으며, 생활의 세부에까지 가장 화려한 것을 도입하였던 사람들도 불결한 야만인의 잔적 안에서만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야만인들은 자기선조들의 행적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해서 장엄한 유적의 잔해를 수호신의 작품이거나 홍수 이전의 강대족(强大族)의 잔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과거를 생각할 때 과거는 마치 “전신(全身)에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청년이 전체의 공동적 운명인 괴멸(壞滅)에서 모면(冒免)할 수 없는 것같이 아무도 모면할 수 없는 준엄한 법인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잔적(殘蹟)을 보고서 “오! 로마여 언젠가는 너도 이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겠구나”하면서 눈물을 뿌렸던 것이며, 머콜리는 뉴질랜드인이 런던 다리의 무너진 아치를 묵상하는 것을 묘사했는데, 광야에서 도시가 건립되는 것을 보며, 신제국의 기초가 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에까지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리가 공공건물을 건축할 때는 가장 큰 초석에다 구멍을 만들어서 우리시대의 기념물 등을 그 안에다 조심스럽게 봉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들의 노작(勞作)들이 잔적이 되어 우리 자신들이 망각되었을 시대에 대처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리고 문명의 발생과 몰락의 상호작용과 진보가 있으면 항상 뒤따라 발생하고 있는 퇴보가 상승선에 있어서의 율동적인 운동인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동적인 운동의 경우나 율동적인 운동이 아닌 경우의 양 경우의 모두 현대이론은 반증(反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동적인 운동 여부의 문제는 비록 공개적으로 질의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증명하기가 퍽 곤란하리라고 생각된다) 문명은 형적도 남기지 않고 사멸하는 것이며, 간신히 진보를 획득하였는가 하면 경주에 있어서 영원히 패배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각 문명의 파동이 더 고차적인 파동으로 승화되고 또는 각 문명이 횃불을 더 원대한 문명으로 전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문명은 인간의 성격에 작용하고 있는 변화로 전진하고 있다는 이론은 이 사실을 설명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문명을 개척하는 것은 낡은 문명으로 교육되었고 전통적으로 제한된 민족이 아니라 하급수준에서 출발한 생신(生新)한 민족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 시기에 문명인이 되는 것은 그 전시기의 야만인인 것이며 이 야만인들은 이번에는 새로운 야만인에게 계승되는 것이다.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인간들이 처음에는 향상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우였던 것이다. 현대의 문명인은 비문명인 보다는 비할 수 없이 우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지마는 문명이 생동하고 있었던 시기의 문명인도 우리와 같이 사멸된 문명의 사람들보다 우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거의 일정한 시기에는 항상 악덕과 부패와 문명의 쇠약기가 있었던 것이다. 야만인에게 압도되었던 모든 문명은 실은 내부적인 부패로 인하여서 멸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사실은 일단 인식되기만 한다면 진보는 형질유전(形質遺傳)에 의한다는 이론은 종지부(終止符)를 찍게 되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개관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위대한 전진의 진로가 유전의 진로와 합치된 때는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떤 특수한 유전의 진로에 있어서 퇴보는 항상 전진을 뒤따랐던 것이다.
그러면 민족이나 종족에도 개인생활과 마찬가지로 민족생활이나 종족생활이란 것이 있으며, 또한 전체사회에는 예를 들어서 그것을 소비하면 부패하는 일정량의 에너지란 것이 있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관념은 오래 되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관념으로 아직도 대대적으로 신봉되고 있으며 발전철학의 해석가의 저서에서도 부단히 계통없이 저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왜 이와 같은 관념이 물질이나 혹은 운동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지 않아서 진화의 법칙에 명백하게 속하게 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종족 내지 민족이 개인을 원자로 생각한다면 사회성장은 “물질의 통합이며 운동의 상반(相伴)적인 분산(分散)인 것이다. 이때 물질은 불확정하고 지리멸열한 동질에서 확정적이며 수미일관한 이질로 이전되는 것이다. 한편 유보된 운동은 동일 방향으로 변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주4) 그리하여 사회생할과 성무(星霧)설에 대한 태양계의 생활 간에는 일종의 유사론(類似論)을 유도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열과 빛은 운동을 발출시키고 있는 전체원자가 산출하고 있다. 원자가 균형상태나 휴식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열과 빛도 정지되어서 비가동상태로 되지만 외계에서 오는 힘의 충격만으로써 이 균형 내지 휴식상태는 깨어져서 발출(發出)과정을 회복하는 것인데, 가스형태로 운동을 통합하여 물질을 분산하면서 이의 압축으로 운동을 재출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개인의 총체(總體)도 이와 같이 문명을 광명하게 하고 온화하게 하는 힘을 발출시키는 것이지만, 이러한 과정이 정지되어 개인구성원들이 균형상태를 이룩하여서 자기들의 고정된 위치를 취하게 된다면 경화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야만인의 침입으로 야기되는 파괴와 분해는 과정의 재발생과 문명의 새로운 성장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비유론(比類論)이란 가장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왜냐하면 비유론은 유사성(類似性)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나 한편 진리를 가장시키며 은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론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이들의 생신한 생동력으로 부단히 재생산되는 것이나 한 사회는 사람과 같이 사회의 힘의 쇠퇴로 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전체의 힘은 개체구성원의 합계임에 틀림없는 것이나 한 사회는 구성원의 생동력이 감소되지 않는 한 생동력을 소실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생활력을 개인의 생활에 비유할 수 있는 공통적인 유사점과 저자가 제안한 바 있는 것에는 명백한 진리 즉 진보를 최종적으로 정지케 하는 장애물은 발전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과, 또한 이전의 모든 문명을 파괴하였던 것은 문명 자체의 성장에서 산출된 조건이라는 진리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진리인 것이며 또한 가장 함축있는 진리인 것이다. 인간 진보에 관한 건전한 이론은 반드시 이 진리를 설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주1) 아류과학이나 인기있는 형태 중에서 이것은 특출한 생동력과 힘의 저작가인 윈우드 리드의 작품인 “인간의 순교”라는 저서에서 가장 훌륭한 표현(가장 솔직하기 때문에)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책은 실제에 있어서는 진보의 역사이며, 그것보다는 도리어 진보의 역사에 대한 원인과 방법론이다. 고로 저자의 철학적인 이해력에 대한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던 정독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주제와 제목과의 관계는 결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우주역사에서 기이하지만 진실된 표제인 “인간의 순교”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각 세대에 있어서 인류는 자기들의 슬픔으로서 자기들의 자식이 이득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들의 변명이란 과거의 고뇌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부당하단 말인가?“
(주2) “사회학 연구”결론
(주3) 윈우드 리드 저 “인간의 순교”(The Martyrdom of Man)
(주4)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에 관한 정의 “제일원리” 39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