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깁는 바늘
바늘은 천 개의 손을 가졌다. 그 날렵한 손길로 우리 삶 곳곳을 누빈다. 재봉사의 바늘은 옷을 짓고 의사의 바늘은 생명을 살린다. 더러는 막힌 곳을 뚫어주고 새의 부리처럼 먹을 것을 낚아 올린다. 낚시바늘이 그러하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찔리면 아픈 것을 알기에 도구로 쓸 때도 조심해서 다룬다. 주사바늘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학교 다닐 때 예방접종 하는 날이면 학교에 가기 싫었다. 예방주사를 맞으려 길게 줄 서 기다릴 때는 두려워 도망치고 싶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주사바늘에 찔리기도 전에 벌써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본 주사바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방주사를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봄날 나는 무시무시한 바늘을 만났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해 질 무렵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갔다. 나도 빨래를 하겠다고 알짱거리다 빨래 방망이에 이마를 부딪쳤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았는데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얼굴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사 아팠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수건으로 상처를 누른 채 삼거리 의사에게 갔다. 키가 큰 의사는 상처를 꿰매려 바늘을 들고 다가왔다. 누런 실이 달린 바늘이 크기도 했지만 그 모양이 완전히 갈고리 같았다. 나는 기겁해 줄행랑쳤지만 붙잡혀 이마에 초승달 같은 흉터가 생겼다.
의사의 바늘과는 다르지만, 아버지도 바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집에 요긴한 연장이었다. 처음에는 대나무 바늘이었지만 짧고 무디어 불편하다며 아버지는 철사로 새롭게 길고 날렵한 바늘을 만들었다. 멍석을 너끈히 뚫을 수 있는 튼튼한 바늘이었다. 뾰족한 부리에 꼬리가 납작한 그것으로 멍석이며 가마니를 손질하였다. 쥐가 쏠아 너덜너덜한 데를 쇠바늘로 기우면 그 자리가 좀 울퉁불퉁해도 가마니는 금세 멀쩡해졌다.
바늘이 만들어 준 고운 추억도 있다. 나를 시집 보낸다고 온 집안이 떠들썩하던 무렵 안방에 비단 두루마리가 들어오고 펼쳐진 옥양목 위로 하얀 목화솜이 놓였다. 네 귀퉁이마다 붙어 앉은 친척 아주머니들이 한 땀 한 땀 이불을 만들었다. 작은어머니는 눈이 침침하다면서도 내가 여고 때 만들다 둔 병풍에 수를 놓았다. 그 정성으로 병풍에 사슴이 뛰놀고 학이 날았다. 잽싸게 움직이는 바늘의 요술이었고 청실홍실로 수놓아 알콩달콩 살라는 어른들의 정성스러운 손바느질이었다.
성질이 까칠한 사람을 흔히 바늘에 빗대기도 한다. 남편은 까칠한 성격이 아니면서도 나에게는 바늘이었다. 만난 지 두어 달 만에 결혼했는데 나에게 익숙지 않아서인지 불쑥불쑥 던지는 말들이 나를 찔러댔다. 서툰 바느질에 손끝 찔리듯 나는 그 바늘에 종종 마음을 다쳤다. 남편은 내가 바늘귀에 꿰인 실처럼 잘 따라오기를 바랐지만 나 또한 실보다 바늘에 가까웠다. 아이들 키우는 문제며 시댁과의 관계, 여기저기서 자꾸 부딪쳤다.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찔리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찔린 자리에 굳은살이 생기고서야 우리는 서로의 바늘에 조금 익숙해졌다.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기도 하고 이해라는 골무를 끼기도 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오랜 세월 써왔던 내 바늘이 좀 무디어졌다. 차츰 쓸 일이 줄어들더니 요즘은 꺼낼 일이 별로 없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설혹 부딪쳐도 옛날처럼 그리 따갑지 않다. 헤진 곳을 기워준다고나 할까. 우리는 이제 서로 기대고 의지한다. 내가 큰 수술을 받고 난 이후부터 더욱 그렇다.
아들들을 키워 장가보내고 한숨을 돌릴 즈음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널뛰듯 오르내리더니 엄지손톱이 파랗게 변했다.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오던 날 의사가 내게 보호자를 데려오라 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주춤했다 곧바로 이 나이 뭐 아쉽겠냐며 바로 얘기해달라 했다. 선천성 심장판막증인데 여태까지는 젊어서 잘 견뎌왔지만, 나이 들수록 더 나빠지고 언제든 예고 없이 심정지가 올 수 있단다. 아! 드디어 내게도 병이 왔구나 싶었다. 내 명줄이 바람 앞에 등잔불 같단 말인가…. 가끔 지끈거리던 뒷머리가 망치로 두드리는 듯 아팠다.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고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흰 가운 입은 사람들이 수술대에 누운 나를 둘러쌌다. 부분 마취를 해 정신이 말똥말똥한 나는 그 눈길들을 한꺼번에 받자 오한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혈관을 뚫어 그 속으로 바늘을 넣어 심장까지 들여보낸단다. 기술은 좋았지만 무서웠다. 위를 쳐다보니 아까 하얗던 천장이 온통 노랬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영일만 우리 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내 손을 잡아주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수술이 잘못되면 어쩌나, 다시 저곳에 돌아갈 수 있으려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마른 땅바닥에서 퍼덕이며 입만 벙긋대는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목마르다 하려 해도 입술이 달싹여지지 않았다. 언젠가 본 영화가 떠 올랐다. 몸을 빠져나온 영혼이 공중에 떠다니며 자기 존재를 알리려 이름을 부르고 사람들을 잡아당겨도 가족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식어가는 육신만 안타깝게 흔들어대던 장면이었다. 내 생명이 비눗방울처럼 한순간에 훅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손아귀 아프게 움켜쥐고 있던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까딱 잘못된다면 낡은 환자복 한 벌만 걸치고 이승을 떠나야 한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이 순간을 잘 넘기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절박한 나의 소원이었다. 다시 눈물이 났다.
허벅지를 뚫는 통증이 묵직하게 느껴지는데도 내 눈꺼풀은 사정없이 달라붙었다. ‘눈 떠요. 잠들면 안돼요!’ 하는 소리가 가물가물했다. 답답했다.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려 살려고 용을 쓰건만 그들 눈에는 내가 조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근지러움과 콕콕 찌르는 따가움이 느껴졌다. 심장이 부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지만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라 했으니 참고 견뎌내야 했다.
한바탕 병과 전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가져온 보료에 앉아 책 읽는 여유를 즐긴다. 한 세대를 뛰어넘긴 예단은 예전과 달리 기계로 수를 누볐지만 두툼해서 마음에 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를 퍼붓던 긴 장마 중에 간간이 비추는 볕이 해사하다. 내게는 습하고 후끈한 기세로 달려드는 더운 바람마저 반갑다. 내가 이 비를 맞고 바람을 쐬는 것은 나와 세상을 이어준, 의사의 바늘이 만든 기적이다. 생명을 기워준 바늘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