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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6) 2024. 5. 19
오순절 성령 강림
행2:1-1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성령 충만히 받으세요.”
<오순절 성령 강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두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행1:4~5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은, 그러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과 약속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에 대해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의미는 “위로자”,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영육 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 안에서 격려해주시고 채워 주시는 분이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한 것은 성령님 외에 첫 번째 보혜사가 있다는 말인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첫 번째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셔서 소외되고, 병들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눅4:18-19).
‘또 다른 보혜사’가 바로‘성령님’입니다. 바로 그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는데 마침내 열흘째 되던 날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날은 마침 ‘오순절’이었기에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오순절이라는 명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고 오십일 째 되는 날입니다(칠칠절이라고도 하고, 보리를 추수하는 날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즉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에 맞추어, 성령님도 ‘안식 후 첫날’, 곧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날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첫 교회인 예루살렘교회). 이날이 기독교 역사의 시작일이요, 모든 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은 인격적으로 실재하는(존재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처럼 성령이 임했습니다(2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특정한 사람만 들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즉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3절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특정한 사람 위에만 임재한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요엘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구약에서는 일정 기간, 특정한 사람에게 임하셨다면, 이제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성령님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님의 주신 능력으로(각양 은사에 따라), 그리고 성령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듣도록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임하셨겠습니까?
왜 모든 사람이 보도록 각 사람 위에 임재하셨을까요?
예, 성령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실재하는 하나님의 영’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 특히 청각과 시각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인격적으로 존재하는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하셔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활동 방식을 설명한 것이지 존재를 설명한 말씀이 아닙니다.
바람은 인격이 없습니다. 없어졌다가 나타났다가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인격적이라는 말은 희노애락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
그의 거하시는 곳은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거하기를 원하시는 곳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것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인격적으로 실존하는 영(기뻐하시기도 하고 근심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성령이 임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은사들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은사가 바로 방언입니다.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나 이 방언은 우리가 이해하는 방언과 좀 다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알아듣는 방언이었습니다.
행2:5-11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고전 14장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적 언어’였지만 오순절 성령의 강림 때 임한 방언은 각 지역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상 언어’였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무려 15개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의 귀에 자기 나라 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이때의 방언 은사는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주셨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방언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교만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조심해야 할 것은 꼭 방언해야만 성령 임재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은 은사 중에 하나며 은사 서열 중에 제일 끝에 있습니다.
고전12:8~11“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등이 은사의 종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고전12:28-31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다 다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은사가 다 성령을 통하여 임하는 것이기에 다 소중합니다.
특히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있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있음을 이어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고전 13장에 언급된 ‘사랑의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표준’을 수정해 주려는 의도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는 그 열매를 통해서 그 은사가 정말 성령의 은사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확인합니다(갈5:22~23).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의 평강을 위해 유익하게 쓰여야 합니다.
셋째, 성령이 임할 때 우리는 복음의 증인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당할 고난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2014년 9월 23일 인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뉴델리 국립 동물원에서 한 남성이 백호에 물려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막수드(Maqsood)라는 20대 청년이 호랑이를 더 가까이서 보려고 울타리 위로 올라갔다가 그만 우리 안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잠시 후 그를 발견한 백호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갔고, 관람객들은 호랑이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던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백호가 날카로운 이빨로 남자를 물고 우리 안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잠시 후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숨진 후였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동물원 관계자는 “그는 술에 취한 상태로 추정된다”고 전했습니다.
호랑이의 본능은 자기 우리(영역)을 침입해 들어오는 생물은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양을 보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당장 물어 죽입니다. 그것이 이리의 습성(본능)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악의 무리들이 구축해 놓은 질서 속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들어와 정의와 사랑을 전하면 그들은 못 견딥니다. 어떻게든 물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도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권능을 헬라어로 두나미스(Dunamis)라고 합니다. 이는 폭탄(Dynamite)의 어원인데 성령은 폭탄이 폭발할 때와 같은 강력한 에너지(Energy)가 있습니다. 이 힘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통해 각종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양 같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수단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120명의 변화를 보십시오.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나와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박해자들 앞에서 두려워하던 자들이 강하고 담대해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던 겁쟁이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놀라운 사도가 되었습니다(행2:36-41).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할 때 복음의 증인 된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반응>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은사를 통해 증거된 말씀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을 본 사람들조차도 그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12-13절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응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친다”(고전9:16)고 까지 말하며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권능이 바울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은 인격적으로 실재하는(존재하는) 영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거나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살전5:19).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가 역사하심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께서 주시는 은사와 도우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화된 삶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증인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성령 충만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십자가의 복음을 힘써 전하시는 증인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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