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왕기상 강해(6) 2024. 7. 24
아도니야의 죽음
왕상2:13-25
<다윗의 유언과 죽음>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선배 신앙인으로서 아들에게 남겨주는 ‘신앙적인 유언’입니다.
그 내용은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온전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철저히 ‘신명기 사관’에 기초한 유언).
다른 하나는 선배 정치인으로서 아들에게 남겨주는 ‘정치적인 유언’입니다.
그 내용은 다윗에게 영향을 끼쳤던 세 사람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을 반드시 제거할 것을 유언합니다.
다윗은 그가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렸다고 말합니다(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임, 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임). 그래서 다윗은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고 유언합니다.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반드시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준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혜를 갚으라고 유언합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길르앗 지방의 마하나임으로 피신했을 때, 침상과 그릇과 다양한 음식을 가져와 다윗 왕 일행을 섬겼습니다. 그의 섬김에 감동한 다윗은 귀환할 때 바르실래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가 거절하자 그의 후손들을 보살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삼하 19:31-39). 다윗은 솔로몬에게 자신이 바르실래에게 행한 약속을 계속 지켜나가도록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셋째, 베냐민 사람 시므이를 처리하라고 유언합니다.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사울 왕가의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 가문의 몰락 원인이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압살롬에게 쫓기는 다윗을 저주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했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제일 먼저 나와 다윗 왕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다윗은 각 지파의 화합과 민심을 얻기 위해 그를 살려두었지만, 그의 저주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솔로몬에게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라’고 말하면서 꼭 제거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인물은 때가 되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었으므로, 다윗은 솔로몬이 견고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므이와 같은 암적(癌的) 존재는 반드시 제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유언을 마친 다윗은 70세를 일기로 위대한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경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라, 그의 나이 70세 때인 B.C. 970년경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으면서 이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의(義)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장차 그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아의 조상으로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도니야의 요청>
이제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실행해야 하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제를 실행할 수 있도록 빌미를 제공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아도니야’였습니다.
13-17절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14 또 이르되 내가 말씀드릴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아도니야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이 죽기 전에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대관식을 거행한 사람입니다. 만일 그때 나단 선지자가 재빨리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거사는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다윗이 솔로몬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그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다 혼비백산하며 도망가고, 홀로 남은 그도 살아남기 위해 성막 앞 제단 뿔을 붙잡고 솔로몬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1:52)라는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아는 미련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아도니야의 신상에 좋았을 텐데, 이제 얼마나 지났다고 불쑥 밧세바를 찾아갑니다.
밧세바는 왕비였으나 지금 그녀는 태후(太后)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에서 태후의 위치는 대단히 유력한 위치였습니다. 아도니야 역시 밧세바를 움직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밧세바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방문에 당황하였습니다.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라는 질문에는 밧세바의 경계심이 묻어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안심시키면서도, 은근히 밧세바의 마음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합니다.
자신이 본래 ‘왕위 계승 1순위’였다는 것입니다(‘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15절).
아도니야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다윗의 생존한 아들 중 그가 최연장자였기 때문입니다(1:6). 참으로 어리석은 말입니다. 왕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자리입니다. 그가 비록 장남이었다고 왕위가 당연히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결코 그를 왕위에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 1초도 왕위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솔로몬이 왕위에 있는데 '왕위가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목숨이 열 개라도 부지할 수 없는 망언입니다.
또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상황 판단 착오입니다. 물론 아도니야의 유력한 추종 세력이 있었지만, 온 이스라엘의 지지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주장은 아도니야의 교만한 성품과 왕위에 대한 미련이 빚은 착각입니다.
그런데 그 왕권이 솔로몬에게 돌아갔음을 인정합니다(‘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렇게 인정한 것이 아니라 밧세바를 안심시키기 위한 발언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장황하게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밧세바의 마음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어머니의 말이라면 거절하지 못하리라 추측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가서 부탁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17절).
아비삭이 누구입니까? 늙은 다윗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해드리기 위해 시중을 들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아도니야의 이 간청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아비삭의 미모가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 미모에 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도니야가 아직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의 첩(후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사 제국을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는 선왕(先王)의 첩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후왕(後王)이 자신의 왕위를 널리 인정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압살롬도 백성들의 목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왕권 쟁취를 널리 선언한바 있었습니다(삼하 16:20-23).
여러분은 어떤 해석에 동의하십니까?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두 번째, 곧 아도니야가 아직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간청을 했을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밧세바의 반응>
그럼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간청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8~21절 “밧세바가 이르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왕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간청을 흔쾌히 수락합니다.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간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까닭은 대략 세 가지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밧세바는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사사로운 애정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치적 연관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뜻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위로와 동정의 대가로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견해입니다. 아도니야의 소원을 들어주면 솔로몬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 그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밧세바 자신이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서 아도니야의 청을 수락했다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아마도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솔로몬 왕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직접 왕을 찾아갑니다.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가 찾아오자 최대의 예우와 존경으로 맞이합니다(‘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70인 역에는 ‘왕이 입을 맞추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밧세바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태후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즉위에 큰 공헌을 한 밧세바(1:15-21)에 대한 예우가 이후 왕실의 태후에 대한 예우 확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솔로몬의 우편’에 앉았습니다. 우편(右便)의 자리는 특히 고대 근동 사회에서 존대와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밧세바는 ‘한 가지 작은 일로’(20) 솔로몬을 찾아왔다고 말하면서 “수넴 여자 아비삭을 왕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21)라고 부탁합니다. 이 말에서 아도니야의 간청을 밧세바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전혀 의심 없이 단순한 남녀 사이의 '애정 문제'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반응>
그런데 뜻밖에도 솔로몬은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22절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간청을 아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솔로몬은 아비삭을 달라는 요구를 왕권에 대한 아도니야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즉, 밧세바에게는 ‘한 가지 작은 일’이었던 것이, 솔로몬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처음의 다정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깨어지고 맙니다. 솔로몬은 밧세바에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하고 화를 냅니다.
<솔로몬의 맹세>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후에 그날 당장에 아도니야를 처형할 것을 명령합니다.
23~25절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특히 여기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자신의 맹세 내용 역시 결코 변하지 않을 확고부동한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 대장인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도니야가 미련한 일을 벌였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살려둔 조건을 잊었습니다. 아니 무시했습니다.
결국,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것입니다(자업자득).
<배우는 교훈>
저는 오늘 여러분과 몇 가지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솔로몬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왕권을 솔로몬에게 빼앗겼다고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선왕의 첩(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몰랐던 아도니야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즉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악인들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즉 악인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이기심과 탐심이 강한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재수 없어서 자신만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안중에 절대자인 하나님과 이웃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만일 돌이켜야 할 죄와 허물이 있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선악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악에 동조하게 됩니다.
아도니야의 진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음모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뱀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하와는 그의 말에 속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창 3장).
친구의 부탁을 받고,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선의를 이용하는 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공항에서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
사도 바울의 권면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셋째, 작은 악이라도 방치하면 모든 것을 부패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아의 간청을 ‘한 가지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음모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의 간청을 들어주면 나중에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것을 알았기에 그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5:6)면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성도는 사적인 관계보다 하나님 앞에 정의를 앞세워야 합니다.
아도니야의 일을 부탁하는 밧세바에게 솔로몬은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솔로몬의 태도가 지나치게 격앙되어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솔로몬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사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마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는 부모와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사로운 인정에 매여서 의를 그르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왕권 찬탈을 위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실패하고, 솔로몬의 관용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던 아도니야는 여전히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아도니야의 무모한 욕심이 그로 하여금 결국 죽음의 길로 가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