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전생(前生)과 윤회의 존재성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1877-1945)는 ‘잠자는 초인’으로 20세기 최고의 영능력자였다고 한다. 케이시는 사망할 때까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15,000여 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생 영독(靈讀)과 전생요법으로 90% 이상 치료했다고 하며 미국 정부는 케이시가 사망한 후에 인간의 영능력과 전생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케이시 위원회에 재정을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생의 존재성은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최면상태에서 전생으로 유도하면 피술자들은 전생에서 살았던 삶의 내용을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 때문이다.
시술자들에 의하면 최면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 의식이 혼미한 사람, 최면의 유도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의심이 많고 정신이 산만하여 깊은 최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종교적 편견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전생의 삶을 말한다고 한다.
전생의 내용을 막연하게 기억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하고의 차이, 수 많은 전생이 얽히고 설켜서 튀어나오게 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 정상인치고 전생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시술자들 중에는 최면에서 나타나는 전생은 빙의가 된 신의 것일 수 있어서 피술자의 전생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빙의가 된 신도 현상계에서 살았던 과거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생의 존재성을 입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최면상태에서의 언어는 무의식적 언어와 잠꼬대 언어처럼 자의식이 개입될 수 없다. 최면에 걸리지 않았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가식하지 않는 한 자의식에 의한 가식과 허위가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성경이 결집될 당시에는 전생과 윤회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었으나 로마의 황제들이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성경에서 삭제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프스에 의하면 초기의 기독교는 윤회와 전생이 대세였다고 한다. 소수파였던 사두개인들만 부정했을 뿐 다수파인 바리새인과 에세네인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윤회와 전생에 대한 갈등과 알력이 표면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윤회와 전생을 부정하는 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AD 5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 당시 동로마의 주교들은 윤회와 전생을 부정하고, 서로마 주교들은 인정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압력으로 동로마 주교는 159명이 회의에 참석했지만 서로마 주교는 6명만 참석하도록 허가가 되었다고 하며
회의에서 "영혼이 다시 환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파문한다."고 결정하게 되어 이 때부터 윤회를 믿는 기독인을 처형하기 시작하여 수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윤회의 내용이 남아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7장 10-13절)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자 예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예수)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서 받으리라.”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러므로 이 내용은 “엘리야가 윤회 전생하여 세례 요한으로 태어났다.”는 식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성경에서 살아 남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생이 존재하면 후생(後生)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생이 마지막 생애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들이 모두 생장성멸(生長成滅)을 반복하듯이 인간도 3생(전생 현생 후생)이라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넘나들면서 생존하는 것은 생명들의 생존 원리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외계인의 전언에 의하면 인간은 영적 상승을 위해 몇 천번(최고 1만번)이나 윤회를 한 존재들이고 예수의 전생 중에는 다윗으로 살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인간과 신은 어떤 존재가 먼저가 되었건 간에, 신(영혼)➝전전생(인간)➝신(영혼)➝전생(인간)➝신(영혼)➝현생(인간)➝신(영혼)➝후생(인간)의 삶을 되풀이하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인 영혼을 영적으로 진화 발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전생에서 살았던 삶을 단편일 망정 조금이라도 기억하지만 영혼으로 살았던 삶에 대하여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혼으로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도 고작 저승의 문턱까지 갔었다는 이야기, 3-5일 동안의 짧은 시간에 견문하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전생에서 살았던 삶처럼 영계에서 살았던 삶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 스베덴 보리의 증언에 대하여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나는 인간이 영계에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3차원과 4차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전생의 삶은 현생과 같은 3차원의 삶이어서 최면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지만 영계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어서 기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생은 수 많은 전생들 중의 단편들일 뿐이다. 전생에서 진시황제로 살고 양귀비로 살면서 부귀공명을 누렸다고 해도 현생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전생 삶을 기억하는 일은 영혼의 상승을 위한 교훈과 체험일 뿐이다. 현생의 삶에서 필요한 교훈과 체험은 날이 날마다 보도가 되는 인간들의 욕심과 부정과 비리, 사랑과 평화에 대한 무관심과 타성, 개인주의와 이기심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을 알지 못했다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주류(일부)의 주장이겠지만
언젠가는 주류(전부)로 인정받는 날이 올것입니다.
민족경전의 하나인 천부경을 보면 '만왕만래 용변부동본'萬往萬來 用變不動本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저는 그 문구에서 자꾸만 영혼의 윤회전생이 연상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윤회전생(만왕만래)을 하면서 쓰밈에 따라 변화를 하지만 그 근본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쓰임에 따른 변화...에 사족을 달면 발전을 위한 쓰임과 영격진화와 관계가 있으므로 그것은 결국 근본(본성)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끼가 용이 되고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토끼왕국의 대통령이 되고 토끼들의 하나님으로까지 발전하고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