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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 개론 (4) : 북-베트남의 라오스 침공과 라오스 내전
History of Laos since 1945
1945년 이후의 라오스 역사 (중편)
주의 : 이 부분에서 라오스어 고유명사들을 표기할 때 채택한 방식은 마틴 스튜어트-폭스(Martin Stuart-Fox)가 <라오스 역사>(A history of Laos)에서 사용한 자역(transliteration, 字譯) 방식이다. 따라서 다른 부분에서 사용하는 표기방식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주: 역자는 번역 과정에서 일반적인 표기를 복원하여 병기해 놓았다.) |
4. 북-베트남의 라오스 침공 (1958~1959)
* 이 부분의 보다 상세한 정보는 '북-베트남의 라오스 침공'(North Vietnamese invasion of Laos) 항목을 참조하라. |
4.1. 개 요
1958년 12월, 북-베트남(월맹) 군대의 부대들이 라오스 영내로 들어와 사완나켓(Savannakhet, 사반나켓) 도, 세폰(Xépôn 혹은 Sepone) 군의 여러 마을들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여타 점령 지역들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이 지역에 자신들의 국기를 게양하고 이곳이 베트남 영토의 일부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라오스 국회는 정부에 대해 이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예외적인 전권을 부여했지만,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정부는 애국 진영 정당들로부터 신뢰성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게 됐다.
1959년 7월, 북-베트남 군대가 라오스 정부군 공격에 가담하는 비율이 증가했다. 이들의 공격 형태는 항상 북-베트남 정규군이 라오스 정부군의 방어 진지를 공격해 저항을 격퇴한 후, 친-베트남 동맹세력인 빠텟 라오(Pathēt Lao 혹은 Pathet Lao, ປະເທດລາວ: 파텟 라오, 라오 조국) 반군에게 그곳을 넘겨줘 승리를 선언토록 하는 형식을 취했다. 두 달 후, 북-베트남은 나까이(Na Kai)의 라오스 영내에서 '제959단'(Group 959)이라는 새로운 친-베트남 조직을 결성시켰다. '제959단'은 사실상 베트남 최소 사령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빠텟 라오'의 조직 및 장비 조달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959단'은 이후 1968년까지 존속했고, 라오스 내전에 참여하던 북-베트남 군대가 이 조직을 구조조정하면서 해산했다.
4.2. 세부 진행상황
수완나 푸마(Suvannaphūmā 혹은 Souvanna Phouma, ເຈົ້າສຸວັນນະພູມາ: 1901~1984, [제2차 재임기] 1956.3.21.~1958.8.17.) 왕자가 총리로서 이끌던 정부는 금새 난국에 빠져들고 말았는데, 해외 원조물자의 분배와 관련된 부정부패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많은 라오스 정치인들이 지닌 부패하고 신뢰할 수 없는 습성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한 원조제공 국가들은 라오스의 치솟는 물가인상률을 완화시킬 수 있도록 수완나 푸마 정부에 화폐개혁을 요구했는데, 사실 그러한 인플레이션은 원조제공 국가들 자신이 저개발 국가인 라오스에 쏟아부은 현금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완나 푸마 왕자는 화폐가치 절하가 자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화폐개혁 요구에 저항했다.
1958년 8월, 미국은 라오스에 대한 원조자금 공여를 보류했다. 그러자 국회 내의 연립 반대 세력과 기회주의 세력은 이것을 수완나 푸마 총리 퇴진을 위한 신호로 해석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가 사임하자, 미국 대사관의 지지를 얻고 있던 푸이 사나니꼰(Phuy Xananikôn 혹은 Phoui Sananikone: 1903~1983, [제2차 재임] 1958.8.17.~1959.12.31.)이 다시금 총리가 됐다. 그렇지만 '빠텟 라오' 측의 장관들은 재임명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은 푸미 노사완(Phūmī Nôsavan 혹은 Phoumi Nosavan, ພູມີ ໜໍ່ສະຫວັນ: 1920~1985)이 맡았다. 그는 미국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우파였다. 푸미 노사완의 지휘 하에 라오스 군대는 다시금 반공 군대가 됐다. 과거 '빠텟 라오' 반군 출신의 2개 대대는 즉시 '빠텟 라오'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1958년 12월, 푸이 총리는 헌법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키고 비상권력 하에 통치했다. 그는 이 비상사태를 이용하여 공무원 조직 내의 '빠텟 라오' 세력을 숙청하려 했고,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에서 [좌익의 명목상 수장인] 수파노웡(Suphānuvong 혹은 Souphanouvong, ສຸພານຸວົງ, 수파누봉: 1909~1995) 왕자 및 여타 '빠텟 라오'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1959년 7월, 라오스 전역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사왕 웡(Sīsavāngvong 혹은 Sisavang Vong, ເຈົ້າມະຫາຊີວິດ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 [재위] 1904~1945 및 1946~1959)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시사왕 와타나(Savāngvatthanā 혹은 Sisavang Vatthana, Savang Vatthana, ເຈົ້າສີສະຫວ່າງວັດທະນາ: 1907~1978 혹은 1984, [재위] 1959~1975)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시사왕 와타나 국왕은 자신의 부왕이 강력한 친-프랑스 성향을 지녔던 것만큼이나 친미 성향을 지녔던 인물이며, 자신이 라오스의 마지막 국왕이 될 것이라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958년 12월에 북-베트남 군대가 --- 북-베트남과 남-베트남(South Vietnam, 월남)의 경계선이기도 했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와 인접한 --- 라오스 세폰 군의 몇몇 마을들을 점령하면서 사태는 불길하게 전개됐다. 라오스 정부는 북-베트남이 라오스 영토 내에 자국 국기를 게양한 일에 즉시 항의했다. 하지만 하노이 당국은 이 마을들이 역사적으로 베트남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선례와 비교하면 북-베트남의 주장은 분명 얌전한 주장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1954년 여름에 비무장지대를 확정할 때 '쭝지아 정전위원회'(Truong Gia Armistice Commission)가 사용한 프랑스 제작 지도의 일방적인 재해석이자 무력에 의존한 것으로서 침략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라오스 국회는 이 위기를 해결하도록 푸이 총리에게 예외적인 권력을 위임했다. 하지만 상실한 영토 회복에 실패하면서, 라오스 민족주의자들은 괴로움에 빠져들었고 미국에 더 많은 희망을 걸게 됐다.
라오스와 북-베트남의 국경선 전역에 걸쳐 전투가 발생했다. 1959년 7월 28~31일 사이에 북-베트남 정규군 부대들이 공격에 가담했다. 이 작전들은 북-베트남 군대가 라오스 정부군이 강한 지역을 선도적으로 공격해 격퇴시킨 후, 저항이 사라진 지역을 '빠텟 라오' 반군에게 넘겨주는 패턴을 사용했다. 이러한 전술은 북-베트남 군대의 출현을 은폐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북-베트남 군대가 이 지역에 나타났다는 소문은 종종 적을 겁주는 효과도 갖고 있었다.
그해 여름 후워판(Houaphan) 도의 산속에서 그러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왕립 라오스 육군(Royal Lao Army: ARL) 소속 대위였던 꽁 레(Kong Le: 1933 혹은 1934~2014)도 있었다. 꽁 레는 '제2 공수대대' 소속 병력 2개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거의 북-베트남과의 국경선 지역만 순찰하던 중이었다. 그들은 적군과 조우하는 일 없이 삼느워(Xam Neua)에 도착했지만, 이곳의 주둔군이 삼느워 읍내를 방치해둔 채 주둔지를 비운 것만 발견했다.
이제 베트남 공산당의 전략은 남-베트남과 관련해서 결정됐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 공산당은 라오 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혹은 Phak Paxāxon Lao: LPRP 혹은 LPP)의 역할을 라오스 혁명의 지도부로서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을 보조하는 세력으로도 규정했다. 1959년 중순에 하노이의 대 남-베트남 전략은 극도로 기복이 심한 세폰 군의 지형에 첫번째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후에 호찌밍 루트(Ho Chi Minh Trail)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다.
5. 중립의 실패 (1960~1964)
5.1. 개 요
푸이 사나니꼰 총리 정부는 '빠텟 라오' 세력을 억압했지만, 우익 진영에 그들이 바라던 형태의 권력을 주지 않았다. 1959년 12월, 푸미 노사완이 라오스 역사상 최초의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위앙짠을 장악하고 푸이 총리도 체포했지만, 푸미는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됐다. 서방국 대사들의 재촉을 받은 시사왕 와타나 국왕이 푸미의 총리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타협이 이뤄져 왕실 종친인 솜사닛 웡꼿라따나(Somsanit Vongkotrattana: 1913~1975, [총리 재임] 1960.6.3.~8.15.) 왕자가 명목상의 총리가 되고, 푸미는 계속해서 국방부장관 직을 유지하면서 정부의 실권자가 됐다.
하지만 수파노웡 왕자와 여타 '파텟 라오' 지도자들이 드라마틱하게 탈옥하면서 신 정부는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수파노웡 왕자 일행은 간수들을 회유하여 그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도망쳤다. 또한 신 정부는 전 총리였던 수완나 푸마 왕자 및 그의 중도 정책을 지지하던 군부 내 일부 세력의 반대에도 직면했다.
1960년 8월 9일, 꽁 레 대위가 이끄는 갑작스런 쿠테타가 발생했다. 그들은 국회에 대해 수완나 푸마 왕자를 다시금 총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분노한 군중들까지 이 쿠테타를 지지하고 나서자 국회는 이들의 요구에 응했고, 수완나 푸마 왕자가 자신의 3번째 정권을 구성했다(제3차 총리 재임기간: 1960.8.30.~12.13.). 위앙짠에 있던 미국 국무부의 사업평가 사무소(Programs Evaluation Office: PEO)는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 항공편으로 즉각 대피했다. 수완나 푸마 총리는 우익 야당들을 무마하기 위해 신 정부에 푸미 노사완 등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푸미는 남쪽으로 내려가 보운 오움(Bunūm na Champāsak 혹은 Boun Oum Na Champassak, ບຸນອຸ້ມ ນະ ຈຳປາສັກ: 1911~1981) 왕자와 함께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공 조직인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를 결성했다.
꽁 레의 쿠테타는 군부를 분열시켰다. 일부 주둔군들은 꽁 레를 지지했고, 일부 주둔군들은 푸미를 지지했다. 그러나 라오스 군대의 예산은 미국에서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꽁 레의 부대들은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고, 결국 '빠텟 라오'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수완나 푸마 총리도 이러한 움직임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지지하여, 그는 삼느워의 깊은 산속에 있던 '빠텟 라오'의 본부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수파노웡 왕자와 함께 라오스의 단결과 중립을 호소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빠텟 라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은 대단한 선전선동 쿠테타에 다름 아니었고 새로운 위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곧이어 베트남 군대가 라오스로 진출하여 북부 및 동부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빠텟 라오'는 사상 최초로 소련(Soviet Union: USSR)으로부터 실질적인 군사 및 재정 원조를 받기 시작했고, 소련인 자문관들이 라오스에 배치됐다. 미국은 이것을 전면전의 신호탄으로 보았다. 미국은 푸미 노사완과 보운 오움 왕자에게 막대한 원조를 보냈다. 1960년 10월, 그들은 위앙짠을 향해 진격했다. 국회의 정족수를 채운 국회의원들이 사완나켓에 모였고, 수완나 푸마 총리를 해임하고 보운 오움 왕자를 총리로 임명한다고 의결했다. 12월이 되자 우익 군대는 위앙짠에 도착했고, 500명이 사망하는 3일간의 격전 끝에 위앙짠을 장악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는 캄보디아로 피신했고, 꽁 레의 군대는 '빠텟 라오'의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때 '빠텟 라오'가 장악한 지역은 라오스 영토 전체에서 절반이 넘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재임] 1953~1961) 행정부가 끝나고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재임] 1961~1963)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제 정치의 환경이 변화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제네바에서 1956년 체결된 합의안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라오스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미국에 최선의 이익이라는 관점을 견지했다. 이 정책은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6월 비엔나에서 니키타 후루시초프(Nikita Khrushchev: 1894~1971, [재임] 1953~1964) 소련 서기장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보았다. 그 결과 제네바 회담은 재개됐지만,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의 "꼭두각시들"이 타협하도록 만드는 데 약간의 애를 먹었다. 푸미 노사완과 보운 오움은 자신들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도둑맞거나 자신들이 경멸하는 수완나 푸마 왕자가 권력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합의가 이뤄질 지도 모른다고 약간 걱정했다. 그들을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과 태국 군부는 상당한 위협을 가해야만 했다.
'빠텟 라오'는 자신들이 국토 전체를 정복하기 직전에 있다고 믿었다. 1961년 말, 그들은 루웡남타(Luang Namtha)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곳은 푸미의 군대를 행해 나아갈 수 있는 길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산당의 원칙을 견지한 채 자신들이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는 타협안을 수용했다. 1962년 6월, 수완나 푸마(중도), 수파노웡(좌익), 보운 오움(우익) 왕자가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에 모여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이 정부의 내각에는 중도주의자 11명, 우익 인사 4명, '빠텟 라오' 인사 4명이 참가하기로 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가 4번째 총리직(재임: 1962.6.23.~1975.12.2.)에 올랐고, 수파노웡 왕자와 푸미 노사완은 부총리가 됐으며, 보운 오움 왕자는 정계은퇴를 했다. 모든 강대국들이 이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주요한 후원자들은 심지어 이 제2차 연립정권이 출범하기 전부터 그 가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Vietnam War,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11.1.~1975.4.30.)이 격화되면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공산당원들에게 보급로로 활용하던 '호찌밍 루트'의 이용 빈도가 증가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이 제네바에서 두 차례나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것임은 점점 분명해졌다. 북-베트남에게 라오스 영토의 사용은 전략적 필수 요소였고, 타협의 여지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합의사항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은 독립국가 라오스라는 관념에는 아무런 존중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1962년 말 경이면, 북-베트남의 그러한 시도를 막는 것이 미국에 필수적 요소가 돼고 있었다. 소련과 북-베트남은 '빠텟 라오'를 공공연히 지원하는 일을 계속했다. 반면 미국은 '항아리 평원'의 왕 빠오(Vang Pao: 1929~2011) 휘하에 있던 몽족(Hmong) 게릴라들에게 무기와 훈련을 계속해서 지원했다. '빠텟 라오'가 장악한 지역들과 라오스의 여타 지역들을 재통합하려는 시도도 전혀 없었고, 심지어 '빠텟 라오'는 자파 군대의 무장해제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꽁 레가 지휘하던 중도파 군대는 미국의 원조를 수용했다. 하지만 이 일은 중도파 군부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고, 그 중 일부가 '빠텟 라오'로 전향했다. 1963년 4월, '항아리 평원'에서 다시금 전투가 발생했다. 이 해 말 경 교전이 확대되면서 '빠텟 라오' 반군이 진격을 개시했고, 중도파 군대는 정치, 군사 양 측면에서 고전하게 됐다.
1964년 4월, 우익 진영에서 또 다른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 쿠테타의 지도자는 위앙짠 주둔군의 지휘관이었던 꾸파싯 아타이(Kupasit Athai)로서, 그는 푸미 노사완의 계파에 속했다. 총리인 수완나 푸마 왕자는 잠시 구금됐지만, 미국이 이 쿠테타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면서 쿠테타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빠텟 라오' 출신 장관들이 위앙짠을 떠난 후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연정은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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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 공군 기록보존소 / Kenneth Conboy) 1961년에 촬영된 몽족 반공 게릴라들의 모습. |
5.2. 분 쟁
분쟁은 5개의 군구(Military Region, 軍區)로 나눠진다.
제1군구 (본부: 루앙프라방) : 왕실 및 '왕립 라오스 육군' 참모총장 출신의 오운 라티꾼(Oune Rathikul) 장군이 지배한 지역. 제1군구 사령관은 국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티야오 사이웡(Tiao Say~vong) 준장이었다. 제1군구는 라오스 북서부 지방에 위치하여 퐁살리(Phong Saly), 후워컹(Houa Khong), 사인야불리(Sayaboury),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등 4개 도를 포함했다.
제2군구 : 라오스의 북동부 지역으로서, 몽족 출신의 '메오 마키'(Mèo Maquis) 대-프랑스 게릴라전 영웅 왕 빠오 장군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제2군구는 후워판(Houa Phan)과 시앙코우앙(Xieng Khouang) 도의 2개 도이다. 사령부는 '항아리 평원' 북서쪽에 위치한 롱쳉(Long Cheng)에 있었다.
제3군구 : 중부지방으로서 사령부는 사완나켓(Savannakhet, 사반나켓)에 있었고, 사완나켓 도와 캄모완(Khammouane) 도를 관할했다. 이 지역은 보운폰(Bounpon) 장군이 지휘를 하다, 1971년 7월부터는 노우펫 다오 흐웡(Nouphet Dao Heuang) 준장이 지휘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실질적 권력은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었던 르웜 인시시앙마이(Leuam Insixiengmay)의 인시시앙마이 가문이 갖고 있었다. 르웜 인시시앙마이의 부인은 몸 부완판(Mom bouanphan)의 큰 여동생이었고, 몸 부완판은 보운 오움 왕자의 아내였다.
제4군구 : 사령부는 빡세(Pākxē 혹은 Pakse)에 있었고, 살라완(Saravane), 아따쁘(Attopeu), 참빠삭, 세돈(Sedone), 시타돈(Sithandone) 도 등 라오스 남부의 6개 도를 관할했다. 이곳을 지배한 것은 보운 오움 왕자의 나 참빠삭 가문이었다. 제4군구 사령관은 참빠삭 가문의 일원인 파숙 라사팍(Phasouk S. Rassaphak) 소장이었다. 그는 약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휘하다, 1971년 7월 작가이기도 한 숫차이 웡사완(Soutchay Vongsavanh) 준장으로 교체됐다.
제5군구 : 라오스의 수도권인 위앙짠과 보리칸(Borikhane) 도를 관할했다. 사령부는 '치아니모 육군기지'(Chinaimo Army Camp)에 있었고, 쿠쁘라싯 아바이(Kouprasith Abhay) 소장이 지휘를 하다, 1971년 7월에 통릭 촉벵 분(Thongligh Chokbeng Boun) 준장으로 교체됐다.
6. 라오스 내전 (1953~1975)
* 이 부분의 보다 상세한 정보는 '라오스 내전'(Laotian Civil War) 항목을 참조하라. |
6.1. 개 요
1964~1968년 사이의 라오스 분쟁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군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있던 '빠텟 라오' 반군 사이의 분쟁이었다. 이 기간 중 정부에 대한 진짜 위협은 '빠텟 라오'가 아니었다. 정부의 진짜 문제는 부정부패 문제와 정부군 내부의 군벌주의(warlordism)였다. 각 지역 주둔군의 지휘관들은 여타 지역 지휘관들과 효과적인 공조를 취하지 못했고, '빠텟 라오'와 싸우는 것보다는 정치적 권모술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총리인 수완나 푸마 왕자는 계속해서 중립화된 라오스를 주창했고, [우익 및 좌익] 모두 그의 이념에 립서비스 차원에서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사실은 어느쪽도 자신들이 획득한 전략적 위상의 일부조차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북-베트남은 자신들이 라오스 내에서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수완나 푸마 왕자는 종종 사임 위협을 받았지만 총리직을 유지했다. 미국도 더 이상 그의 중도적 관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은 라오스 군부에 대한 실질적인 자금책이었기 때문에, 수완나 푸마 총리를 무시한 채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북-베트남은 라오스를 자신들의 지도가 필요한 미개발 이웃국가로 보면서 라오스 정부의 전복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1968년, 북-베트남은 '빠텟 라오' 반군을 한쪽으로 비켜나 있게 한 후 전투에 나섰다. 북-베트남은 1월에 자국 군 '제316사단'을 남박 계곡(Nambac Valley)을 향해 전개시켰다(☞ 남박계곡 전투). 이곳에는 라오스 정부군 최정예 부대들 중 7개가 배치돼 있었다. 남박계곡은 포위된 상태에서 포격을 당했고 결국 함락됐다. 이 전투로 인해 '왕립 라오스 육군'은 이후 몇년간 사실상 무력화되고 말았다. '빠텟 라오' 반군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군사력이었지만, 소련이 제공한 야포와 전차로 무장한 북-베트남 정규군은 라오스 정부군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라오스 정부는 모든 군대에 대해 대대급보다 큰 규모로 모이지 못하도록 하면서 교전을 피했다.
1968~1973년 사이에 라오스 분쟁은 더욱 고조됐다. 라오스는 미국과 북-베트남이 벌이는 전쟁의 전쟁터로 변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라오스 정부군 편에 서서 몽족 무장조직과 태국 육군(RTA) 병력을 훈련시켰고, 북-베트남 인민군은 라오스 공산당 편에 서서 '빠텟 라오' 반군을 지원했다. 라오스는 2개의 구역으로 분할됐다. 북-베트남 및 그 동맹세력이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던 지역은 라오스 영토의 3분의 2 면적에 달했지만, 이 지역 인구 수는 전체 인구의 4분의 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정부가 실효적으로 통제하던 지역은 메콩 강(Mekong River) [유역] 계곡보다 약간 더 넓은 지역에 볼과했지만, 인구의 대다수를 포함했다.
앞에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빠텟 라오' 세력은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통제하는 데 기꺼이 협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라오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북-베트남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라오스가 북-베트남의 중요한 보급로였다고 회자되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비약한 것이다. 북-베트남에게 있어서 라오스 남부지방은 유용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라오스 영토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던 것은 보급로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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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64~1973년 사이에 미국이 라오스에 퍼부은 대규모 공습은 '비밀전쟁'(Secret War)이라고도 불린다. 이 공격은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고, 미 의회의 승인도 받지 못한 것이었다. 라오스에 대한 공습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폭격에 비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사실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이었다. 미국이 라오스에 쏟아부은 폭탄의 양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과 일본에 투하한 폭탄의 양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고, 당시에 사용된 불발탄과 집속탄 등은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
6.2. 미국의 목표
라오스에서 미국의 목표는 라오스 정부로 하여금 가능한 한 동쪽으로 실질적인 통치권을 확대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베트남 세력과 '빠텟 라오' 반군을 '항아리 평원'에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1968년 이후, 미국은 이러한 목표를 주로 왕 빠오가 이끄는 몽족 무장세력 및 공산 진영에 대한 대규모 공중폭격을 통해 달성하려 했다.
미국의 또 다른 목표에는 정보수집 및 북-베트남의 호찌밍 루트 사용을 교란하는 일도 있었다. 호찌밍 루트 교란에는 주로 공군의 공습이 사용됐다. 이 기간 중 라오스는 그 이전 어떤 국가보다도 역사상 가장 심한 폭격을 받은 나라가 됐다. '빠텟 라오' 장악 지역의 기반시설들은 파괴됐고, 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북-베트남의 목표는 더욱 복잡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베트남 남부로 향하는 호찌밍 루트의 유지 및 미국이 라오스를 북-베트남 침입의 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전쟁은 '항아리 평원' 안팎에서 양측이 밀고당기는 양상으로 악화됐다.
(지도) 라오스 남부지방에 형성돼 있던 호찌밍 루트(황토색 지역). 하단의 보다 진한 선은 캄보디아의 시하눅빌 항구에서 호찌밍 루트로 이어지던 일명 '시하누크 루트'이다. 북-베트남은 북위 17도선에 설정된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을 넘어,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공산 반군들(=베트공)에 대한 군수 지원을 하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호찌밍 루트를 건설했다. 일부 지역에는 상당한 길이의 땅굴도 건설됐다.
1969년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재임] 1969~1974)이 미국의 대통령이 됐고, 베트남 전쟁의 긴장을 완화하고 정치적 해법을 찾기 위한 기나긴 과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라오스 상황의 즉각적인 완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닉슨의 새로운 행정부는 라오스에서 이전과 동일한 수단을 이용해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실제로 1969년 및 1970년에 라오스에서 북-베트남 군대 및 '빠텟 라오' 반군에 대한 공중폭격은 더욱 격화됐다.
1969년 봄, 북-베트남은 우기를 이용하여 '항아리 평원'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이에 미국은 잘 공조된 작전을 펼쳤고, 북-베트남은 참패했다. 계속적인 공세로 인해 '항아리 평원'에서 북-베트남의 저항은 붕괴했다. 그들은 엄청난 가격의 군사장비들을 방치한 채 거의 북-베트남 국경선 근처까지 퇴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미국과 라오스의 이러한 승리는 단기적이었다. 북-베트남은 대규모 전차 부대를 앞세운 2개 사단 규모의 반격을 시작했다. 그 해에 미국이 얻었던 전과는 대부분 북-베트남 군에게 다시금 돌아가고 말았다.
1970년 3월, 캄보디아에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론 놀(Lon Nol) 장군의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정권은 북-베트남의 자국 영토 사용을 눈감아주던 정책을 중단했다. 캄보디아의 시하눅빌(Sihanoukville) 항구는 수년 동안 사실상 북-베트남의 군수지원 기지가 되고 있었지만, 론 놀 정권은 이 항구의 사용을 봉쇄했다. 이후 캄보디아도 곧 내전에 휘말리고 말았다. 캄보디아 상황의 변화로 인해 라오스 영토를 통한 보급로 확보는 북-베트남에게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됐다.
1970년 봄, 북-베트남 군대는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서쪽 깊숙히 라오스 영내로 진격했다. 같은 해, 태국 육군도 이 분쟁에 참전했다. 소위 '통합 대대들'(Unity Battalions)이라 불린 태국 군 병력은 이론적으로는 의용군(=자원자 부대)이었지만, 사실상 태국의 정규군들이었다.
1971년, '왕립 라오스 육군'이 교전 현장으로 복귀했다. 북-베트남이 라오스 영내 깊숙히 진격하면서 현상유지 상황을 파기하자, 라오스 정부군의 행동 돌입이 압박을 받았던 것이다. 1971년 7월, 태국 및 비정규군 연합병력은 '항아리 평원'에서 1969년의 공세를 다시 한번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이전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있었고, 공세 이전에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연합 병력이 많은 영토를 장악하긴 했지만, 북-베트남 군대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태국 군 및 비정규군 연합 병력은 '항아리 평원' 한 가운데 요새들의 사슬을 만들었다.
1971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육군이 라오스 남부를 침공했다. 남-베트남 군의 작전 목표는 북-베트남의 호찌밍 루투에 타격을 가하고, 미국이 전투 병력을 철수시킨 후에도 남-베트남 정부를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을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은 이 침공에 강력히 저항했고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 게다가 북-베트남 군대는 라오스 몇몇 지방의 도청 소재지들까지 점령하여 반격을 가했다. 북-베트남은 이전에도 이 지역들을 포위하긴 했지만 점령하려고 들지는 않았었다.
라오스 분쟁 과정에서 약 5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중 많은 수는 라오스 민간인들이었다. 특히 '빠텟 라오' 반군이 장악한 산악 지대에 살던 소수민족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았지만, 메콩 계곡 주변의 도시들에 거주하던 라오-롬(Lao Loum 혹은 Lao-Lum: 계곡 평원의 라오족) 주민들은 군사적 의미에서 볼 때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의 원조 금액만 5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미국의 요원들과 달러가 유입되면서 이들 도시들에서는 경제적 붐이 조성됐고, 전쟁에 필요한 서비스산업이 성장하고 미국인 민간인 거류자들도 증가했다.
1965년에 실각한 푸미 노사완이 이끌던 라오스의 장군들과 정치인들은 부정부패, 마약 거래, 매춘, 밀수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많은 수의 라오스 보통사람들도 사상 최초로 현금 경제권으로 편입됐다. 특히 급속도로 성장하던 위앙짠에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전쟁은 사상 최초로 라오스 사람들에게 서구의 대중문화를 전면적으로 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반면 '빠텟 라오' 세력과 보수적인 불교도들은 라오스의 전통 문화가 깊이 타락한다고 여기게 됐다.
이 기간 중 '빠텟 라오'는 국내외에 온건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수파노웡 왕자는 [좌익의 명목상 수장으로서] '빠텟 라오'의 공식적인 얼굴인 '라오스 애국 전선'(Lao Patriotic Front) 의장을 맡고 있었고, 공산당 및 그 지도자인 까이손 폼위한(Kaisôn Phomvihān 혹은 Kaysone Phomvihane, ໄກສອນ ພົມວິຫານ: 1920~1992)은 배후에 남아 있었다. '라오스 애국 전선'은 1968년 회의에서 12항의 프로그램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통합 정부와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또한 불교와 군주제를 존중할 것이라고도 약속했다. 수파노웡이 왕족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는 점은 많은 라오스인들에게 '빠텟 라오'가 집권해도 온건한 노선을 선택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빠텟 라오'가 장악한 지역의 경우, 일부 가능한 지역에서 집단농장 구성 시도가 있긴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두드러질 정도로 온건한 정책을 구사했다. 미국의 끊임없는 폭격으로 인해 애로가 있긴 했지만, 이 지역들에서 '빠텟 라오'는 주민들에 대한 기초적인 서비스들을 실질적으로 제공했고, 고산지대 소수부족들을 효과적으로 재배치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빠텟 라오'가 부패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이 알고 있듯이, 그들의 부정적 측면은 대부분 북-베트남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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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66년 라오스 영내를 행군하는 북-베트남 정규군의 모습. |
6.3. 평화협정 (1973)
1973년 1월, 닉슨의 재선에 이어 북-베트남과 미국이 평화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1954년의 제네바 회담에서 수립된 관례에 따라, 베트남의 요청에 따른 부수적 의제로서 라오스의 평화적 해법도 합의됐다. 라오스의 양대 진영은 자신들의 실질적 후원국들이 동의한 상태에서, 7월이 되기 전부터 비공식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양측은 휴전협정에 신속하게 서명했고, '평화회복 및 국가화합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the Restoration of Peace and National Reconciliation)을 발표했다.
이 협정의 주요한 내용은 수완나 푸마 왕자를 총리로 하는 제3차 연립정권을 구성하며, 양측에서 12명씩의 장관들로 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정치적 적법성을 상실하고 있던 국회는 42인으로 구성된 '자문회의'(Consultative Council)로 대체하기로 했다. 자문회의 의원은 양측에서 각각 16명씩 선정하고, 10명은 양측의 합의로 지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자무뇌의 의장은 수파노웡 왕자가 맡기로 했는데, 이 기구가 사실상 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수파노웡 왕자가 사실상 라오스의 공동 통치자가 됨을 의미했다.
이 협정문에는 '빠텟 라오'가 기존에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포기할 것인지 그 여부에 관한 언급은 들어 있지 않았다. '빠텟 라오' 산하 군대도 이론상 정부군과 통합토록 하고 있었지만, 그 시행 일정은 결코 발표되지 못했다.
이 협정은 북-베트남 군대가 라오스에서 철수하도록 규정했지만, 베트남 군대는 결코 철군하지 않았다. 이러한 합의내용은 제2차 연립정권 이후 대단히 강화된 '빠텟 라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우익 진영은 이 점을 인식하여 1973년 8월 위앙짠에서 최후의 쿠테타를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라오스인들은 '빠텟 라오'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우익의 쿠테타는 금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74~1975년 사이,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이 직접 개입을 중단함에 따라 라오스에서의 권력 균형은 '빠텟 라오' 진영으로 확고하게 이동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는 1974년 중반에 심장마비를 겪고 몇달 동안 프랑스에서 회복을 한 후부터 쇠약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 이후 그는 1976년 초로 예정돼 있던 총선이 끝나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제 반공 세력은 지도자를 잃었고, 분열된 채 부정부패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파노웡 왕자는 달랐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뛰어난 정치적 책략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뒤에는 공산당의 규율 잡힌 당원들과 '빠텟 라오' 군대, 그리고 북-베트남 군대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미국의 원조 중단은 반-'빠텟 라오' 군대 대부분의 대규모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빠텟 라오' 군대는 북-베트남에서 자금 및 장비를 계속해서 보급받고 있었다.
1974년 5월, 수파노웡 왕자는 "국가 재건"(National Reconstruction)을 위한 18개항을 발표했고,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의 지배력이 강화됐음을 의미했다. 국가재건 계획은 자유선거 약속, 민주적 권리와 종교의 자유 존중 등 대부분 논란의 여지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 단합"이라는 명분 하에 언론 검열이 도입됐다. 이 조치는 은밀하게 정권 장악을 노리던 '빠텟 라오' 세력에 대해 비-공산주의 계열 정파들이 정치적 활동을 조직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1975년 1월, 모든 형태의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다. 영향력 있던 사업가들이나 정치가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인식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태국, 프랑스, 미국 등지로 옮기기 시작했고, 어떤 경우엔 이주를 하기까지 했다.
1975년, '항아리 평원'에 주둔하던 '빠텟 라오' 군대가 북-베트남의 강력한 화력과 병력의 지원 하에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4월 말, '빠텟 라오' 군대는 살라 포우 콤(Sala Phou Khoum) 교차점 주변의 정부 출장소 건물을 장악했다. 이곳은 13번 국도를 통해 므엉 까시(Muang Kassy)로 진격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 정부 내의 비-'빠텟 라오' 세력은 캄보디아나 라오스에서 벌어진 일이 라오스에서 재현되기보다는 타협을 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즉 무력으로 권력이 교체되기보다는 항복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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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영상을 추가했습니다..
엄청고생하셧습니다,
이좋은 글을 이렇케 쉽게 읽어보다니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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