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광원 초창기
이현필 선생은 가장 초기 (初期)에서부터 따르고 또 이선생의 일생동안 충성스런 그 제자로 그의 정신을 따른 분은 오북환 집사이다. 오북환 집사는 남원 읍내에서 친한 신자 네 명과 합동해서 목공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오집사와 그의 친형님과 서재선 집사, 배영진(후에 장로가 됨) 등이었다. 목공소의 이름을 삼일목공소라고 했다. 3.1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여 일본 경찰의 주목을 더 받았다. 남원에 목공소를 차리기 전에 오집사의 친동생 오동욱 목사도 감옥에 갇혔고 오집사도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끌려가 취조 받고 옥고를 치루었던 것이다.
오북환 집사는 이현필 선생을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는 자기 목공소를 내놓아 집회소로 삼고 이선생을 따르는 이들이 매일 그 집2층에 모여 예배보고 성경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 때 남원 읍내의 기성교회에 다니는 부인들 중에 여럿이 거기 찾아다니며 이선생 교훈에 동화되어갔다. 강화순, 강차남, 강남순, 강부남, 물노인 등 교회 내의 중진들이 몽땅 빠져나와 이선생을 따라 다니니 기성교회의 질투가 극심했다.
남원은 동광원운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고장으로, 한때는 광주보다도 남원을 더 이 운동의 중심지로 삼으려 한 때도 있었다. 나이 30대의 청년인 이현필이란 인물이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고 다니는 인물이기에 좌우간 그가 한 두 번 지나만 가면 마을마다 집집마다 이현필을 따라 나서는 부인들, 처녀들이 줄을 지었고, 혹은 온 가정 식구가 통틀어 그를 따라나서는 일도 자주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동광원 운동은 핍박이 대단했다. 가족을 찾으러 와서 야단치는 이도 있었고 자기 애인이 거기 따라가니 애인을 빼앗긴 청년이 뒤따라와 눈에 불을 돋구어 분노하며 모조리 죽인다고 위협하는 일도 있었고 더구나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중진교인들이 이 무리들을 따라가니 속이 상해서 노골적으로 이현필 운동을 핍박하고 경찰에 고발하여 경찰서에까지 박해를 가했다. 동리 청년들도 합세했다. 이현필 선생의 주장이 사유재산제도를 타파하고 가족제도도 파괴한다고 해서 한 때 이 운동을 공산주의로 몰아 고발하기도 했다.
이현필 선생 바람이 한창 휩쓸던 시절에는 남원이나 진도(珍島)같은 데서는 적어도 기성교회 교인의 5퍼센트 가량의 정수 교인들이 이선생 모임에 따라 다녔다. 프란치스코 운동이 그 당시 구라파 기성기독교의 안일과 사치에 대해 대조적이었던 것처럼, 현대교회가 너무도 그리스도 정신을 멀리 떠나 세속적이고 경건성을 잃은데 대한 반동적 운동 같은 느낌을 주는 이현필 운동은 기성교회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 독선적이고 과격하고 이단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핍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걸음 속에, 그 진리 속에 예수가 포함되어 있으면 그 길이 옳다. 한동안 남원지방의 신자들 사이에 하나의 구호처럼 부르고 다닌 말은 ‘이 길이다!’였다. 동광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나 감격하여 부르짖는 첫말은 ‘이 길이 옳다!’이다. 기성교회 생활 속에 틀이 박혀 있던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이상하게 믿는 사람들이고 새 길이었다.
신자들이 이현필 선생 정신에 감동되어 따라 다닌 것은 임시 기분적인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가정도 다 버리고 재산을 자진해서 동광원에 바치고 들어온 신자들의 약 70퍼센트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이 길을 걷고 있다. 이선생은 사람들이 자기한테 찾아온다고 무조건 함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보고는 “도로 가 보시지요. 더 깨닫게 되면 오십시오.”라고만 했다.
순결주의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이상하게 들려지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교리도 아니고 신조도 아니다. 동광원에는 교리가 없다. 그들은 수도만 하는 사람들이다. 수도자에게는 순결이 생명이다. 현대 그리스도 교회의 타락과 세속에 비해 볼 때 이들 수도자들이 독신으로 살며 스스로 순결주의에 대한 해석에 의문점이 있다 할지라도 순결하게 사는 일은 어디까지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종교적 향기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그 놀라운 마력같은 영향력을 지녔던 이현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운동의 초기적인 열광도 이제는 가라앉아 진정됐다. 지금은 동광원의 수녀들이 구구 비둘기 같이 모여 고요히 수도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동광원은 결코 열광하지도 않고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고 독선하지도 않는다. 동광원은 지금은 위험하거나 기성교회에 피해를 끼치는 단체도 아니므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고요히 자기네 수도의 길만 가는 단체다. 어찌 수도원과 교회가 모든 면에 있어 같을 수 있겠는가.
광주 YMCA 총무로 있던 정인세 선생이 이현필 선생 운동을 협조하려 다니다가 한번은 남원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동리 청년들이 몰려와서는 밤중에 정선생을 밖으로 불러내어 십여명이 포위하고는 “이 자식! 왜 이 동리에 와서 남의 종가(宗家)집 사람들을 꾀어내어 제사도 못 드리게 하느냐?”면서 눈에서 불이 나게 뺨을 철썩 쳤다.
그 때 입장은 무어라 변명하기도 곤란한 처지였다. 잘했다 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 사과할 수도 없고, 때마침 지나가던 노인 한 분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주어 큰 일은 없었다. 다음날 그 뺨 때리던 청년이 찾아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불은 남원에서 일어났다. 전도의 시작은 남원에서부터 했다. 6.25가 일어나기 전 한동안은 남원읍에서 이발소댁이라 불리는 박정화님(6.25때 순교) 2층에서 이현필 선생을 모시고 여러 사람이 모여 성경공부 집회를 하였다. 집회에 모인 남자들로는 남원에서 목공장 하던 오북환 집사, 이세종의 수제자 되는 노인들 그리고 정인세 선생 등이었다.
어느 날 공부하던 도중에 이선생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정인세, 오북환 두 분에게 모임을 맡기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두분끼리 서로 미루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대가 침입했다. 남원읍 교회 목사가 이선생을 공산당으로 몰아 경찰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들어와서는 남원 사람은 빼놓고 “객지에서 온 사람이 누구냐? 손들어 보라”고 소리 질렀다. 정인세 선생과 몇 사람이 잡혔다.
“경찰서로 가자!”해서 형사에게 끌려갔다. 경찰서에 가서는 경관들이 공산당이나 잡아 온 듯이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돌아다니는 이놈들!”하며 노발대발 했다. 사실은 억울한 일이었다. 이현필 선생이 기성교회를 헐뜯고 다닌 것이 아니다. 이선생이 자기 선전을 한 것도 아니오, 기성교회가 틀렸다고 한 것도 아니다. 다만 교인들이 그렇게 자석에게 끌리듯 이선생께 끌렸다. 그런데도 교회는 핍박했다. 남원만이 아니다. 광주, 나주지방 일대에서도 기성교회 목사들이나 노회에서는 이현필 운동을 금욕주의자요, 산중파로 이단시했고 그 때문에 말썽이 나서 이현필과 손잡은 정인세 선생도 YMCA 총무로 있다가 이선생에게 점점 깊이 빠져가는 데 말썽이나 결국 Y총무까지 사면하고 아주 삭발하고 나섰다.
남원에서 오북환 집사의 삼일목공소 2층에서 이현필 선생을 따르는 이들이 늘 모여 예배보고 있을 때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부인 중의 하나인 강부남 권사는 남원태생이오, 전북 순창에서 성장했었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가 된 김금남 수녀의 이모이다. 그는 이현필 선생 모임에 와서 처음으로 성경공부에 참석해 보고는 “이제 살 길을 찾았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남편의 핍박이 심했다
강부남 권사는 핍박을 잘 견디며 이선생을 따랐다. 한번은 성경공부를 시키던 이선생이 아무도 몰래 밖으로 빠져 나가 버렸다. 강부남 권사나 다른 이들이 웬일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별안간 문이 열리더니 강권사의 남편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면서 “이현필이란 자를 좀 만나자“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내 아내를 유인하는 자 누구냐?“고 야단했다. 그러나 이선생이 그 자리에 없으매 자기 아내 강권사를 끌고가 화풀이로 실컷 매를 때렸다.
강부남 권사를 그렇게 핍박하던 남편도 그 후에는 회개하고 잘 믿는다. 늦게야 외아들을 낳아 강권사는 “나는 순임(아들 이름)을 키워야겠다“고 생각되어져서 결국 이현필 선생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 아들은 성장하여 지금의 의사가 되었다. 이선생은 언젠가 그 아들보고 “의사 공부하려면 영육(靈肉)을 다 살피는 의사가 돼라”고 교훈했다. 그는 그런 정신으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