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은 지리적으로 태기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은 화면이요 서쪽은 횡성군 둔내면과 갑천 청일면이며 북으로는 홍천군 서석면과 내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그리고 영동 고속도로가 진조리와 면온리를 지남으로 교통이 좋고,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문화 유적지, 명승고적과 아울러 문인, 열사, 효자, 효부가 많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 가을이면 메밀꽃으로 온 산과 들이 소금을 덮은듯이 하얗게 태어난다는 조그만 동네 봉평.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봉평여행의 출발점은 영동고속도로 장평나들목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10분 가량 가면 나오는 길이다. 6㎞ 조금 넘는 이 길은 소설에서 장돌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봉평장에서 재미를 못보고 대화장으로 가던 그 길이다.
철이 이른지라 아직은 하얀 꽃이 피어 있는 메밀밭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잎새 푸르른 옥수수밭의 광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봉평 읍내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벌써 문학소년처럼 콩당콩당 뛰기 시작한다. 길섶에 세워진 ‘메밀꽃 필 무렵’ 표석을 지나면 한국문학의 백미인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였던 봉평 장터. 좁다란 골목길에 죽 늘어선 난전들은 효석문화제 초대장을 받아들고 찾아온 방문객들을 시나브로 소설 속의 공간으로 이끈다. 봉평장을 찾은 장돌뱅이들이 노곤한 육신을 달래기 위해 목을 적시던 충줏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아쉬우나마 반갑다. 충줏집과 수작하던 동이를 후려친 허생원의 한숨소리와 늙은 나귀를 괴롭히던 장터 아이들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메밀꽃 향기에 실려오는듯 하다.
봉평장은 이런저런 옷감을 파는 드팀전 장돌뱅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된 허생원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들렀던 곳이다. 하지만 매년 초가을의 봉평장은 허생원이 장돌뱅이로 떠돌던 1930년대와는 달리 멀리서 찾아온 외지인들 덕에 상당히 분빈다고 한다. 21세기를 전후해 매년 초가을 효석문화제 때만 되면 이 자그마한 고을에 무려 2∼3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메밀 대궁 모두 베어낸 황량한 겨울에도 적지 않은 답사객들의 발길이 이효석 생가로 이어진다니 200자 원고지 50매도 채 안 되는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에 놀랄 따름이다. 장터를 나서 이효석 흉상과 문학비가 있는 아담한 가산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공원 한쪽 구석엔 허생원과 동이가 막걸릿잔을 기울이던 충줏집도 복원해 놓았다.
이효석생가는 물레방앗간에서 1.5km쯤 거리니 걸어서 20분도 채 안 걸린다. 메밀꽃 핀 펑퍼짐한 들판에 덩그라니 서있는 이효석생가는 강원도 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다.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집은 지붕이 초가에서 함석으로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다.
툇마루에 앉아 이효석의 상상력을 키워주던 먼 경치를 바라보니, 초여름의 햇살 쏟아지는 고즈넉한 들판으로 허생원과 이효석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작품에 나오지는 않지만 허생원은 분명 첫사랑인 성서방네 처녀를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들 동이까지 얻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한 이효석의 말년은 불행했다. 이효석은 1940년 부인과 어린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작품활동도 포기한 채 만주를 유랑하다 2년 뒤인 1942년 뇌막염에 걸려 요절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별초와 격전을 벌였던 여몽연합군의 일원인 몽고인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메밀이 전래된 데는 몽고인들의 속셈이 있었다고 한다. 몽고인들은 이 메밀이라는 작물에 독성이 있다고 여겨 삼별초를 도왔던 제주사람들을 골탕 먹일 속셈으로 메밀씨앗을 전해준 것인데 실제로 이 곡물은 타 곡물에 비해 무기질(회분)함량이 높아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곡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제주의 선조들은 소화효소가 풍부한 무를 함께 섭취함으로서 몽고 사람들을 오히려 놀라게 했는데 메밀과 무의 찰떡궁합이 낳은 대표작이 바로 빙떡이고 이후 제주 사람들의 빈약한 먹거리를 보완해주는 효자 음식이 되어 제주의 관혼상제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특별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강원도에 전해지면서 총처럼 생겼다 해서 메밀총떡 또는 메밀전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하였으며, 만드는 방법 또한 발전하여 강원도 원주에서는 콩나물 넣어 만들며, 영월, 제천등지에서는 김치로만 속을 넣는 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고 전해진다.
메밀은 그냥 먹기는 힘들지만 비만, 고혈압, 당뇨병 및 성인병을 예방하는 성분인 루틴을 다량 함유하여 다이어트 식품으로 적합하며, 피를 맑게 하는 정혈작용이 뛰어나고 단백질, 비타민 C, E 등의 성분이 풍부하다. 또한 "무" 에는 우수한 소화효소인 디아스타아제와 발암성물질을 분해하는 옥시다아제가 함유되어있어 메밀의 영양분을 보다 쉽게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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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면 전지역, 특히 남안동,덕거리,무이리,원길리 등지에는 예부터 메밀을 많이 심어 왔다. 메밀은 가녀린 대공을 가진 연약한 작물이지만 꽃을 피울 때는 그야말로 청순하고 매끄러운 하얀 바다를 이루고 살랑거리는 바람이라도 불면 하얀 '물이랑'이 생겨 구비구비 산으로 하늘로 기어오르는 듯한 식물이다. 그래서 효석(孝石)의 명작 『메밀꽃 필 무렵』이 나오기도 하였던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메밀이 다량 생산됨에 따라 거의 집집마다 하루 한 끼 정도는 이 메밀 국수로 때웠는데, 그 맛이 대단히 구수하고 담백할 뿐 아니라 국물 맛이 좋아 차차 미식(味食)으로 탈바꿈해 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드디어는 오늘날의 '막국수'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막국수는 칼로 썰어 만들던 것을 '반죽 분틀'이란 기계에 넣고 국수를 뽑아내던, 말하자면 냉면국수 같은 것인데 순 메밀로 눌러내고 동치미 국물에 말고 갓김치를 꾸미로 하여 먹어야 제 맛을 내는 음식이다. 지금은 이 '막국수'가 미식(味食)이 되어 봉평면 본동에도 순 막국수로 영업하는 식당이 여럿 있고, 재배하는 가정에서도 이제는 별미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되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사랑 받고 있지만, 특히 이 곳 봉평의 막국수는 그 종주격(宗主格)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광객(觀光客)과 미식가(味食家)들에게 대단한 별식(別食)으로 각광 받고 있다.
메밀은 여름에 배앓이에 좋은 음식이다. 특히 여름만 되면 배탈ㆍ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들에겐 메밀국수를 권한다. 메밀가루에는 아밀라아제, 말타아제 등 소화 효소가 많이 들어있어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 식이요법을 하는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환자들에게도 메밀국수가 좋다. 메밀이 당뇨병에 좋은 이유는 탄수화물 분해에 관여하는 효소의 활성을 메밀이 저해, 혈당의 급상승을 막고 당뇨 합병증으로 나타나는 신경 장애 유발 효소의 활성도 억제하기 때문이다. 메밀에 함유된 루틴과 퀘르세틴은 혈압을 올리는 효소활성을 억제하고, 혈관의 탄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고혈압에 좋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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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메밀밭이 무성한 봉평은 다른 곳보다 고도가 높은 곳이다. 보통 7백 미터 정도의 고지가 대부분이다 보니 아무리 사람이 활동하기에 좋은 높이가 7백 미터라고 하지만 논농사를 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님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다 보니 옥수수나 메밀같은 고랭지 작물들 만이 자랄 수밖에 없었다. 메밀은 어찌보면 가난했던 시절의 상징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한번도 중심이 되지 못한 지역의 한과 가난의 설움이 모여서 소금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