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席毛島는 원래 누에고치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린 시절 잠실蠶室에 들어가서 누에들이 일제히 뽕잎을 먹어치우는 소리를 들으며 꼭 파도 소리 같다고 생각했었다. 솨아, 솨아, 모든 생존의 소리는 이처럼 왕성하고, 그 왕성함으로 또한 처연하다. 이제 보니 내가 써온 시들 역시 그 울음소리를 닮아 있다. 내 시뿐 아니라 문학이란 그런 삐걱거림 또는 파닥거림의 기록이 아니던가. 시는 근원적으로 무애無碍한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빚어지는 공간은 오히려 비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생존의 울음소리는 피해야 할 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귀기울여야 할 소리가 아닐까..(이하 생략)> 나희덕, 같은 책, 196쪽, '두 조나단 사이에서' 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처지이나, 불행하게도 이렇다할 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나는, 평생 '예술 근처', '예술 주변'을 떠나지 못한 채 얼쩡거리며 살았다. 옷을, 문학을, 영화를, 그림을, 음악을, 춤을 사랑하고 즐겼다. 중요하지 않은 삶의 순간이 어디 있을까. 보이건 보이지 않건, 세상에는 아름다워서 귀한 것이 너무 많았다. 유년시절의 기억이라곤, 하루 종일 단칸방 아랫목에서 부자였던 사촌집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졸다가, 또 몰래 알전구를 켜 놓고 책을 보다 "전기세 나온다!" 외할머니의 호통과 강제소등으로 중단된 독서에 대한 아쉬움을 삼키며 억지로 잠을 청하던 기억. 그런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어찌된 영문인지 8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나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는 근원적인 불안 때문에 애써 기억하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안에 검질기게 남아있는 '미적지향'은, 절반 이상이 일종의 현실도피, 존재의 알리바이로 기능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겠다.
이처럼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을 지닌 내게,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어린 시절'이라거나, '백석 시에 등장하는 청배를 먹어본 유년'에 관한 얘기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저 밑줄 친 부분을 읽다보니 시적 재능은 복된 유년 따위의 문제가 아님을 알겠다. 그 어떤 현실의 자리도 어색한 존재의 감수성. '삐걱거림 또는 파닥거림' 그런 것들이 시인을 낳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동력인 모양이다. 예술적 재능은 내게 없으니, '선한 삶'의 꼭지점을 찍어보자는 것이 이 평범한 중생의 서원이건만, 아래와 같은 얘기는 그마저도 힘들 것임을 미리 일러주는 것 같다. 이 산문집에서 나는 아래에 소개하는 꼭지가 가장 좋았다.
<소록도에서의 성만찬>
사춘기 시절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으며 언젠가 소록도에 꼭 가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마흔이 가까워서야 소록도에 가게 된 것은 그 섬이 먼 남쪽바다 저편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소록도에 가기 위해서는 왠지 다른 여행지와는 다른 마음의 준비 같은 게 필요해서다.실제로 섬에 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 타면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소록도는 자리잡고 있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헤엄쳐서라도 건널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소록도가 간직해온 고통의 역사를 떠올리며 마음이 넘어야 할 물결은 훨씬 높고 강하게 일렁였다. 섬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내리쬐는 햇빛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걷다가 잠시 쉬려고 소나무 그늘을 찾아들었다. 시장기가 느껴져 배에서 먹다 남은 떡을 가방에서 꺼냈다. 떡을 집어드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떡을 들고 다가가 "저어, 이것 좀 드세요"하고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나는 너무 놀라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반 넘게 문드러져 있었고, 그에게는 떡을 받아들 두 손마저 없었다.
물론 그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한센병이 치유되었다는 뜻일 테니 전염을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떡을 건넴으로써 그의 손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일반인과 한센병 환자의 거리를 서로 확인해야 한다는 게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심스러운 생각조차 나의 편견이었다. 노인은 일그러진 얼굴로나마 아주 편안하게 웃었고, 손가락이 거의 녹아버린 몽당손으로 떡을 받아들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한 그 손이 노인에게는 여전히 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떡을 나누어 먹었고, 노인은 중앙공원 쪽으로 가는 길을 내게 일러주었다.
공원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조형물처럼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지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었을 누군가의 손이 썩어가는 상처를 지녔을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전시관에서 소록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과 유품들을 보는 동안에도 그 불편함은 점점 커졌다. 몽당손으로 그물을 잡고 둘러서 있는 소년들, 섬을 탈출하기 위해 뗏목 하나만으로 바다에 뛰어든 남자,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꽃수를 놓고 있는 아낙들.......
어디 그뿐인가. 자식을 낳고도 격리된 채 살다가 한 달에 한 번 부모와 자식이 만났다는 통곡의 길도 있다. 전염될까봐 길 양쪽으로 갈라선 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눈으로만 피붙이를 만나는 사진 속에서는 아직도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제시대 시체를 해부하던 검시실과 감금실, 남자들을 강제로 거세시키던 단종대斷種臺 등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흔적들에 진저리가 쳐졌다.
어두운 역사를 뒤로 한 채 이제 소록도에는 재활의 활기가 넘쳐 보였다. 두 다리가 없는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동을 나서는 딸의 표정도 밝았다. 산책을 나선 모녀는 다정하게 소곤거리며 숲그늘로 사라졌다.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섬에서 그들은 병을 잊은 듯 살고 있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 원장이 꿈꾸던 천국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나 소설에서는 그의 노력이 '우리들의 천국'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당신들의 천국'에 머물고 만다. 일반인과 한센병 환자들이 '우리들'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처가 너무 깊었다.
소록도 외에도 한센병 전문병원으로 전남 여수의 애향원이 있다. 그 병원이 만들어진 유래도 인상적이다. 백여 년 전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한 오웬 선교사가 위독해지자, 목포진료소에 있는 내과의사이자 선교사인 포사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갈이 왔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서둘러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포까지 와서 다시 말을 타고 광주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는 길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고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에 도착했다.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오웬 선교사는 목숨을 거두고, 사람들은 그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한센병 환자를 태우고 뒤늦게 나타난 포사이트 선교사를 보며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힘을 모아 광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비록 동료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지만 수백 명의 한센병 환자를 살려내는 기적의 씨앗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환자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자 광주 시민들은 병원을 다른 지방으로 옮기도록 요구하고 나섰다. 한때는 700여 명에 달하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병원은 결국 여수로 옮겨졌다.
나는 소록도의 따가운 볕 아래서 벌이라도 서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 편견과 이기심이 내 속에도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는 이 참담한 땅을 잊어버린 채 자기 고통에만 겨워 살아오지 않았던가, 햇빛은 창처럼 꽂히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건넨 떡 몇 조각을 몽당손으로 받아들던 노인은 모든 걸 용서한 듯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어색하지만 따뜻했던 기억을 나는 소록도에서의 성만찬이라 부르고 싶다. (나희덕, <소록도에서의 성만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