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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도 - 그리고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도 - 모르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모르던 사실’을 전시회나 강연회에 가서 새롭게 배울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대전 화폐박물관의 전시물을 보며 깨달았고(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게시판의 글인「▩대전 여행기 - 대전 화폐박물관을 다녀오다」를 읽어보라),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또 다른 전시회를 보고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국의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으로 줄여서 부름)은 올해(서기 2013년) 7월 2일부터 10월 20일까지 석 달 열여드레 동안 <이슬람의 보물 - 알사바 왕실 컬렉션>이라는 특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는 “쿠웨이트 알사바 왕실이 수집한(모은 - 잉걸)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뛰어난(‘아름답고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써야 문법/어법에 맞다 - 잉걸) 이슬람 미술 컬렉션(Collection. '수집품‘이라는 뜻 - 잉걸)”들을 소개하는 행사였다.
나는 올해 10월 9일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서 표를 산 뒤 전시실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그린 도표가 나를 반겼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다른 책에서 중세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다시말해서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표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배우려고 간 게 아니니까).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이슬람 세계의 서예였는데, 붓글씨 자체를 예술로 여기는 경향은 동아시아에만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서예가 이슬람 사회에도 있다는 것을 알자 몹시 놀라고 - 한편으로는 - 흥분했다. 박물관의 설명문(이하 ‘설명문’으로 줄임)에 따르면 “이슬람의 경전인『꾸란』이 필사(筆寫. 붓[筆]으로 씀[寫] - 잉걸)되면서 아랍어 서예가 이슬람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로 등장”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서(西)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서예는 무려 1369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셈이다. 또 이 설명문을 읽음으로써 ‘이슬람 세계에도 서예가 있다.’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나는 ‘무슬림들이 펜으로『꾸란』을 옮겨적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글자의 모양 자체가 예술이다.”라는 개념이 나타났다.’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이슬람 세계에도 서예가 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인인 내가 이슬람 세계를 보다 가깝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 세계(중국 안에 사는 무슬림 공동체 - 한족(漢族)들은 그들을 ‘회족(回族)’이라고 부르지만, 회족은 자신들을 그냥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 는 빼고)가 동아시아 사회처럼 붓을 쓴 건 아니다. 설명문에 따르면 “아랍어 서예는 말린 갈대 또는 끝을 사선으로(비스듬히 - 잉걸) 자른 깃털로 쓴다.”고 하니까. 하지만 동아시아의 임금들과 귀족/황족/왕족들, 글쟁이(문인文人/지식인을 일컫는 순우리말)들이 서예를 반드시 익혀야 할 예술이자 교양인의 덕목으로 여겼듯이,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꾸란』필사 작업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니, 두 세계의 서예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설명문을 더 인용하자면, “원래『꾸란』은 서기 610년경(그러니까 맨 처음)에는 말로 전해져 내려왔으나, 3대 칼리프 ‘오스만’ (내가 따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서기 644년부터 서기 656년까지 아랍 제국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의 정확한 이름은 ‘<우>스만’이지 ‘오스만’은 아니다. 이는 한국인의 성[姓]인 ‘한[韓]’이 ‘간(がん)’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 잉걸)에 의해 비단과 파피루스에 기록되고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서기 8세기 당나라에서 제지술(製紙術. 종이[紙]를 만드는[製] 기술[術] - 잉걸)이 들어와 종이를 쓰기 전까지『꾸란』은 주로 양피지(羊皮紙. 양[羊] 가죽[皮]으로 만든 종이[紙]. 질기고 튼튼하며 오래가는 대신 무겁고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150쪽 분량의 원고를 양피지에 쓰려면 양을 10여 마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설명).’ - 잉걸) 위에 갈대 펜과 잉크로 필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가 예수가 죽은 지 3세기가 흐르고 나서야 공식적으로 정리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신약성서』로 탈바꿈한 것과 비슷하고(그 전에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경전’으로 받드는 문서가 제각각이었고 내용도 조금씩 달랐다), 종이가 없어서 비단이나 양피지에 글을 적은 것은 고대 중국 사회와 비슷해(중국인들은 동한[東漢] 시기에 채륜[蔡倫]이 서한[西漢]시기에 나타난 종이를 개선해 더 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기 전에는 죽간이나 목간에 글을 썼다. 단, 이 때도 그림이나 지도를 그릴 때는 양피지나 비단 두루마리를 썼고, 때로는 이것들 위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처음 안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고대 미스르(‘이집트’의 정식 국호) 사회에서만 쓰인 줄 알았던 파피루스가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도 - 그리고 그 이전에 동로마 사회에서도 - 쓰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몇 가지를 더 소개하면, 나에게는 이슬람교의 경전인『꾸란』과『하디스』는 배움과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설명문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명문에 따르면 “『꾸란』은 ‘펜(의 사용)을 가르치시는 신(神)’,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가르치시는 신’과 같은 구절에서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내가 이 전시회에 가기 훨씬 전에 읽은 책의 내용에 따르면,『꾸란』에는 천사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신의 말씀이 적힌 글을) 가져가서 읽어라.”라고 명령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무슬림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겼다는 증거다 - 잉걸)
또한『하디스』(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적어둔 책. 무슬림은 이 책과『꾸란』이 모두 이슬람교의 경전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구약성서』와『신약성서』를 모두 중요한 경전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고, 유생[儒生]들이『논어』뿐만 아니라『맹자』도 유교의 경전으로 챙기는 것과 같다)에는 “지식을 구하라. … 지식은 행복으로 가는 안내자이며 역경에 처할 때 힘을 준다. 지식은 동무(친구 - 잉걸)를 모이게 하며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 학자의 먹물은 순교자의 피보다 신성하다. …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무슬림의 의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구절 때문에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복잡한 학문과 정교한 기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한 예로 셀주크 튀르크 제국 시절, 그러니까 서기 1231년에서 1238년 사이에 오늘날의 튀르키예(터키Turkey의 정식 국호. ‘터키’는 영국식 발음이고 정확한 발음은 ‘튀르키예’다)에서 만들어진 아스트톨라베(천문 관측기구. 별들의 높이와 거리를 재려고 쓴 휴대용 천문 관측기구. 바다 위에서 별의 방향과 위치를 알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배가 있는 곳이나 배가 가는 방향을 알았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꼭 가지고 다녀야 했다. 또 별의 위치와 움직임은 날짜를 알아맞히는 일과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달력을 만들 때에도 필요했다. 무슬림에게는 메카와 메디나의 위치가 중요했기 때문에,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땅 위에서 정확한 방향을 알아내는 학문[그러니까 지리학]도 발달했다 - 잉걸) 논문(論文) 모음집은 “아스트톨라베의 제작 방법/이론/사용법 능에 관한 논문 3편과 편지 하나로 구성된 책”인데, 책 모양이 서기 16~19세기의 유럽 책과 비슷하며, 종이책이다. 중세시대의 서유럽에는 이런 논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과학을 따로 다룬 책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사족이지만 이 책을 다룬 설명문에 이슬람교의 달력 -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은 서양사회의 달력인 ‘서기西紀’다. 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피난을 기준으로 삼는 이슬람교의 달력과는 다르다 - 인 ‘헤지라’가 적혀 있었다. 이렇게 다른 세계의 달력을 소개하려고 한 박물관의 시도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가 사회 구성원의 재능과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긍정적인 일을 한 사례로서 기억할 만하며, 적어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 글에 소개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지만, ‘배움’과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고 많이 배운 사람이나 학자를 떠받들던 중세 이슬람 사회의 분위기는 ‘글’과 ‘책’을 받들고 ‘문[文]’을 중요하게 여긴 동아시아 사회의 분위기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후자가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대한 과학과 기술도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때문에 전자가 이룬 것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전시물들 가운데 적어둘 가치가 있는 것을 또 소개하자면 유리 제품과 도자기와 양탄자를 들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이슬람 세계가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새롭게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유리는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 사람들이 맨 먼저 만들었고, 곧 온 서아시아로 퍼졌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인(사산조 페르시아인)과 로마인(동로마인)의 특산품이 되었는데, 동(東)로마(‘비잔틴’이라는 이름은 서유럽인이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에서 따온 것이라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을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사람들은 자신을 ‘로마인’으로 불렀다. 비록 제국의 성격이 그리스도교를 받들고 라틴어 대신 헬라스 말[중세 헬라스 말]을 쓰는 등 옛 로마제국과는 달라졌지만 말이다 - 잉걸)의 땅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복한 아랍인이 유리를 만드는 기술을 받아들여서 유리제품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 예로 서기 7~9세기(그러니까 이슬람 시대 초기)에는 이란에서 “작은 유리 대접”이 만들어졌고, 이것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 제작 기법을 계승한 대접이다.”
또한 훨씬 훗날에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서기 17세기 말 ~ 서기 18세기 초”에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의 무슬림(무굴 제국의 백성인지 아니면 무굴 제국의 정복한 이슬람 왕국의 백성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굴 제국이 정복하지 못한 타밀나두나 케랄라에 살던 무슬림인지는 알 수 없다 - 잉걸)이 쓰던 타구(唾具. 침 뱉는 그릇. 휴지가 없던 시절에는 가래침을 뱉는 그릇을 따로 정해두고 그 안에만 침을 뱉었다 - 잉걸)는 “유리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했다.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은 유리를 좋아했고 유리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유리 공예는 이슬람 이전의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기술이나 공예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서기 10세기 이후의 이슬람 세계)의 유리 공예품은 동시대(같은 시대 - 잉걸)의 금속 공예품과 기형(‘기본 형태’라는 뜻 - 잉걸) 면에서 유사한(비슷한 - 잉걸) 경우가 많았다. 이는 금속과 유리 공예 장인들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슬람 세계의 장인(匠人 : 기술자)들은 가진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 기술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나아가 기술을 자신의 분야에 맞게 바꾸거나 적용했다는 이야기다. 문득 ‘그랬기 때문에 중세 이슬람 세계는 동로마의 유리제품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파랗고, 맑고, 깨끗하고, 화려한 유리제품을 만들 수 있었고, 금속 공예품도 복잡하고 틀이 잘 잡히고 화려한 것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자기들을 볼 때에는 그것들의 모양이나 크기나 빛깔보다 그것들을 만들 때 쓴 기법이나 그것들을 만든 옹기장이(한자로는 ‘도공陶工’)들이 받아들인 동아시아적인 요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설명문을 읽으면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태토(胎土. ‘[그릇을] 낳는[胎 -> 만드는] 흙[土]’이라는 뜻. ‘바탕흙’이라고도 한다. 그릇을 만드는 데 쓰는 흙이다 - 잉걸)에 불투명한 유약을 바르고 초벌구이를 한 다음 표면에 금속 산화물 안료로 무늬를 그린 뒤 초벌구이 때보다 낮은 온도로 구워 금속과 같은 광택(이 나는 - 잉걸) 효과를 내는 도자기 장식 기법”인 ‘러스터 기법’은 “이슬람 세계의 도공들이 중국 도자기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이슬람 세계의 아름다운 도자기는 ‘(바깥세상의 - 잉걸) 도전과 (그에 대한 - 잉걸) 응전’이라는 토인비 선생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른 사례가 아닌가 한다. 만약 중국 도자기라는 경쟁력 있고 품질이 뛰어난 상품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서아시아의 도자기 산업은 다 망했을 테니까.
박물관이 전시한 “서기 9세기의 이라크 대접(도자기)”은 “서기 9세기 중국(그렇다면 당나라? - 잉걸)에서 제작되던 푸른색 안료 도자의 영향을 받아 푸른색으로 식물 무늬를 그려 넣은 대접”인데, 내 눈에는 그 도자기가 조선왕조(좀 더 구체적으로는 서기 15~16세기)의 청화백자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도자기는 분명히 다른 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졌고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게 몹시 궁금했다. 당나라의 도자기 제작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는 도자기가 당나라의 도자기인 당삼채(唐三彩)와는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은 서아시아 도공들의 재능 - 남의 것을 배우되 그것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 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서기 11~13세기에는 “중국(북송과 남송 - 잉걸) 도자와의 경쟁 과정에서 프릿 도기와 같은 이슬람 특유의 도자기가 제작되기도 하였다.”니, 이쯤 되면 ‘경쟁이 창조를 부추긴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박물관의 설명문에는 서기 13세기에 “몽골의 일한국이 서아시아/중앙아시아를 지배함에 따라 그곳의 이슬람 미술에는 연꽃, 구름, 모란, 미르(순우리말로 ‘용龍’ - 잉걸) 등 동아시아의 모티브(주제 - 잉걸)가 유입되었다.”는 말이 나오고, 한 때 몽골제국과 피튀기며 싸운 맘루크 왕조(중세 미스르에 세워진 튀르크인 용병들의 왕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용병들이 ‘소유된 자’라는 뜻인 ‘맘루크’로 불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몽골의 아프리카 침략과 십자군의 서아시아 침략을 막아내고 십자군의 서아시아 지배를 끝장냈으며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다. 맘루크들은 아랍인 역사가인 이븐 할둔에게 칭찬받았으며 그들의 왕조는 나중에 같은 튀르크인의 나라인 오스만 제국에게 패해 무너진다 - 잉걸)의 예술품에 “중국식 모란이나 봉황 무늬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그 설명문을 읽으며, ‘맘루크 왕조가 나중에 몽골제국과 화해하고 교류하면서 원나라의 미술을 받아들인 걸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서기 14세기 미스르의 도기 대접에는 “맘루크 왕자의 궁정 사무실 문장인 로제트 무늬와 그릇 제작자의 이름, 그리고 ‘전하 주방의 주문에 따라 제작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같은 시기의 원나라(몽골제국의 일부분) 도자기에는 이와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슬람 세계의 도자기를 ‘동아시아 도자기의 아류’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남의 것을 참고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독자적인 재(再)창조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양탄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양탄자’ 하면 ‘이슬람 세계’를 떠올리던 내게 이슬람교가 나타나기 전에도 양탄자가 있었다는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설명문에 따르면 “정원을 묘사한 ‘정원 양탄자’는 이슬람 성립 이전 페르시아에서 이미 만들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가 수도인 크테시폰에 건설한 궁전 바닥을 멋진 양탄자로 깔았다고 한다. 이 양탄자는 루비로 된 꽃, 다이아몬드(한자로는 금강석[金剛石])와 사파이어로 된 물, 에메랄드로 된 나무로 장식되어 ‘호스로의 봄’이라 불렸으며, 연중(年中. 그러니까 1년 중 - 잉걸) 가장 건조한 시기, 사막에서 자연(이 경우에는 숲 - 잉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때 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정원 양탄자는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꾸란』에서 그린 우유, 꿀, 포도주, 물이 흐르는 천국, 즉 낙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구약성서』에도 ‘살기 좋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넘치는] 땅’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나온다 - 잉걸).”
이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슬람 세계의 양탄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양탄자 제작 기술을 이어받아 그것을 이슬람식으로 새롭게 풀이하여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물론 나는 ‘우연의 일치’로 보지만) 페르시아의 관념으로 만든 양탄자가 이슬람교의 관념과 어느 정도 들어맞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숲과 정원을 그리워하는 관념을 담은 양탄자가 종교적인 낙원을 담은 양탄자로 탈바꿈한 것이다(나는 이 사실에 주목하느라 양탄자의 빛깔이나 그 무늬의 구체적인 모양이나 그 크기와 넓이와 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감히 다는 사족이지만 내가 전시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양탄자 가운데 테두리에 술이 달린 건 하나도 없었다. 왜 그걸 확인했냐고? 내가 열 살인가 열한 살 때 - 그러니까 24~25년 전 - 우리 집에 있던 벨기에산 양탄자는 술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양탄자에는 다 술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유물들을 보면서 ‘남의 것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자기 식대로 새롭게 바꾸고, 자기보다 뛰어나고 경쟁력이 있는 사람의 것도 받아들이고,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지 않고 남의 분야에서도 배워 그것을 자기 분야에 써먹었기 때문에 중세 이슬람 사회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문화의 개방이냐, 아니면 종속이냐? 담을 높게 쌓고 문을 걸어 잠가야 하는가, 아니면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면서 외래문화라는 손님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담을 헐고 문을 활짝 열어서 완전히 짓밟혀야 하나?”라는,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물음에 일종의 해답을 던져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이 유물들의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보다도 더 중요한 교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전시회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이슬람 세계의 옥(玉) 제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을 안겨주었다. 나는 2년 전 디스커버리 채널이라는 미국의 방송국이 만든 다큐멘터리에서 “서양인들은 옥을 ‘싸구려 돌’로 여긴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옥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과 중앙아메리카 원주민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천만뜻밖에도 무슬림들이 옥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옥은 아시아 지역에서 매우 사랑을 받아온 재료로,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이를 - 잉걸) 귀중히 여겼다.” 실제로 전시회에나온 서기 17 ~18세기(그러니까 3~4백 년 전) 바라트에서 만들어진 궁수용 반지(활의 줄을 당겨 화살을 쏠 때, 줄과 화살촉 때문에 손가락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이 반지를 끼었다 - 잉걸)가 옥과 산호로 만들어진 것이고, 역시 전시회에 나온 서기 14~15세기(6~7백 년 전) 사마르칸트에서 만든 옥으로 만든 잔/지팡이 손잡이/대접과 서기 17~18세기에 바라트의 데칸(바라트 반도의 중부와 동부 - 잉걸)에서 만든 똑같은 것들도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무슬림이 옥으로 만든 제품을 귀하게 여겼음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서(西)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발칸반도에 있는 나라인 알바니아나 보스니아는 이슬람 국가다 - 잉걸)에서 나온 옥 제품이 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옥을 좋아하는 경향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무슬림에게 한정된 것이고, 나머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옥이 푸대접을 받은 건 아닐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또 중앙아시아의 옥 제품이 남아시아(바라트 포함)의 옥 제품보다 300년 전에 만들어진 걸 보면, 원래 옥을 좋아하는 경향은 중앙아시아 출신 유목민이자 무슬림이었던 사람들의 기호였고, 그들이 남아시아 사회를 침략/점령하고 남아시아 사회에 뿌리내렸기 때문에(무굴 왕조도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튀르크족이 세웠다) 그 기호가 남아시아로 건너온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전시회에서는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기 때문에, 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냥 ‘재미있다.’고만 생각하고 큰 뜻을 부여하지 않은 전시물들도 많다.
예컨대 서기 17~18세기(그러니까 3~4백 년 전)에 만들어진 “이란의 물담배 보관병”이라는 도자기는 ‘무슬림들도 예전에는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것을 본 순간 ‘술은 말할 것도 없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엄격한 이슬람교가 떠올랐다. ‘같은 이슬람교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어떤 나라에서는 담배를 묵인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금지하니까. 하긴『꾸란』과『하디스』에 술 마시지 말라는 구절은 나와도 담배를 다룬 구절은 없고, 그러니 유럽을 거쳐 담배가 들어왔을 때 담배를 피운 무슬림이 많이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참고로 내가 16년 전에 본 이란 영화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는 이란인 노인 - 물론 무슬림임 - 이 손자에게 “담배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서기 12세기에 이란에서 만들어진 ‘숟가락 겸용 포크’(은으로 만들었음)는 위쪽에는 포크, 아래쪽에는 숟가락이 달려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밥을 먹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물과 서기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숟가락들은 ‘무슬림은 오른손으로만 음식을 먹고, 식기는 안 쓴다.’고 믿은 내 선입견을 조롱했으며, 서기 14~15세기, 그러니까 맘루크 왕조 시절에 미스르에서 만들어진 목제 덧문 또는 찬장문은 조선 궁궐의 문과 비슷하게 생겨 내게 ‘혹시 조선이 이슬람 세계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양식을 받아들였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라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물론 상상일 뿐이지 정설은 아니다!). 서기 8세기 중반 요르단에서 만들어진 건축 장식물(석재)은 “이슬람 성립 이전 고대 그리스(정식 국호 ‘헬라스’. ‘그리스’는 로마인이 헬라스를 무너뜨리고 붙인 이름이다 - 잉걸), 로마의 건축 장식물에 많이 표현되던 요소”인 “아칸서스 잎”을 조각해 넣어 중세 이슬람의 문화와 문명이 고대 서아시아와 남유럽의 그것을 많이 참고했음을 보여주었고, 서기 10세기에 이란 동부에서 수정으로 만든 병에 서기 16세기 에스파냐에서 도금한 은판을 부착한 것을 보고 ‘물건을 아껴 썼나 보네. 그러니까 무려 6백년 이상 이 병을 썼다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시회 첫 부분에 보란 듯이 전시된, 서기 9세기경 이란 동부와 이라크에서 쓰였던 체스 말들은 수정으로 만든 것이었으며(그래서 아주 투명하고 맑고 아무런 색이 없었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무늬가 베풀어져 있고 서양의 체스 말과는 달리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을 본뜨지 않았다. 또 유럽의 체스 말과는 달리 이슬람 세계의 체스 말에는 ‘코끼리’와 ‘전차’가 있는데, 이는 체스의 발상지인 바라트에서 건너온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설명문에 따르면 “『꾸란』은 노름을 못 하게 막지만 - 바둑이나 장기나 체스는 오래 전부터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노름으로 악용되었다 - 체스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 세계에서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단, 이 체스 말들은 내가 예전에 자료에서 본 적이 있는 아랍 세계의 체스 말들과는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이것이 이슬람 세계의 일반적인 체스 말인지 아닌지는 결론을 미루고자 한다.
이런저런 유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새로운 것을 찾아 돌아다니느라 전시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한마디로 나는 이 전시회에서, 나무와 돌과 꽃과 새 대신 미술품들로 가득 찬 ‘정원’에서 길을 잃고 헤맨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전시회의 출구로 갈 수 있었고, 그곳의 벽에 적힌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줄여서 ‘루미’. 중세 이란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의 말(“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연민과 사랑을 태양(이 빛과 열을 주는 것 - 잉걸)처럼 하라/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넓고 깊게 - 잉걸) 하라/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은 마치 전시회(와 그 전시회의 미술품들)가 내게 던지는 작별인사 같았다. 나는 그 말을 읽고 나서야 전시회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정신을 차리는 대에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전시회는 한국인에게 중세와 근세 이슬람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소개하겠다는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다만 ‘작은’ 불만이 있는데, 우선 설명문에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 오스만 제국의 각종 제도를 모방하여 국력 강화에 힘썼다.”는 말이 나오는데, 설명문만 읽은 사람은 사파비 왕조가 오스만 제국과 싸웠고, 오랫동안 대립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서아시아의 역사 -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오늘날의 서아시아 정세 - 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미술’을 소개한다면 중세시대와 근세시대에 이슬람 국가가 된 나라/민족들의 미술(예컨대 서아프리카의 나라인 말리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나 브루나이나 보스니아나 알바니아나 필리핀의 모로족)도 소개했어야 했는데, 알사바 왕실이 그렇게 하지 않아 매우 아쉽다. 부디 이 아쉬움을 나중에 열릴지도 모르는 다른 전시회에서는 풀 수 있기를 빈다.
끝으로 전시회에서 본, 옷에 수놓아진 중세(서기 12~13세기) 이란 무슬림의 노래를 설명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노래는 중세 이란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었기 때문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
언제까지 내가 연인을 생각하며 슬퍼해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생명의 물’을 꿈꿔야만 하는가?
오, 지혜의 바퀴여, 바미얀(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속한 지역 - 잉걸)으로 나를 돌려보내주오.
언제까지 나는 동반자 없이 슬퍼해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내 사랑을 숨겨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이 심장이 아파하고 슬퍼해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당신의 종이 이별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당신과 나의 넋이 무관심하게 지내며,
내가 부서진 심장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하는가?
나의 괴로움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가네.
당신이 엄격한 사람이라면 나는 크게 질책을 받아야 하네.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네.
신(神)이시여, 바라옵건데 저를 용서하소서. 오 신이시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이 보고 싶어 잠들 수 없네.
무엇을 진정해야 하는가? 나의 입술은 걱정으로 봉해졌네.
나는 당신에 대한 갈망으로 미쳐가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런 괴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네.
(역설적으로 - 박물관의 주석) 잘 되었네! 당신의 얼굴은 수백 명의 넋에 안식을 주네.
말 없는 당신의 입 속에서 설탕은 소금으로 바뀌었네.
수천 개의 비책(秘策. 숨겨진 계책 - 잉걸)으로 가득 찼던 이 마음은
다시 슬픔으로 넘쳐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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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제가 자주 해외에 있습니다. 주로 중동국가 이지요..그래서 더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좀 색다른건 아직도 그들은 오른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물어보니 꾸란에 적혀 있다고 그들이 얘기했는데...아닌가요...
지금 PC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요, 답변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열다섯 해 전에 읽은, 바라트(인도)를 다룬 책에 따르면, 남(南)아시아 사람들도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비누와 물로 깨끗하게 씻은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게 안전하고 깨끗한 방법이야.'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내 "오른손"은 내 몸에 달려 있고, 내가 씻는 걸 직접 내 눈으로 보니까, 깨끗하고 안전하고 믿을 수 있어. 게다가 내 "오른손"은 음식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하고 생각하지요. 오히려 그들은 '누가 먹었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여러 번 쓴 물건'인 식기
(위 글에 이어서), 그러니까 숟가락이나 젓가락이나 포크로 음식을 먹는 건 '더러운 일'이라고 여깁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서(西)아시아("중동[中東]"이라는 말은 '[유럽에서 보았을 때] 가운데에 있는 "동양"'이라는 뜻인데, 이건 유럽에서만 통하는 이름이지, 다른 곳에서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서쪽에 있는 아시아'라는 뜻인 '서西아시아'라는 말을 쓰셔야 합니다)나 북아프리카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이유로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화장실에서) 밑 닦는 데 쓰는 손'인 왼손과, '밥 먹을 때 쓰는 손'인 오른손은 철저하게 구분해요. 그래서 그들은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게 안전하다고
(이 글의 바로 위 글에 이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부디 이 답변이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
그리고 잉걸님..전에 제가 부탁드린거 백제의 성씨에 대한 답변은...꾸벅 죄송합니다.
저한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제가 사과해야죠. 써 놓은 건 있는데,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요. 서두르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백제" 임금의 "성씨"를 다룬 글을 썼습니다. 집안 식구들 몰래 써야 하는지라(제가 여섯 해 동안 실업자로 살다 보니, 집안 어른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돈'과 '밥'을 벌어다주지 않는 일[예를 들면 이 카페에서 회원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글을 쓰는 일]은 허락하지 않고 비난하시거든요. 한 달 전에도 이 카페를 그만 둔 게 맞느냐며, 제가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벌어야지, 다른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시는데, 제가 뭐라고 할까요?) 그 글도 부모님이 잠시 집을 비우신 때를 틈타서 썼죠. 지금 문주왕과 삼근왕의 성씨를 다룬 부분까지 썼는데, 첫 임금인 비류왕(沸流王)과 온조왕의 성씨를 다룬 대목까지 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댓글도 눈치를 봐 가면서 몰래몰래 쓰고 있는 겁니다!) 저를 원망하시는 마음은 알고, 저에게 재촉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제 처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해서 댓글을 남깁니다(저는 인간세계에서 살고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고, 그래야 눈치를 안 보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죠. 전 이슬 먹고 구름을 싸는 신선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가신 뒤, 다시 시간을 내서, 방금 전까지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의 성씨를 고증하는 대목을 썼습니다(그나마 그것도 다 쓴 게 아니고, 이제 저는 잠을 자러 가야 합니다). 비류왕/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가 남았는데, 언제 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