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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추적 어느 날 대사부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는 준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탐색대가 필요한데 누구 자원할 사람 있느냐?] [제가 해보겠습니다, 사부님!] 사이훙이 재빨리 지원하였다. [사실은 내가 사로잡아야 할 놈이 하나 있단다. 그런데 너를 보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무술 원정이면 훨씬 좋겠는데요!] 사이훙은 열에 들떠 말을 이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아홉 번이나 용서했던 자이다. 그렇지만 그놈을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구나. 실은 나도 강제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단다. 성주가 직접 나 를 찾아와서 내가 그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화산에 있는 도관 이란 도관은 전부 파헤쳐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단다.] 대사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이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자에게는 비천지주()라는 명칭이 붙어 있단다.] 사이훙은 순간 지난번 여행중에 엿들었던 건달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자는 최근에 정부의 황금 수송 호위대를 강탈하고 많은 경비원을 살 해했지. 이 지붕 저 지붕으로 또, 담을 넘어 날아다닐 수 있는 곡예사 같 은 기술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야. 두 개의 단도로 싸우면서 <응조권법( )>을 구사하는 무사지.> 사이훙은 사부의 말씀을 모아 머릿속에 도표를 그려 보았다. 그는 사냥 감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악명 높은 난봉꾼이란다. 뚜쟁이인데다가, 마약 밀매꾼, 녹원회 ()의 일원이다. 사실 성주가 그자를 쫓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말 하자면 이 난봉꾼이 그의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베이징에 있는데 신문의 지면들이 그에 관한 기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매주 그의 범죄 행각이 뉴스 거리가 되어 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왜 그런 자에게 관심을 쏟으십니까?] 사이훙은 공손히 물었다. 대사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대한 결단을 앞둔 듯 사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을 어릴 때부터 키웠다. 그는 바로 너의 사형인 후디에란 다.] 사이훙은 엄숙해졌다. [네 개인적 감정을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겠느냐? 성주 조차도 사적인 감정으로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대사부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네, 사부님. 그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과 우리 분파를 배반했으니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겠습니다.] [젊은이다운 말이로구나.]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부님.] [그렇다면 떠나거라. 내일 감시 업무를 맡고 있는 우잉과 우콴과 함께 떠나거라. 너는 후디에를 쫓아가서 신속히 그를 데려오너라.] [하지만 사부님, 진엔니아오는 어떻게 할까요?] 사이훙이 질문했다. [그 일은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 너는 어서 네 사형을 데려오너라. 빨 리 가거라. 더 이상 묻지 말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못되어 사이훙, 우잉, 우콴은 서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이훙은 부유한 무술가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떠 났다. 목깃이 달린 아름다운 문양의 비단옷을 입고, 양끝에 수를 놓은 검 은색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고, 검은색의 천의 신발을 신었다. 허리 띠에 매달려있는 값비싼 둥근 옥은 그가 귀족계급 출신임을 상징해 주었 다. 사이훙은 긴 머리를 한 줄로 따서 늘어뜨렸다. 변발은 중화민국에서 는 불법이었다. 그래서 사이훙은 긴 변발을 몸에 지닌 다른 무기처럼 옷 속으로 숨겨야 했다. 사이훙은 화산을 떠날 때마다 북부 산시성에 있는 관가보()에 들 렀다.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는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는 했지만 가족 들은 귀가할 때마다 항상 그를 반겨주었다. 사이훙 소유의 방들과 개인 서재가 저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관에서는 금지 사항이지만 특별히 주문 제작된 사이훙의 무기들이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분은 가난한 도교 수행자가 아닌 부자에다 귀족, 협객으로 상승하였다. 사이훙의 가문은 바로 <전쟁의 신>의 후손이었기에 그에게는 막대한 재산 이 떨어졌다. 집에서 그는 비단옷을 걸치고, 옥으로 만든 갖가지 장식품 으로 쓰면서 황금으로 비용을 조달하고, 강철로 무장하고 낭만적인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사이훙은 이곳에선 강철 사자가 되었다. 사이훙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우잉과 우콴 형제를 바라보았다. 둘다 40대인 그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도교에 입문하기 위해 화산에 왔었다. 두 사람은 무뚝뚝한 성격에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거구이고 신분 또한 비 천했다. 사이훙은 저들은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는 살아오다가 언제부터인가 서글픈 이름들을 얻게 되었고 도관에 와서도 그 이름을 떼어 버릴 수가 없었다. 우잉은 <쓸모 없는>이 란 뜻이고, 우콴은 <무력한>이란 뜻이었다. 형인 우잉은 머리 생김새가 마치 늙은 참외 같았다. 피부는 어린 시절 앓은 병때문에 몹시 거칠었다. 때때로 눈가가 팽팽하게 긴장할 대는 시름 에 잠긴 듯 우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몸은 아주 단단한 근육질 이었으며 어깨는 황소처럼 딱 벌어져 있었다. 우콴은 형보다 훨씬 더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 얼굴은 청동 가면처럼 보였고, 두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가늘고 그 늘이 져 있었다. 호전적인 성격을 그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호전성을 지울 만한 자비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갈색과 회색의 옷은 그 거구를 가려 주기에는 턱없이 모 자랐다. 이들 형제의 관계는 아주 거칠고 냉담하였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맺은 무언의 동맹이요, 생과 사를 함께 해온 사나이들의 연합이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슬픈 눈의 우잉을 미신적으로 만들었다. 우콴은 형과 는 달리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좀체 서로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고용된 전사였다. 사이훙은 대사부가 모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대사부는 발빠른 자를 쫓도록 두 명의 무시무 시한 킬러를 보낸 것이다. 그들은 밤낮을 기차 속에서 보내며 시달렸다. 딱딱한 의자, 계속되는 기차의 흔들림, 기차 바퀴가 선로에 부딪쳐 나는 듣기 싫은 쇳소리, 여행 객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를 견뎌내야 했다. 기차역마다 으깨어질 듯 가득 찬 사람들의 냄새,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 고통스럽게 비틀어대는 몸뚱어 리들과 온갖 짐들로 좁은 기차 안이 빽빽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서로 밀고 찔렀다. 차창 밖으로 몸을 내놓고 덜덜거리는 기차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세 명의 전사들만 은 피해 다녔다. 그들은 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이어 귀족임을 상징 하는 사이훙의 기장을 본 뒤 싸놓은 칼에서 시선을 멈췄다. 청 왕조가 무 너진 지 거의 20년이 다 되었건만, 상류층 귀족과 전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옛 격언을 알고 있었다. <검객은 죽이기 위해 칼을 지니고 다닐 뿐이다. 칼 은 피 맛을 보지 않고는 다시 칼집에 꽂히지 않는다.>라는. 사이훙 일행은 베이징 - 상하이 열차편으로 갈아탔다. 기차를 갈아 타 는 역은 선로 여기저기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는 불결하고 번잡한 곳이었 다. 사이훙은 증기기관차를 타게 되어 무척 기뻤다. 란 남자가 태연히 철 로를 따라 걸어가서는 망치로 기차 바퀴를 탕탕 두드리는 것을 본 사이훙 은 은근히 적정이 되었다. 아무렇게나 두드려대는 것처럼 보이는 망치질 이 새로운 발명품을 더욱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 것만 같았다. 우콴은 연결봉들이 제자리에 다시 들어맞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사이훙에게 설명 해 주었다. 그들이 탄 기차는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몇 시간 뒤 기차는 일본 점령 지역을 통과했다. 후디에의 갱단이 전쟁 지역에서 활약하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기가 더욱 힘들 것 같았다. 사이훙 일행은 그의 일당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본 순찰대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사이훙이 탄 기차는 선로 위를 흔들거리며 진흙 벽돌로 지은 집, 농장 과 과수원, 마을을 지나쳐갔다. 그러나 사이훙은 오래된 포탄 구멍, 전혀 복구가 안 된 채 내버려진 마을, 먹이가 될 만한 시체를 찾아 헤매는 피 둥피둥 살이 오른 개들도 보았다. 어느덧 전쟁은 중국과 일본 모두의 진을 빼놓는 소모전으로 굳어졌다. 전투 지역은 일본군 행정병, 중국의 관료, 병사, 게릴라와 갱원의 잔류자 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전투는 우울한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일본 점령군은 중국의 갱단, 기회주의자들과 자유롭게 거래를 트고 지냈다. 아 편과 헤로인은 주요 상품이 되었고 수천 파운드의 마약은 양측 모두를 부 자로 만들어 주었다. 황하에서 해안까지 죽음과 잔혹함, 마약 거래, 서투 른 군국주의가 초현실적으로 뒤섞여 난무하고 있었다. 영웅주의는 오래 전에 실종되고, 불한당들이 활개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오후가 되어서 사이훙 일행은 산둥성()의 취푸()로 가는 역 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하늘은 짙은 회색과 자주색 물을 먹인 듯 몹시 어두웠다. 한 차례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공기는 여 전히 후끈했다. 잠시 후 비가 그쳤다. 그러나 벌써 도로는 황토빛 진흙탕 이 되어 있었다. 취푸까지는 아직 15킬로나 더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곳 이 공자의 탄생지이며 그의 무덤이 모셔진 곳이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을 추모하는 심정으로 철도를 연장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사이훙은 생각했다. 세 사람은 지나가는 농부의 마차를 세워 올라탔다. 그들은 돌로 만든 아치 아래를 지나갔다. 그것은 오래된 망루였다. 부 서진 거리와 좁은 골목길을 지나 대사부가 일러준 주소지를 찾아갔다. 그 곳은 자극성 강한 약초 향기가 물씬 풍기는 한약방이었다. 주인은 50대의 땅딸막한 남자였다. 대머리에다 안경을 썼지만, 열정적이고 힘이 세어 보 였다. 그는 계산대 뒤에서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뭘 사고 싶으신지요?] 한약방 주인이 물었다. 처음 오는 손님들이라는 사실을 안 듯 주인은 한약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의 뒤로는 한약재를 담는 수백 개의 작은 서랍들로 들어 찬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높이가 마룻바닥에서 천장까지 이른 서랍장에 는 약재를 분류하는 라벨은 없었지만, 그는 어느 서랍에 어떤 한약이 들 어 있는지 하나하나 알고 있었다. 건너편 진열장에는 인삼, 호랑이 뼈, 코뿔소 가죽, 영지버섯, 사슴뿔, 말린 도마뱀, 염소 앞다리와 곰, 사슴, 강치의 말린 장기들이 전시돼 있 었다. 그 옆으로 중년의 두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거기 있 다는 것 자체는 의심을 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약재상에는 종종 친구들 이 찾아와서 한나절씩 떠들어댔다. 그러나 왠지 이 두 사람은 분위기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소개장을 들고 왔습니다.] 사이훙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한약상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 대답했다. 사이훙이 편지를 내밀었다. 주인은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당신들의 사부님은 지위가 아주 높으시군요. 댁 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뒤 주인이 말했다. 다음 날 사이훙은 다시 찾아가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약상은 요구 사항을 논의했고 동의를 얻어냈다. 이틀 후 평의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사이훙 일행은 <무술계의 원로들>을 배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에는 두 개의 거대한 암흑 세계가 있었다. 지하 범죄 조직과 무술 가들의 세계인 무림()이 그것이었다. 선의로든 악의로든 간에 그들은 스스로 무사의 명예와 원칙에 매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로 평의회 와 왕에게 복종하고 자신들의 법에 따라 스스로 치안을 유지해 나갔다. 특히 범법 행위를 저지른 무술가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라고 여겼다. 충성에 보답하고, 배반자에게 벌을 내리고, 자 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관대하게 도와주는 것이 이들의 독특한 정서였다. 범죄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무림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제 2의 암흑 세계로 빠져 들었다. 제 2의 암흑 세 게는 녹원회(), 홍건단(), 삼지창회(), 백련교( )등과 같은 비밀 조직의 통제를 받았다. 이 같은 갱 조직의 상당수는 사부, 도관, 제자나 명예의 전통 중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순전히 건달패들이었다. 탐욕적인 아첨꾼이며 오로지 학자와 부자를 울리 는 폭력의 배후 조정자들이었다. 홍건단 같은 대다수의 비밀 조직들은 처음에는 청 왕조를 타도하는 데 몸을 바친 반만주()계의 애국주의 단체로서 출발했었다. 하지만 수 년 동안에 걸쳐 지하세계는 아편, 헤로인, 매춘, 도박, 금품 강탈 및 암 살과 정치적 조종 등의 일에 더욱 깊게 관여했다. 이들 양대 암흑계는 중국 전역에 걸쳐 십자망의 연결 조직을 구축하였 다. 그리고 중국 동포들이 있는 세계의 전지역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다. 사이훙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두 암흑 조직은 없어서는 안 되 는 필수 조직이었다. 지금 사이훙이 무술계와 함께 일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만이 사이훙이 후디에를 잡을 때까지 화산에 관용을 베풀어 주겠다는 보장을 해줄 수 있었다. 무술계는 지역마다 대표 원로와 원로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모든 무 술가는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원로들은 분쟁을 해결 하고 결투를 허가하고 집단 활동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사의 규정 을 어긴 자들은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사이훙 일행이 청원을 넣기 위해 간 곳이 바로 이 평의회였다. 회의는 무덥고 습기 찬 오후에 어느 개인 저택에서 열렸다. 저택에는 안뜰과 정원, 흐르는 시냇물과 웅장한 정자가 있었다. 어두운 홀 내부에 극장처럼 열을 맞춰 좌석이 마련되었다. 무술계의 다양한 회원들이 좌석 에 앉았다. 기둥으로 떠받쳐진 홀 앞에는 10명의 원로들이 앉는 둥근 탁자가 놓였 다. 두 명을 제외한 원로들은 긴 중국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중국 의상 을 입지 않은 두 사람 중의 하나는 하얗게 센 머리에 국민당 군대의 짙은 황록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불교의 법복을 입은 50대 남 자였다. 한데 모인 열 명의 원로는 무술계뿐 아니라, 종교와 정부를 대표 하였다. 무술계는 모든 권력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불교 승려가 무술계 의 총대표였다. 그의 법명은 준치()로, <순수한 정신>이란 의미를 지 니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주름이 잡혀 쪼글거리고 눈은 약간 튀어나왔지 만, 깨끗하게 삭발한 머리는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준치 법사의 수염은 염소 수염처럼 짧고 숱이 적었지만, 어깨는 한 때 벌어졌던 흔적이 엿보였다. 녹회색 법복 위로는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처 럼 금색 문양이 있는 짙은 갈색 가사가 가슴과 어깨 너머로 비스듬히 내 려와 있었다. 법사는 목에 108염주를 걸고 있었는데 찬란한 제왕의 옥이 36개 염주알마다 하나씩 끼여 있었다. 손가락에는 작은 염주알 하나가 끼 여 있었다. 법사가 개회를 선언했다. [화산에서 온 세 명의 도사를 소개합니다. 앞으로 나오시오.] 그들은 일어나 탁자 가까이 걸어갔다. 몇몇 원로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그저 무관심하게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말하시오.] [저는 화산의 호접 도인으로 대사부의 제자입니다.] 사이훙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여러 원로분들이 산시성()성주의 청을 거두어 주십사 탄원 하러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 저의 사형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즉각 그를 넘겨 주지 않는다면 성주는 화산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 도록 군에 명령할 것입니다.] 준치 법사는 국민당의 장교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조롱하는 듯한 미 소를 흘리며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은 바라보았다. 왜 하필 여자 문제 따위 의 시시한 문제냐는 기색이었다. 사이훙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의 사부님의 의견으로는 이 일은 화산이 풀어야 할 내부 문제입니 다. 우리는 무림의 범위 내에서 이 문제를 풀겠습니다. 원로 여러분이 우 리를 위해 중재해 주십시오.] 법사는 탁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고개 를 끄덕이거나 손짓을 할 뿐이었다. 사이훙은 한 사람이 고개를 젓는 것 을 보았다. 나머지는 찬성이었다. 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세 분에게 꼭 100일을 허락하겠소. 그 후에는 여러분을 보호해 줄 수 없소이다.] [원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이훙은 절을 올리며 말했다. 회의장을 나선 사이훙 일행은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급히 여관으로 돌 아왔다. 사이훙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원로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해 법을 집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의 장교는 정부에 정식으로 명령을 하달할 것이고, 기업가들은 후디에의 조직에 대한 돈과 물품의 지급을 보 류할 것이다. 사이훙은 화산이 100일 동안 군대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사부가 진엔니아오와 대항해서도 버 텨낼 수 있기를 기원했다. 세 사람을 태운 기차는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 구었다. 건조해진 밭에서는 흙이 떨어져 나가 곳곳에 땅이 패어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전쟁과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땅에 대한 애착을 버리 지 못하고 진흙덩이로부터 옥수수, 밀, 기장, 감자 따위를 긁어 모으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땀 흘려 일했다. 허리를 굽힌 채, 다리를 절뚝거 리며 농부들은 푹푹 열이 오르는 땅에 모을 수 있는 물을 모두 모아 군데 군데 뿌렸다. 그들은 사막의 거친 돌풍이 뿜어내는 강한 모래 먼지까지 견뎌내야 했다. 왕조가 바뀌고, 몇 세대가 지나고, 수없이 해가 지나갔지만, 베이징은 원래 선택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매우 이상적 인 땅이며 세계의 중심지인 베이징의 실제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뜨거운 황토의 먼지 구름이 마치 대군이 몰려오듯 시내 전역에 온통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태양은 대기를 바싹 건조시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입술 사이와 눈가에는 빠른 속도로 왕모래가 쌓였다. 나무, 양곡, 짐을 싣는 동물과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베이징의 건조한 기후에 쇠약해지고 시들해졌다. 중국 문명의 중추를 확립하기 위해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했 던 연()의 창건자들이 이용했던 비법은 사라져 버렸다. 사이훙은 수세 기에 걸쳐 이 도시를 약탈하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대평원을 누비고 다녔던 수많은 군대들을 생각했다. 행진하는 군대의 발길에 짓밟 히고, 말발굽에 채고 으깨어지는 모습이 중국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 눈앞 에 펼쳐졌다. 북쪽에서 쳐들어온 오랑캐,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 지구 저쪽에서 횡단해 온 유럽 군대 그리고 대양을 건너온 일본의 침략자 들은 자금성()의 주홍색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썼다. 기차의 종착역은 옛 도시의 성벽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도심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장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좋았 다. 군중을 이용해 일본군의 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항상 감시 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는 암흑가의 첩자들로부터 모습을 감출 수 있었 다. 그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한 거리를 헤쳐 나갔다. 비만 한번 좍 쏘다져도, 지진만 일어나도 땅속으로 함몰될 것 같이 보이는 진흙과 벽돌 로 지어진 집들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이훙은 마치 미로 속에 빠져든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자금성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옛 사람들은 땅 에서 멀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낮은 건축물과 포장되지 않은 좁은 길들이 마구 뻗어 있었다. 낮고 초라한 담장은 베이징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가옥과 건물에는 담이 둘러처져 있었다. 벽돌을 쌓고 틈새에 황색 모래와 석탄 가루를 발라 만든 담장들이었다. 어떤 담장은 회 반죽과 벽돌은 불 규칙하게 조각조각 덧대어 만든 것이었다. 창에는 대개 반투명 종이를 발 라 붙이거나 먼지가 잔뜩 껴서 건물 내부를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화창 한 햇살도 음침한 담장에는 생동감을 불어 넣지 못했다. 옴이 올라 상처 투성이인 개들이 통로를 기웃거리며 다니다 쓰레기 더 미에 코를 쑤셔 박았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오줌을 휘갈겨 담벽은 더럽 기 짝이 없었다. 깨진 기와들이 쌓여 있는 먼지 구덩이에서 잡초와 풀이 자라나 담장을 덮었다. 문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따금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석탄처럼 시커먼 방이 들여다 보였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서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일이든 감춰질 수 있었다. 십중팔구 그 안에서는 굶주린 가족들이 비좁고 불결한 칸막이 속에서 갇혀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이 작고 야트막한 담들이 도시의 기초를 형성한다면, 시 전체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나라 최초의 황제가 나라 전체에 성벽을 쌓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허황하게 들리지 않았다. 고대의 성벽은 여전히 이 도시에 서 있다. 각을 이룬 높은 벽돌 담의 꼭대기는 벌어진 이빨처럼 없어진 벽돌이 만든 틈이 여러 개 있었 다. 고대의 성벽은 근접을 불허하는 당당한 자태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어 원래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역사와 흘러간 시간을 성벽에 음각이라도 하려는 듯 1900년 동맹군의 기습 공격에 포화를 맞아 벌어진 구멍들이 미 복구 상태로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성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여행객들은 시 치안 판사에게 신고 해야 했다. 여행객들은 붉은 기둥의 벽돌 건물로 직행했다. 연단이 마련 된 텅 빈 접대실에는 무거운 자단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2마리 학의 벽화는 방에 완벽한 균형미를 주었다. 높은 자리에 놓인 빨간 북은 문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노란색의 팽팽 한 북가죽 중앙에 커다란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사이훙은 막대를 집어 들고 큰소리가 나게 북을 쳤다. 이렇게 하면 치안 판사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황록색의 서양식 제복을 입고 총을 멘 군인들이 방 끝의 문 입구에서 줄지어 나왔다. 그들은 묵묵히 걸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군인들이 돌아서 서 서로 마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청색 옷을 입은 수행원이 나왔다. 수 행원은 작은 안경을 끼고 염소처럼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베이징의 치안 판사님!] 수행원의 말에 사이훙과 그의 동행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돌바닥은 딱 딱하고 차가웠다. 치안 판사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입장했다. 땅딸막하 고 드세고 근엄한 표정을 한 판사는 검은색 비단옷과 조끼를 입고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는 등뼈를 수직 각도에 맞춰 꼿꼿한 자세로 자리 에 앉았다. 그의 불그레한 얼굴은 곰을 연상시켰다. 수염은 솔처럼 뻣뻣 해 보였고, 둥근 눈은 무겁게 눈꺼풀이 내려와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느낌 을 주었다. 사이훙, 우잉과 우콴은 3번 모두 고두하며 예의를 다했다. [요구 사항을 말해 보시오.] 수행원이 지시했다. [우리는 이 도시에 들어와 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를 요청합니다.] 사이훙은 말하면서 바닥을 쳐다보았다. 치안 판사를 마주보는 것은 무 례한 짓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류는?] 수행원이 오만하게 물었다. 사이훙은 머리 위로 올려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는 계속 아래를 보았 다. 수행원이 계단을 내려와서 그들을 치안 판사에게 데려갔다. 치안 판 사는 사이훙의 통행증을 펴 보았다. 좁고 가는 주름이 잡힌 긴 종이가 두 장의 딱딱한 종이 사이에 묶여 있었다. 한쪽에 사이훙의 주소, 서명과 함 께 타원형 사진이 있었고 그의 여행 목적을 알리는 화산의 대사부가 서명 한 글이 있었다. 끝에는 엄청나게 큰 화산의 봉인이 대사부의 봉인과 함 께 찍혀 있었다. 통행증 외에도, 여행중에 관청에 등록하기 위한 등록 명 부들이 있었다. 치안 판사는 이상야릇한 불만을 나타냈다. 수행원과 경비원들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다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의사 소통을 했다. 치안 판 사는 자신에게 간청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나 아랫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이 거의 없었다. 치안 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붓을 잡았다. 수행 원을 알랑대며 백옥문진을 통행증에 힘있게 놓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 인 5개의 잉크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치안 판사가 무엇을 쓰든 그것은 별 로 중요하지 않았다. 잉크의 색깔이 그의 명령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 다. 검은색은 승낙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녹색은 승낙한다는 뜻이었다. 청색 은 그 문제를 고려해 보겠다는 뜻이다. 흰색은 그 요청은 중요하지 않으 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며, 빨간색의 증서의 수속이 완료되었다 는 의미이다. 사이훙은 근심스럽게 잉크병 위로 움직이는 붓끝을 주시했 다. 다행히도, 붓끝은 녹색 잉크로 떨어졌다. 수행원은 뭐가 그리 못마땅 한지 통행증들위에 봉인을 찍는 동안 뿌루퉁해 있었다. 치안 판사는 수행원을 손짓으로 불러 뭔가를 속삭였다. 치안 판사는 몹 시 화가 난 듯 책상을 손바닥으로 쳐가며 수행원에게 뭐라고 해댔다. 수 행원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애처롭게 대답했다. 잔뜩 겁을 먹은 수행원이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안판사님께서는 당신들의 사부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수행원의 목소리에는 사부의 명령에 대한 비겁한 복종과 야릇한 혐오감 이 함께 담겨 있었다. [판사님은 더할 나위 없이 당신들의 추적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 시오.] 치안 판사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구성원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고 군인들은 줄을 서서 나갔다. 단 한 명만이 뒤에 남아 사이 훙 일행에게 통행증들을 돌려주었다. 그들은 찻집으로 갔다. 비싼 차값을 내고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수많은 벽돌집과 안개 사이로 붉은 성벽과 금색 기와를 얹은 자금성의 윤곽이 보였다. 공 기는 숨막힐 듯이 무더웠다. 하지만 백단향의 격자 무늬 창문들에서 향긋 한 내음이 풍겨 나왔다. 급사가 급히 올라와서 무슨 차를 들겠냐고 묻고 주문을 받아갔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이훙은 어떻게 형을 찾아야 할까 궁리를 했다. 그들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와 있었다. 찻집은 일반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새벽부터 늦은 밤시간까지 문을 여는 찻집에서 사람들 은 사교모임을 갖고 시간을 보냈다. 차와 음식은 계속 내올 수 있었다. 더 환상적인 곳에서는 어여쁜 여성 음악가들이나 떠돌이 이야기꾼들이 여 흥을 북돋워 주었다. 손님들은 중국 일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맹목적으로 차에 열광하는 학자, 결혼을 주선하는 중매인, 손님을 대접한 다면서 거북스러워하는 친척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학생들, 은퇴해서 여생을 느긋하게 지내는 노신사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무사들은 보통 손님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 중에는 거의 돌연변이에 가까운 거인들도 있었다. 어떤 무사들은 옷을 보고 만주에서 왔는지 산둥 에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든 벌떡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은 발을 넓게 벌리고 자리 위에 힘있게 앉았다. 무기는 숨겨 놓지 않는 게 예의였 다. 칼, 부채, 단도, 곤봉과 같은 길이가 짧은 무기들은 테이블 위에 올 려놓았다. 쇠몽둥이, 창, 봉처럼 큰 무기들은 테이블에 기대어 놓았다. 무사들은 바야흐로 멸종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청 왕조가 복귀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무사들 이 일본군을 상대로 그 얼마나 멋진 활약을 해왔는가. 무사도와 작위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무사의 막강하고 독특한 전형들은 아직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이훙은 바로 그런 무사로 늙어 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우잉은 옛 친구를 만나 그의 테이블로 갔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야 윈 남자가 손이 쉽게 닿는 곳에 날이 넓은 칼을 놓고서 우잉을 열렬히 환 영했다. 대화를 좀 나누더니 그들 사이에서 은화가 오고 갔다. 그 마른 남자는 우잉이 자리로 돌아올 때는 더욱 노골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 다. [나는 뇌물을 싫어해.] 사이훙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정보 제공자에게 준 차값 정도로 생각하면 돼.] 우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그를 만난 건 행운이야. 괜찮은 정보를 얻었거든.] [무슨 정보인데?] 우콴이 물었다. [후디에는 30대 초반의 부유한 애인과 살고 있대. 그 여자는 암호랑이 란 뜻의 핀후()란 이름을 가진 가공할 만한 무사라는 거야. 손가락이 꼭 강철 못처럼 몸을 꿰뚫어 버린다지. 그녀의 아버지는 소림의 무사였 고, 핀후의 동생은 10살 짜리 소년이래. 핀후가 손위여서 아버지는 자신 의 무술을 주저하지 않고 딸에게 먼저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핀후는 아버 지부터 거의 모든 걸 배웠다고 하더군. 그리고 후디에가 그녀의 무술 기 법을 더 키워 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동생은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무술을 제대로 못 배웠나 봐.] [그 여자 집으로 가지.] 우콴이 성급히 말했다. [그렇게 빨리는 안 돼.] 사이훙이 우콴을 말렸다. [우리는 더 많이 알아내야 해. 남자보다 무서운 여자 무사도 많이 있으 니까.] [맞아. 내일 우리가 검시관의 사무실로 가는 이유도 바로 그거야.] 우잉이 동의했다. 세 사람은 그날 유명한 백운관()에서 밤을 보냈다. 백운관은 도 교에 있어서 매우 성스러운 사원이었다. 백운관은 드넓은 자리에 정확히 남북을 축으로 지어져 있었다. 백운관은 당나라 순종()에 의해 그 자 리에 처음 세워졌다. 1202년 도관이 불탄 후, 몽고의 징기스칸이 도교의 현인 치우 창춘()을 초빙하여 도관을 재건했다. 백운관은 명과 청 왕조에 이르러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교리면에서 전적으로 은둔 적 도교를 지지해 온 백운관은 장문인들의 전국적인 대집회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중국의 모든 도교 수행자와 도사의 법명은 수임식이 끝나기에 앞서 이 도관의 기록부에 먼저 올려졌다. 도관의 정문은 잿빛 기와 지붕이 얹어져 있었고, 문에는 금색과 붉은 색, 청색을 많이 써 매우 화려했다. 대리석 기둥과 철문 뒤에 넓은 뜰이 있고 세 개의 아치 길과 심홍색의 벽돌 대문이 있었다. 화강암으로 된 수 호 사자들과 구름 기둥들이 바깥 세계와의 경계를 지어 주었다. 도관 전 체는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안쪽의 대문은 산문()이라고 불렸 다. 산문에 들어섰다는 건 속세를 떠나 정화된 성지로 들어 왔다는 의미 를 포함했다. 주요 사당들은 양 측면에 있는 보다 덜 중요한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중심선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백운관의 중심축에는 도교의 수호신을 모 신 영관전(), 옥황전(), 치우 창춘 조사를 모신 구조전( ), 사어전(), 노율당(), 삼청각(), 운집산방( )등이 들어서 있었다. 동쪽 축에는 양진당(), 수진당(),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모신 두부궁(), 진무전()과 화타를 모 신 화조전() 그리고 오조전()이 있었다. 서쪽 경내에는 여동 빈을 모신 여조전(), 여덟 신선을 모신 팔선전(), 도교의 여 신들인 낭랑신()들을 모신 원군전() 그리고 북과 종을 치는 고루()와 종루()도 있었다. 사원 곳곳에 백운관의 후원자였던 제 왕들의 찬사와 경구가 기록돼 있었다. 도인들은 평신도들에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전하려고 실제 대상물의 단순한 은유를 이용했다. 탁 트인 아름다운 정원과 도시와 떨어진 적막한 도관의 위치가 신도들에게 엄숙한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봉래의 교설은 사원 뒤의 바위, 정원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신의 세속적 권능은 음양의 상징을 부여받음으로써 현시되었다. 즉, 신의 손에 전 우주를 담는 그림 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도관은 종교를 위한 정교한 극장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백운관은 감 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혼의 울림을 주었다. 여러 세대에 걸 쳐 성인들은 백운관에서 깨달음에 도달했다. 사이훙 같은 사람에게 사원 은 혼란스런 도시를 떠나 새로운 기분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 었다. 차가운 여조전에 들어서자 사이훙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사이훙은 여동빈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먼지 나는 평신도복을 입 은 채 사이훙은 무사와 도교 수행자 사이에 나란히 앉아 안식을 찾았다. 그는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기도를 할까? 기도를 올릴 자격이 있을까? 승리를 위해? 아니면 앞으로 그가 저질러야 할지도 모를 살인에 대한 용 서를 구하기 위해? 사이훙은 찻집에서 봤던 사람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는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 못내 처량하게 생각되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참다운 본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이훙은 어머니가 바라던 학자 고, 아버지가 원하던 군인도, 사부의 시자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 은 확실성뿐이었다. 영혼의 진실이 제시하는 확실성, 무술의 확실성, 고 결한 미래의 확실성이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지금 불확실성과 맞닥뜨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사들은 현대 앞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고 사이훙은 어차피 자신은 무 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영혼의 진리 또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이훙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전자 모두가 그보다 힘이 더 셀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 될지 몰랐다. 사이훙은 수백만이 사는 나라에서 사형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를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이훙 은 자신이 과연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을지 의아해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의혹에 저주를 퍼부었다. 신념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무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불확실성은 약점이다. 그는 앞으로 있을 싸움을 위해 자신의 심약함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추적에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 해 자신을 더 깊이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사이훙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임시 시체 안치소로 갔다. 그곳은 음산한 벽돌 건물이었다. 검시관에게 서류를 보여 주고 이틀 전 들어온 시체를 보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검시관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마와 두 눈은 흐리멍덩한 반면 입술은 아주 신랄한 풍자를 터뜨릴 듯한 미소를 흘 리고 있었다. 검시관은 쾌활했다. 또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 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사이훙 일행의 관심이 합법적임을 확인 한 뒤 검시관은 그의 최대 업적을 자랑한다는 흥분에 휩싸여 그들을 복도 아래로 안내했다. 검시관은 긴장보다는 기대감으로 들떠서 가죽처럼 질긴 두 손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검시관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했다. 포름알데히드 냄새와 해부 된 창자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사이훙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계단은 둥근 천장을 한 작은 방으로 이어졌다. 방에 놓인 관들이 유등에서 나오 는 희미한 불빛을 받고 있었다. 조수가 한 여자의 시체를 막 해부하려는 참이었다. 검시관은 그를 내보내고 기름때가 묻은 천으로 시체를 가만히 덮었다. 그는 사이훙 일행을 어두운 구석으로 안내했다. 검시관은 그들이 찾는 시체를 찾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했다. [다행히 아직 석회로 봉하지 않았죠. 조사가 있을 것 같아 하루를 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해됐다고 해서 요즘 신경 쓰는 사람이나 있습니까.] 사이훙은 시체를 살폈다. 건장한 체구의 불교 승려였다. 삭발을 한 머 리가 포탄만큼이나 컸다. 눈썹은 짙고 숱이 많았다. 자줏빛으로 변한 입 술이 벌어져 있었다. 입 안 가득 깨진 이빨에 피가 엉켜 있는 것이 보였 다. 목에 건 무거운 쇠염주는 알 하나하나의 직경이 4센티는 되어 보였 다. 우콴은 칼집에서 칼을 빼내 칼끝으로 승려가 입고 있는 옷을 한쪽으 로 밀쳤다. 오른쪽 쇄골 아래와 왼쪽 귀밑에 반점이 있었다. 가장 분명한 상처는 심장 부위에 난 손바닥 모양의 자줏빛 타박상이었다. [우리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모릅니다.] 검시관이 전문가다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살인 같습니다. 갖고 있던 무기는 부서져 버렸어요.] 그들은 깨진 무기를 보았다. 시체 옆에 되는 대로 내팽개쳐져 있었다. 불교승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다루는 무기인 철장()이었다. 한쪽 끝에 삽처럼 생긴 큰 날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약초를 캐는 데 쓰는 삽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끝에는 초승달 모양의 날이 붙어 있었다. 양끝에는 강 철 고리가 늘어져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차르랑차르랑 쇳소리가 났다. 억 센 티크 나무 손잡이가 괴력에 의해 쪼개져 있었다. 사이훙은 검시관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고 청하고 우잉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보 제공자가 뭐라고 했으며, 이 일과 후디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던가?] 우잉은 램프를 집어들어 관의 끝에 올려 놓았다. 시체 위로 노란 불빛 이 쏟아져 보기 흉한 시체를 밝혀 주었다. [얘기는 이렇게 되지. 이틀 전 이 승려는 우리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던 거야. 그는 후디에와 그의 애인이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던 거야. 무림의 법을 자네도 잘 알잖아. 선 인과 악인은 반드시 맞부딪치게 되어 있지. 그는 핀후의 남동생을 이용해 핀후를 끌어내려고 했지. 이 승려는 암흑가의 정보원에게서 소년은 보통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선다고 들었지. 미리 가 기다리다 소년을 만난 승 려는 길을 가로막고 두 개의 납공을 땅에 던졌어. 납공은 그 힘과 무게 때문에 진흙탕 속 깊이 박혀 버렸지. 승려는 두 개의 공 위로 뛰어올라 도전장을 던졌지. 만일 소년이 그를 이긴다면, 소년에게 한수 가르쳐 주 기로 한 거지. 소년은 자기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다른 무술인으로부터 더 배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경솔하게 공격을 가했지. 불교승은 그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지. 소년은 피를 토하고 도망가 버렸어. 소년이 누이에게 상처를 보여 주자, 핀후는 철사장()이 남긴 흔 적임을 곧 알아차렸지. 목표물을 손바닥으로 가격하는 훈련을 하고 특수 약초에 손을 담근 사람만이 그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즉 각 복수하러 갔지. 불교승은 핀후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먼저 맨손으로 그녀와 대적했지. 하지만 그녀의 힘과 능력에 깜짝 놀라 무기를 써야만 했어. 목격자들의 말로는 핀후는 아주 쉽게 그로부터 철장을 뺏어 버렸다더군. 동생을 상처 입힌 불교승에게 화가 난 핀후는 동생이 입은 상처와 똑같은 상처를 그에게 돌려주었지.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어 공포 의 손가락으로 그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네.] 사이훙은 뻣뻣이 굳어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상처와 부풀어 오른 부 위가 우잉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암호랑이라고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무사임을 말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가자. 후디에는 벌써 우리가 베이징에 도착한 사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오늘 오후에 핀후의 집을 습격하자구.] 사이훙이 말했다. 우잉과 우콴은 동의했다. 그들은 검시관에게 감사의 뜻으로 약간의 은화를 집어 주고 나서 후디 에가 사는 북서부를 향하기 시작했다. [결투가 벌어지는 날 시체 안치소에 가다니 기분이 나빠.] 우잉이 투덜댔다. [그런 생각에 누가 신경이나 쓴대? 시체 썩는 냄세, 그게 바로 진실이 란 말이야.] 우콴은 형의 미신적인 생각을 비난했다. [악취와 비교해보면 도시 냄새가 좋긴 좋군.] 사이훙이 말했다. 우잉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석탄 냄새가 대기 중 에 가득했다. 우잉은 기침을 했다. [제기랄, 크게 다를 것도 없군.] 그가 불평했다. 세 사람은 베이징의 가장 오래된 구역으로 들어갔다. 회색 건물들과 부 서진 담장들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만들었다. 베이징은 한대 정확한 격 자 모양 위해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곳이었지만, 이젠 개인주의의 지저분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모퉁이를 돌아서서 길게 이어진 광활한 회색 돌담을 보 자마자 부유한 핀후의 집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핀후의 저택에 둘 러쳐진 벽은 그 높이가 10미터도 넘었고 꼭대기는 윤기나는 녹색 기와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문 양쪽에 붉은 기둥들이 서 있고 주홍색의 문은 탱 크도 너끈히 이겨낼 만큼 단단해 보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전부 멋들어진 회색, 붉은색, 녹색이었다. 어디에도 쉽게 열고 들어갈 만한 곳 이 안 보였다. 세 사람 중 누구도 후디에의 도약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 다. 밧줄을 사용해서 올라가야만 했다. 사이훙은 난공불락의 울타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감탄을 했다. 현란한 빛들이 단색조의 고대 도시에 화려한 무늬를 짜넣고 있었 다. 정원과 가옥의 아름다움은 장구한 문명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상한 취미와 건축과 풍경의 세심한 균형은 수많은 세월에 걸쳐 완성된 듯했다. 핀후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이 보물을 황제에게 숨겼을 것이다. 만일 통치자가 알았다면 시기심 때문에 죽여 버렸을 테니까. 인공 연못이 집 앞에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은 안채의 서쪽 뒤로 흘러갔다. 충충한 녹색의 불투명한 수면 위로 여러 그루의 수양버들 이 어른거렸다. 연못가에는 기암괴석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마 치 그 유명한 <원난성()의 바위 정원>이 색다른 형태로 변해 있기 라도 한 듯 바위 정원은 동화 속의 산맥을 그리고 있었다. 명상을 하며 자연 속에 파묻힐 수 있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정원사들은 이론적인 원근법이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에 지붕이 있는 산책로를 길게 닦아 놓았다. 각 구역마다 기이하게 꺾인 산책로의 각도는 조화나 균형보다는 산책자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과였다. 그러나 녹색의 기와 지붕과 붉은 기둥들은 자연과 섬세한 조화를 이루어 자못 경이롭기까지 했다. 포플러, 소나무와 삼목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무수한 점이 되어 흩어졌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꽃은 불꽃처럼 붉게 타 올랐다. 노란색, 자주색, 적갈색의 국화들이 다소곳이 바위 정원이 드리 워진 나무 그늘도 가히 환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정원은 천상의 우아함 과 초현실적인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벽돌로 지어진 저택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거대한 2층 집은 전통적인 버드나무 무늬를 새긴 튼튼한 기둥과 맵시 있게 뻗은 지붕으로 단단히 지어져 있었다. 선인장 화분이 주랑 끝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 다. 빨간 문에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진주들이 박혀 있었다. 사이훙은 거 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었다. 한쪽 끝에 칼이 달린 밧줄을 몸에 묶었다. 사 이훙은 동료들을 보고 칼을 뽑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부드럽고 둥근 선이 돋보이는 칼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당 나라의 학자 이관()이 <무기는 불길한 도구>라고 한 말이 옳다고 생 각했다. 칼은 사용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다시 문을 마주보고 섰다. 그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출현을 알 려야 했다. 사이훙은 거칠게 발로 문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아름다운 빨간 문이 떨어져 나갔다. 사이훙과 동료들은 방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잡이에 장식을 조각하고 비단으로 쿠션을 대어 만 든 의자들이 탁자 주위에 두 줄로 놓여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 모 양의 대형 비단 양탄자가 깔려 있고 벽은 값비싼 두루말이 그림과 도자기 로 장식되어 있었다. 홀의 상단에 붉게 빛나는 작약꽃들이 옆으로 길게 있고 두 개의 의자가 문을 향하고 있었다. 방의 불빛은 흐릿하고 실내엔 곰팡내가 스며들어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와 여자가 하인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핀후가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금색과 청색의 비단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키에 날씬한 몸매였지만, 운동으로 단련되어 단단해 보였다. 발도 튼튼하고 전족이 아니었다.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다. 마치 백옥 같 았다. 두 눈은 크고 눈썹은 짙었다. 눈꼬리가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다. 핀후의 용모는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 같았다. 잠깐 동안 사이훙은 자신이 방에 들어온 이유를 잊었다. 잔잔한 향기에 취해 버린 사이훙은 핀후 같 은 여인에게 유혹을 받으면 자기도 수도 생활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 다고 생각했다. 핀후의 뒤를 이어 동생이 들어왔다. 머리를 삭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눈 을 가진 그는 말라깽이 10대 소년이었다. 얼마 전에 입은 상처 때문에 불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붉은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조심스럽게 웃옷의 가장자리를 검은 허리띠 속으로 밀어 넣어 신속하게 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그는 자기 키만한 창을 들어 사이훙 일행에게 겨누었다. 남매는 방의 한 가운데로 나왔다. 누군가 문가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후디에였다. 평소에 으스대며 자신만만하던 후디에가 아니었다. 과묵해 보였고 사이훙은 보는 눈길은 마치 숙명론자 같았다. [우리가 너를 잡으러 왔다, 후디에!] 사이훙은 방 건너편에서 크게 소리쳤다. 후디에는 고개를 들어 외면했다. [사부님이 너를 찾으신다. 너는 사부님의 포용 한도를 넘어섰다. 자, 우리와 함께 가자!] [여기는 내 집이다. 너는 명령을 할 입장이 아니다.] 핀후가 말했다. [이 일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화가 난 사이훙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후디에를 쳐다 보았다. [공격 개시!] 사이훙은 크게 소리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핀후는 거뜬히 그의 기습을 받아냈다. 사이훙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핀후의 기술은 그보다 몇 수위였다. 단순히 힘의 문제가 아니 었다. 사이훙의 체중과 완력이 핀후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핀후는 사이훙의 공격을 민첩하게 잘 빠져 나갔다. 방어할 생각도 안했다. 그녀 가 반격을 가할 때는 사이훙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손가락 끝을 이용한 핀후의 가격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이훙이 옆으로 껑충 뛰어올라 조용히 물러서 있는 후디에에게 달려들 었다. 핀후가 사이훙을 향해 뛰어 올랐다. 사이훙은 옆으로 살짝 피했다. 그녀는 사이훙을 뒤쪽으로 몰아붙이고 마침내 그의 가슴을 무섭게 걷어찼 다. 순간 금속의 섬광이 번뜩했다. 사이훙과 핀후는 순간 놀라서 멈칫했 다. 그녀는 신발 끝에 칼을 넣어 두고 있었고 사이훙은 가슴에 강철판을 대고 있었다. [겁쟁이 같으니.] 그녀는 경멸조로 말했다. 사이훙은 어색하게 웃었다. 만용을 부릴 수야 없는 것 아닌가.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는 밧줄의 매듭을 잡아당기고 빙빙 돌렸다. 사이훙은 그것을 핀후를 향해 냅다 던졌다. 핀후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사이훙은 적어 도 그녀가 균형이라도 잃게 하고 싶었다. 밧줄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였다. 밧줄을 팽팽 히 만들어 공격을 하고 나면 밧줄은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밧줄이 되돌아오면 사이훙은 그것을 손목이나 팔목, 다리에 감았다가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날려 보냈다. 핀후는 사이훙의 묘기에도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더욱 밀어붙였다. 사이훙은 5미터 길이의 밧줄과 그 끝에 달린 날카로운 면도칼로 간신히 핀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우잉과 우콴이 잘 싸워 주기를 바랄 뿐이 었다. 우잉과 우콴은 소년보다 60센티 더 컸다. 그러나 소년은 빠른 속도로 창을 내 찌르며 열세를 극복하고 있었다. 두 검객은 소년에게 손쉬운 상 대에 불과했다. 빙글빙글 도는 동작과 정확한 찌르기는 특수한 소년의 무 기에 의해 반격을 받았다. 창자루는 야생 덩굴을 잘라 만든 것으로 특수 기름에 오래 담가 두었기 때문에 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이훙은 핀 후의 동생이 고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핀후는 사이훙에게 달려들었다. 사이훙은 무섭게 되받아 치면서 밧줄을 그녀의 정면에다 던졌다. 핀후가 재빨리 옆으로 비꼈으나, 밧줄은 살짝 그녀의 어깨를 베었다. 밧줄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되돌아오자 사이훙 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밧줄은 손 안에서 힘있게 감겼다. 사이훙은 밧줄을 계속 움직여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사이훙은 여자에게서 등을 돌 리면서 밧줄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핀후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자 사이 훙은 뒤로 돌아 호랑이 꼬리치기로 그녀를 가격하고 밧줄을 잽싸게 날렸 다. 밧줄은 소년에게 정통으로 맞았다. 사이훙은 앞으로 뛰어올라 잽싸게 소년의 목에 밧줄을 휘감았다. 우잉과 우콴은 때를 놓치지 않고 즉각 칼 날을 깊숙이 박아 그를 죽여 버렸다. 핀후는 슬픔과 분노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 더 이상의 양보는 없었다. 치밀한 전략도, 우아한 동작도 그녀의 안 중에는 없었다. 핀후는 방심을 불허하는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다. 남자라 고 느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사이훙을 가격했다. 사이훙은 몸을 비틀어서 그 힘을 분산시켰으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가 비틀비틀 뒤 로 물러서자 핀후는 손가락 하나를 그의 목에 겨냥하고 다가왔다. 사이훙 은 증오심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두 눈을 바 라보았다. 그녀가 기를 모아 전력을 다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방 향을 잡는 동안 쉿쉿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나 핀후가 찌르기 바로 전에 사이훙의 눈 앞이 번쩍하면서 우콴이 그녀의 손을 댕강 잘라버렸다. 숨소리는 이내 단말마의 비명으로 변하고 그녀의 귀중한 손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잘려진 손목에서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녀는 포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 다. 사이훙 일행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핀후는 있는 힘을 다해 숨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그리고 죽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 을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핀후는 손까지 잃었다.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 녀의 명예는 천길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핀후의 손가락은 유명했으며 그녀의 무술을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제 핀후는 모든 것을 잃었 다. 무술의 영웅은 결코 자존심을 더럽히는 법이 없었다. 게임은 끝났다. 이제 핀후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꼿꼿한 손가락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핀후는 힘을 어떤 식으로든 쓸 수 있었다. 신체의 어디로든지 기와 혈액의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핀후는 기와 혈액을 전부 혓바닥으로 올려보냈다. 생명의 힘을 다 바쳐 이곳으로 기를 밀어 올리면서 그녀는 혓바닥을 깨물 어 장렬한 최후를 장식했다.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핀후의 영혼은 스스 로 입힌 상처를 통해 분출했다. 사이훙은 그녀의 몸뚱어리가 빙글빙글 돌 다가 사냥꾼에게 당한 동물처럼 꼬꾸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 지막 춤은 아름다운 암호랑이가 빙빙 선회하다가 심홍색 핏방울의 분수 속으로 묻히면서 막을 내렸다. 사이훙은 소년에게서 밧줄을 풀었다. 시체는 무거웠다. 사이훙은 피묻 은 줄을 감아 올린 뒤 조심스럽게 칼날을 닦았다. 피 냄새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사이훙은 문으로 걸어갔다. 유등이 있었다. 사이훙은 유등의 기름으로 양탄자에 불을 붙였다. 두 남매의 육신은 양탄자 위에서 불꽃으 로 타올랐다. 며칠 후 사이훙, 우잉, 우콴은 암흑가의 대규모 첩보망을 통해 후디에 를 추적하였다. 사이훙은 <<손자병법()>>에서 따온 한 구절을 떠 올렸다. <지혜로운 장군이 이룬 업적은 그 선견지명 문에 평범한 사람을 능가 하는 것이다. 선견지명은 영혼, 신, 과거 사건의 유추에서 얻을 수 없으 며 계산으로 얻을 수도 없다. 적의 정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얻어낼 수 잇는 것이다.> 첩자는 손자가 말하는 <신의 실타래>였다. 누군가 끈을 당기는 법을 알 면, 그물의 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뜬소문만을 쫓다가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도시와 시골을 닷 새 동안 뒤지고 다닌 후, 그들은 후베이성()의 다훙이라는 마을로 갔다. 그러다가 어느 초라한 주점에서 정보 제공자를 찾아냈다. 그는 시 시한 사기꾼에다 좀도둑이었다. 두둑하게 돈을 지불하자 마침내 그는 사 이훙 일행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들려주었다. [당신들의 친구는 호북삼호()모임에 끼여 있소. 한 명은 리 ()라고 불리는 팔괘장()의 사부지요. 그의 스승은 선종의 도교 수행자이며 그의 계보는 인 푸가 시조랍니다. 인 푸는 1900년 황태후가 베이징을 탈출할 때 그를 보호했었지요. 또 한 명의 이름이 왕()입니 다. 그는 유명한 순 루탕()의 제자인데 형의권()과 육합검 ()의 대가요. 나머지 한 명은 페이마오()라고 부른답니다. 자 그마한 사람이지만 힘은 정말 무섭습니다. 청 황조의 마지막 기사들 중 한 사람인 비성표자(:날으는 성스러운 표범)에서 무술을 철저히 전수 받았답니다. 이들은 모두 50대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무술은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습죠. 댁들은 너무 젊어서 그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을 찾을 수 있는지 제발 말해 주십시오.] 우콴이 사기꾼에게 요청하였다. 도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리 가십시오. 댁들을 위해 어디로 관짝을 보내야 할지 제가 아니까요.] 그들은 능글능글 웃어대는 사기꾼과 헤어져 계획을 세웠다. 이 문제는 이제 실질적으로 무림의 문제가 되었다. 그 자체로서 유일한 방법은 개인 적인 도전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이 세 사람에게 도전장을 낼 수 있 었다. 그들 모두가 호북삼호 각자에게 집단으로 대항한다면 불명예가 될 터였다. 사이훙은 자원해서 즉각 도전장을 냈다. 날씨는 점점 더 무더워졌다. 사이훙은 후디에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이틀 후 사이훙은 리와 왕을 만나, 두 사람 모두 묵사발을 만들 어 버렸다. 팔괘장을 구사하는 리는 우아하고 교묘하게 잘 빠져 나갔지만 사이훙은 리를 번쩍 들어 바닥에 꽂아버리는 몽고 씨름으로 결판을 냈다. 리는 딱딱한 땅바닥에 수 차례 던져지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이훙은 왕을 대적할 때는 리의 권법을 이용했다. 두 번 다 적을 죽이 지 않았다. 이번 결투는 무사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디에를 순전히 우정 때문에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사이훙은 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난 후,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때야 비 로소 두 사람은 후디에가 곤경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사이훙에 게 서둘러 남쪽으로 가라고 말해 주었다. 페이마오는 후디에를 호위하고 양쯔강으로 가고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허겁지겁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차를 놓쳐 버 렸다. 우잉은 기차를 놓친 일이 매우 불길하다고 투덜거렸다. 다음 기차 가 올 때까지 4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난징행 열차를 탈수 밖에 없었다. 24시간이 걸려서야 양쯔강 북쪽 강가에 당도했다. 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폭이 넓은 만에는 건널 다리가 없었다. 다서 배로 실어 나르는 데 몇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세 사람은 급히 둑으로 달 려가 건너갈 작은 배 한 척을 세냈다. 난징 부두는 임시용 범선, 증기선과 화물선을 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농산물이 담긴 광주리와 오리와 거위를 담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선창은 가솔린, 기름, 쓰레기와 땀냄새가 섞인 악취가 진동 을 했다. 꼭두새벽인데도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사이훙은 옷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땀이 흠뻑 젖어 들었다. 태양을 피하느라 눈을 옆으로 뜨는 데 후디에가 보였다. 부자들이 입는 하늘색 비단옷을 입고 갑판 위에 서 있 는 후디에의 자태가 눈부셨다. 겉옷 밑으로 앞가슴이 트인 깨끗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한가로이 걸어다녔다. 그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사이훙은 사람들 속으로 마구 헤집고 나갔다. 사이훙이 사람들을 밀치 자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가 났고, 페이마오는 즉각 신경을 곤두세웠 다. 사이훙이 마지막 구경꾼을 밀쳐내자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그 에게 날아들었다. 밧줄 창살의 명수인 페이마오가 무기를 날린 것이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그러나 아주 멀리 흩어지지는 않았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사이훙과 페 이마오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수 자세를 취했다. 페이마오는 바짝 경 계하며 사이훙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마르고 키가 작았다. 얼굴을 올 리브 씨처럼 생겼고 피부는 질긴 가죽 같았다. 두 눈은 가늘고 날카로웠 으며 새까만 머리칼엔 포마드를 잔뜩 칠했다. 밧줄 창살이 날카롭게 날아 들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강철 부채를 펴서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을 감행 했다. 사이훙은 날렵하게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놀랍게도 페이마오는 그 의 주먹을 피했을 뿐 아니라, 근사한 기계체조 기술을 동원하여 사이훙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는 허공에서 사이훙을 발로 차고 나서 다시 한 번 밧줄 창살을 날렸다. 사이훙은 널빤지에 넘어졌다. 나뭇조각들이 손바닥을 할퀴었다. 사이훙 은 재빨리 날아드는 밧줄 창살을 피했다. 페이마오는 그 동안 창살을 회 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밧줄을 따라 뛰어오르고 공중에서 고리를 만들어 폭탄을 투하하듯 아래로 던졌다. 그가 다시 뛰어오르자 사이훙은 부채를 뒤로 젖히고 페이마오 앞에다 부채를 찰칵하고 폈다. 사이훙은 부채의 바 깥 살에 붙은 비밀 단추를 눌렀다. 사이훙이 빠른 손놀림으로 쏘아보낸 13개의 가는 바늘은 페이마오의 다리에 명중했다. 우잉과 우콴이 합세했다. 구경꾼이 꽉 들어차서 칼을 빼낼 수가 없자, 그들은 맨손으로 싸웠다. 상처를 입긴 했어도 페이마오는 용감하게 싸웠 다. 그러나 사이훙 일행은 곧 그가 부둣바닥에서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사이훙은 사람들 속을 비집고 나가서 부두 끝으로 달려갔다. 후디에는 벌써 배의 갑판 위에 올라탔고 배는 떠나고 있었다. [내가 너를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너는 하늘로도, 땅속으로도 숨을 수 없다! 내가 꼭 잡고 말 테니까! 꼭 잡고 말거야!] 사이훙은 무섭게 소리쳤다. 사이훙은 후디에의 무표정한 모습에 놀랐다. 후디에는 그런 얼굴로 사 이훙은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며 무슨 대답이라도 들어 보려고 안달을 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뭐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 인가? 후디에를 추적하기 위해 사이훙 일행이 탄 증기선을 승객으로 만원이었 다. 사이훙은 난간에 서서 물살을 구경하고 있었다. 양쯔강은 수로를 따 라 힘차게 흘러갔다. 이 수역은 너무 광활해서 강이라는 호칭이 우습기까 지 했다. 양쯔는 깊고 위험하고, 드넓고 힘찬 거대한 바다였다. 불투명한 진흙빛 수면 위로 배에서 나온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자 갈색의 광활함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 매끄럽게 펼쳐지는 강을 표류하노라면, 대모험 이 벌어질 것 같았다. 사이훙은 배의 옆에서 물결이 일어났다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 얀 물거품이 겨우 일어날까 말까 하였다. 세상은 아주 간단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평으로 펼쳐진 푸른 하늘, 신록의 들판, 갈색의 강 속 에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사이훙은 들판의 그림자들이 강을 따 라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그것은 완만한 둑을 이루었고 때로 는 그다지 크지 않은 덩어리들이 물로 떨어지기도 했다. 들판을 지나고 진흙 벽돌로 지은 가옥들도 지나갔다. 다른 증기선 한 척이 그들을 지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증기선은 점령 지역에서 빠져 나온 난민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이훙은 그들 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거칠어 보였고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놀 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친척을 찾아서, 일자리를 찾아서 하류로 내 려가고 있었다. [요즘은 일자리가 귀해 점령지에 있는 게 차라리 낫지.] 누군가 난민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배 위가 술렁거렸다. 한 구의 시체가 배 옆으로 둥둥 떠다녔다. 얼마 안 있어 또 한 구가 내려왔다. 물살은 아주 빨랐다. 하지만 시체들 은 그대로 있었다. [자네 봤어? 불길해!] 우잉이 들뜬 소리로 말했다. [그래. 맨 마지막 시체가 여자였어, 여자였어?] 사이훙이 물었다.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아? 얼굴이 밑으로 가라앉아 있으면 대개는 남자 야. 얼굴이 위로 향해 있으면 대개 여자이고.] 우콴이 말했다. [그런 이상한 얘기를 어디서 주어들었지?] 사이훙이 물었다. [여행을 하다가 어디에선가 들었지. 여자는 엉덩이가 더 무거워서 아래 로 처지고 얼굴은 위로 올라오지. 하지만 남자는 머리가 무겁거든. 그래 서 얼굴이 내려가는 거야.] 곧 또 한 구가 떠내려왔다. 그들은 우콴의 말을 시험해 보려 했다. 불 행히도 이번의 시체는 머리의 반이 달아나고 없었다. 사이훙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비집고 뱃머리로 나아갔다. 이따금씩 물안개가 끼었 지만 거대한 삼각형을 이룬 강의 하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파도는 최 면술을 부렸다. 사부님이 언젠가 말씀하셨지. 물은 특별한 요소이므로 제 대로 성찰하려면 수면을 잘 주시하라고. 사이훙은 베이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가 살아오면서 몇 명이나 죽 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전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살인 기술은 그 가 물려받은 유산인 셈이다. 그는 도적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 린 시절부터 싸움을 해야 했다. 무사들의 도전을 받아 결투를 벌였고 게 릴라병으로도 싸웠었다. 게다가 사이훙과 모든 무술가들이 이해하고 있듯 이, 핀후와 그녀의 동생도 싸움이 남긴 최후의 대가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죽음이 사이훙에게는 비극적이고 헛된 것이었으며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이훙은 후디에 사형의 연인을 죽인 것이다. 이제 사이훙은 영웅이 아 니라 파괴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추적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 무사였다. 더 이상 이상주의적인 도교 수행자가 아니 었다. 그 대신 그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도전을 받아들인 사나이였다. 사이훙은 도전에 또 다른 윤리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성공이었다. 도전은 그가 묶여 있는 무사도 규정의 심장부 였다. 그러나 의기()속에는 다른 모든 원칙들을 희생하는 슬픔이 감 춰져 있었다. 사람은 내내 탐구를 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음유시 인들은 소년이 어른 되는 진짜 이유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즉 도덕과 현 실의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것은 고상함과 우아한 이상을 포기함으로써 가 능했다. 무술가로서 현대적 기사로서 사이훙은 자신이 도전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다. 원칙과 상황 사이에 그가 열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사 이훙은 도전을 떠맡게 될 때마다 새로이 희생과 타협의 똑같은 교훈을 배 워야 했다. 사이훙은 갑판에 서서 그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받 아들였다. 그의 영혼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도 인정했다. 사이훙은 사형을 잡기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임을 받아들였 다. 그는 배의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최후의 종말을 느꼈다. 마치 무사 도의 수호자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유유히 흘러가는 갈색의 강물을 바라보았다. 사이훙은 자신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위()의 개념을 이해했던 10년 전의 질문을 회상했다. [무위가 무슨 뜻입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그 말의 뜻은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고 완벽하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단다. 네가 끊임없이 갈고 닦아 온 귀중한 정적을 방해하게끔 감정을 들쑤시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사부님에게 영향을 주지 않나요?] [그런 것은 없다.] [사부님이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부님을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죽여 버릴 테다.] [그 다음에는요?] [그리고는 다시 앉아 명상을 하지.]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다.] [다른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으시겠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나는 단지 그들을 훼방놓았을 뿐이다.] [속으로도 사부님은 괴로워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단다. 그게 무위이니라.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네가 진정 무위를 이해한다면 그때 너는 평온해질 것이다.] 사이훙은 당황했다. 대사부는 결국 이런 식으로 그 점을 해명해 주었 다. [무()는 없다는 것이니라. 위()는 <위해서>와 <대해서>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결과를 뜻하기도 한다. 무위는 너의 행동이 형이상학적으 로나 네 자신 속에서 어떤 결말도 갖지 못하는 것을 뜻한단다.] [또 사부님의 내면에서도.] 사이훙은 흔들리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낮게 읊조렸다. 명상 속의 정적 은 이제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사이훙은 산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추적을 벌이는 이곳에서는 감정의 장막에 감춰져 버렸다. 또 한 구의 시체가 흘러갔다. 이번에는 여자였다. 양쯔강은 시체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사이훙은 죽은 자들의 행렬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시체는 양쯔 강 하구의 똑같은 지점으로 가고 있었 다. 바로 상하이()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