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씨 인물
곽명생(郭命生. 1669년-1744. 자-直夫, 호-直菴. 현경면 현화리 성자동. 현풍인)
聖子洞이란 지명은 마을의 입향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안에 최초로 입향한 현풍곽씨의 입향조는 곽명생이다. 공은 강진 성전에 살다가 무안읍 신학리로 들어와 살면서 名利를 버리고 자연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또한 평소에 주자의 말씀 중 ‘聖人은 만사를 응하고 천지는 만물을 생할 때에 直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아들은 돈목, 정목, 경목을 두었는데 돈목(숙종 신미 1691년 生 - 영조 을해 1755년 卒)은 무안읍 대곡리에서 살다가 현경면 현화리 성자동으로 왔고 정목(숙종 갑술 1694년 生 - 영조 을미 1775년 卒)은 무안읍 병곡 마을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모두 책을 벗 삼아 생활하며 보냈다고 한다.
곽성구(郭聖龜. 자-문미, 호-현주. 현풍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할 때에 의병을 일으켜 여산까지 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돌아왔다. 그 후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를 받았으며 그 뒤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말년에는 우암 송시열과 담론을 주고 받았으며 공의 문집이 남아있다.
곽엽(郭曄. 자-회이. 호-원재. 현풍인)
충익공 재우의 증손이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을 따라 다니며 학문을 익혔고 도기의 변과 존양의 의를 얻어들었다. 무진년에 음사로 목릉 참봉을 지냈다. 광해군에 의해 인현왕후가 출궁을 당하고 율곡과 우계선생이 왕조에서 축출 당하자 말을 잃었으며 우암 선생마저 초야에 묻히자 울분에 쌓여 지냈다. 왕조에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극간하였으나 오히려 무장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사면으로 해배되자 무안으로 귀향하여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보냈다.
곽의완(郭義完. 자-언국, 호-몽암. 1824-1870. 무안읍 신학리 병곡. 포산인)
공은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잘 모셨다. 그가 성장했을 때 아버지께서 실명의 위기에 처하자 밤낮으로 간호하더니 눈속의 오물을 혀로 핥아내 치료해드렸다. 아버지께서 나이가 들어 눕게 되자 갖은 정성으로 모셨으나 차도가 없자 단지를 하고 허벅지 살을 베어 공양하였다. 그럼에도 돌아가시자 자신이 죄인임을 자처하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묘살이를 했다. 그가 무릎을 꿇었던 자리는 깊게 흔적이 남고 눈물을 흘렸던 자리는 풀이 자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 묘 아래에서 물이 솟아나 시묘살이를 도우니 주민들은 그 샘을 효자샘이라 하였다. 하지만 시묘살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그 샘은 말라버렸다고 한다. 후일 지손들은 그의 정성을 귀하게 여겨 병곡마을에 효자각을 세워 넋을 기렸다.
구씨 인물
구인(具仁. 1596-1664, 자-군직. 해제면 학송리 송전. 능성인)
송전 마을의 첫 입향조는 능성(능주)구씨 구인이다. 공은 현경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 구씨들 사당이 있었으나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무안에서 능성구씨들은 이 마을에만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권씨 인물
권숙표(權肅杓. 호-연제. 1920-2010. 무안군)
공은 현대 환경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1920년 무안에서 태어나서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기후약학전문학교 약학과를 졸업하였다. 1944년에는 동경대 약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1946년에 국립화학연구소 위생화학과 과장을 시작으로 연세대 의대 교수를 하면서 환경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체하게 된다. 1968년에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장, 1989년에 한국 환경교육협회장, 1994년에는 아시아태평양환경NGO본부 회장을 맡고 1999년에는 글로벌500 한국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수상으로는 1992 글로벌500환경업적 수상, 1982 국민훈장 모란장, 2000 제6회 한일국제환경상을 수상했다. 공은 초기에 지금의 보건복지부인 보건사회부에서 의약 분야를 담당했지만 그 이후로는 약학과 직접적인 길을 걷지 않았다. 약을 다루다 보니 동물을 다루게 되고, 동물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레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됐고 환경문제를 접하게 된 것. 그저 시나브로 환경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해’라는 단어를 쓴 주인공이 바로 권숙표 교수다. 일부 학자는 과거 군사정권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려 할 때 ‘공해문제’를 사회문제화 한 선구자가 바로 권숙표라고 칭송한 바 있다. 당시 정치적으로도 많은 압박이 따랐던 상황인 만큼 그의 노력이 결코 헛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동료, 그리고 후배들로부터 ‘권공해’라는 별명을 얻었다. 권공해라 불릴 만큼 멤버들 사이에서 권숙표 교수는 공해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 그는 명백한 공해박사였다. 참고로 1970년대만 해도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공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 데다 1963년 제정돼 1969년 시행에 들어간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법 역시 ‘공해방지법’이었다.
권우(權祐. 자-宗叔, 삼향읍 남악리 안동. 안동인)
안동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진주 강씨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물러 가 버리고 그 후 1500년대 중반에 안동 권씨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무안세적지에 의하면 권우가 正言(司諫院의 正六品 벼슬)으로 입조하여 무오사화와 을사사화 때 바른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왕의 눈 밖에 나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 삼향면으로 귀양 왔다고 한다. 공은 이곳에 살면서 세상일에 담을 쌓고 은둔하여 후손의 교육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