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사에서 큰 나라의 제후가 된 태공망
[월간조선] 이한우의 '사기(史記)' 읽기
최고의 책사는 누구인가 ②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입력 2025.11.15. 03:00
| 0 |
태공망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룬 책사(策士)를 말할 때 이구동성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을 꼽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윤은 상(商)나라[은(殷)나라라고도 함-편집자 주]를 세우는 데 대훈(大勳)을 세웠고 태공은 주(周)나라를 세우는 데 대공(大功)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어쩌면 한(漢)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장량(張良)의 공훈(功勳)을 뛰어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윤의 경우 상고(上古)시대의 인물이어서인지 기록이 많지 않고 사마천(司馬遷)도 대부분 《서경(書經)》 상서(商書)에 실려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이윤의 행적을 정할 뿐이다. 사마천의 〈은 본기〉에서 이윤과 탕왕(湯王)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윤은 이름이 아형(阿衡)이다. 아형이 탕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말미암을 방법이 없자 마침내 유신씨(有莘氏)의 잉신(媵臣)이 되어 정(鼎·쇠솥)과 조(俎·제사용 도마)를 메고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비유로 예를 들어 탕에게 유세하여 왕도(王道)에 이르게 하였다. 혹자는 “이윤은 처사(處士)였는데 탕이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맞아들이고자 했으나 다섯 번 거절한 뒤에야 기꺼이 가서 탕을 따랐으니 (이에) 소왕(素王)과 구주(九主)에 대해 말했다”라고 했다. 그를 들어[擧] 국정을 맡겼다. 이윤은 탕을 떠나 하(夏)나라로 갔다. 하나라가 이미 부패했기에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
“힘쓰시옵소서, 힘쓰시옵소서”
즉 두 가지 모습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이윤이 먼저 탕왕에게 접근을 시도한 유세객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탕왕이 먼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넘어 다섯 차례나 찾아가고서야 이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모습이다. 그런데 국정을 맡았다가 탕을 떠나 하나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실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좋았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은 본기〉에는 두 사람 간의 대화가 딱 한 차례 실려 있는데 그 대목에서도 두 사람의 묘한 긴장을 읽어 낼 수 있다.
〈탕은 제후들을 정벌했다[征·정]. 갈백(葛伯)이 제사를 올리지 않자 탕은 처음으로 그를 정벌했다. 탕이 말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윤이 말했다. “밝으십니다! (남의) 말을 능히 들을 줄 아신다면 도리는 마침내 나아갈 것입니다. 나라의 군주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능력 있는 인물들이 모두 왕의 관직에 있게 될 것입니다. 힘쓰시옵소서, 힘쓰시옵소서!”
탕이 말했다. “네가 삼가 명(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나는 큰 벌을 내려 내쫓을 것이고 결코 사면(赦免)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탁고지신(託孤之臣)
이윤(왼쪽)과 은 탕왕.
재상 이윤이 오래토록 중국 역사에서 기억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어린 태갑(太甲)을 내쫓았다가 다시 세워 준 일이다. 이는 스스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 공자는 이를 지덕(至德)한 행위라고 불렀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태백(泰伯)은 아마도 지극한 다움[至德]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수가 없다.”〉
다시 〈은 본기〉다.
〈탕왕이 붕(崩)한 후에 태자(太子) 태정(太丁)이 아직 세워지지 못한 채 졸(卒)하자 이에 마침내 태정의 동생 외병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帝) 외병(外丙)이다. 제 외병이 자리에 나아간 지 3년 만에 붕하자 외병의 동생 중임(中壬)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 중임이다. 제 중임이 자리에 나아간 지 4년 만에 붕하자 이윤은 마침내 태정의 아들 태갑을 세웠다. 그런데 제 태갑이 이미 세워진 지 3년이 되어도 눈 밝지 못하고[不明] 포학해서 탕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임금다움을 어지럽히자[亂德] 이에 이윤은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았다.
3년 동안 이윤이 섭정하면서 나라를 맡아 (본인이 몸소)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제 태갑이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스스로를 꾸짖으며 좋은 쪽으로 돌아오자[反善=改過遷善] 이에 이윤은 마침내 제 태갑을 맞이하여 정권을 주었다.〉
〈은 본기〉가 전하는 이윤의 행적은 여기까지다. 탕왕의 책사이자 재상으로서, 제위(帝位)를 넘보지 않고 탁고(託孤)의 명을 완수한 뒤, 태갑을 개과천선시켜 은나라 초기 정치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아들 역시 재상으로서 은나라 정치를 보좌했지만 태공망처럼 봉국을 하사받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이윤은 〈세가(世家)〉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고 또 상고시대 인물이라는 이유로 주나라 초기부터 기록된 〈열전(列傳)〉에도 포함되지 못하였다.
태공망과 주 문왕의 만남
주 문왕과 태공망의 만남. 일본 에도 시대 화가 가노 마스노부(狩野益信)의 그림.
우리가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는 태공망은 본래 성과 이름이 강상(姜尙)이다. 따라서 그를 강태공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 조상은 하나라 때 여읍(呂邑)에 봉해져 성이 여씨(呂氏)로 바뀌어, 그를 여상(呂尙)이라고 불렀다.
주나라 문왕 때 그는 이미 고령이었으나 낚시를 하면서 주나라 문왕을 만나고자 하였다. 〈제(齊) 태공 세가〉 주(注)에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이한우 옮김, 21세기북스)이 전하는 당시 태공망의 모습이다.
〈여망은 나이가 70살로 위수(渭水) 물가에서 낚시를 했는데 사흘 밤낮으로 물고기가 한 마리도 물지 않자 망은 이에 화가 나 그의 의관을 벗어던졌다. 근처에 어떤 농사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옛날의 이인(異人)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일단 다시 낚시를 하되 반드시 그물망을 가늘게 하고서 미끼에는 향이 나게 해 천천히 던져서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오!”
망이 그의 말대로 하자 처음에는 붕어가 잡혔고 그다음에는 잉어가 잡혔다. 잡은 물고기의 배를 갈라 글을 얻었는데 거기에는 “여망이 제(齊)에 봉해지리라”고 되어 있었다. 망은 그 이적(異蹟)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렸다.
그 무렵 문왕도 사냥을 가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이번 사냥에서 사로잡을 것은 맹수가 아니라 패왕(覇王)을 보좌할 신하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주 서백(西伯·문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과연 위수 북쪽에서 태공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선군이신 태공(太公·계력) 때부터 ‘빼어난 이[聖人]가 주나라에 오면 주나라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신이 진정 그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太公望]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를 ‘태공망’이라고 부르며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그를 세워 사(師·스승)로 삼았다.〉
그밖에도 사마천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경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다음에 이렇게 정리한다.
〈여상이 주나라를 섬기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말마다 다르지만 그러나 요점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사(師)가 됐다는 사실이다.〉
‘환과고독’ 구제한 민생 정치
《설원》에는 여상이 문왕에게 치도(治道)를 논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여망(呂望·강태공)에게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대답해 말했다. “왕도(王道)로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패도(覇道)로 다스리는 나라는 무사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근근이 존재하는 나라는 대부(大夫)를 부유하게 해주고, 망하는 도리로 다스리는 나라는 나라 창고만 부유하니 이를 일러 위에서는 재물이 넘치는데 아래에서는 다 새어 버려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문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대답해 말했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묵혀 두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바로 오늘 창고를 열어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鰥寡孤獨]을 구휼하소서.”〉
이처럼 민생을 구제하는 정치의 핵심인 ‘환과고독’이란 말의 원저자도 실은 태공망이었다.
태공망이 이윤과 다른 점은 정략(政略)뿐만 아니라 무략(武略)에도 밝았다는 것이다.
〈주나라 서백 창(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와서는 여상과 은밀히 모의해 다움을 닦아[脩德] 상나라 정권을 기울게 했으니 그 일에 병권(兵權)과 기이한 계책이 많이 쓰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군사의 일과 주나라의 은밀한 권모술수를 말할 때면 모두 태공을 으뜸으로 받들었다.〉
중국 고대 병법서인 《육도삼략(六韜三略)》 중에 《육도(六韜)》가 바로 태공망의 병법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육도》에 태공망의 무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무왕(武王)이 태공에게 물었다. “12율(律)과 음(音)을 가지고 삼군(三軍)의 동향이나 성패를 알 수 있습니까?”
태공이 말했다. “그 뜻이 깊습니다. 왕의 질문이시여! 무릇 율관(律管)에는 열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섯으로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이니 이는 바른 소리이자 만대불변입니다. 오행(五行)의 신비로움이자 도리의 일정함이니 이를 통해 적(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는 각각 그것이 이기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늘이 맑고 고요해 먹구름이나 비바람이 없을 때를 이용해 한밤중에 경무장한 기병을 적군의 보루에서 900보쯤 떨어진 지점에 은밀히 접근시켜 12율의 관(管)을 귀에 대고 적진을 향해 큰소리로 함성을 질러 적군을 놀라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적진에서 반응하는 소리를 관으로 듣습니다. 이때 관에 울리는 소리는 아주 미미합니다. 각(角)의 소리가 관에 울려 왔을 때에는 백호에 해당합니다. 치(徵)의 소리가 관에 울려 왔을 때에는 현무에 해당합니다. 상(商)의 소리가 관에 울려 왔을 때에는 주작에 해당합니다. 반응이 없어 오음에 해당하는 것이 없어 상(商)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이는 청룡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오행의 부험(符驗)으로 상극의 진리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징조로서 성패의 관건입니다.”〉
은나라를 무너뜨리다
중국 삼국시대에는 제갈량(諸葛亮)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군사(軍師)라는 직함을 가졌는데 그 원조가 바로 태공망이다. 군사의 핵심 임무는 전장의 득실(得失)과 이해(利害)를 살펴 공격과 후퇴의 시점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도 태공망은 탁월했다. 《사기》의 〈제 태공 세가〉에 나오는 두 장면이다.
〈문왕이 붕하고 무왕이 자리에 나아갔다. 9년에 (무왕이) 문왕의 대업을 닦고자 하여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 제후들이 (자기에게) 모이는지 여부[集否·집부]를 살폈다. 군대가 출정할 때 사상보(師尙父·태공망)[註–【집해(集解)】 유향(劉向)이 《별록(別錄)》에서 말했다.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높이고 아버지처럼 대한다고 해서 사상보라고 한 것이다. 부(父)도 역시 남자를 부르는 아름다운 칭호다”]는 왼손에 황색 도끼를, 오른손에 소꼬리 장식을 한 흰 깃발을 들고 맹세했다. “외뿔소여, 외뿔소여, 너희 무리를 모두 모으라. 너희에게 배의 노를 맡길 것이니 늦게 오는 자 목을 벨 것이로다!”
드디어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제후들은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모인 제후가 800이었다. 제후들은 모두 말했다. “주(紂)는 정벌할 수 있습니다.”
무왕이 말했다. “아직은 아니다.”
군대를 돌리고서 태공과 함께 이 ‘태서(太誓)’를 지었다.〉
〈2년 뒤에 주(紂)가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감옥에 가두었다. 무왕은 장차 주를 치려 하면서 거북점을 쳤는데 점괘가 불길했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여러 공(公)들은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태공만이 무왕에게 강력하게 권유하니 무왕은 이에 드디어 정벌에 나섰다.
11년 정월 갑자일에 목야(牧野)에서 맹세하고 상주(商紂)를 쳤다. 주의 군대가 패했다. 주는 몸을 돌려 달아나 녹대(鹿臺)로 올라갔고 드디어 끝까지 쫓아가 주를 목 벴다. 다음 날 무왕은 사직(社稷)에 서고 여러 공들은 맑은 물[明水]을 받드니 위(衛) 강숙(康叔) 봉(封)은 여러 색의 자리를 폈고 사상보(태공망)는 희생으로 쓸 짐승을 끌고왔으며 사관(史官) 일(佚)이 축문을 읽어 주의 죄를 토벌한 일을 하늘에 아뢰었다.
녹대의 돈과 거교(鉅橋)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다. 비간의 무덤의 봉분을 높이고 감옥에 있던 기자를 풀어 주었다. 구정(九鼎)을 옮기고 주(周)나라 정치를 닦아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보의 모계(謀計)가 많이 작용했다.〉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는 까닭
주 무왕
공자는 문왕은 칭송해도 무왕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논어》 팔일(八佾)편이다.
〈공자가 ‘소무(韶舞)’를 평해 말했다.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좋다.”
‘무악(武樂)’을 평해 말했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않다.”〉
‘소무’란 순(舜)임금 시대의 음악이고 ‘무악’이란 무왕 시대의 음악이다. 음악에 대한 평은 곧 그 시대 임금에 대한 평가와도 연결된다. 그 점에서 공자는 무왕에 대해 “아름답기는 하지만 좋지는 않다”고 했다. 이는 주나라를 세운 이후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데 대한 냉정한 평가다.
그럼에도 무왕에게 덕치(德治)의 길을 열어 준 사람이 바로 태공망이다. 다행스럽게도 《설원》 제1장 군도(君道)에는 무왕에게 덕치의 길을 가르치는 장면들이 상당수 실려 있다. 그중 일부이다.
〈무왕이 태공에게 물었다. “뛰어난 이를 들어 썼는데도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공이 말했다. “뛰어난 이를 불러다만 놓고 그의 능력을 제대로 쓰지 않아 뛰어난 이를 모았다는 이름만 있고 그 뛰어난 이를 실제로 썼다는 실질은 없기 때문입니다.”
무왕이 말했다. “그런 잘못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태공이 말했다. “소선(小善)을 좋아할 뿐 진짜로 뛰어난 이를 얻지 못한 때문입니다.”
무왕이 말했다. “소선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공이 말했다. “임금이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만 듣고 싶어 하고 자기를 비판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뛰어나지 못한 자를 뛰어나다고 여기고 좋지 못한 자를 좋다고 여기며, 충성스럽지 못한 자를 충성스럽다고 여기고 신실하지 못한 자를 신실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을 칭찬해 주는 자는 공이 있다 여기고 자기 잘못을 지적하는 자는 죄가 있다 여깁니다. 이 때문에 공이 있어도 상을 내리지 않고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지 않게 됩니다. 많은 무리를 지은 자는 출세하고 무리가 없는 자는 쫓겨나지요. 이런 까닭에 소인배 같은 신하들은 서로 당을 지어 뛰어난 이를 가로막고 간사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죄가 없는데도 비방으로 인해 죽게 되고 간사한 신하는 공이 없는데도 명예와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나라는 위태로워지거나 망하는 구렁텅이로 빠질 밖에요.”
무왕이 말했다. “좋도다! 나는 지금 비방과 칭송이 나뉘는 실상을 들었다.”〉
무왕은 은나라를 꺾고서 사상보를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해 주었다. 희성(姬姓·주나라 왕실의 본성[本姓])이 아닌 인물에게 비교적 큰 제후국을 봉해 준 것이다. 그만큼 문왕과 무왕을 도운 태공망의 기여가 컸음을 말해 준다.
이 무렵 은나라 유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무왕이 묻자 태공망은 이렇게 답한다. 《설원》 제5장 귀덕(貴德)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나서 태공(太公)을 불러 물었다. “장차 저 은나라 사대부와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태공이 대답해 말했다. “신이 듣건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조차 사랑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집 담벼락조차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적국 사람들을 모두 죽여 남은 사람이 없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안 된다.”〉
경세가 태공망
태공망은 창업(創業) 과정에서의 책략뿐만 아니라 수성(守成)의 지혜도 갖춘 인물이었다. 〈제 태공 세가〉가 전하는 경세가 태공망의 모습이다.
〈내(萊)나라 후(侯)가 와서 치니 그와 영구를 두고 다투었다. 영구는 내나라와 가까웠다. 내 사람들은 오랑캐인데 마침 주(紂)의 난정(亂政)이 있었고 주나라는 천하를 평정한 초기라서 먼 곳까지 안정시키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내나라는) 태공과 봉국을 놓고서 다툰 것이다.
태공은 봉국에 이르러 정치를 닦고 그곳의 습속에 바탕을 두고서 그 예법을 간소하게 했으며 상공업을 통하게 했으며 어업과 소금굽기의 이로움을 편리하게 해주니 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귀의해 제나라는 대국이 되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나라에 반기를 들자 마침내 소강공(召康公)을 보내 태공에게 명해 말했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목릉(穆陵),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에서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사실상의 정벌권을 부여하노라.”
제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정벌권을 가짐으로써 대국이 됐다.〉
제후가 천자로부터 정벌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그 패권을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훗날 강한 제나라는 이미 태공망 때부터 기반이 다져진 셈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책사가 대대로 이런 대규모 봉국을 소유한 경우는 태공망이 유일하다. 그 점에서 최고의 책사 한 명을 꼽으라고 하면 필자는 주저 없이 태공망이라 말할 것이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