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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 바람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고향을 생각하면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는 때가 많다. 베토벤의 명상곡을 듣는 날이면 더욱 고향풍경 속에 잠기여 허우적대다가 창문을 열고 고향하늘 향하여 기도 들리는 듯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멍청이 서서 남쪽하늘을 바라본다.
고향땅 충청도를 등지고 살아오길 반평생, 고향을 등진 공허함과 그리움이라는 형벌에 울적하기고 했다. 하지만 타향보다 차가운 고향이 되지 않을까!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좋지 않고 힘든 일들뿐이다. 즐거운 일이 있다면 어린시절친구들과 놀던 추억이 전부지 싶다.
운명처럼 떠나야 했던 고향땅은 왜 잊을 수 없을까? 도시에서 두더지를 닮아 밑바닥 헤매기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활의 안정과 쾌락을 잡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잡은 것은, 한 살 두 살 더 먹은 나이밖에 더 있는가.
이제는 고향땅에 안겨 긴 밤을 쉬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두운 밤처럼 보이지 않는 암흑의 바다 속 흙덩어리모양 갈아 안기만 하는 인생 출렁이는 파도는 변함없는데 무거운 돌덩이 같은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흐린 날은 계속 되는 되 벗어날 길은 번번이 놓치고, 허우적대기만 하고 고향땅이 그리울 때면 꿈속을 헤맨다. 어느 날인가 이웃에 사는 공 씨는 고향에 내려가 과일 농사를 짓게 다고 이삿짐을 싸는 곳을 보았다 그 날 나는 부러운 나머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결국 북악산을 오르기 위해, 산에 갈 준비를 시작하였다. 마누라는 집안에 할 일 많은 데 웬 등산, 내 마음 모르고 핀잔만 분 는다. 무작정 시작한 산길은 연주 암을 것 처 연주봉(629메타) 꼭대기까지 도착했다. 멀리보이는 곳에 눈이 꽂힌다. 그곳에는 어머니 아버지 김매기하시는 모습이 눈에 비처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대답은 왜 불러하는 식으로 되돌아 온 메아리에 눈물을 흠치고 산을 내려 올 수밖에 없다.
그레도 산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땅이다.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도착 한이 마누라는 또 잔소리만 시작된다. 푸념이라 생각하고 생활의 안정을 향해 달려갈 수박에 없는 것 현실이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치고 허기진 이때, 고향의 흙냄새 그리워 못 살겠다. 우리 무조건 온 길을 되돌아가든 고향으로 가자고 마누라한데 청한 다음날 첫마디가 무얼 먹고 사느냐 반문 하는 데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내를 좋아하던 시절 해변 가에서 조개를 줍듯이 바람 부는 날 산에 올라 산 도라지를 캐던 생각이 떠올랐다. 돌담길을 함께 건고 싶고 더 이상 새장에 갖춰 방황하는 참새가 실타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삶에 지친 밤, 세월에 비래하여 망각도 따라올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동내어귀와 골목길이 어둠과 함께 타오르고 있다. 내 병이 짙어지는 것일까? 산위에서 불어오는 고향바람 때문 인지 몰라도 며칠 후 나는 아내의 승낙 얻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회갑이 가까워 고향이 그리운 탓에 자리에 눕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사되는 듯 했다. 저 하늘 저산 아래 소원은 일위 지는 것 같았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 일세
끝없이 쏟아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불러보니 고향을 불러보니
가슴 아프다“는 백년설 노래 가사처럼 살아 갈 일이 감감 하였다.
처음 에는 눈을 먹고살아도 좋을 듯 했지만 살아가는 문제 만만치 않았다.
도시에서 살던 집 값, 우선 집 한 칸 사고 작은 밭 딸인 논 두마지를 살 수 있어 먹고사는 쌀 문제와 반찬거리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꾸는 길에 환상이 있듯이 고향 산야를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가 보았으나 주인 일은 집나간 망아지처럼 소라 높여 울고만 돌아왔다
마음 것 뛰어놀고 네 작은 웃음과 인정 많은 바람 부는 고향땅, 산 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처럼 나를 몸부림치게, 현실은 만들고 말았다. 이처럼 고향은 나에게는 다가서기 어려운 낯선 땅인 것이 분명하다.
호랑나비 꿀벌, 춤추는 모습은 영영 보기 어려운 풍경이고, 뻐꾸기울음 소리는 귀머거리가 되어 왔다. 영영들을 수 없는 환상의 소리같았다.
가고파도 갈수 없는 고향, 보고파도 볼 수 없는 돌아가신 어머니 품처럼, 향수에 젖은 마음은 어느 누구도 알아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이내 삶에서 찾아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다가서기 어려운 땅이라면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것 고향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이삿짐을 챙기고 있다. 바라보고 있던 아내도 말없이.
엄젠가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꽁보리밥 맛있는 내 고향으로.
종달새 초록빛 꿈을 꾸고/ 하늘같은 아지랑이 춤을 추며/
진달래 버섯송이 꽃피고 있는 곳/
꿈에 보는 낯익은 동리/ 고향으로 돌아간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고향 바람처럼 훈훈한 바람소리 들이면서 둘이서, 둘이서 충청도 땅으로 한편의 졸시(詩)를 남기고 떠나왔다.
고향은 이처럼 밑바닥 인생에게는 가까우면서도 낯선 땅, 가고 싶어도 돌아가기 힘든 곳. 그러나 남쪽에서 날아온 새는 고향바람이 불면 남쪽으로 날아갔다.
2
고 향
무척 당황스러웠다. 동네는 분명 맞는데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골목과 산과 오솔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한 동네 살던 어르신들을 찾을 수 없고 친구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을이 오면 좁다란 길을 따라 메뚜기 잡던 논들, 햇살 따갑던 오후에 첨벙거리던 제법 폭이 넓었던 개울, 가끔은 죽은 뱀들이 누워있고 산 뱀들도 스르르 지나가던 철따라 꽃들이 피던 산길도 우거진 풀들에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난감함이 밀려들었다. 빈 가슴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변해버린 낯선 도시에 내 유년시절이 송두리째 사라진 느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번 더 가보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살았던 옛집을 근거지로 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고 싶었다. 내 삶의 십오 년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 마을로 집을 옮기고 나서는 잘 찾지 않다가 사는 곳을 옮기고 오랜 세월이 흐르니 낯선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 마을에 사시던 형님마저 이사하니 더 갈 일이 없어졌다. 마을도 끈질긴 인연이 있는지 처가붙이들이 그 마을 가까이에 집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그렇게 커보이던 우리 동네에 이웃한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한 동네와 다름이 없이 되었다.
몇 년 전, 명절에 그곳에 간 김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틈을 타 혼자 내 살던 근처를 찾아보려 나섰다. 십 년이 훨씬 넘게 살던 집으로 가는 길은 찾기가 어려웠다. 수없이 다니던 골목길은 사라지고 정든 이웃과 친구들의 집 대신아파트와 연립들이 들어서 길을 막고 있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중턱도 가기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길 없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풀이 우거지고 발이 빠지는 곳을 지나서 허위허위 도달한 곳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철거대상으로 남은 폐허가 되어가는 뼈대만 유지하고 있는 집들이 있었다. 어릴 적 우리 집과 아랫집, 그리고 절이었던 곳들이다.
내 유년 부모님과 따스했던 추억들이 만들어졌던 좁다란 공간들, 혼자 놀던 여기저기 드문드문 잡초들이 자라던 마당, 초등학교 고학년 때, 설치했던 펌프가 놓였던 공간들. 에돌아 산길로 이어지던 학교를 오가던 길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보았다. 마당보다 높았던 밭 쯤 되었을 곳에서 전망을 막아선 연립주택에 막혀 눈을 감고 예전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커다란 냇물이 흐르고 골목이 나타나고 논들과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입구 같았던 다리와 이어진 가게와 이발소, 국숫집과 쌀가게, 공터가 있었다. 내 서있는 곳 가까이에 집 뒤로 바위가 많았던 바위백이 집과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아랫집 은수네, 마을 사람들이 길어먹었던 샘이 있던 태용이네 집이 있었다.
엣 모습과 현재의 시설물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장마가 지면 마을 사람들을 두렵게 하던 커다란 냇물은 복개되어 넓은 도로가 되었고, 가을이면 벼들이 일렁이던 논들은 주택들이 들어섰고 개울 건너 산이던 곳엔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릴 적 공간에 세월이 쌓이고 길이 나고 현재의 풍경들이 하나씩 덧칠이 되어 마을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이 내 고향일 수 있는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어려서 이사와 십오 년여의 세월을 살았던 곳일 뿐, 그 시절 풍광은 찾아볼 수 없다. 친척도 살지
않고 그 시절의 어른들이나 어린 시절 동무들도 찾을 수 없다. 선조들 묘소가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명절에 찾는 곳이 고향이라면 그것도 아니다.
고향의 의미가 무언가. 유년의 추억이 서려있어 삶에 지치고 어려움을 만날 때 돌아갈 수 있는 곳, 철없던 시절, 이해관계에 물들기 전, 걱정 없이 산과 들을 쏘다니던, 눈뜨면 매일같이 만나던 동무들이 있던 곳, 항상 내 편이고 나를 믿어주던 부모님이 계시던 곳이라면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곳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추억 속에 내 고향이 있다.
어둠침침했지만 해넘어 갈 때가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그을음으로 까매진 낮은 천장과 양은솥 걸린 부뚜막이 있는 부엌이 있고 누런 장판이 열기에 까매진 안방의 이불 펴진 아랫목에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어머니는 눕게 하곤 하셨다. 밤이 되면 등잔불 아래 떨어진 양말을 깁고, 아침이면 추운 부엌에서 달각달각 아침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추억 속에 계신다. 내 놀던 공터와 늘 오가던 골목이 눈만 감으면 순식간에 불러올 수 있다.
명절이 아니어도 차를 타고 시간 들여 찾지 않아도 옛집 앞 고갯마루에 올라 신작로를 바라보며 장에서 돌아오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친구들 집을 찾아내기도 하다 땅에 금을 긋고 혼자 놀고 심심하면 집안으로 돌아와 스피커를 듣고 낮잠을 자고 기다리다 지쳐 울기도 하는 나를 추억 속에서 만난다. 그 곳에서 마을 어른들도 만날 수 있고 동네 친구들도 볼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가는 고향은 더 이상 내게 없지만 힘들어 낙심될 때, 조용한 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으면 오십여 년 전, 그곳,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골목길을 걸어 아버지가 오시고 매운 연기 후후 불며 저녁밥을 준비하실 어머니가 계시는 그곳이 보인다. 그 어머니가 나를 부르고 보리밥에 나물국을 차려주는 상상을 하며 아릿한 냄새가 나는 행주치마를 입고 있는 주름진 어머니 얼굴을 회상하면 가슴속에 조용히 힘이 고인다. 그곳이 내 유년을 불러오고 내게 새 힘으로 활력을 회복하는 진정한 고향이다.
3. 고향
저수지를 지나 군데군데 콩밭들이 있는 얕으막한 구릉지로 소를 몰고 나간다. 풀이 무성한 곳에서 소에게 맘껏 풀을 뜯게 하기 위해서다.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으론 길게 늘인 고삐를 손에 둘둘말아 쥐고 소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뒤 촘촘이 깔린 풀밭에 책을 들고 눕는다. 소는 열심히 풀을 뜯고 나는 책에 빠져든다. 나른한 오후 시간이어서일까 책속의 눈길은 어느덧 꿈길로 들어서고 의식도 없는 손에 잡힌 고삐는 허공에 날리는 실타래 같이 풀리고.
꿈속은 흰구름이 그림처럼 떠있는 파란하늘이었다. 드문드문 꽃이 핀 넓은 초원은 끝도 없이 펼쳐져 이세상 같지 않았다. 바람도 비단결같이 살랑살랑 불어 상쾌함이 하늘을 찌른다. 발에 엔진을 단 듯 바람과 함께 쉬임없이 달려도 지치지 않는다. 목화솜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온 몸에 흐르고 바람과 나 사이엔 달콤한 향기가 끊임없이 피어 오른다. 그런 꿈길을 걷는 동안 소는 고삐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만끽하고 있다. 이 골짜기 저 산비탈 풀밭을 섭렵함은 물론 주위 콩밭까지 자유로운 출입을 하였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어느해인가 추석 명절에 고향을 가려고 마장동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표를 구입하고 끝없이 길고 긴 고향가는 버스 줄에 한없이 기다려 버스를 탔다. 버스안은 앉은 사람도 불편할 만큼 많은 사람이 빼곡이 선채로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 비포장길로 들어서자 덜컹거리며 먼지를 날린다. 경기도 광주를 지나면서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멈춤에 서서 가던 승객들이 일시에 뒤로 쏠리면서 뒷 유리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 깨졌다. 하지만 정비할 방법이 없는지 덜덜거리며 그냥 달린다. 뒷 유리창이 없으니 버스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먼지가 안으로 날라 들어왔다. 명절에 어머니가 떡가루를 받칠 때 흔들리는 체 밑으로 뽀얗게 흘러 내리는 하얀 가루와 흡사 닮은 꼴이다. 시간이 흐르자 버스안의 모두는 하얀 떡가루를 뒤집어 쓰고 있는 듯 했다. 얼굴에 하얀 분칠은 물론 눈썹에도 짐칸의 빼곡한 짐꾸러미 위에도 소복했다. 그럼에도 내린다거나 힘들어 못 타겠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고향은 태어나서 내게 들어와 계신 부모님을 알게 된 곳이다. 그리고 처음 정을 나눠준 주위분들이 이웃이었고 눈에 들어온 산하 그리고 들판과 주변들이 익숙한 모습이 인생의 첫 풍경이 되었다. 처음 글을 배운곳이 시골의 초등학교였으며 만난 또래들이 내 생애 첫 친구들이 아니던가. 그 곳은 첫 정을 내게 함초롬히 쏟아준 소중한 곳이기에 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를 몰고 풀을 뜯게하며 먼 훗날의 푸른 꿈을 꾸고 키웠던 어린시절의 고향은 모두가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격려해 주는 이웃이 있었고 함께 놀고 같이 크던 친구들이 있어 모자람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킨 수채화같은 시절이었다. 밖에서 돌아오면 늘 사랑으로 따뜻함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던 어머니가 계시기에 나에겐 세상의 모두였으며 어느 곳보다 편안하고 아늑한 꿈의 공간이기도 했었지.
방황하던 청소년기엔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의 그리움이 무지개빛이 되어 나를 비춰주고 힘이 되어주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객지생활이 많이 힘들어도 고향오는 길이 어렵고 불편해도 참고 견디어내지 않았을까.
문득 어릴 때 자주가던 저수지가 생각난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던 신작로와 미루나무도 내가 살던 작은 허름한 초가집도 떠오른다. 학교가 끝나고 허기가 져서 집으로 오는길에 가끔 단팥빵 몇 개를 나누어 주시던 빵집아저씨, 소를 몰고 지나가던 나를 부르며 과수원 아카시아나무 울타리 넘어로 자두를 넘겨주시던 최씨 아저씨, 늘 웃으시며 잘하라고 격려해 주시던 만두집 아주머니, 아버지와 친해 자주 오셔서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마사오 아저씨도 생각난다.
그리고 투박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자식들을 먹여살린 아버지와 어려운 살림에도 웃음을 잃지않고 모든걸 베풀어 주신 어머니도 ....
하지만 그 분들의 모습도 그 시절의 모습도 이젠 내 곁을 떠나 보이지 않는다. 슬프게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되는게 마음 아프다. 수구지심(首丘之心)이라고 했던가. 짐승도 고향을 못잊고 산다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어머니를 따라간 세월 속의 고향이 바람따라 흘러가며 저 멀리서 나를 부른다.
4. 고향을 그리며
고향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애타는 마음이다. 또 지난 일에 대한 애틋한 회상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다. 산등성이에 걸려있는 무지개처럼잡고 싶으나 잡히지 않는 마음속의 소망인지도 모른다. 오늘밤도 고향산천을 그리며 불면으로 추억을 회상해 본다. 나의 고향은 면소재지에서 고개를 넘어 십리 남짓 떨어진 은성銀城 마을이다. 지명 은성銀城이 말해주듯 성벽으로 둘러 싸여있는 듯한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은 아늑함, 포근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이다. 동네 앞으로 소박한 들이 펼쳐지고 이어서 남서쪽의 불당산과 남동쪽의 홍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동네 앞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어린 시절 이 들과 산을 놀이터 삼아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고기를 잡고 멱을 감으며,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며, 버들피리를 불고 참꽃을 따 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앞산에는 마을에서도 선명하게 보일만큼 크게 쓴 <재건단합>이란 어귀가 있었다. 6.25동란 후 동네청년들이 돌에 흰 페인트칠을 하여 만들어 놓았다고 들었다. 그 뒤로 돌이 퇴색되고 나무에 가려서 자연히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얼마나 산이 황폐하고 민둥산이었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마을 뒤로는 동쪽 어귀에 오뚝 솟은 매봉산과 서쪽의 붕산이 연결되는 야트막한 능선이 있다. 매봉산 아래쪽엔 작은 언덕이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찐돌이, 닭싸움 등을 하며 놀기도 하였고, 우린 그 언덕에서 누가 대장인지를 겨루는 싸움을 벌였었다. 가옥은 능선 구릉을 따라 산 밑에 언덕위에 제각각 자리를 잡았는데, 모양이 긴 삼각형 형태의 동네 모양을 이루었다.
우리 집은 마을 위쪽 산 밑에 위치한 남동향의 초가집이었다. 아침에 홍산 위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가 잠을 깨웠으며 울타리 없는 마당 끝으로는 뒷산으로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언덕 바로 위로는 꽤 넓은 가족묘지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 묘지 주변을 뒷동산이라 불렀으며 어렸을 적 나의 주 놀이터였다. 뒷동산엔 잘 다듬어진 잔디와 상석이 있고 작지 않은 공간도 있어 씨름과 닭싸움, 소꿉놀이, 술래잡기 등은 물론 상석위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다 혼이 나기도 한 정감어린 곳이었다.
뒷동산은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고 숨어드는 피신처이기도 했다. 예닐곱 살 무렵까지 난 오줌을 못 가렸다. 잠자기 전에 소변을 보고 오줌을 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는데 잠결에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뜨니 아래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아! 내가 오줌을 쌌구나. 한동안 안 싸서 이젠 오줌을 가리게 되었나 보다 했는데 또 실수를 저질렀다. 가만히 방 안 분위기를 살폈다. 같은 이불을 덮고 주무시는 아버지는 옆에 안 계신다. 벌써 새벽일을 나가신 모양이다. 동생과 함께 주무시는 엄마는 내가 오줌 싼 걸 모르고 뒤척이신다. ‘어쩌지? 엄마한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엄마가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아랫목이 따뜻해진다. 엄마가 군불을 때시는 모양이다. 젖은 속옷과 이불을 아랫목에 말리면 되겠다는 묘안이 떠올랐다. 축축한 속옷이 방바닥에 닿도록 엎드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윗방에서 주무시던 할머니께서“우리 손주가 왜 엎드려서 자나?” 하시면서 나를 바로 눕혔다. 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침밥을 먹고 나니키를 씌워 옆집으로 내몰렸다. 지난번에도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옆집으로 갔던 생각이 났다. 옆집 아줌마는 한참을 놀려댄 후 소금을 주었었다. 창피하고 싫었다. 키를 내동댕이치고 안 간다고 버텼다. 엄마가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시는 것을 보며 난 뒷동산으로 도망쳤다. 한참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야속해 하기도 했던 뒷동산에서의 기억이 아련하다.
나에게 뒷동산은 사색의 장소였으며 마음을 추스르는 안식처였다. 여름밤엔 달과 별을 보며 변화하는 달의 모양과 별자리를 탐구하던, 떨어지는 별똥별에 환호하며 무한한 우주의 세계를 상상하던 나만의 천문대였다.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좌절되었을 땐 눈물과 설움을 삭이던 곳 이었으며 청소년기 꿈과 희망을 키웠던 장소였다. 또 사춘기 시절엔 말은커녕 편지조차 건네지 못하는 어느 여학생을 연모하는 혼자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지도 반세기 가까이 됐다. 고등학교를 청주로 진학하면서 고향 발길이 뜸해졌고 이듬해에 이사를 하면서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연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짙어지는 고향생각에 고향을 자주 찾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다. 그러나 고향에 부모님도 안계시고 뿌리도 없고 반겨줄 친지나 친구도 없어 선뜻 고향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온갖 개발과 도시화로 옛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마을이 많은데, 내고향산천은 예전모습 그대로다.
돌아오는 봄에는 고향을 가봐야겠다. 오줌 싸고 도망쳤던 뒷동산에 올라 옛 일을 추억하고 싶다. 발갛게 피어오르는 참꽃을 따먹고 풀벌레 소리 들으며 달과 별도 보는 소망을 품어본다. 혹시 아는가. 어릴 적 소꿉놀이 동무와 우연히 조우할 런지.
5 고향의 그리움
초등학교 때 한번은 바삐 가느라 도시락을 못 챙겨 간 적이 있었다. 그런 데 쉬는 시간에 어머니가 찾아오시어 도시락을 건네주시며 바빠도 점심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과 함께 간식도 가져오시어 무척이나 고마웠다.
우리 집은 원래 ㄱ자형 한옥 이었는데, 아버님이 세를 놓다가 방이 부족하다고 하시며 ㅁ자형으로 월세 방을 더 늘리시고, 뒤에 또 한 칸막이 집에 친척까지 살게 하여 우리 식구와 다섯 집이 함께 살며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친분이 두터워졌다. 고향을 떠올리면 지금도 어린 시절의 그 집이 그리워진다. 모두들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책을 많이 읽도록 거실에 책장을 놓아주시고, 책이 필요하다면 이웃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사다 주셨다. 여고시절 공부하다 밤늦게 와도 그 때까지 기다리시던 어머니셨다. 내 마음의 고향을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자로만 남기기에 흡족하였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다.
하교 후에 엄마가 집에 없어 텃밭에 가보면 오이, 고추, 호박, 가지, 토마토 등 채소를 가꾸시느라 쉴 틈도 없이 일하고 계셨다. 거들어 드리려고 하면 다 되었으니 집에 가자고 하신다. 딸이 힘들까 보아 일을 하다말고 집에 가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운 적도 많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단양에 첫 발령을 받으니, 멀지만 잘 되었다며 버스로 그곳까지 함께 동행 하시며 사택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주신 정겨운 어머니. 1년 후에 제천으로 가서 기차로 주말에 귀가하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우리 셋째 딸이 최고라며 아낌없이 보듬어 주시던 그 정성…. 결혼 후에 둘째를 낳았을 때 먼 길을 오시어 돌봐 주시던 어머님의 정겨움과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묻혀 있다. 고향의 아름답고 정겨운 추억과 함께…….
아! 그리운 부모님. 평소 부지런하시어 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실 줄 알았더니, 남을 위해 헌신하시던 부모님들의 옛정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따스한 부모의 품이 그리워진다. 오늘따라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끼게 되어 그리움이 맴돈다.
고향,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보고픈 모습으로 넉넉하게 웃어주는 이웃이 옛날 같은 훗날에도 옹기종기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전설처럼 쏟아지는 옛 추억들이 구수한 고향 꿈에 어린다.
고향의 정은 오고 가는 정들이 널브러져 있다지만, 세월이 흐르니 그 정들도 뜸하기에 서로들 인심 생각하여 주고받는 실리인가. 세상이 변해도 잠재한 정 있으니 그 정들이 새록새록 싹이 트니 환하고 이제는 지난 세월이 허무 속에 웃는다. 그리운 마음을 열면 향수에 젖은 시골 길에 쉼 없이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친구들의 해맑은 미소가 빈 가슴을 차고 넘친다. 아련한 고향하늘 초가집 굴뚝 위로 추억의 풍금소리 아스라이 울려 퍼진다. 고향 하늘 예나 지금이나 파랗다.
어느새 산그늘 그림자 내리고 해가 뉘엿거려 넘어가는 저녁나절 해가는 줄 모르고 가족들이 쫓아가던 고향의 그리움! 사랑하는 정겨운 내 고향, 친구들 고향 사람들이 그립고, 두고 온 고향 산천 내 고향에 빨리 가고 싶어진다. 고향이 그리워 언제나 가고 싶은 고향 산천, 정겨운 고향산천의 푸른 산들아 포근한 품속에서 꿈을 꾸던 시절이 이제는 추억마저 아득하여라.
가슴으로 피어나는 고향 산천에, 봄바람 변함없이 불고 있겠지. 꿈길에 어린 그리운 고향, 그 시절의 추억이 나를 울리네. 세상 길 따라 정처도 없이 헤매던 발길, 지금도 잘 있느냐. 정다운 고향의 푸른 강물아. 포근한 꿈속에서 노래하던 시절이 저 멀리 그리움으로 아롱거린다.
마음 저편 어머니의 품속이듯 못내 그리운 내 고향 옛 모습. 마음속에 그려보고 눈 속에 간직했던 그 고향이 지금도 가슴속에 꿈틀대는 향수되어 내 살던 그 고향이 그립구나. 보고 싶으며 가고 싶은 나의 고향, 지금은 꿈과 같은 나의 고향,
하늘 문을 처음 열어준 한없이 포근하고 끝없는 어버이의 사랑이 출렁이는 고향, 물같이 흘러간 세월의 저편에서 언제나 가슴으로 떠오른다. 터질 듯 부푸는 유년시절의 추억도 아련히 떠오르는 청순한 사랑의 숨결도 곳곳에 서려 있는 그리운 고향산천, 추억의 파편들만 고향의 그림자로 흔들린다.
고향이 그리워 돌아 갈수 없어 더 사무치는 고향 뜰에는, 지워지지 않은 기억 조각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오늘도 행복한 웃음소리 넘나드는데, 고향 정다움을 삼켜버린 낯선 긴 그림자이다. 찾아와도 만날 수 없는 맑은 눈 반짝이던 동무들이 남아있는 기억 속 고향집 뜰엔 눈 내리는 저녁이면 발자국으로 다가오는 따뜻한 마음 반가운 정일랑 소복하게 쌓이는 눈의 담장위에 그리움이 가득하였다.
올 때마다 그리움이 어리며 가슴을 파고들어 역시 살던 곳이 따뜻하게 비치네. 몇 그루 남지 않았던 고향 뒷산의 아버지 나무와 엄마나무는 어디로 갔는지, 산 능선 푸르게 산새가 지저귀니 칡넝쿨 감고 친구들과 놀이 하던 시절이 아련하다.
내 그리운 고향이여. 오랜 세월 속에 잊고 지낸 작은 일기장의 사연으로만 간직한 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주 옛날 고향은 인심 좋고 마음 좋고 따듯한 정이 넘치는 아주 내 집 같은 그런 고향이었다.
눈을 감으면 선뜻 다가서는 고향산천이 나를 부른다. 논두렁 밭두렁에 땀방울 흘리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흑백 그림자에 담겨오는 그 모습 멋지며,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어머니 품같이 포근한 고향과 아버지 등처럼 따스한 고향, 꿈길에도 달려가는 내 고향이다.
고향을 그리워할 때마다 고향은 엄마의 품속처럼 날 밀어내지 않고 거기 그 자리에서 늘 반기네.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리운 고향, 산 들이 겹겹이 쌓여있고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곳,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모든 것을 훌훌 떨어 버리고 그곳에 살고 싶구나.
고향의 정, 오고 가는 정들이 널브러져 있다지만 세월이 흐르니 그 정들도 뜸하기에, 서로들 인심 생각하여 주고받는 실리인가. 세상이 변해도 잠재한 정 있으니
그 정들이 새록새록 싹이 터서 환하고 이제는 지난 세월이 허무 속에 웃는다.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려 하니, 그곳이 나의 살던 고향이었네. 찔레꽃처럼 환한 얼굴에 살구 빛 그리움이 쪽빛하늘 아래 들녘으로 끝없이 번져간다.
오래전 나의 꿈이 무르익는 봄의 내음이 전해지는 집 한 채, 추운 겨울을 헤치며 다가오는 따사로움에 움츠린 어깨와 두 손을 이른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에 두 손을 뻗는다. 하루의 시작을 위하여 산과 들로 다니던 내 추억이 살아 숨 쉬며 바쁜 나의 삶속에서 잊었던 추억의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고향의 순박하고 훈훈한 정(情)을 나눠 먹고 살던 정겨운 얼굴들과 동무들은, 햇살과 바람같이 청아한 인심의 향기를 옹글게 피워, 추억 속에 걸린 고향의 풍경처럼 지친 심신을 치유해준다.
꿈에도 그리워하던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길 향수에 젖어 미리부터 들뜬 마음은 따뜻한 시골 안방에 자리하고 열렬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동안 그리움에 쌓였던 정담을 나누었다. 고향의 풍성함을 베고 누운 아랫마을 윗마을 동네 설 명절을 부르는 고유의 따뜻한 민심이 깊이 묻어 흐르는 고향의 훈풍을 들이키며 가벼운 운행 길을 열고 달려가던 고향 길 따뜻하신 어머님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다녀 보아도 때가 묻지 않은 소박하고 너그러운 고향의 소리가 들려오고, 향수에 젖은 눈빛으로 언 마음을 고스란히 녹이며 가던 고향 길에
눈이 부신 화폭을 담아보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푸른 하늘아래 뭉게구름이 두둥실 바람결에 춤을 추고, 황금물결 일렁이는 들녘에는 풍요로움의 땀방울에 탐스럽게 익어가는 즐거운 모습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행복의 고향이다.
내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옛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향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지라도 마음으로 달려가고 싶은 넉넉함과 여유로움으로 반겨줄 것 같은 아름다운 꿈으로 행복의 나래를 펼치러 떠난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고향이 그립다. 고향의 봄은 꽃 보다 아름다웠다.
하늘 문을 처음 열어준 한없이 포근하고 끝없는 어버이의 사랑이 출렁이는 고향
물같이 흘러간 세월의 저편에서 언제나 가슴으로 떠오른다. 터질 듯 부푸는 유년시절의 추억도 아련히 떠오르는 청순한 사랑의 숨결도 곳곳에 서려있는 그리운 고향산천이다.
고향은 언제나 포근한 곳이다. 향수와 정이 넘치는 고향 가는 길 막히고 힘들어도 기다리는 부모님 계시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수성가 하여 귀향길 오르니 길모퉁이 양지바른 곳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우리네 부모님이 계시어 흡족하다. 그 옛날 고향은 눈이 많이 쌓이고, 눈에 덮인 새하얀 산과 넓은들 온통 백색의 천지였지. 눈싸움하며 뒹굴던 어린 광대와 추운 줄도 모르고 즐겁던 지낸 시절에 지금도 그 눈은 그 자리 내리겠지. 메마른 대지 위에 함박눈이 내리면 그 시절 그대로이겠지. 강과들에 눈이 쌓이고 그리움은 고향에 있고 이렇게 눈 내리는 날이면 고향에 나를 반겨줄 친구가 그대로겠지.
내 일생에, 문학을 꿈꾸는 자유가 얼마나 남았을까. 문인의 경지에 다가가 내 인생의 향기가 흠씬 풍기는 글 한편 남기고 싶다. 고향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찬연히 빛나는 문학의 향기에 취하며, 문인들과 대화의 기쁨을 누리면 좋을 듯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성한 고향을 그려 담는다. 생각만 해도 시원한 곳, 아주 산세가 좋고 물이 좋았던 최적지의 풍광을 그리던 내 고향! 시원한 폭포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는 고향 산기슭에 능선을 타고 넘었던 옛 시절! 어느새 산그늘 그림자 내리고 해가 뉘엿거려 넘어가는 저녁나절 해가는 줄 모르고 쫓아가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따뜻하게 맞이하는 뒷동산과 나무들은 언제 봐도 그대로인데, 세월이 흘러가서인지 인적들은 뜸하고, 어머니 반기는 모습은 그림자처럼 스쳐가며 스산한 바람만 부는구나. 어릴 적 놀던 그 장소는 변하고 수풀만 무성하니 그래도 내 고향은 늘 엄마 품속 같구나.
눈감으면 안겨오는 그리운 고향 산천, 세월이 빛을 바래어도이 세상 어디를 가도
내 항상 그리는 고향. 고향의 순박하고 훈훈한 정(情)을 나눠 먹고 살던 정겨운 얼굴들과 동무들은 햇살과 바람같이 청아한 인심의 향기를 옹글게 피워, 팍팍한 일상에서 도피한 지친 심신을 치유해준다.
꿈으로 찾아온 고향의 봄 높다란 하늘 고향의 산새소리가 듣고 싶다. 맑은 샘물과 향기로운 꽃향기를 가슴 깊이 마셔도 좋던 고향이 그립다. 고향의 정을, 오늘 즐기는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소망을 들어주는 친구들. 세상이 변해가도 고향의 정 변함없듯이 길이 빛나서 흡족하다.
6.
고향
시끌벅적한 설 명절이 지났다. 오랜만에 가족모두가 모여 반갑고 행복한 명절이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가 아니다. 밀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간 듯 이불, 옷가지 등 생활 용품들이 제멋대로 나뒹굴어 아내가 바쁘다. 여북하면 주부들 사이에 명절증후군이란 병이 생겨났을까. 명절 후에 이혼율이 급증한다는 조사도 있을 만큼 주부들에겐 힘든 명절이다. 가정주부들에게 명절이란 반드시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닌가 보다.
명절이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고향에 모여 정을 나눈다. 모두 그동안 못 다한 지나간 얘기와 고향소식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어주고 건강을 염려해주며 한 가족임을 새삼 깨우쳐 준다. 명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가족이고 다음으로 고향이 아닐까. 우리 정서를 제일 많이 자극하는 단어도 사랑과 고향 일게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유행가를 봐도 사랑 다음에는 고향과 관련된 노래가 많은 것 같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시골에 고향을 둔 세대가 점점 엷어져 간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유행하는 노래에서 고향에 관련된 노래를 듣지 못했다. 점점 고향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는 듯하다.
고향하면 그래도 시골이어야 제 맛이다. 빌딩숲 도심 속 병원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동네친구들도 있고 하겠지만, 시골고향처럼 가슴 뭉클한 추억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성장한 고향은, 하교 길에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앞개울에서 검정고무신을 냇가 둑에 벗어놓고, 모나지 않은 돌 들을 하나하나 들추어 송사리 붕어를 잡아 검정고무신에 넣다보면 해가 뉘엿뉘엿해졌다. 그때서야 집으로 달려갔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이면 매미, 잠자리 잡으러 동구 밖 느티나무아래에 모이거나, 방학숙제로 식물 채집한다고 들판을 뒤지고 다녔다. 동네 또래들과 무리지어 언덕 위 뒷동산에서 선조들 산소를 넘다들며 우리나라와 나쁜 나라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에 하루가 가는 줄을 몰랐었다.
도시의 빌딩숲이 고향인 사람들은 기껏해야 동네 모퉁이에 앉아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팔던 달고나를 먹던 기억밖에 없으리라. 설 명절 때 할아버지 따라 큰집에 오면 골목에 눈이 녹아 미끄러우면 미끄럼을 타거나 달고나를 먹는 것 밖에는 볼 수 가 없었다.
내 고향에서는 여름이면 개울에서 고기 잡으며 멱 감기, 참외. 수박서리에 스릴을 만끽하고, 겨울이면 연날리기 설매 타기, 팽이치기 등 추억이 한 겨울에 하얗게 쌓인 눈송이만큼이나 많다.
선산에는 우리고향에 처음으로 정착한 헌충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선조들께서 잠들어 계신 곳으로, 언젠가는 나도 쫒아 가야할 궁극적인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지금이야 먼 옛날의 추억이지만 늦가을 시제지낼 때에는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책보를 둘러멘 채 십리를 내달려 선산으로 갔다. 향 몫을 받아 산길을 따라 집으로 내려오며 먹던 한 조각 과자와 떡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꿀맛이었다. 지금은 동네에 사당을 지어 산소 사진을 걸어놓고 시제를 지낼 만큼 세월이 많이 변했다.
그렇게 고향에서 우리는 행복한 추억을 쌓았고, 고향 땅을 밝으며 추억을 회상 할 수 있지만,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가슴 아픈 실향민들이 많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과 같이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에 두고 죽는다 했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가지 못하는 고향은 얼마나 그리울까. 말 그대로 사무치게 그립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갈 수 없는 실향민으로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으로 세계 어느 나라 보다 이산가족이 많은 것 같다. 이산가족의 수가 오백만 명이라는 말도 있고, 이산가족 상봉 방송할 때 어느 방송사에서는 천만이산가족이라 하여 이산가족이 무척 많은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죽기 전에 고향땅을 한번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산가족 1세들은 나이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소원을 못 이루고 눈을 감는 가족들이 점점 늘어만 간다. 어떤 할아버지께서는 더 나이를 들게 되면 고향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기억을 더듬어 고향집 주변의 약도를 그려 가슴속 깊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는 걸 보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어떡하면 그분들 소원을 풀어드릴 수 가 있을까. 그동안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는 들어주고 싶어도 초강대국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 악화로 이산가족들의 고향땅 밟기는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우리민족간의 인도적인 문제까지 강대국의 힘에 좌지우지해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과 비참함에 울컥해진다. 다행히 현 정부에서는 개별관광이라도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인간의 본성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정치적인 계산으로 유. 불리를 떠나 무조건 허락하여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게다.
지금은 많이 변하여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변하기 전 옛 모습의 고향의 전경을 그려보며 고향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아픔을 헤아려 본다.
7. 고향.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고향이 있다. 그리움이 크고 추억이 많은 만큼 더 고향이 그립고,타향에서 한잔 술에 고향에 대한 노래를 많이 부르고 있다. “탐 존스의 고향의 푸른 잔디.” 를 들어보면.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이 고향의 푸른 잔디 밑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노래다. 고향은 꽃향기도 다르다, 새소리, 매미 울음소리, 가을밤의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마저 다르게 들린다, 함박눈 내리는 느낌도 고향에서는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생각하는 마음은 애달프다. 독서실 옥상에 올라서 빌딩사이로 숨바꼭질하는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아내의 고향은 공주. 나의 고향은 충주다. 이렇듯 태어난 곳이 각기 다른 사람끼리도 인연이 되어서 잘 살아가고 있다.
논과 밭에 줄지어 들어선 비닐하우스 속에는 이미 오래전에 외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일거리를 독점하고 있다. 그들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베트남에서 왔어요, 인도네시아입니다. 필리핀이요, 네팔입니다. 등등 다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떠나와 저마다의 꿈을 안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가슴마다 고향을 품고 그리워하며 이방인으로 서럽게 살아가고 있다.
구청, 동사무소 문화센터에는 결혼 이민자들이 한국을 좀 더 알고 하루 빨리 정착 하려고 매일 모여서 한국문화와 한글을 배우고 있다. 모두 고향은 각기 다르지만 제2의 고향을 만들려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
우리 집에는 미국이 고향인 “헤이든” 이라 부르는 고양이가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들과 딸의 향수병을 이겨내게 해 주었고, 정이 들어서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다. 동물도 고향의 냄새를 그리워 할 것만 같다.
미국에서 치과를 하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지구촌★★”라는 병원을 개원한 친구가 있다. 외국인으로 살며 고향이 몹시도 그리워서 그런 이름을 붙였나 보다. 외국에 나가면 고국이 더 그립고, 태극기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고,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들 한다. 싸이판 항구에서 원얀 어선 선원들을 만났을 때 같은 동포라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그들의 심정도 고향을 그리는 향수에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과 같은 고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렇게 눈물이 나는가보다. 외국에서 생활을 조금 해 보니 고국의 그리움도 알 것 같다. 외국에서 돌아와 공항에 내리면 냄새부터 다르다. 집으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얼큰한 육개장을 한 그릇 먹으면 비로소 고향에 온 포근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나의 고향은 이미 개발이 되어서 뛰어놀던 과수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만 들어서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향을 그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추억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고향을 충주에서 대한민국으로 바꾸었다. 달도 그 달이요, 별도 그 별 그대로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살아가든 항상 고향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고향의 범위를 조금 넓혔을 뿐이다.. 고향을 충주에서 대한민국으로 바꾸는데 70여년이 걸렸다. 이제는 아내의 고향도 나의 고향도 모두 대한민국이다.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고향에서 살고 있다.
“I am from Korea.” 라고 외국에 나가서 당당히 말한다.
“나는 한국이 고향이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쳐본다.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 특히 이미 정복한 달나라에 가서, “나는 지구가 고향이다.” 라고 외치는 그 날이 오면, 외국인 노동자들도 “외국인” 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고향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21세기의 고향은 앞서가는 사람과, 이끓어 가는 사람들이 좀더 폭 넓은 고향의 의미를 실천해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멍든 가슴을 토닥여 줄 수 있는 “나의 살던 고향” 에서 “내가 사는 고향” 으로 만들면 좋겠다. 고향의 크기를 가슴이 정한다면 더 큰 가슴을 갖자. 생각을 바꾸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자.
지구촌시대의 고향은 내가 살아가는 그곳이 고향이 되었으면 좋겠다.
8 .
고향을 찾아서
산책로 양지 녘에 하늘색 얼굴을 살포시 내밀며 군데군데 봄 까치 꽃이 피어있다. 어느새 봄이 오누나, 무심결에 아기 손톱처럼 조그맣고 앙증맞은 봄꽃을 만나다니, 그리운 이에게서 온 봄 편지처럼 반갑고 설렌다. 청초하게 피어난 풀꽃 곁에서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언덕을 그리며 가녀린 꽃향기 실바람에 실려 보낸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나의 고향, 지나간 수많은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순박한 사람들이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고향은 암 닭이 병아리를 품듯 아담한 산자락이 마을을 나직이 감싸주고 있었다. 틈만 나면 산에 올라 집게벌레 장수풍뎅이 하늘소를 잡고 놀던 오랜 추억이 아직도 또렷이 떠오른다. 언덕 위에 있던 하얀 예배당에서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구호품을 받으려 교회로 달려가던 아이들, 사과 반쪽 연필 한 자루에도 마냥 즐겁고 신나던 반세기 전의 추억은 이제는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들길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나던 이름 없는 풀꽃들 개울가에서 송사리 떼들과 멱을 감고 놀던 동심의 세계는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양분이 된 셈이다. 삘기를 뽑고 마름을 까먹던 빈궁한 날의 기억은 어쩌면 고향이 내게 준 선물 아닌가, 내 삶에 향기로운 사유가 되었으니 비루했던 기억마저 반갑고 즐거운 소풍날처럼 인생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다.
나의 첫 직장이 경기도 **병원으로 취업이 되자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던 날의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낯설고 물 서른 타향살이가 쉽지는 않을게다. 부디 남에게 양보해주고 배려하며.... 아침 안개 걷히는 논둑길을 걸으며 나를 배웅해 주시던 아버지는 딸에 대한 걱정이 매우 크셨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시고 오랫동안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잔영이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다.
철부지인 나를 품어주었고 동무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었던 나의 고향은 문명의 물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지만 고향은 더 따듯하게 나의 마음에 있었다. 늘그막에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던 노인들은 재개발한다는 도시계획을 반대하였지만 정작 고향을 떠나간 젊은 세대는 고향의 변화를 반기는 눈치였다. 다소 희비가 엇갈렸지만 착하고 순한 고향 사람들은 수십 년 아니 삼사대 무덤처럼 여기며 살아온 터전을 뿔뿔이 떠나야만 했다.
장승처럼 마을을 지키던 황토 산도 첨단의 기술로 허물어져 갔고 피땀 흘려 일군 전답과 가옥들 그리고 개울가에 피어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오랜 세월 옹기종기 한 가족처럼 사랑하며 고지식하게 고향의 흙냄새만 맡으며 살아가던 마을은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관공서가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단지로 둔갑을 하여 위용을 떨치는 번화한 거리로 거듭났다. 검소한 습관 탓에 담배 가게 하나 없이 알뜰히 살아가던 노인들에게 화려하고 세련미 넘치는 상점이 즐비한 거리는 어쩌면 신세계를 보는 듯하였을 게다. 나는 낯선 이방인처럼 새 고향의 풍경 속을 배회한다.
우리 집터는 어디였을까, 저기 쯤 일까? 아니면 더 위쪽이던가? 기억을 더듬어 우리 집이 있던 자리를 가늠해보고 한 발짝씩 안방 윗방 사랑방으로 거닐어 본다. 고향이 신도시로 변화하면서 내가 몸담고 살았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는 듯한 아픔이었다. 둥지로 삼고 대가족이 웃음꽃을 피우던 기와집 전경이 눈에 선하다. 집 앞 텃밭에 정갈하게 심겨있던 쑥갓의 향기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향의 향수이다.
삶이 지치고 고단할 때든지 추억이 목마를 때에 무턱대고 찾아가도 좋을, 반겨줄 고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어머니를 대신해 고향은 달래줄 텐데...
변화무쌍한 세월에 고향을 지척에 두고 사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오늘도 아파트를 끼고 도는 조붓한 고향길로 걸음을 옮긴다. 귀퉁이 남겨진 고향의 산자락에 오르자 낙락장송 끝에 이는 바람 소리가 마음을 엔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은 나이 탓일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고향이 있고 언젠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 산마루에 서서 추억을 달래며 향수에 젖어본다. 내가 돌아갈 본향은 어디멘가, 저만치 신작로를 달리던 악동들의 웃음소리가 마음의 고향에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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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에 묻혀가는 고향
장작 패는 소리에 민달팽이가 긴 목을 빼고 넘어다본다. 소리에 놀란 달팽이가 투명한 껍질 속으로 긴 목을 감춘다. 오체투지로 담장을 넘어 마당가에 있는 우물가의 매화나무 앞뒤로 숨는다. 병아리를 쫒아 술래잡기를 하면서도 곁눈으로는 달팽이를 쫒는다. 혹여 병아리의 먹이가 될까봐 우물가와 떨어진 곳으로 병아리 떼를 쫒는다.
유년시절의 고향은 늘 하늘위에 떠도는 구름마냥 평화로웠다. 담장 밖에서 물길을 끌어들인 마당가에는 도랑을 만들고 개나리 진달래를 심어 봄이면 매화향기에 벌과 나비의 놀이터가 되고 개나리꽃 그늘에는 병아리 떼가 술래잡기를 했었다. 어머니는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만들고 동그란 수틀에다 목단 꽃을 피웠다. 장롱속의 아버지 신사복은 대나무로 수를 놓은 옷덮개속에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랑가에는 연자방아를 놓아 목욕을 하고 몸에 있는 물기를 말리며 빨래판으로 쓰기도 했다. 봄에는 고욤나무 꽃으로 동생 목걸이를 만들고 감꽃으로 내 목걸이도 만들어 목에 걸면 달콤한 꿀내음이 났다. 목화솜처럼 따뜻한 정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동구 밖에는 남자 아이들이 굴렁쇠 놀이를 하고 자치기도 하고 회포대로 딱지를 접어 딱지치기도 했다. 딱지 옆에 왼발을 대고 바람의 강도를 세게 하여 넘기던 남자 아이들은 자라서 고향을 지켰다. 우리는 고무줄놀이, 오자미 놀이, 목자치기를 하며 함께 놀았다. 심술궂은 남자아이들이 고무줄을 끊어 도망가면 우리는 끝까지 따라가 찾아오곤 했다. 우리의 유년은 순수한 꿈을 키우며 웃음소리로 담장을 넘겼다. 그 시절만 해도 대가족이기 때문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통하며 살았다. 애경사에는 내 것 니 것 없이 나누며 살던 곳이 복사꽃피던 고향인 것 같다.
결혼하여 반백년 넘게 산 세월을 흰 도화지속에 가득 채웠다. 그림 속에서 유년시절 도시락을 나눠먹던 은숙이가 고개를 살포시 내민다. 초콜릿색이 나는 손바닥만한 빵을 도시락 대신 가지고 와서 먹던 은숙이를 보며 나는 군침을 삼켰다. 우리 어머니께서 해 주신 빵은 희고 동그랗고 작았다. 은숙이가 가지고 오는 빵은 초콜릿색이 나는 커다란 빵이었다. 어머니는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반죽하고 발효하여 팥 앙금을 넣어 동그랗게 만들어 주셨다.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빵끼리 바꾸자고 하면 내 빵이 작으니 안 바꿔 줄 것 같아서 도시락과 바꿔먹자고 하니 좋아라하였다. 그러나 초콜릿색이 나는 빵은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없었다. 까슬까슬한 느낌에 소다 냄새가 올라왔다. 나중에야 고운 보리쌀 딩겨에 소다를 넣어 만든 빵이라는걸 알았다.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친구를 보며 맛이 없어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우리는 학교 가는 다리에서 간첩이 접선하듯 도시락을 바꾸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 땐 모든 것이 다 재미있었다.
서울에 사는 손녀가 방학이라며 내려와 있다. 맏딸이 산달에 내려와 청주에서 분만을 했었다. 그 때 태어난 손녀가 지금 내 옆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산후 조리원에서 한 달 머물다 서울로 간 손녀에게 청주가 고향이라고 할 만한 추억거릴 찾아 길을 나섰다. 바람이 살갖에 차갑게 닿는 가경천을 걸어가 태어난 산부인과에도 들러보고 사후조리원에도 들렀다. 신생아들을 보여주며 한 달 동안 너도 저 예쁜 아기들처럼 바우처에 누워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장난감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사주기도 하면서 훗날 고향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외할미와의 추억도 함께 끄집어내보기를 바래본다.
나의 고향은 야트막한 야산이 앞에 둘러져있고 뒤에는 구병산이 병풍처럼 울을 친 아름다운 고장으로 봄에는 산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예쁜 처녀처럼 화사했다. 고향에서 살았던 기간은 짧았지만 잠재된 동화같은 이야기들은 고은 비단실타래처럼 사리사리 또아리를 틀었다. 2019년 12월 30일 결초 보은 문향 발간 참석차 고향에 들렀다. 차부집 딸이 행사 시작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읍내에 있는 차부에 들렀다. 낯선 분이 먼저 앉아있다. 유리창 너머로 부모님 모습이 자막처럼 스쳐 지나간다. 밖에는 때 이른 빗방울이 차 유리창을 때린다. 유년시절 살았던 옛집을 찾아가니 집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드리 살구나무와 고욤나무만 고주박이 되어 웅크리고 앉아있다. 발로 차보니 힘없이 옆으로 눕는다. 늙은 내 모습인 듯하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쓸쓸한 바람이 가슴에 인다.
10
그리운 추억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오후다. 똑똑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젊은 새댁이 이사를 왔다며 인사를 한다. 잘 부탁한다며 떡 접시를 내민다. “반가워요. 좋은 꿈 꾸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도 이사 올 때 시루떡을 나누며 인사를 하고 얼굴도 익혔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사를 와도 인사가 없어졌다. 나는 시루떡을 좋아해서 얼른 한입 떼어 입에 넣었는데 단맛이 조금 덜 했으면 좋았을 걸 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시루떡이 생각나며 마음은 어느새 고향 집으로 달려간다. 시루떡의 단맛은 쌀과 팥에서 나는 자연의 맛에다 소금으로 알맞게 간을 한 시루떡이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그 시루떡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마을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마다 시루떡을 했다. 어머니는 커다란 고무통에 쌀을 씻어 불렸다. 한나절 불린 쌀을 방앗간에서 빻아온다. 쌀가루는 눈같이 희고 너무 깨끗했었다. 아침에 미리 씻어 놓은 꼭지가 네 개 달린 커다란 시루에 구멍은 볏짚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구멍 위에 놓고 위에 베 보자기를 깐다. 미리 만들어놓은 팥고물을 두툼하게 깔았다. 그리고 쌀가루를 골고루 덮었다. 그다음에도 팥고물과 쌀가루를 번갈아 깔다가 마지막엔 팥고물로 마무리한다. 베 보자기를 덮고 장작불을 때서 쪄내면 시루떡이 완성되는 것이다.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루 번을 바르고 불을 때서 얼마 후 김이 오르면 고루 잘 익었나 미리 준비해둔 싸리나무로 떡을 찔러 본다. 하얀 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으면 잘 익은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떡이 다 쪄지면 고사를 지내야 한다. 떡 시루를 방에 가져다 놓고 정화수 한 그릇 올린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두 손을 크게 올려 합장을 하고 절을 하신다. 무릎을 꿇고 천지신명과 조상님께 올가을 풍년 농사에 감사를 드린다. 내년 농사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온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말문이 막히면 그저 하시며 말을 이어 가신다. 국태민안과 가정의 행복도 빌었다. 말문이 막힐 때마다 그저그저 하시며 비손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근엄하시면서도 정겨웠다. 고사가 끝나면 할머니는 떡을 접시에 담아 부엌, 토광, 장독대 등에 떡을 놓아둔다. 그곳에도 우리를 도와주는 신이 있다고 믿고 계신다. 다음은 동네에 떡을 돌리는 일이다. 떡을 담는 동안 동네가 크다 보니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윗동네서부터 떡을 돌리고 다른 팀은 아래 동네서 돌리다 만나기로 했다. 떡 담은 접시를 쟁반 위에 포개놓고 언니는 머리에 이고, 나는 대문을 두드리거나 애들 이름을 부르면서 떡을 돌렸다. 처음엔 남에게 주는 것이 좋아서 신바람 나게 돌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밤이라 춥기도 하고 떡을 조금 먹었더니 배도고프고 힘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답고 따스한 풍경이었던 것 같다. 며칠이 지나면 이웃집에서도 가을 떡을 해서 우리 집에 가져왔다. 이웃에 돈독한 정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었고 따뜻한 시루떡을 받아먹는 것도 즐거웠고 맛이 꿀맛이었다.
봄이면 해당화가 곱게 피던 산모롱이 양지바른 언덕에서 산새들의 지저귀기는 소리가 정답게 들린다. 쑥과 냉이, 달래를 뜯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깔깔대며 함박웃음을 웃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꼬물꼬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친구들과 같이 나물을 뜯어도 내 바구니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나물을 많이 뜯은 점순이는 다른 애들 보지 않게 나물을 한 줌 내 바구니에 슬며시 넣어 주었다. 나는 눈을 흘기며 웃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한다. 어느 날은 비 온 뒤에 떠 올랐던 무지개를 잡아 보겠다고 무작정 따라 갔었다. 그 때는 알고 싶은것과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물을 뜯고 무지개를 쫓던 친구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잃어버린 날의 향수처럼 여름철이면 바가지로 물을 푸던 샘이 그리워진다. 그 당시는 마을 사람들이 마시는 샘가에서 목욕을 할수밖에 없었다. 마을 어르신의 호통에 혼비백산하여 벌거벗은 여인들은 옷을 챙길 겨를도 없이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은은한 달빛 아래 아름다운 여체들의 난무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달님도 재미있는지 웃으며 더 환히 비추었다. 논에 빠지고 울상이 되어 돌아와서는 박장대소하며 웃고 울었던 그 모습들, 샘가에 퍼지든 정겨운 음성들,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물을 끼얹어 주며 정을 나누던 그 샘가가 그립다. 물이 줄줄 새던 바가지도 그립고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옛날 풍경이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가끔 투망을 가지고 고기를 잡으러 가실 때면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가 투망을 던지시면 둥그런 원을 그리며 넓게 펴지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넓은 개울이나 방죽에서 주로 고기를 잡는데 고기를 털어놓으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팔딱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잠시후 잠자듯 조용해진다. 이때 멀리서 악을 쓰는 소리에 놀라 바라봤더니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큰일이 난 것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영문도 모르고 물 밖으로 급히 나왔다. 얼마 후 1m 높이의 황토물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 아버지는 날 꼭 껴안으시고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많이 놀랐지” 하시면서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 주셨다. 고함치던 아저씨의 손짓이 얼마나 감사 했던지....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숨겨진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살아 생전에 아버지 사랑한다는 말을 한마디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저무는 인생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그리운 고향이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 품속 같은 아늑한 고향이 그리워진다. 가물가물한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아쉬운 것도, 슬펐던 일도, 기뻤던 일도 옛이야기처럼 가슴에 쌓인다. 고향 생각만 하면 왜 그리웁고 눈물이 날까.
11 오해
폭염으로 제대로 숨도 쉬기 어려운 날씨 탓에 시원한 냉 음료만 들어부으며 속을 달래고 있는데 A에게 전화가 왔다. “보내준 복숭아가 반은 썩어서 왔다네”. 순간 뭔가로 한 대 심하게 얻어맞은 느낌이 뒷머리를 두드렸다. “어! 그래. 알아볼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많은 생각이 오갔다. 복숭아를 보낸 사람이 잘못 한 것인지, 아니면 택배 기사가 잘못 배달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철에 복숭아를 택배로 보내는 일은 하루 이틀 안에 배달되지 않으면 날씨가 무덥고 습기가 많아 물러버리거나 속에서 썩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복숭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도 복숭아를 맛있고 보기 좋게 재배를 해도 일단 나무에서 수확하여 내 놓으면 보관할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 이내라는 점이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다른 과일처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보니 바로 통조림을 만들거나 먹어서 없애버려야 한다. 아껴두려고 상자에 그대로 놓아두면 겉은 멀쩡해도 박스의 아랫부분은 여지없이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A에게 얼마 전 친구가 농사지은 햇사레 복숭아를 보내주었었다. 그랬더니 복숭아를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려고 하는데 주문을 해 달란다. 가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아 며칠 전 친구에게 살 때 금액인 4만 원 정도라고 하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여 과수원을 하는 친구의 계좌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A는 바로 과수원을 운영하는 친구의 계좌로 돈 8만원을 입금했다고 하면서 맛있는 것으로 보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기에 알았다고 한 후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크고 좋은 상품으로 보내 달라고 하니 오히려 나에게 성질을 낸다. 지금 상품 한 상자에 5만원이 넘고 택배비 5천원을 포함하면 한 상자에 5만 5천원은 받아야 하는데 두 상자에 8만원만 보냈으니 손해라는 것이다. 농사를 어렵게 지으며 땀 흘려 가꾼 농산물을 경매로 올려 보내는 것보다 싸게 사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이미 지난 경매시세로 입금한 것인데 지금 그것을 따지는 친구가 너무 옹졸하게 마음을 상하게 하여 소리를 질렀다. “야! 차액은 내가 물어 줄 테니 복숭아나 잘 보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친구도 당황한 모양새다. 내 생각으로는 친구 농산물을 좋은 가격에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싫은 소리만 하였으니 마음 한 구석이 씁쓸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물건을 중간에서 중개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는 사람은 질 좋은 물건을 한 푼이라도 싸게 사기를 원하고, 파는 사람은 보다 좋은 가격에 팔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간에서 이문을 남기고 되파는 상인이 아니잖은가. 조금이라도 양쪽에 약간의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귀찮다 생각안하고 중간에서 거래를 도와준 것뿐이다. 그런데 해보니 잘한다고 해도 한쪽으로부터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이번의 경우도 괜한 일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택배회사에 연락하여 어떻게 생물인 복숭아가 모두 썩어서 배달이 된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잠시 뒤, 친구로부터 온 전화의 사연은 이러했다. 택배기사가 월요일에 배달을 갔더니 집안에 아무도 없어 복숭아상자를 집 문 앞에 놓아두고 왔고, 복숭아를 받을 사람은 여행을 갔다가 목요일에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여 복숭아는 사흘 동안 40도에 육박하는 태양빛을 받으며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숭아가 절반정도 썩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렇게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모두 썩지 않고 반만 썩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 A에게 전화를 하여 택배기사가 배달한 것이 월요일이었고, 집을 며칠 비워 발생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A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A역시 또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기에 복숭아가 반은 썩어서 배달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나보다.
선물이란 잘못하면 오히려 아니한 만 못하는 것인데, 자신이 보낸 선물이 모두 썩은 채 도착 했다고 연락을 받았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소개한 나도 머리가 아득했는데 선물을 보낸 당사자는 어땠을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만약에 내가 선물을 받은 당사자라면 어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여행을 다녀오니 생각지 않은 선물이 도착해 있었고, 내용물이 생물이어서 썩어 있었다면, 당연히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썩은 물건을 선물할 리가 만무하니. 먼저 불만을 표시하기보다는 보내준 사람에게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는 것이 순서이다.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의 평안과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번 복숭아 선물사건은 여러 면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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