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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_신고당부군(信古堂府君) 행장(行狀)
선(先)부군(府君)에 휘는 우명(友明) 자(字)는 군 양(君亮) 본관(本貫)은 황해도풍천(黃海道豐川)으로 국자(國子)진사(進士) 휘(諱) 유(裕)의 후예이며 시조 이후로 명성과 지위 높은 이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 선(先)부군(府君)의 고조(高祖) 휘(諱) 흥길(興吉)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추증되고 증조(曾祖) 휘(諱) 언(焉)은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追贈)되고 조(祖) 휘(諱) 숙동(叔仝)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兼)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고 고(考) 휘(諱) 분(昐)은 중훈대부(中訓大夫) 행예문관교리(行藝文館校理) 지제교(知製敎) 겸(兼)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였다가 그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賛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추증되고 비(妣) 거창(居昌) 신씨(愼氏)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諱) 선경(先庚)의 따님으로 성화(成化)[명(明)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신묘년(辛卯年)(1407년) 정월 임진(壬辰) 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일찍이 부친을 여윈 뒤에 스스로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쓸 줄 알았고 점차 성장하여서는 문조(文藻)(글을 짓는 재주)가 기발(奇拔)하고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백형(伯兄)은 진사공(進士公) 우량(友良) 계씨(季氏))인 진사공(進士公) 우영(友英)과 함께 문행(文行)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삼주(三珠)(세 구슬)로 지칭 모두 진심으로 숭앙(崇仰)하였다.
홍치(弘治)[명(明) 효종(孝宗)의 연호(年號)) 11년(1498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지 얼마 안되어 모친이 별세하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의 예제(禮制)를 따르되 애(哀)와 경(敬)을 다하였고 마침 폐조(廢朝)[연산주(燕山主) 시대]의 단상령(短喪令)이 엄중하였으나 동요됨이 없이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천성이 번시 고아(高雅)한 터이라 이때부터 과거(科擧)공부(工夫)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다가 겨우 40여세에 출세하는 일과 잡다한 번뇌를 단념하고 다만 서적(書籍)을 가져 자락(自樂)하였다
부친인 교리공(校理公)이 피병(疲兵)[피로해지는 증세]로 고향에 내려와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별세한 뒤부터 생계(生計)가 넉넉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선대에서 물려받은 집을 털 것만큼도 수축하는 예가 없어 거의 무너져 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고 가사(家事)의 경리(經理)를 일체 나의 모친에게 위임 많은 식솔(食率)에 식량(食糧)이 모자라 끼니를 거르게 되어도 언제나 느긋하였다. 어려서는 조비(祖妣)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에게서 자라 특별한 사랑을 받은 터이라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많이 떼어 주려 하였으나 적극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말년에는 조그마한 당(堂)을 지어 이름을 신고(信古)라 하고는 뜨락에 매(梅)·죽(竹)·백(栢)을 그 사이에는 약초(藥草)를 가꾸었고 꽃나무 따위는 심지 않았으며 깨끗이 소지된 한 칸의 방 안에 궤안(几案)을 바르게 진열하였고 가득 쌓인 서적(書籍)도 차례가 정연하였으며 벼루와 종이 같은 것까지도 조심스레 다루었고 조금의 먼지만 끼어도 즉시 소지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반드시 맞은 지기(志氣)를 가려서 서로 교유(交遊)하였으며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모두 맞아 주었고 혹 주식(酒食)까지 내어 대접하되 형편의 유무(有無)을 불계(不計) 하였으며 배우로 오는 이가 있으면 친절히 가르쳐 주어 조금도 게을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백형공(伯兄公-우량)이 부친의 상(喪)을 만나 너무 애통해 하다가 일찍 별세한 뒤로 계씨(季氏-우영)와의 우애가 지극하여 그 거리가 좀 멀었으나 서로 오가며 묻기를 십여일 사이에 서너번씩 하였고 혹 주식(酒食)을 돌려가며 마련하여 안팎이 모여 즐기기를 한 번도 빠뜨린 달이 없었으며 혹 연고가 있어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시통(詩筒)[시를 대나무 통]을 대신 보내는가 하면 가끔 산(山)에 오르고 물에 임(臨)하여 생선을 잡고 산채(山菜)를 마련하여 천진(天眞)스러스러운 놀이로 유쾌히 마시고 읊조리면서 마음껏 즐기었다.
무인년(戊寅年)(1513년)에 모제(慕齊) 김공(金公) 안국(安國)이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엄혈(嚴穴)에 숨은 선비를 찾아내는 일로 근무를 삼다가 부군(府君)을 만나 보고 매우 존경하는 한편 당사(堂辭)까지 지어 준 뒤 안우(安遇)·노(盧)필·김대유 세 사람과 함께 조정에 추천하여 영경전(永慶殿)참봉(參奉)의 제수 되었다가 이윽고 현능(顯陵)참봉(參奉)으로 옮겨 지자 공(公)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위졸(衛卒)을 은애(恩愛)로 거느렸으니 아무리 말단 직위었으나 사람에게 준 혜택이 많았다.
이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고 나서 의(義)로운 선비를 뽑기 위하여 별과(別科)를 실시하자 시험 전날에 김공(金公)대유(大有)가 부군(府君)을 찾아와서 응시 여부를 상의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부군(府君)은 끝내 이를 다행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경진년(庚辰年)(1520년)에 봄에 벼슬을 내려놓고 귀향(歸鄕)하였다가 3년이 지난 계미년(癸未年)(1623년) 시월 신축(辛丑)일 신병으로 별세하니 연세가 53세였고 함양군 북쪽 주곡에 있는 신부인(愼夫人)의 묘(墓) 아래 자좌(子坐)에 안장(安葬)하니 이해 12월 17일이었다.
부군(府君)는 단중(端重)한 풍채(風采)에 자성(姿性)이 간결(簡潔)하고 평화로운 기색(氣色)에 언어(言語)가 강직하였으므로 누구나 바라보기만 하여도 사(私)로서 접근하지 못한 줄을 알았으며 평소에 정숙(整肅)한 의관(衣冠)으로 단정이 앉아서 부득이한 연고가 아니고는 눕거나 기대는 예가 없었으며 항간(巷間)의 예(禮) 아닌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세속(世俗)에 재리(財利) 추구를 마음속에 둔 적이 없었는가 하면 담박과 청고(淸苦)로 본분(本分)의 안착(安着)하고 간약(簡約)함을 지키어 털끝만큼도 사치스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어버이 섬기는 데는 효(孝)를, 조상 받는 데는 경(敬)을 다하고 족인(族姻)에게는 인(仁)을, 붕우(朋友)에게는 신(信)을 쌓았으며 노복(奴僕)에게는 은혜로 대하여 혹 과오를 범하더라도 바로 나무라지 않고 먼저 타일러서 듣지 않은 뒤에야 회초리를 가하였다. 그러나 외인(外人)의 비행(非行)에 대하여는 일찍이 면책(面責)한 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는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의(德義)가 더욱 깊어서 마을에서 모든 일을 다 물어서 결정하여 한결같이 존경하고 신임하였으며 아무리 부초(不肖)한 자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조심하여 함부로 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신고당(新古堂)이라 칭하였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일찍부터 시(詩) 짓기를 좋아하여 청담한 데다가 격력(格力)[5가지 시법(詩法) 중 하나]이 있었고 또 시(詩)의 원류(源流)를 탐색(探索)하여 저 당송(唐宋) 시대 것까지도 일호 틀림없이 변별(辨別)하였는가 하면 글자의 청탁(淸濁) 고저(高低)·편방(偏傍)·점화(點畵)를 모두 정밀히 해득하였고 또 해서(楷書)에 능하여 경정(勁正)한 자화(字畵)가 동진(東晉) 시대에 필의(筆意)를 깊이 체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보물로 삼았으며 저서로 시집(詩集)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일찍이 한 사람이 강경과(講經科)[경서를 회개하여 사람을 뽑는 시험]에 사용하기 위하여 경전(經傳)의 주해(注解) 옆에 점을 찍고 줄을 그어 놓은 것을 보고는 “주해(注解)도 성현(聖賢)들이 성현들의 말씀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나무랐으니 이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나 부군(府君)의 소양(所養)을 대충 엿볼 수 있다.
선(先)부인(夫人) 순흥(順興) 안씨(安氏)는 전적(典籍)[조선시대 성균관에 정육품 벼슬] 기(璣)의 따님 즉 문성공(文成公) 유(裕) 후예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고 후부인(後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생원(生員) 시민(時敏)의 따님 즉 고려(高麗)시대 정승(政丞) 한공(漢功)의 후예로 역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소생은 4남 3녀인데 장남 희(禧)는 진사(進士)로 선부인(先夫人) 소생(所生)이고 차남 진(禛)는 전동지중추부사(前同知中樞府事)이고 제3남 관(祼)은 제원도(濟原道) 찰방(察訪)이고 제4남 녹(祿)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장녀는 찰방(察訪) 임숭두(林崇杜)에게 차녀는 부장(部將) 최우(崔佑)에게 출가하여 출가했으니 역시 선부인(先夫人)의 소생이고 3녀는 행목사(行牧使) 영천(靈川)신잠(申潛, 1491~1554)에게 출가하였으나 차녀와 같이 후사가 없다. 진사(進士)[희(禧)]는 처음 병조참판(兵曹參判) 방유녕(方有寧)의 따님을 맞이하여 2녀을 두었으니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박리(朴理)에게 차녀는 현감(縣監) 최언광(崔彦光)에게 출가했으나 후사(後嗣)가 없고 승사랑(承仕郞) 양응기(梁應麒)의 따님을 맞이하여 삼남(三男)을 두었으니 장남은 사준(士俊) 차남은 사예(士豫)회이고 제3남은 사개(士价) 사계는 유업(儒業)의 종사하고 있다
진(禛)은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 안처순(安處順)의 딸을 맞이하여 칠남이녀(七男二女)를 두었으니 장남 사훈(士訓)는 진사(進士)로 별좌(別坐)[조선시대 정종 5품에 속한 벼슬]에 제수되었다가 지금은 그만 두었고 차남은 사회(士誨) 제3남은 사소(士訴) 제4남은 사악(士諤) 제5남은 사전(士詮) 제6남은 사첨(士詹) 제7남은 사심(士諗)이며 장녀는 유기(柳起)에게 차녀는 허성필(許成弼)에게 출가하였다.
찰방(察訪)[관(祼)]은 부사과(副司果) 표곤운(表晜雲)의 딸를 맞이하여 3남 2녀을 두었으니 장남은 사선(士善), 차남은 사상(士尙), 제3남은 사소(士召)이고 장녀는 강활노(姜滑老)에게 출가하였다.
녹은 경주(慶州) 이선원(李先元)의 딸을 맞이하여 2남을 두었으니 언홍(彦弘), 차남은 언수(彦壽)이다.
임찰방(林察訪)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기엄(紀嚴)은 문(文)이 있으나 요절(夭折)하고 장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양응정(梁應鼎)에게 차녀는 문위천(文緯天)에게 제3녀는 참판(參判) 윤의중(尹毅中)에게 출가하였으며 증(曾) 손자녀(孫子女)도 몇 명이 있다.
부군은 젊었을 때 일두(一蠹) 정선생(鄭先生)이 사는 마을과 이웃하였다. 그러나 선생(先生)이 서울에 있는 기간이 많다가 아는 안음(安陰)[안의]의 고을 현감으로 나가자 가끔 선생 문하(門下)의 왕래(往來)하면서 학문을 물었다 부군(府君)같이 아름다운 자성(姿性)으로 옛것을 믿고 의(義)를 좋아하는 독행(篤行)이 이미 젊었을 적부터 이러하였으니 응당 심심한 계합(契合)과 정대(正大)한 전수(傳授)가 있었으련만 워낙 아물아물하여 그 사적을 들을 수 없다. 삼가 생각하건대 부군(府君)는 초년(初年)부터 세속에 번뇌를 단절하고 담박한 데 마음을 두어 청일(淸逸)한 운치로 본지(本志)을 삼았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기송(記誦)하고 탐구(探究)하다가 중년(中年) 이후로는 성리학(性理學)에 전력, 방안에 단정이 앉아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기를 싫어하지 아니하여 그 훌륭한 입심(立心)과 제행(制行)이 소시(少時)와 노년(老年)의 차이가 없었고 가정을 잘 다스려 향리(鄕里)를 교화한 사실을 속일 수 없으니 이는 모두 독실한 학문에서 얻어진 것이련만 지금 와서 추심(推尋)할 길이 없으므로 불초(不肖)가 함부로 단정하지 못하니 아아! 마음 아픈 일이다.
그리고 불초(不肖)가 겨우 5, 6세에 구독(句讀)을 익히며 조석(朝夕)으로 모시고 있을 때 부군(府君)이 중용(中庸)과 매암선생(梅庵先生)[주희(朱熹)]의 잠명(箴銘)·발어(跋語)을 손수 써 주며 외고 익히게 하되 발어(跋語) 뒤에 쓰인 이름을 이름은 휘(諱)[성현(聖賢)의 이름을 읽거나 부르지 않는 것을 이름]하도록 하였고 지금 남은 유첩(遺帖)[성현의 글을 필첩으로 쓴 것을 이름]에도 그 이름을 빼고 년조(年條)만 쓰여져 있다.
또 기억하겠는데 불초(不肖)가 혹 장난을 칠 적에도 즉시 꿇어 앉도록 하였고 혹 발길로 책을 밀칠 적에는 그 책을 머리에 이게 하여 시각이 지난 뒤에야 내려놓도록 하였으니 어릴 적부터 바른 것을 가르침으로써 가문(家門)의 전수을 엄격히 하려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부군(府君)을 여윈 뒤로는 중도에 방황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였고 이미 장성하여도 선훈(先訓)에 분발하지 못한 채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마침내 내놓을 만한 것이 없게 되고 말았으니 선훈(先訓)을 떨어뜨린 무상(無狀)한 죄를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는가.
또 부군(府君)이 별세(別世)한지 벌써 50여 년이 되었고 불초(不肖)가 국은(國恩) 입어 벼슬길에 나온지 지금에 이르도록 부군(府君)에 몇 묘표(墓表)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아무리 모든 일에 그 시기가 있다고 하지만 태만하고 불경스러운 죄가 너무 크다. 지금 부군(府君)에게 종이품(從二稟) 품계(品階)에 참판(參判)으로 추증되었고 또 비(碑)를 세워 덕(德)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보여야 당연한 일인데 불초(不肖)가 늦고 병들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부군(府君)의 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망극(罔極)한 생각을 펴지 못하고 말까 매우 염려되므로 감히 세계(世系)와 행적을 서술하여 이 다음 집필자(執筆者)의 채택에 대비하는 바이다.
아아! 부군(府君)같은 아름다운 학행(學行)과 덕성(德性)이 조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이것밖에는 더 기록할 수 없고 또 불초(不肖)가 정신을 상실하여 백형(伯兄)에 생존 당시에 부군(府君)의 사적을 물어 서술해 놓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그 줄거리만을 표현하였으나 거의가 전문(傳聞)과 예상(豫想)에서 나온 것이고 또 일행일사(一行一事)를 낱낱이 지적 표시하지 못하여 빠뜨린 부분이 많으니 불초(不肖)의 아픈 마음이 더욱 그지 없다. 그러나 이미 서술된 부분에 대하여 불초(不肖)가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없는 사실을 거짓 만들어내는 것은 도리어 효(孝)가 아님을 알거니 어찌 구차히 말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만력(萬曆)[명(明)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3년(年)[1575년] 윤(閏) 12월에 고(孤) 진(禛)이 삼가 서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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