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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중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더위로 아마 힘드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장마가 끝났나 했더니 또 비가 많이 와서 힘드셨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구름도 지속되지는 않는 것처럼 이제 4일만 있으면 여름도 끝인가 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인생 7계명을 보았습니다. 거기 보니까 첫째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보람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평생을 통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이에게 애정을 갖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자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함 고마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추억 갈피에서 많이 들추어내어 그것을 반추하면서 사는 사람이 성공적으로 기억을 관리할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강의가 뜻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소개 받으신 대로 대한민국의 거장이신 일랑 이종상 박사님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십니다. 지금보시는 것처럼 30대에 오천 원 권을 그리고 34년 만에 5만 원권 신사임당을 그리신 세계 초유의 뵙기 힘든 분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좋은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작품 5만 원권과 5천 원권 늘 가정에 많이 들어오시도록 그 화폐를 직접 그린 작가가 일찍 여러분들을 찾아뵙고 축복을 드리는 덕담을 여러분들이 직접 들으셨으니까 여기 나오신 모든 분들은 아마 3대 부자가 나올 것으로 봅니다.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했고 서울박물관장, 미술관장도 했고 정년퇴임한지 6년째입니다. 그런데 재직 때보다 더 강의가 많아졌습니다. 오늘 이곳에 와서 강의를 여러분들에게 한다는 것은 매우 저에게 부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가 강의를 안 나간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판검사 중 내 강의를 안 들었다면 사법연수원을 안 다닌 겁니다. 제가 법미학 강의까지 했습니다. 외무고시 패스하면 제 강의를 듣습니다. 행정고시 패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모레 그 강의가 수원에서 있습니다. 국방대학원도 제가 강의를 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를 다루시는 한국경협에도 제가 이병철 회장님 계실 때 조찬강의를 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저 화가가 참 이상하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데 초청 받아서 나가나'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언제 작품을 그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식사 하면서 내 강의를 듣듯이 저도 본업을 합니다. 분명히 본업에서 느끼고 체득한 것을 강의합니다. 책 보고 남에게 옮겨 주는 강의는 제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서 강의를 하는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이것도 창의력입니다. 제가 일어나서 강의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제 강의를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나이 72세에 여러분들 앞에 일어나서 강의를 합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지금 박수치신 분은 6대 부자가 나옵니다. (웃음) 추가로 치면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창의력, 순발력이 있는 분이거든요. 여러분들 여기 제가 잠깐 원탁 테이블에 앉았는데 저는 엄청난 강의를 듣고 갑니다. 그래서 강의의 귀재들, 강의로 전업을 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 앞에서 강의를 해라 이건 저에게 형벌입니다. 여러분들은 강의를 하시는 분이지 들으시는 분들은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모인 학부형들 대단히 칭찬 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 강의를 나가지만 이렇게 잘 모이고 저는 지난번에 모르고 이 시간에 불쑥 들어왔다가 도로 나간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섭섭했지만 어쨌든 그때도 지금처럼 많은 분들이 모이신 것을 가면서 '참 창의적이고 독창적이고 좋은 곳이구나'그래서 오늘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가 늦을까봐 여기에서 잤습니다. 이런 정도의 성의를 제가 들여서 여러분들을 만난 강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까지 여러분들을 찾아오게 만들고 곁에서 자게 만들고 이런 분이 계십니다. 서울포럼의 이재영 운영위원장님. 그리고 그 옆에 앉아계신 김태희 회장님은 사실 중국에서 제가 뵈었는데 여기에서 또 뵙네요. 아마 그동안 여러분과 저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이메일, 홈페이지 수도 없이 저와 거의 매일 교신을 하고 소통을 해 왔습니다. 제가 혹시 어딘가로 달아날까 그랬는지 그래서 제가 꼼짝도 못하고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덕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는 제 모습은 필요 없거든요. 이건 독창적이지 못해요 제 모습은 제가 배우가 아닌데 봐서 뭐합니까? 이걸 왜 가지고 나왔느냐하면 이 앞에 돈 그린 거, 저는 돈 그리는 화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요즘 돈 그리는 화가라는 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는데요. 그런데 5천원을 그렸을 때 제가 30대 중반인가 그랬었는데 그때 가는데 마다 사인해달라고 그러고 돈 그린 작가라고 하는 바람에 제가 어디에도 강의를 가지 않았습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모르실겁니다. 제가 돈을 그린 것은 우리나라에서 어진을 그린, 임금님의 얼굴을 그린 어진을 그리는 독특한 기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교육계에 다 계시지만 제가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점묘법 누구 생각납니까? 미술시간에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쇠라?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잘못 교육 시키고 있습니다. 점묘법을 쇠라가 그릴 때 그 아버지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고려 불화에서부터 점묘법이 있다는 것 아십니까? 아마 거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미술선생님이 계시면 우리는 교단에서 나는 해방교육 1세대입니다. 저부터 '가갸거겨'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어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미술교육을 배운 것이 서양미술교육을 배웠습니다. '생각하는 사나이'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로댕. 백이면 백 다 그렇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댕의 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각하는 사나이' 그것을 우리는 금동불상으로 만든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국보 78호!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이것을 막대기에 새겨 가지고 백제시대에 일본에 갖다 전해 주었더니 일본 국보 1호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백제시대에 생각하는 사나이가 일본의 국보 1호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우리 민족 대단한민족입니다. 창의력, 디자인. 왜 디자인입니까? '의장'입니다. 왜 외래어를 써야 합니까? 내가 그걸 따졌더니 우리 학교에서 디자인과를 바꿨습니다. 응용미술 과였는데 디자인과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결사반대 했습니다. 고구려 벽화부터 있었는데 꽃꽂이가 고구려벽화부터 나오는데 어떻게 외래 말을 쓰느냐고 했더니 '한국에 무슨 디자인이 있느냐'고 그래요 이런 사람들이 디자인 하는 디자인이 어떤 디자인일까요? 여러분들 자제분 교육을 이런 식으로 디자인을 시켜 보십시오. 낳기는 문화 DNA는 여러분들이 만들어 놓으시고 생리학적 디자인과 다른 사대주의에 몰입해 하는 디자인을 여러분 자녀에게 교육시켜 보십시오. 악담에 가까운 겁니다. 어떨까요? 외모는 한국 사람인데 속은 외국인도 아니면서 외국인인 척 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국에 수 없이 돌아다닙니다. 이런 사람이 나라망신을 외국에 시키고 돌아다닙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내가 오늘날 루브르 미술관에 전 세계에서 살아있는 화가가 초대작가로 개인전을 한 최초의 작가입니다. 돈을 그린 생존 작가가 아닙니다. (박수)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은 세계 최고의 자녀분들을 두실 분들입니다. 뭔가 소통하니까 나는 제자에게 항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너무너무 훌륭합니다. 뭐가 그러냐? ‘늙었다’와 ‘낡았다’는 것 여러분들 어떻게 구분을 하십니까? ‘문화’가 무엇이고 ‘문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우리나라에 ‘자동차 문명은 있으나 자동차 문화는 없는 것’아십니까? 그런데 고구려 시대에 자동차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 글을 읽으셨다면 '아하'하고 무릎을 치셨을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 연구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오해를 받아서 60년대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할 때 대학교 갓 졸업하면서 저는 '아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하', 그게 창의력입니다. 이게 우리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교육시켰습니다. 바로 이것이 필름에 나오는데 딱 잘라버리고 저에게 이야기하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냥 이야기합니다.
창의력이라는 것은 학부형들 많이 계시니까 여러분들 자제분을 창의력 있는 아이로 만들어야겠다고 창의력 강의를 하십시오. 다 소용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한 말씀 한 말씀 원효가 해골바가지의 물을 먹고 '아하' 리액션을 했듯이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본뜨는 것을 보고 부력을 발견했듯이 뉴턴이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듯이 여러분들 창의력이라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에서부터 우연히 나옵니다. 그러나 그 우연은 필연입니다. 절대 우연은 없습니다. 또 하나 꼭 체험으로 말씀드릴 것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돈어, 점수라는 게 있다는 것 다 아실 겁니다. 지금 사찰에 가면 아직도 싸우고 있고 이가 먼저냐 기가 먼저냐 조선시대처럼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이가 먼저 입니까? 기가 먼저 입니까? 이런 쓸데없는 논쟁이 필요 없는 것이 이어령 선생님이 얼마 전에 창조학교를 만드는 것 신문에서 보셨을 겁니다. 오죽 우리나라 교육이 창조교육을 따로 이어령 씨가 따로 '창조학교'라는 것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분 무식하고 학교 교육 못 받은 분 아닙니다. 그런데 오죽하면 창조교육을 시키는 멘토와 멘티가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었겠습니까? 전국에서 각 분야의 가장 전문적인 7명이 그 안에 멘토로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미술 쪽에 제가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예술학교의 멘토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이라는 것은 창조교육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어려서부터 학부모님들이 아이들 교육을 주입식 교육으로 이미 바꾼 지 오래입니다. 다시 이게 학교로 가서 연장 됩니다. 이래서 서구의 실용주의 교육이 지금 교단에 만연 해 있습니다. 내가 그 교육을 배우고 지금까지 큰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내가 큰 지금 이런 작가가 된 이 원천의 힘이 학교 교육이었는가 여기 '박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화가도 박사가 수두룩하고 천지입니다. 미술대학에서 박사 막 만들어 냅니다. 취직이 되어야 하니까. 저는 그런 박사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서울대학교의 박물관장은 하지 않습니다. 3대보직의 하나입니다. 서울대학의 박사는 이병도 박사, 김원룡 박사, 우리나라 학계를 움직이는 분들만 하는 보직이에요. 총장보다 더 알아주는 보직입니다. 총장은 행정직이지만 그 보직은 학문보직입니다. 자기의 전공을 살리는 학문적인 보직입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인문대학이 항상 독차지하는 역사 깊은 서울대 박물관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박물관에서, 남북한이 아무도 못하는 중앙박물관에서도 해보지 못하는 동북공정 나오기 3년 전에 제가 북한을 다녀와서 고구려 전람회를 서울대학박물관에서 했다는 사실 아십니까? 이거 창의력입니다. 제가 학교 교육을 받아서 이걸 했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냐 아닙니다. 돌아가셨습니다. 6.25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11살 때 입니다. 11살에 아버지를 여윈 내가 여러분들 앞에서 아버지 교육을 이야기 해? 이게 가정교육입니다. 무서운 겁니다. 저는 6.25때 참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6.25전에 서울 성광국민학교를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주 괜찮은 학교였습니다. 내 동기동창이 과기처장관 하던 정근모입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그 친구 아버지입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때 그 학교 육성회장이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 명동에 있는 삼천리전기 전구를 만들어내는 사업가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소원은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응로 씨와 일본으로 야반도주를 하다가 총각때 붙들려서 약국집 한의사 딸 부잣집에 장가를 강제로 들여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창조력입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제가 11년을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제가 있었고 그 어마어마한, 화가로 태어났다면 평생의 소원인 루브르 미술관에 작품 한 점을 가지고, 어떤 작품 입니까? 강화도 마니산을 그린 높이 6미터에 길이가 자그마치 72미터인 한 폭짜리입니다. 이걸 가지고 가서 프랑스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127만 명의 전 세계인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온통 르몽드지 휘가로지 도배를 하고 왔습니다. 해를 넘기면서 세 번의 앙코르를 받았습니다. 그 작품 못 떼어 간다고.. 나중에는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작품을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에 모나리자와 함께 영구히 전시하겠다고 합니다. 거저라도 주고 싶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시시한 박물관에 소장한 것 청와대에 소장한 것까지 경력에 쓰는데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한다는 것 어떻습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저는 반대 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준다고 그러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빌딩 하나를 사고 남는 돈입니다. 여러분들 자제가 이런 제의를 받았다면 가문의 영광이고 빌딩이 생기는데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아니, 여기 있는 분들 말고요. 그런데 저는 창의적인 기지를 발휘 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 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돈 한 푼도 안 받고 루브르에 영구 비치해 드리죠.’ 그랬더니 아주 좋아합니다. 단 한 가지 제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그게 뭐냐 ? 당신들이 9명의 선교사를 죽였다고 해서 강화도에 극동함대가 쳐 들어와서 강화성벽을 무너뜨리고 강화도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국보급인 외규장각 도서를 싹쓸이 해 갔습니다. 훔쳐 갔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책 안 읽기로 유명한 나라가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전 세계에서 금속활자 책을 제일 먼저 만들어낸 나라라는 것은 여러분들 잘 알겁니다. 직지심체요절입니다. 이것은 좋은 종이 좋은 잉크 좋은 활자 없이는 도저히 전 세계인들이 상상도 못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이를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발견 했느냐 중국에 환관 채륜이라는 사람이 발견했다고 배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결지 밖에 못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무결지로는 책을 못 만들어 냅니다. 압력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고 프랑스를 깜짝 놀라게 한 우리나라의 장지입니다. 그 장지가 여러분들 집에 가면 지금도 카펫으로 깔고 자는 장지판입니다. 장자 돌림입니다. 하도 질겨서 장할 장자입니다. 장판지 위에서 자고 장판지 위에서 우리는 가야 되는 운명입니다. 장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장한 민족이라는 겁니다. 이런 걸 아이들에게 가르쳐야지 뭐를 가르칩니까? 아이들에게 돈 많다는 거예요? 경제 성장한다는 것? 소용없는 짓입니다. 저는 그런 교육을 어려서 배웠습니다. 누구한테? 아버지한테. 어떻습니까? 미술시간에 가면 점묘법은 쇠라,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고 이런 의식을 가지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툭하면 '디자인' 툭하면 '창의력' 이것 부르짖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지금 과외 때문에 야단이고 과외를 못하게 하고 사교육비 운운하면서 '사교육 사교육' 하는데 사교육을 받아야 될 대상은 여러분들의 자제가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라는 사실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오늘 좀 느꼈으면 합니다. 정말 제가 이 늙은이가 하소연을 합니다. 우리 집에 와 보시면 알지만 대 가족입니다. 손주도 있습니다. 외손주 친손주 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박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전부 교수들인데 한 집에 삽니다. 완고하다고요? 내 강의를 매일 조석으로 그래서 생활화해서 듣기 때문에 그리고 교단에 가서 서라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다고 잡지사에서 자꾸 취재를 옵니다. 세상에 할아버지가 손주들 데리고 사는 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여러분들 지금도 믿지 않을 겁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집에서 데리고 살지 몰라도 이렇게 딸하고 사위 외손주까지 집에서 데리고 살까 여러분들 그런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집은 작은집 아니거든요 연립주택을 통째로 샀어요. 여러분들 저하고 마주봐도 3대 부자 소매 끝만 스쳐도 3대 부자 나온다는 것 조선일보에서 안 읽었습니까?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조선일보가 한 게 아니고 조선시대부터 했습니다. 외국에도 돈 그린 사람하고 소매 끝만 스쳐도 3대 부자가 나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돈 얘기 또 해서 죄송한데 이렇게 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지금 아이들에게 '너희들 그만 밖에 나가서 살아라. 손주 보기 니 엄마 힘들다' 그래도 나가지를 않는 겁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세요? 우리 손주 아이들 사위 자식 한 번도 저는 레슨비를 내고 사교육을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오히려 사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 사람과. 그런데 지금 학부형 이야기 들어보면 애를 사교육의 대상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거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틀립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틀린다고 답이 나와야 됩니다. 왜? 적어도 여러분들은 내 강의를 몰입해서 들으시는 분들 태도를 보아서 분명히 여기 계신 분들은 열외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 가서 강의를 하면서 소통 하면 저는 평생 강의를 했기 때문에 지금 저 뒤에서 어느 분이 빨리 가야 되는데 화장실 가야 되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 안 보이는 것 같죠? 여러분들은 어둡고 저쪽은 밝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끝에서 끝이 안 보이는 72미터 자리에도 점 하나만 내 제자가 삐뚤어지게 건드려 놨어도 저는 발견해내는 사람입니다. 형상에 대해서는 저를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훈련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하면 제 작은 눈에 여러분 한 분 한 분 숨소리까지 듣고 강의를 합니다. 저 분이 뭘 궁금해 하는 구나 저 분이 지루해 하는구나. 다 소통하고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가 돌아갑니다. 사실 창의력이라는 것은 강조 되는 것이 아니고 '아하' 리액션에서 나온다는 것을 결론처럼 말씀드립니다. 이건 제 경험입니다. 지구가 무슨 힘에 의해서 자전이 되고 공전이 되느냐? 아마 신이 있으면 하느님의 '아하' 리액션 일겁니다. 그 하느님의 창조의 모상을 닮아서 인간이 하느님을 닮기 위해 종교를 갖습니다. 그래서 나는 차마 '창조'라는 말씀을 못하고 '창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타이틀을 보십시오. '창의력'입니다. '창조력'이 아니고. 그렇지요? 내가 '창조'가 아니고 '창작'이듯. 우리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은 '창의력'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교육에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순전히 그것은 집에서 여러 학부형들의 몫입니다. 교단에서는 교과서 밖에서의 몫입니다. 저는 평생을 창의력 교육을 해 가면서 실험을 해 보았더니 활자 속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찮은 곳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살다 보면 의문도 많고 의혹도 많습니다. 금방 여기 둔 핸드백 어디 갔지? 저놈이 훔쳐갔나? 오늘 남편이 들어오는데 연속극 봤더니 늦게 들어오면서 못된 짓 하고 들어와서 집에 들어가서 왜 이렇게 늦었어? 하니까 '아, 친구 초상집에 갔다'고. 그 연속극이 막 끝나기 무섭게 남편이 들어와서 '왜 이렇게 늦었어? 초상집에' 우연의 일치로 그것은 의혹입니다. 글씨를 쓰다가 '한문으로 이걸 어떻게 쓰지?' 옥편 빨리 찾아보시는 것 의혹입니다. 요즘 인터넷이 하도 좋아서 지금은 사전 찾지 않습니다. 옥편을 제대로 부수를 찾아서 들어가는 아이면 엄청난 실력이 있는 아이가 아니고서는 옥편을 가지고 못 찾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듣고 사전 교육을 시키지 말고 자제분들한테 가서 '얘야 무슨 자 옥편에서 찾아봐라' 이야기해 보십시오. 옥편에서 찾는가 아마 얼른 찾아오는 애 뒷조사 해 보면 '음'에서 찾았을 겁니다. 그 다음에 조금 머리가 있는 아이는 '부수'에서 찾았을 겁니다. 획수에서 획수를 찾지 못합니다. 서예를 배우지 않아서 그러니까 구조가 창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의혹을, 지금은 아예 사전도 안 봅니다. 컴퓨터 앞으로 달려갑니다. '뿅'하고 달려가서 써옵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리포트를 써내라' 하면 짜깁기의 명수입니다. 대학생 우리아이들 모두 다 짜깁기의 귀재에요. 인터넷에 들어가서 딱 '창의력' 치면 좍 나옵니다. 이것을 여기저기에서 전부 뜯어 가지고 토씨만 바꿔서 제 말처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귀신 같이 알아내는 사람이 참 스승입니다. 이거 모르면 아이들 창의력 교육 못시킵니다. 제가 귀신 같이 그걸 알아냅니다. 그러면 저를 보고 그 숱한 인터넷 지식을 다 외웠느냐고요? 아니에요. 인터넷에 나오는 것, 전혀 다른 사람의 사고에서 중간에 접착제로 붙인 그런 글은 내가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 글의 내용을 형상화 시킬 줄 알면 읽혀집니다. 그런데 제가 결론을 말씀드리면 의혹은 바로 푸십시오. 여러분들 인터넷 들어가도 좋습니다. 어른들에게 물으셔도 좋습니다. 의심나면 '당신 오늘 왜 늦었어?' 물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가방 네가 안 훔쳐갔어?' 다 물어도 좋습니다. 의혹은 푸세요. 우리나라 말 참 조심해서 들어야 됩니다. '풀다'와 '품다' 비슷한 말입니다. '의혹을 풀어라. 의문은 품어라.' 여러분들 '아하' 소리가 들리네요. 내 귀에. 분명히 '아마 맞아.' 들렸습니다. '아하' 소리를 하신 분 창의력 교육을 충분히 시키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이 왜 돌아가느냐 왜 오늘날 우리가 경제발전을 하고 지금 이 정도 살고 있느냐 '아하' 소리를 수도 없이 지르는 분들의 원동력에 의해서 창의력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오늘날 나도 여러분도 여기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겁니다. '아하' 리액션 강의를 목이 터지게 해도 '아하' 소리가 안 나오는 겁니다. 습관이 되지 않아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겁니다. '아하' 소리를 당장 오늘 사전을 보세요. '아하' 아주 간단합니다. '아하'가 무엇인가. '아하'는 우리나라 말에서 무엇을 깨닫거나 알았을 때 '아하'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영어로 '아하'를 쳐 보십시오. 다른 말에서 보시면 거의 만국 공통어 입니다. 이 만국공통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부터 깨달음의 리액션으로 만든 겁니다. '아하' 소리를 지르지 않는데 어떻게 창의력이 나옵니까? 설거지를 하다가 방을 닦다가 장판지를 닦다가 '아하' 리액션을 내지를 수 있는 사람이 세계를 움직이는 겁니다. 뉴턴도 아르키메데스도 아인슈타인도 '아하' 소리를 수없이 질렀다는 자서전을 봤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하' 소리를 지른 것 이야기할게요. 내가 미국에 가서 미술 교과서에 보면 폐차된 자동차를 콘크리트처럼 쌓아서 어마어마하게 높이 쌓아서 탑을 만드는 독일의 작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저와도 가깝습니다. 백남준이 안젤름키퍼, 머스 커닝햄 그런 사람들하고 TV를 가지고 번쩍번쩍한 작품을 하고 있을 때 같은 친구입니다. 프랑스에서 저와 전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황당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합판에 붙인 것이 전후에 독일에서 나온 쓰레기입니다. 연탄재 골목에 많았지요. 지금은 안 쓰지만 그런 연탄재와 같은 쓰레기였습니다. 그것을 본드로 덕지덕지 발라놓고 뉴욕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 작품 하나가 우리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독일의 쓰레기가 그렇게 비쌉니까? 그때 저는 기념이 될까 해서 내가 아는 친구이고 해서 제가 바람이 흔들흔들 사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밀집 하나가 뚝 떨어지기에 '야, 이거 기념이 되겠다'해서 얼른 가서 그걸 주우려고 허리를 반쯤 굽혔는데 벨이 좍 울리면서 저한테 사람들이 모이는 겁니다. 모여서 '그것 그 자리에 놓으라'고 합니다. 제가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영어도 서툴고 갑자기 당황하니까 아무 이야기도 안 나오는 겁니다. '쏘리' 조차 안 나오고 벌겋게 되어서 그 자리에 놓으니까 조금 더 좌측으로 놓으라고 합니다. 그쪽에 놓았으면 되었지 막 집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때 전람회 보지 않고 왔습니다. 공항에 오면서 계속 태평양을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너 독일 쓰레기를 아파트 값 하나 받아? 이종상이라고 못할 것 없어.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다.' 이 머리에서 창의력이 짜진다고 치약 짜듯이 나옵니까? 아하 소리가 의문을 품은 것이 없는데 점수를 안 했는데 어때 돈어가 나옵니까? 들어와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일체 커피 한 잔도 필요 없으니까 내문 불문율이에요 화실에 한번 들어가면 절대 냉수도 떠 가지고 나를 방해하러 못 들어옵니다. 우리 가족 모두. 내가 횡사를 해도 며칠 후에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 생활을 합니다. 들어가서 며칠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누라가 어떻겠습니까? 걱정되지요.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니까 열쇠구멍으로 제가 보여야죠. 머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밖에서 노크를 하고 싶어도 노크도 못하고 열쇠구멍으로 오랜 동안을 계속 들여다봤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내가 미친 짓을 하는 겁니다. 무슨 짓이냐 무언가 방바닥을 긁으면서 오려내는데 내가 만든 장판을 면도칼로 오리고 또 오리고 하면서 둘둘 말더라는 겁니다. 그게 열쇠구멍으로 보인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내 남편이 미쳤구나.' 그래서 '펑-' 주저앉는 소리가 어디선가 났어요. 열심히 오리고 있는데 우리 마누라가 뚱뚱 하거든요. '펑'하고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뭐가 떨어졌나 하고 문을 열었는데 아직도 안 일어나고 문이 열리지 않아요. '당신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당신 괜찮아? 왜 그걸 오리고 있냐' 그래요. 제가 그때 '아하' 소리를 지르고 오리기 시작한 거예요. 아무리 프랑스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싶어도 전 세계에서 종이를 깔고 살고 물걸레질 하고 사는 종이를 카펫으로 삼고 사는 민족이 아프리카도 좋고 어디든 좋으니까 여러분들 여행 많이 다니셨죠? 있는지 한번 보세요. 전 세계에. 아, 중국에 있습니까? 없다고 그럽니다. 중국 통이 말씀하셨습니다. 중국에 종이 깔고 사는 문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문화는 중국 것이 아닙니다. 종이를 깔고 구들을 놓고 밑에서 불을 때는 온돌 문화는 고구려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고로 동북공정은 싸움 할 것도 없이 우리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먹는 시루떡 시루 문화가 고구려에서 왔습니다. 자동차 베어링 고구려에서 왔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김장 담그는 것 고구려 문화입니다. 젓갈 고구려 문화입니다. 영종도에서 고구려 젓갈 기지창을 발견 했습니다. 고고사팀을 이끌고. 그래서 '활주로를 그리 내지 말라' 해서 활주로가 그쪽으로 확장하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고구려의 문화가 여러분들의 문화입니다. (박수) 종이를 깔고 자는 민족이 도대체 우리 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한 민족이에요. 그래서 제가 흔적을 봤더니 여러분들 오늘 가서 다시 보세요. 카펫이라고 생각하고 장판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 걷어내고 비닐을 까신 분 많을 거예요 천추에 후회를 하실 겁니다. 집안에 내려오는 엿 갖다 바꿔 먹고 이발소 그림을 사다 놓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장판은 아이들 정말 사교육을 기가 막히게 시킬 수 있는 소재라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장판 하나 가지고. 제가 장판을 봤더니 아, 이거 내가 할머니한테 배워서 장판을 3년 전에 내가 만든 거거든요. 거기서 면도칼질하고 별의별 그림을 다 그리다가 보니까 문갑을 놓았던 자리를 치웠더니 거기는 마치 현상 한 것처럼 빛을 안 받아서 굉장히 노랗더라고요. 기막힌 그림이다. 여기 터치 하나하나는 전부 내가 그린 겁니다. 아무도 그 방에 들어온 사람이 없어요. 제가 3년 동안 내가 그린 내 작품입니다. 지금 그걸 다 뜯어내어서 연탄재하고 장판재하고 둘둘 말아서 쓰레기 치우는 사람 가져가라고 골목에 내어 놓고 있는데 이거 빨리 오려서 그림을 하나도 안 그렸어요. 내가 3년을 그렸는데 무슨 그림을 거기에 또 그립니까? 그게 내 생활인데 사인을 해서 갖다 내었습니다. 세계에 제일 큰 미술관이 루브르 다음에 그랑 어마어마한 큰 미술관이 있습니다. 전 세계의 미술견본시장입니다. 거기에 '꼬레'라는 한국최초의 부스를 얻어서 전시를 했어요. 그때 백남준이 내 건너편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부스 이름이 어땠을까요? 나처럼 '꼬레아'라고 썼을까요? 분명히 '도이치'이었습니다. 사람은 한국 사람인데 도이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형님 왜 도이치라고 붙였습니까?' 했더니 '내가 국적이 거기니까.' 저는 그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 내가 국적 안 바꾸기 정말 다행이다.' 한국화가들 외국부인을 얻든지 국적을 바꾸든지 하지 않으면 세계화될 수 없다는 생각. 이거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나는 와룡선생입니다. 나는 유학 한 번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박사'입니다. 대한민국 인문학 최초의 화가로서 최초의 박사입니다. 내가 이 박사 학위를 하기 위해서 저는 미술대학 나왔지만 다시 인문대학을 학사부터 했습니다. 내가 박사를 했을 때 명함에도 못 넣어 다녔습니다. 너무너무 흉을 봐서. 무엇 때문에 그따위 짓을 하고 다니냐고 스승한테 혼났습니다. 내가 학위를 최종적으로 딸 때는 서울대학교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최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습니다. 어쨌든 장판지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좋은 곳에서 전시를 했는데 아까 이야기 한 안젤름키퍼와 같이 전시를 했습니다. 여전히 자기들은 쓰레기 가지고. 그런데 사람들이 그쪽 보다 내 장판지에 관심이 많아요. 내 장판지에 다 와서.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내가 있을 때 물으면 좋은데. 독일어를 못하지만 통역을 불러서 해줄 텐데 화장실을 꼭 거기 와서 묻고 내가 오면 가고 그래요. '저 친구 자꾸 와서 뭐 묻나?' 그랬더니 '이게 비닐이냐 유화냐?' 뭐냐고 묻는데요. 오라고 해. 그래서 불렀습니다. 아까 거짓말 하는 것이 제일 안 좋다고 들었죠?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이야기할게요. 창의력 얘기입니다. 불러서 왔습니다. 묻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그림을 제일 먼저 세워 놓고 그렸느냐 눕혀 놓고 그렸느냐 방 하나가 얼마나 큽니까? 호 수로 따지면 엄청나게 크죠. 이젤에 놓고 그리기 어려우니까. 눕혀 놓고 그렸다. 아주 간단하게 대답 했습니다. '이게 캠퍼스냐 비닐이냐? 캠퍼스이다. 재질이 뭐냐 페이퍼 종이다. 무슨 종이냐? 한국에만 있는 종이다.' 그대로 묻는 걸 대답한 것입니다. '색깔은 무슨 칼라를 썼느냐 치자물이다.' 그랬더니 통역하는 놈이 '치자'가 독일어로 뭔지 몰라요. 우리끼리 막 이야기를 하니까 이 사람이 의혹이 생기는 거예요. 자기 흉보는 줄 알고 가려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알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했더니 '판타지아' 이상하다? 어떻게 치자가 노란 물을 만들어내느냐 시간이 얼마나 걸렸냐고 해서 '꼭 3년 걸렸다'고 했습니다. '붓은 뭐로 그렸냐'고 하기에 제가 뭐라고 대답 했겠어요? '바디페인팅, 내 몸으로 그렸다. 눕혀 놓고 내가 드러누워서 등으로 그렸다. 판타지아 그러면서 막 달아나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얘기를 하니까 안 믿고 안 가르쳐주려나 보다 하고 도망 가버리는 거에요. '저 사람 다시 불. 아주 중요한 것 하나 안 물었어. 다시 불러'라고 해서 다시 왔어요. '이거 내가 이야기 해 준 대로 아무리 해봐야 이런 간지가 안 나오니까 한 가지 통역을 해 달라' 그랬더니 '밑에서 따뜻하게 불을 떼야 한다'고 전해줘라. 그 이야기를 했더니 완전히 자지러지는 겁니다. 어떻게 그 큰 것을 놓고 밑에서 따뜻하게 불을 고르게 떼느냐? 바로 이 한국의 촌스러운 온돌 문화가 북유럽에 가서 돈 벌고 싶으면 온돌장사를 해 보세요. 빨리. 거기 각장장판을 만들어주세요. 니스 바르지 말고 순수하게 호흡을 하게. 최고의 위생입니다. 이게 선풍적인 인기입니다. 전부 라디에이터 뜯어내고 바닥 온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돌에 카펫을 까는 것을 보고 'No. 장판을 깔아라.' 그 그림을 지금 미국 농장주가 사갔습니다. 내가 3년을 쓰다가 바꿀 때가 되어서 쓰레기로 오려낸 것이 얼마를 받았는지 아세요? 액수 이야기하면 놀라시니까 그때 우리 큰딸 시집보낼 때에요. 시집보낼 때인데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더라고요. 딸 시집가는 데 그렇게 돈이 들어가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돈이 딱 온 겁니다. 그것 판돈이 온 겁니다. 어차피 버려야 할 쓰레기 판돈이 온 겁니다. 왔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내가 마누라 불러서 얘기를 했어요. '여보, 이거 내가 우리나라 쓰레기를 판돈이니까 단돈 10원도 1달러도 원료 수입하지 않은 거야. 이거 가지고 내가 외화를 벌어 왔으니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딸을 위해서 다 써.' 하고 줬습니다. 지금도 놀려요. 사위한테 '얘 장판지 한 장으로 시집간 아이야.' 내가 그것을 발견할 때 수 없이 의문을 품고 있다가 '우리 자생문화는 뭐냐? 남이 가지지 않는 것이 뭐냐?' 수 없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문득 고개 숙인 나에게 나의 흔적인 그 흠집이 많이 나오는 새로 하려고 생각했던 그 장판지를 보고 나는 '아하' 소리를 지르면서 면도칼로 오려내기 시작한 겁니다. 평소 품은 창의적인 것이 부화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암탉이 계단을 품듯 '의혹은 풀어라 의문은 품어라' 그리고 '아하 리액션을 해라.'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이럴 수 있는 아이라면 앞으로 사교육 필요 없습니다. 활자를 보면서 책을 하나 주면 수 없이 '아하' 하면서 책을 탁탁 치면서 느끼는 것을 봅니다. 수학책을 보나 안 보나 문틈으로 감독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교육시킬 때 '너는 그림만 그리고 공부를 안 하냐는' 말을 노인네가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박사를 만든 겁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여러분들도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홍성에서 제일 먼저 뾰족구두 신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뭐라고 했느냐? '종상아. 그런데 어머니가 나에게 뭐라고 하시냐면. 속으로 부글부글 끓으셨겠죠. '얘, 종상아. 너는 웬종일 질리지도 않냐 그림 공부만 하게.' 이거 그냥 나온 소리 아닌 것 같거든요. 여러분들 대개 '야 그림 그만 그리고 공부 좀 해.' 이런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대요. 나는 그런 소리 안 들었고 내 자식한테도 장난하든 놀든 다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의 의미가 뭡니까? 이거 당장 가서 찾아보세요. 공부는 생활이에요. 국그릇을 어디에 놓고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 다 공부입니다. 그런데 너는 웬종일 질리지도 않니? 그림 공부만 하게. 궁금한 것이 뜯어보지 않는 사람은 발전이 없다. 집안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뜯으라고 공구를 사다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 뜯어 본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하' 소리가 계속 내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부모의 교육이 천년을 가는 거예요. 자식들에게 또 물려주니까. 또 물려주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도 국전의 가장 높은 심사위원까지 올라갔는데 어머니가 항상 나한테 '그림공부'라고 했는데 왜 나한테는 박사가 없을 때 '미술에는 박사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항상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그래서 미술대학을 나오고 다시 박사가 있는 인문대에 가서 철학공부를 했어요. 그 수모를 당해 가면서 이거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 아니거든요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학부형도 되어 보고 서울예술고등학교 선생도 하고 그 학교에서 학부형도 되어 보고 그 학교 재단이사도 했습니다. 학교도 운영 해 보고. 저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학교 운영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 평생을 강단에 서신 분도 계시고 자녀를 교육 시켜야 되는 학부형들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들 복 많이 받으시고 제가 말씀드린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마지막으로 결론 내리겠습니다. 여러분들 복 많이 받으시고 그리고 늙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낡음을 두려워하시는 삶을 사시면 여러분들은 창의적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