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시민이 주인인 정치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대리인”인 정치가들이
“주인”이 되고 “주인”은 그 “대리인”에게 구걸하는 이러한 “인생 역전”. “자리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투표를 하여 “대리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주인이 그 대리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기 때문이 아닐까?
왜 대리인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주인들은 무력한 존재로 되는 것일까?
“무효표” 논리든 , “주민 소환제” 논리든 다 같이 전권을 대리인들에게 이양하는 것에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 전권을 대리인들에게 이양해야 되는 것일까?
그런 이유가 있다면 , 그 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나서 , 그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권한이 위임되고 나면 , 주인과 대리인은 “위치”가 역전된다. 대리인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지만 , 대신에 주인의 감시망을 피해야 되거나 , 통과해야 된다. 주인은 이제 무력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대리인을 감시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 주인은 주인이 아니다. 자기 권한을 남에게 주어버린 자가 어떻게 주인이 될 수 있는가?
이들 대리인들의 이해관계와 주인의 이해관계는 보통 일치하지 않는다. 대리인들은 물론 주인에게서 위임을 받기 위해서는 , 주인의 이해를 어느 정도는 반영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이 얼마나 잘 그 대리인을 평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대리인에 대한 평가가 오직 “투표 행위”로만 4-5년에 1번씩만 이루어진다면, 그 대리인은 주인에게서 자유롭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투표 행위가 “유효표”이든 “무효표”이든 결과는 같다. 그 투표행위가 “주민 소환”이든 “주민 기소”이든 같다.
이 모든 “투표행위”는 한마디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후 약방문”에 불과하다.
삼성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방 원리”가 “사후 약방문”보다 수백 배 더 효과적이다.
삼성과 같은 “반시장 antimarket” 조직들은 “대리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요구를 법제화할 것을 주문한다. 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전 약방문” 전략이다. 이들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거의 언제나 성공한다. 반면에 “녹색주의자”들은 거의 언제나
“사후약방문” 전략을 쓴다. 그 결과 데모든 , 항의든 여러 차례 소동을 일으켜 , 삼성과 같은 반시장의 전fir을 좌절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세는 언제나 삼성이 장악한다.
“주인-대리인 문제”를 해결하는 2가지 전략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대리인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다.
대리인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1가지이고, 권한을 되찾아 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www.co-intelligence.org 라는 사이트에서 Atlee는 여러 가지 제안을 한다. 그의 안의 핵심은 시민 심의 위원회이다. (http://www.co-intelligence.org/CDCUsesAndPotency.html)
시민 심의 위원회에서 법안을 제시하고, 대리인이 처리해야 될 사안들에 대해 심의할 수도 있다.
반시장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안이다.
둘째, 대리인에 대한 평가가 정기적으로 , 심도 있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한다.
그가 만난 자들, 그가 처리한 법안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기적으로 공지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시민들이 하도록 하여, 그 평가도 공지되도록 해야 한다.
그가 한 일과 할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메일로 발송하고, 그것을 평가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와 시민들로 구성된 평가단이 정기적으로 심층 평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안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평가를 받지 않는 직종들은 대부분 고위직이다. 정치가들은 4-5년에 1번만 평가받으면, 다음 4-5년은 편하게, 반시장과 한통속이 되어 지낼 수 있다.
정부관료들은 자기들끼리 평가하든지 하여 눈가리고 아웅하는 평가시스템으로 평생 안락하게 반시장과 한통속이 되어 지낼 수 있다. 법관들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보면 “평가의 무풍지대”는 바로 권력의 3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이 주인인 세상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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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군사정권 때는 돈이나 물건을 돌리며 표를 사는 불법 선거가 판을 쳤기 때문에 공정하게 선거를 치르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를 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자동적으로’ 보장한다고 착각했다. 선거만 별 무리 없이 치르면 민주주의가 자연스레 확립되리라 기대했다. 허나 우리 현실은 그런 믿음을 배반해 왔다.
선거에는 민주적이지 않은 요소가 많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이 선거에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아마 후보등록에 필요한 기탁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대변할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지금도 각종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정치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해 주리라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서 내 맘에 꼭 드는 후보나 정책이 없는데도 울며 겨자먹기로,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그럴싸한 사람들에게 투표해 왔다. 이런 과정을 민주적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더구나 선거에는 2등이 없다. 승자가 모든 걸 혼자 먹는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생존경쟁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을 가진 위험한 세력이고, 내 얘기만이 옳고 선하며 다른 얘기는 틀리고 악이다. 세상에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선거에서는 그런 논의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래도 선거가 민주적일까?
선거 때가 되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자신을 믿고 지지해 달라고 얘기할 뿐 아래로 내려와서 멍든 사람들의 가슴을 껴안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명쾌한 답이나 해결책을 주지 못해도 그냥 껴안고 얘기만 서로 도란도란 나눠주면 그것만으로도 응어리진 한이 좀 풀릴 텐데, 그들의 눈에는 사람이 표로 보일 뿐이다.
투표로 나라를 바꾸자? 무효표는 어때?
2007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재미없는 선거라는 점은 이미 분명해졌고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누구를 찍을 것인가라는 수동적인 결단만이 남아 있다. 더구나 사표(死票,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를 고려해 전략적으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라는 쓸모없는 고민도 해야 하고, 고민이 귀찮아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기회는 없을까? 1863년 2월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프루동은 투표거부운동, 즉 기권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프루동은 독재체제와 영합한 언론을 비판했고, 인민의 대표들이 정부의 활동을 비판할 수 없는 거짓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며, 보통선거권이라는 가상의 주권이 사실상 독재자에 대한 충성의 맹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거부운동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을 묶을 고리가 없어서 선거 이후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기권은 투표하지 않아서 정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낼 수 있지만 선거 이후의 다양한 정치활동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기권이라는 정치행위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논의를 자극하고 사람들의 만남과 네트워크를 구성할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기권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정치적 기권과 구분되어 계산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무효표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기권은 계산되지 않지만 무효표는 계산되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의지로 표현될 수 있다(대통령선거에는 따로 찍을 비례대표제 용지가 없으니 혼동해서 잘못 투표했다는 오해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무효표는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내가 마음에 드는 후보나 정책이 없다면, 억지로 다른 누구에게 표를 몰아주는 게 아니라 내 맘에 드는 사람이나 정책이 나올 때까지 무효표를 만들면 된다. 소비자 불매운동을 하듯이 무효표 운동을 벌이면 어떨까?
정치적인 압력 ’무효표’를 조직하자
우리가 대안적인 상상력을 펼치며 직접행동하면 어떨까? 무능한 정치인들이 내 얘기나 욕구를 대변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내가 직접 원하는 세상, 원하는 삶에 관해 얘기하면 어떨까? 요즘 유행하는 UCC(User-created Contents)처럼 CCU(Citizen-created Contents)를 유행시키면 어떨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투표소에 가서 내 정치적 의지를 무효표로 드러내자(아예 기표를 하지 않거나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그들 모두에게 표를 찍어주자)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정책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단 한 표도 받을 수 없음을 그들이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자.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내 블로그나 카페에 내가 원하는 내용을 쓰자. 예를 들어, 지리산에 댐이나 골프장을 만들지 말자, 제주도 군사기지를 반대한다, 한미 FTA 비준을 반대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자, 청년실업을 막고 미래세대의 꿈을 키울 정책을 마련해라 등등. 그리고 이런 얘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트랙백을 걸고 그 내용에 자신이 요구하는 내용을 더하자. 이렇게 각자가 원하는 정책이 트랙백으로 서로 연결되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면 그들이 욕망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트랙백을 따라가며 나와 비슷한 소망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제는 대의정치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 그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만일 그렇게 사람들의 소망이 모인다면 내년의 절망적인 정치판에 희망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모일수록 그 힘은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선거에서 누구를 당선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선거 자체를 괄호 속에 집어넣으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밝히고 그것에 관한 대책을 세우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무효표는 무능한 정치판을 심판하고 시민의 능동성을 부활시킬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하승우씨는 "행동하는 지식을 꿈꾸는 사람들의 대안연구공간"을 표방하는 ’지행네트워크’(jihaeng.net) 연구활동가로, 정치학 박사(정치사상)입니다. 이글의 원문은 <녹색평론> 최근호(11/12월호)에 "그들의 선거? 우리들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첫댓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반시장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안' 이라는데 여기서 '반시장'이란게 무슨 뜻이죠? 그 말만 이해가 안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