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클레먼트 허드가 그리고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이 글을 쓴 <잘 자요, 달님>을 보자.
아기 토끼가 커다란 초록방에 있는 침대에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모두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잠드는 간단한 이야기다. 컬러 화면이 원색 분해가 아니라 분판으로 처리된 것으로 보아 인쇄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의 책으로 보인다. 이 소박한 책은 1947년에 처음 발간되어 50년이 넘도록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자기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서 재운 경험을 갖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자는 사이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까 봐 못 잔다고도 한다. 아주 어린아이들은 존재의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해 잠이 들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안심하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은 부모에게나 아이에게나 매일매일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은 조용조용히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한다.
커다란 초록 방안에
전화기 하나
빨간 풍선 하나,
그림 속에서는
(그림 1) 그림은 초록 방안에 주인공 토끼와 토끼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보여준다. 토끼는 이제 막 침대에 들어가 주위를 쳐다보고 앉아 있다.
암소가 달을 뛰어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곰 세 마리
(그림 2) 방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그림들을 클로즈업해서 흑백으로 보여준다.
아기 고양이 두 마리
벙어리 장갑 두 짝
조그만 장난감 집 하나
생쥐 한 마리
(그림 3) 토끼를 빼고 그림 1의 왼쪽을 약간 겹치게 해서 방의 왼쪽 끝까지 보여준다.
“커다란” 이라는 말에 대응되는 화면이며, 열거된 사물들로 인해 방안의 여기저기를 독자가 살펴보게 만든다.
토끼를 오른쪽 화면 밖으로 밀어내고 토끼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왼쪽 방의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사물을 찾으며 방안을 둘러보는 독자의 시선이 마치 토끼의 시선이라고 느끼게 된다. 토끼를 화면 밖으로 뺀 것은 독자가 그림 2와 이후의 흑백 화면 모두를 토끼의 눈으로 보게 만드는 중요한 설정이다.
빗 하나, 솔 하나, 옥수수죽 그릇 하나
“쉿” 나지막이 속삭이는 할머니
(그림 4) 이 할머니는 장면 전환을 예고한다. 그림 3에 빈 의자를 보여줘 방밖에서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그 새로운 인물은 어른이며 정적을 깨고 “쉿”하고 말함으로써 토끼에게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잘 자요, 초록 방
(그림 5)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것과 방 전체를 독자가 볼 수 있게 된다. 도입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고 있다. 토끼는 할머니의 주의를 듣고 얌전히 누워 할머니를 바라본다.
잘 자요, 달님
잘 자요, 달을 뛰어넘는 암소
(그림 6) 토끼의 시선이 방안에서 벗어난다. 창밖의 달에게 인사를 하더니 그림 속에 있던 암소가 액자를 벗어나 어느 새 상상과 현실이 섞인다. 할머니가 자라고 하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상상이나 하면서 가만히 누워 있는 모양이다.
잘 자요, 스탠드
잘 자요, 빨간 풍선
잘 자요, 작은 곰들
잘 자요, 의자들
(그림 7) 방안의 조명의 변화가 눈으로도 느껴진다. “잘 자요, 스탠드”하고 스탠드를 첫 문장에 지목하여 어두워지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토끼는 몸을 움직여 머리 위의 액자를 본다. 더 이상은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의 심리가 보인다.
잘 자요, 아기 고양이들
잘 자요, 벙어리 장갑
(그림 8) 토끼는 다시 주변 사물들을 보면서 잘 자라고 한다.
잘 자요, 시계
잘 자요, 양말
(그림 9) 자라고 요구하는 할머니와 잠이 오지 않는 아기 토끼를 화면 양 끝에 배치하여 둘의 갈등을 보여준다.
잘 자요, 작은 집
잘 자요, 생쥐
(그림 10)
잘 자요, 빗
잘 자요, 솔
(그림 11) 아기 토끼는 다시 눕는다.
잘 자요, 아무나
잘 자요, 옥수수죽
(그림 12) 왼쪽 화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아기 토끼도 잠이 좀 오는가 보다. 모두 깨어 있지 말고 누구든지 잘 자라고 한다. 주변의 사물을 확 뛰어넘고서 다시 먹을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아이다운 발상이다.
“쉿”하고 속삭이는 할머니도
잘 자요
(그림 13) 이제 방안은 확연히 어두워져 창밖이 더 밝아 보인다. 정말 자기로 했는지 이불을 덮고 똑바로 누워 할머니에게도 인사한다.
잘 자요, 별님들
잘 자요, 먼지
(그림 14) 흑백의 단조로운 화면이지만 이 화면은 지극히 감동적이다. 아기 토끼는 모든 존재에게 잘 자라고 한다. 창밖의 별과 더 멀리 있는 별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에게까지 인사한다. 잠에 막 빠져들기 전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모든 공간과 존재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잠들어 간다.
잘 자요, 소리들
(그림 15) 이제 토끼는 잠들었다. 할머니도 방을 나갔고 고양이 두 마리도 할머니가 앉았던 의자에 올라가 잠들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모든 존재와 전 우주와의 교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글쓴이와 그린이가 다른 사람이지만 글만 떼어놓고 읽거나 그림만 본다면 교감과 일체감은 확연히 떨어진다. 이 책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토끼의 시선을 독자의 눈으로 쫓아가면서 천천히 읽도록 배려해 두었다. 화면에서 토끼를 뺀 그림 3을 통해 독자와 주인공의 시선을 일치시켜 주었기 때문에 객관적 시점인 채색 화면과 주관적 시점인 흑백 화면을 번갈아 써도 책 속의 현실과 독자의 현실이 분리되지 않으며 흑백 화면이 주관적 시점이라는 것이 명확하므로 그림 6과 그림 13처럼 상상을 그려도 어색하지 않다.
흑백 화면인 그림 4에 처음 나와 컬러 화면 그림 5에 등장한 할머니는 그림 9, 그림 13에 배치되어 전체적인 이야기의 호흡을 조절한다. 간결한 글은 그림을 설명하지 않는다. 글은 그림에 시선을 주거나 머물게 하거나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의 심리에 맞추어 가장 친근한 주변의 사물에서 창밖으로 우주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글과 그림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서서히 나아간다. 이 책은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만드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