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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영화 그 자체의 시대인 동시에, 홍보 마케팅의 시대, 그리고 홍보물들의 시대다. 그중 특히 영화의 태동기부터 관객과 함께했던 전단, 소위 '찌라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칼럼니스트이자 전단 수집가인 최원균이 역대 한국 영화산업계를 지배했던 한국영화, 외화들의 찌라시를 더듬는다. 여기, 찌라시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 극장가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 있다.
얼마 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소영 주연의 공포영화 <아파트>의 전단지가 화제에 올랐다. 그는 이 대목에 이르러 진심 어린 감탄사를 연신 쏟아냈다. “이제껏 전무했던 전단 3종 세트라니, 대단한 아이디어 아닙니까? 광고의 목적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아울러 좀 더 많이 회자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아파트>의 전단은 최고 중 최고의 성공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개봉이 한참 남아 있는 <아파트>는 영문 스펠의 약자인 A, P, T를 각각 개별적으로 강조한 세 종류의 티저 전단을 만들어 벌써부터 극장에서 배포하고 있었다.
하기야 언제부턴가 영화들도 트릴로지(삼부작) 정도는 되어줘야 뭔가 있어 보인다는 듯 편수에 집착하는 것 같고, 그 만만해 보이는 홈쇼핑 파격가 정장 바지세트도 3종이 기본 구성이니 전단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인의 말대로라면 한국영화 홍보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음이 분명한 이런 획기적이고 놀라운 '전단의 사건'에 정작 공감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영화의 발전과 함께 영화의 홍보 방법 역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변하지 않고 굳건히 존재하는 홍보 형태가 있으니 바로 포스터와 전단지가 그것이다. 특히 전단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다양한 정보와 콤팩트한 사이즈로 많은 영화 애호가들의 수집품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감히 한국영화 전단의 역사와 특징을 단번에 훑어보려는 발칙한 시도의 결과물을 여기 공개한다. 그것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완성이 될 리야 미션 임파서블하겠지만, 그저 추억의 이미지들을 되살려보는 정겨운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족한 일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홍보물 그리고 전단
영화의 탄생연도인 1895년은 카메라나 영사기가 발명된 해가 아니다. 일반 대중들에게 영화가 공식적으로 처음 상영된 시점이며 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공개되는 것을 그 궁극적 완성으로 하는 작업임을 규정하는 명백한 합의이기도 하다. 이에 창의적 예술로서의 숭고함 이면에 이 같은 상업적 업보(?)를 함께 짊어지고 탄생한 영화는 규모의 발전을 거듭하며 더 많은 관객, 더 나은 흥행을 위해 어떻게든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아야 했고, 이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한 편의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홍보에 동원되는 노력과 자본은 상상을 초월한다. 요즘처럼 홍보에 순 제작비를 능가하는 자본이 투입되기까지 하는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결과 이벤트 시사회, 경품 지급, 배너광고와 여론 형성을 통한 인터넷 홍보 등 무형의 마케팅에 대한 비중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지만, 전통적 광고 형태 역시 굳건히 병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전통적 광고물들로 포스터, 전단과 함께 영화 홍보물의 큰 위치를 차지했던 추억의 카드 광고물이나 카드가 사라지면서 그 뒤를 잇고 있는 엽서 광고물을 비롯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던 팸플릿 등이 있다. 이밖에 성냥, 티슈, 스티커, 파일, 노트, 구두 주걱, 손거울, 파일, 컵 받침, 일회용 라이터, 볼펜, 핸드폰 줄, 부채처럼 저렴하면서도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게 되는 다양한 물건들이 홍보물로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효율성과 지속성에 있어 포스터와 전단만큼 신뢰를 받아온 독보적 홍보물은 찾기 힘들다. 그중에서도 전단이 갖는 매력은 더욱 다양하다. 일단 일반 관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부분은 가장 큰 장점이다. 포스터나 엽서 같은 다른 형태의 홍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단은 배포량이 많고 극장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큰 포스터에 비해 평균 A4 또는 B5 정도 크기로 낱장 또는 2~4페이지 형태로 제작되는 전단은 보관 또한 용이하다. 포스터 메인 이미지는 물론, 스틸과 영화에 대한 대략적 정보까지 총체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종합 정보지라는 점도 놓칠 수 없는 특징이다. 아울러 멋진 배우들의 모습과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줄거리부터 참여한 인물들의 정보, 넓게는 영화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가이드를 첨부함으로써 충분한 기록의 역할까지 해낸다. 또 유행어나 이슈를 적극 활용하는 카피 문구는 당대의 문화적 상황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전단이 일반적인 영화 광고물로 자리 잡은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일본과 우리나라 정도? 이외의 국가에서는 매우 간헐적인 흔적만 발견될 뿐이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관객들에게 퍼주듯(?) 전단을 배포하고 있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나라의 관객들은 전단에 한해선 복 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작정한 컬렉터가 아니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또는 특별한 추억이 담긴 전단 하나 정도 일기장이나 책장 사이에 끼워 보관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전단의 시작
그렇다면 우리나라 영화 전단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1926년 공개된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에 관련한 기록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발견된다. “서울에서는 상연 첫 날부터 사람들이 단성사로 몰려들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 말인가’하는 가사가 문제가 되어 전단 1만여 장이 압수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며 무려 5년 동안이나 전국 곳곳을 순회 상연했다.” 아쉽게도 <아리랑>이라는 영화 자체처럼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문헌을 통해 이미 당시부터 전단이 영화를 홍보하는 중요한 매체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역사가 곧 한국영화 전단의 역사와 일치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초기 전단 자료들은 국내 개인 소장가들의 컬렉션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발 새로운 발견이 있게 되길 기대해보지만 당시의 시대정황상 국내 수집가의 컬렉션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최근 들어 외국인들이 개인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이 간헐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당시 홍보물들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 아쉽기는 매한가지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발행된 전단들은 몇몇 유명 수집가들의 컬렉션으로 단행본과 전시회, 그리고 영화 속 소품 등 다양한 형태를 통해 대중들에게도 공개되어 친숙한 편이다.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던 인쇄기술과 디자인 산업의 과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전단들은 지금의 전단들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편, 당시 국내 개봉한 대부분의 외국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다는 사실도 주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계 역시 해방 이후에도 일제치하의 잔재를 단호히 끊어내지 못한 탓인데 개봉작 선별은 물론 제목과 홍보문구, 광고 비주얼까지 일본의 것을 거의 그대로 카피하고 있는 경우가 쉽게 발견된다.
추억의 광고물들
과거 극장 안에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었던 '팸플릿'은 이런 섭섭한 과거의 흔적을 흠뻑 머금은 대표적 결과물이다. 일본어 위에 한글만 덧입히고, 일본과 우리나라는 책장을 넘기는 방향이 반대였던 탓에 가끔 이미지를 역전시키는 수고를 더했을 뿐 일본에서 발행된 디자인과 형태를 그대로 카피해 찍어내던 제작방식은 팸플릿이란 판매물 형태가 사라진 90년대 초까지 사실상 계속되었다. 이즈음에서 언급하고 넘어갈 영화 광고물의 또 다른 형태가 있다. 바로 ‘카드’라 불리던 소형인쇄물이다. 전단과 함께 주종을 이루던 카드는 대부분이 뒷면에 달력을 인쇄하고 있어 ‘캘린더’라 불리기도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는 종종 학업 시간표를 인쇄하기도 했었다. 카드는 전단에 비해 디자인이 쉽고, 제작도 용이하다는 점에서 많은 종류가 제작되었다. 또 작은 사이즈는 수집 또한 용이해 지금까지도 많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접어들면서 카드는 새롭게 등장한 ‘엽서’ 광고물 형태로 대체되면서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관련해, 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방학 시즌마다 줄기차게 개봉했던 한국 장편 만화영화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작 공개된 극장용 만화영화들은 80년대 중반 TV용 만화영화로의 급격한 전환을 맞을 때까지 활발하게 제작, 개봉됐다.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브이>, <황금날개 1,2,3>, 임정규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 <전자인간 337>, <별나라 삼총사>, 김현동 감독의 <해돌이 대모험>, <해저탐험대 마린 엑스>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영화들은 몇 해 전 복고 열풍에 힘입어 다시금 주목받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영화 대부분의 전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당시의 독특한 홍보방식 때문이다.
이 만화영화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배포되던 전단을 지양하는 대신 입장 관객을 대상으로 포스터 이미지가 그려진 책받침을 만들어 제공했다. 책받침은 전단에 비해 높은 제작비가 투여되지만, 대신 주 관객인 학생들 사이에 집중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으며 아울러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므로 지속적인 광고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 영화를 본 관람객들만을 위한 선물이라는 명목 하에 생색까지 낼 수 있었으니 당시로선 매우 적합하고 효율적인 광고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추억해보면 그 당시 개학날이면 방학 동안 새로 개봉했던 영화 책받침을 꺼내놓으며 ‘나 이 영화 봤다’고 은근히 자랑하던 모습들은 꽤나 익숙하고 재미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일관일편(一館一篇)의 시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 편의 영화가 다수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선 꼭 특정 극장을 찾아가야만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각각의 극장들은 시설이나 서비스보다는 자신들이 개봉했던 영화들 중 특별한 대작이나 흥행작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연관시켜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홍보 전략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특정 영화의 전단 역시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시 발행되는 다양한 전단들을 지속적으로 빠짐없이 모으기 위해선 일주일이나 2주에 한 번씩은 교체되는 개봉작 주기에 맞춰 극장 한 곳 한 곳을 일일이 다 방문해야만 했다. 언뜻 상당히 피곤한 일처럼 보이지만 지금처럼 불특정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전단이 배포되는 산만함에 비하면 그때는 차라리 여유 있고 운치(?)있는 수집 여건이라 할 만했다. 또 어떤 영화의 전단이 발행되고 발행되지 않았는지의 여부도 분명히 체크할 수 있었다.
그중 특히 공포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공포영화는 유달리 무시당한 장르였다. 그래서 영화 광고물들 중에서도 공포영화는 상당수가 생략되곤 했다. 전설의 <13일의 금요일>의 경우 정식으로 개봉했던 1편과 4편을 제외하곤 당연히 특별한 극장 자료를 발견할 수 없고, 철학적 공포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클라이브 바커의 <헬레이저> 3부작 역시도 비교적 근래 작품에 전부 극장 개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편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배포 광고물이 제작되지 않았다. 이런 전례로 볼 때 뉴라인시네마를 졸지에 메이저로 끌어올린 일등공신 <나이트메어> 시리즈는 국내 컬렉터들에도 상당히 운이 좋은 시리즈다. <프레디 vs 제이슨>을 포함한 총 8편의 장기 시리즈가 모두 극장 개봉을 했으며, 7편 <뉴 나이트메어>를 제외하곤 모두 전단, 카드 등의 광고물이 발행되었다. 또 6편 <최후의 나이트메어: 프레디의 죽음>의 경우는 드물게 입체영화 방식 그대로 온전히 극장에서 상영돼 영화팬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에서 1985년 3월 23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한 <나이트메어> 1편의 전단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일단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도 그렇고, 당시 광고 스타일의 전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조악하고 무책임한 디자인은 더욱 그렇다. 상단 메인 이미지는 윌리엄 러스틱의 1980년 작 <매니악>의 포스터 이미지를 가져다 썼으면서, 그 밑에 엉성하게 오려 달랑 얹어놓은 주인공 낸시(헤더 랑겐캠프)의 얼굴을 보라. "女性단독입장불허!", "恐怖의 포식, 생명보험 가입자 우대! 25%할인(생명보험 가입카드를 제시하면 25%를 할인해드립니다)"라는 과장 일색의 카피들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없는 나이었던 필자로선 그 진위 여부까지는 알 수 없다.
성애영화의 독특한 홍보물
처음 개봉 당시엔 예측치 못했다 관객들의 뜻밖의 호응으로 롱런하며 흥행 신화를 이룬 영화들도 종종 존재했다. 88년 개봉한 <더티 댄싱>은 깔끔한 재미와 매력적인 배우들, 뛰어난 OST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 관객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은 영화의 대표적 경우. 이 영화를 개봉했던 중앙극장 앞은 연소자 관람불가였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심신이 고달팠던 청소년들로 연일 혼란스럽기도 했다. 중앙극장은 이후 한동안 <더티 댄싱>의 상큼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차기 개봉 영화들에도 꾸준히 연결시켜 홍보하게 된다. B4 사이즈 시원한 크기에 두 주인공의 역동적인 모습이 두드러진 전단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편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는 사극과 사회고발 형태를 빌린 성인영화가 주를 이뤘다. 함께 유럽의 성애영화들도 득세했다. 이 같은 경향은 직배영화를 전후로 다양해진 거대 오락물의 출현과 VTR의 급속한 보급으로 끈적끈적한 영화를 굳이 극장을 찾지 않고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급속히 사그라졌다.
간혹 독특한 형태의 홍보물이 시선을 끌기도 했다. 일회용 성냥이나 컵 받침 같은 것들이 그런 예인데, 1989년 2월 11일 개봉한 <제2의 성>을 광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티슈 전단도 그중 하나다. 티슈 다섯 장을 고이 접어 넣은, 지금이라면 가치와 정성이 이해가 되지 않을 이상한 홍보물이었다. 요즘에야 넘쳐나는 종이티슈지만 “1회용 고급미용손수건”이라는 품명을 명확히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흔치않은, 상당히 고급 생활용품이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또 낱장마다 영화의 타이틀을 인쇄한 노력도 대견하다. 멜로드라마의 성격상 영화가 끝난 후 눈물을 닦으라는 배려도 기특한데, 예나 지금이나 '슬픈 영화=손수건 또는 티슈'라는 공식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비슷한 시기를 조사해보면 티슈를 홍보물로 선택한 다른 영화들도 몇 편 눈에 띈다. 당시 봇물을 이뤘던 유럽 성애영화 중 한 편으로 개봉한 마우로 볼로지니니 감독의 86년 작 <베니스의 정사 La Venexiana>도 그중 한 편인데, 이 때 티슈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비닐 포장의 작은 휴대용 티슈의 형태다. 앞서 말한 티슈 홍보물과는 다른(?) 부분에서 영화의 이미지를 강하게 어필하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게 사실이다. <제2의 성>을 개봉한 국도 극장은 마지막까지 단관 형태를 유지하다 결국 사라진 추억 속의 극장이 돼버렸다. 대부분의 극장이 보수 및 증축으로 거듭난 90년대 후반까지 본래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관객의 발길이 뜸해진 이곳은, 이로 인해 도리어 주류의 대세를 비켜난 <옥보단>, <쇼킹 아시아>, <홀로코스트> 등 진정 컬트라 할 만한 영화들을 개봉하게 되어 짭짤한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홍콩영화의 몰락, 직배영화의 출현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의 한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건 홍콩영화였다. 하지만 홍콩영화에 대한 열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전 성룡의 아크로바트 코믹 액션부터 시작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 그리고 <지존무상>으로 이어지는 카지노 무비들로 절정에 오른 홍콩영화의 전성기는 이후 빈약한 아류작들의 무분별한 수입과 홍콩 반환의 정치적 상황까지 맞물리며 이내 그 힘을 잃었다. 당시 홍콩영화의 전단들은 존재 여부와 완성도 등에서 작품의 퀄리티만큼이나 혼란스러운데 그때의 향수를 되새기기엔 딱이라 하겠다.
한편 올림픽 열기로 온 국민이 열광했던 1988년은 UIP를 통해 국내 직배영화가 처음 상영된 해로 기록되기도 한다. 한국영화의 인지도가 든든한 지금이야 직배영화의 구분이나 존재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제작규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 자본과 흥행성으로 중무장한 할리우드영화의 직배상륙은 한국 영화계의 전망을 우려케 한 충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1988년 7월 UIP를 통해 개봉한 <위험한 정사>는 국내 상영된 첫 직배영화로 기록된다. 결과는 한국 영화인들과 이들의 선동(?), 그리고 이에 고취된 대다수 관객들의 따가운 시선과 보이콧 속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흥행 참패. 하지만 UIP는 89년 설 <007 리빙데이 라이트>를 기점으로 심기일전, <레인 맨>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트윈스>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가족영화 중심의 온화한 이미지로 본격적이고 점진적인 정착을 도모한다.
<8번 가의 기적>은 이즈음 UIP가 다섯 번째로 공개한 영화다. 방학 시즌 아이들을 겨냥한 전단 디자인과 내용이 확연히 눈에 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UIP 상영관으로 낙인찍혀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신영, 코리아 극장을 제외하고, 당시로서는 재상영관 정도에 머물던 소규모 영화관들을 개봉관으로 선정한 것인데, 이는 어떻게든 관련 극장을 늘려보려는 UIP의 안간힘과 이 영화의 흥행에 대한 소극적 기대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즈음 전단 수집가들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집 쑤셔놓은 듯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영화 홍보시장 전체에 커다란 공황을 가져왔고, 이 무렵 UIP를 통해 소개된 직배영화들은 물론 국내 배급라인을 통해 소개된 영화들마저도 전단 구경하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다이 하드>의 전단은 이 같은 과도기의 혼란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다. 88년 겨울 <다이 하드> 1편이 개봉한 주말은 하필이면 UIP 상륙에 반대해 서울의 모든 극장이 파업을 선언한 날이었다. 모든 극장이 꼭꼭 문을 걸어 잠그는 초유의 사태에 <다이 하드>의 전단은 발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개봉관인 단성사 내에 제대로 비치조차 되지 않았다. 90년 겨울에 개봉한 <다이 하드 2>의 경우는 더욱 난감했다. 이 영화는 이십세기폭스코리아가 직배를 시작하며 처음 개봉한 영화인데, UIP의 선례의 의식해 소극적인 홍보를 결정한 폭스는 아예 전단을 제작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다이 하드> 1편과 2편의 전단은 영화의 높은 인지도로 인해 더욱 구하기 어려운 전단으로 희귀 아이템 리스트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얼마 후 한동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탄탄하게만 보이던 직배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결국 한 편의 영화로 단번에 허물어져버렸다. 그 영화는 바로 데미 무어를 만인의 연인으로 등극시키고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린 제리 주커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 <사랑과 영혼>이다. 1990년 11월, 눈치 보기를 과감히 접고 UIP에 동참한 다수의 극장들까지 합세해 나름 대규모로 개봉한 이 영화는 주제가인 'Unchained Melody'의 히트를 동반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다. 이후 직배영화 반대에 앞장섰던 극장들마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는데, 결국 충무로는 만 2년 동안의 짧고 요란했던 직배 반대운동에 타협적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
<사랑과 영혼>의 인기와 대대적 흥행은 남아 있는 전단의 면모와 규모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UIP가 주기적으로 발행하던 신문 형태의 소식지는 물론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B4 사이즈의 초판 전단이 함께 배부되었다. 또 한동안 사라졌던 팸플릿을 제작해 저렴하게 판매하기도 했는데, 당시로선 획기적인 퀄리티를 선보인 고급스런 디자인과 편집이 돋보인다. 이후 다시 조금 변형된 디자인의 재판 전단까지 발행하게 되는데, 이렇게 총 3가지 버전의 전단과 1권의 팸플릿이 홍보물로 남게 되었다.
극장, 서서히 진화하다
80년대 말 UIP의 폭풍이 한창일 즈음, 충무로의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전까지 전근대적인 시설을 고집하던 극장들이 하나둘 과감하게 보수나 신축을 단행해 전과는 다른 관람환경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88년 혁신적인 보수 공사로 다시 태어난 명보 극장이 선보인 최첨단 시설은 당시를 경험했던 영화팬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다. 스크린 크기도 대폭 확장되었지만 100개의 소형 스피커를 좌석 밑에까지 설치한 제대로 된 THX 음향시설의 위용은 영화 관람의 일대 혁신이라 할 만했는데, 지금도 그만한 위력의 음향시설은 경험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보수 직후인 1988년 8월 13일 개봉한 <플라이>는 이런 극장의 장점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던 최적의 영화이기도 했다. 아울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기괴한 세계관을 한국 관객들에게 널리 알린 첫 영화로도 의미가 크다.
이듬해 89년은 드디어 강북의 서울 극장과 강남의 씨네하우스가 비슷한 시기 국내 최초의 다 개관 콤플렉스 시네마의 시대를 연 의미 있는 해로 기록된다. 이전까지 대한 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등의 인기에 열세를 면치 못하던 서울 극장은 이를 계기로 종로를 대표하는 막강 개봉관으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반면 씨네하우스는 잠시 동안의 태평천하를 뒤로하고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극장이 되고 말았다.
서울 극장 재개관 초기작 중 최근 다시 떠올리게 된 인상적인 작품이 하나 있다. 작년 <내 이름은 김삼순>의 인기와 더불어 유명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에 익숙한 제목의 소설이 하나 떠올랐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모모>다. 까마득히 잊혔던 걸작이 다시 대중들의 손에 쥐여진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시작이 한 편의 드라마에 잠시 등장했다는 가당치 않은 이유인 것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호응자들은 이 책의 존재 자체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세대 차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사건일 수밖에. 70~80년대를 풍미했던 미카엘 엔데의 <모모>는 국내에서도 인기의 여세를 몰아 가요의 소재로 등장해 노래되기도 했다. 가요의 또 다른 인기는 동명의 영화 <모모는 철부지>를 탄생시키기도 할 정도였는데, 79년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청춘영화의 대부 소리를 들었던 김응천 감독의 연출로 전영록, 이미숙, 최불암 등이 출연을 했다.
<네버엔딩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그의 산문은 쉽게 영상화될 수 없었는데, 1986년에야 뒤늦게 요하네스 샤프 감독이 연출하고 서독과 이탈리아 합작으로 영화화돼 국내에는 89년 수입, 개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규모나 이미지에 비해 너무나 단출한 전단 이미지는 당혹스러울 정도다. 반대로 뒷면을 빡빡하게 채운 수많은 카피와 수식어구들은 당시의 조악하고 욕심(?) 많은 전단지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유럽영화의 등장
지금의 A4 사이즈가 일반화되기 전인 80~90년대에는 B5 사이즈와 큼직한 B4 사이즈 외에도 380x180mm의 길쭉한 형태의 전단이 의외로 많이 발행됐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무엇보다 모으는 사람 입장에서 보관하기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형태가 왜 그리 사랑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최진실의 데뷔작 <꼭지딴>, 강수연 주연의 <그 후로도 오랫동안>을 비롯한 수많은 종류의 전단들이 이 형태로 남아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강남에 위치해 전성기를 누렸던 씨네하우스는 적은 규모일망정 사실상 국내 최초의 다 개관 운영을 선보인 곳이다. 개봉관들이 주로 강북에 편중돼 있던 당시로선 더욱 가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1989년 신관 개관으로 사세를 확장한 씨네하우스는 비슷한 시기 신축 공사로 다시 태어난 서울 극장과 함께 멀티플렉스 시대의 포문을 연 선구적 극장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후 이곳은 국내 대중들에게 잊혔던 유럽, 특히 프랑스 대중영화를 지속적으로 수입, 개봉해 당시 할리우드와 한국영화 일색으로 답답하던 관객들의 숨통을 틔어주기도 했다.
채플린의 고전 영화들로 짭짭한 재미를 본 우진필름에 의해 운영되던 이곳에선 <귀여운 여도적>, <시라노>, <세상의 모든 아침>, 당시 떠오르던 프랑스 아이돌 스타 바네사 파라디가 주연했던 <하얀 면사포>, 루이 말 감독의 <굿바이 칠드런>,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직접 수입해 공개했었다. 당시 제작된 전단들은 대부분 B5 사이즈에 포스터 이미지의 컬러 앞면과 영화 정보를 담은 흑백 뒷면의 형태로 획일적 디자인이 주조를 이루는데, 자체적으로 많은 영화를 한꺼번에 소화해내기 위해 선택된 그들 나름의 효율적 홍보방식이었을 것이다.
<금지된 사랑> 역시 그중 한 편이다. 클로드 소테의 섬세한 연출과 아름다운 배우들의 호연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감동으로 각인돼 있다. 전단의 형태는 예외적으로 앞뒤 컬러로 완성되었고 사이즈도 유독 당시 유행했던 380x180mm 접지 형태를 선택하고 있음이 이채롭다. 함께 제작, 배포된 엽서보다 큰 크기의 깔끔한 스틸 홍보물은 흔치않은 형태로 영화의 중후한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전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당시 씨네하우스가 선보인 영화 중 이채로운 한 편이 있다. 바로 홍콩영화 <지존소자>. 이제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자신의 독특한 영화관을 인정받고 있는 스타 주성치의 초기 주연작이다. 이 영화는 국내에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개봉한 작품이라는 점, 아울러 주성치적 영화의 시발점에 서 있는 영화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또 적잖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불구, 최근 몇 편을 제외하곤 그만의 색깔을 띠고 있는 상당수 후반기 영화들이 대부분 극장 개봉 없이 비디오로 소개된 경우가 많아 그 전단이 발행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 전단의 가치는 더욱 남다르다 하겠다.
예술영화의 대중화
90년대 초반을 회고하며 필히 언급될 만한 극장 중 또 하나는 종로에 위치한 코아아트홀이다. 이전까지 영화 전공자들에게나 선택되었음직한 고전과 거장들의 영화들이 소개된 이곳에선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꾸준히 공개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의 경우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만큼 흥행을 거둔 나라가 없다고 전해진다는 우스개 아닌 진실은 이때의 분위기를 잘 대변한다.
20세기 영화사를 회고하며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 크지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역시 이곳을 통해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감독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95.10.14 개봉)은 강렬한 홍보 이미지로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3단으로 접지 디자인된 전단에는 영화 전반에 대한 기본적 정보는 물론, 깊이 있는 이해를 도울 만한 폭넓은 해석의 시각을 충실하게, 그러나 넘치지 않는 깔끔한 디자인으로 고급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해 주목받았던 <세 가지색 블루, 화이트, 레드> 시리즈의 전단과 연장선상에서 차별화를 이뤄낸 멋진 디자인이다. 레오스 카락스 역시 이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반가운 이름 중 하나로, 그의 장편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96.01.13 개봉)는 뒤늦게 개봉됐지만, 오리지널리티를 최대한 살린 국내 전단과 포스터는 모던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까지 식지 않았던 이런 예술영화 붐은 이후 한낱 지적 허영의 거품으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그간 대중들의 눈밖에 있던 예술영화들과 시네아스트들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이후 소극적이나마 폭넓은 영화 수용의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사건임이 분명하다.
1993년 크리스마스이브, 홍콩과 대만영화에 주력하던 동아수출공사가 수입, 개봉한 <결혼 피로연>은 아시아인으로선 최초의 아카데미 감독상이라는 영예를 획득한 이안의 이름을 국내 처음 알린 작품이며, 비교적 주목받는 시점에 때맞춰 국내 공개된 신인작가의 작품이라는 데서도 의미를 지닌다. 또 아직 낯설기만 했던 동성애란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는 점도 분명 남달랐다. A4 사이즈의 전단과 함께 배포된 엽서는 5장의 이미지가 줄줄이 연결된 특이한 형태였는데, 아직까지 엽서 광고가 본격적이지 않았던 시점이라 더욱 특이한 광고물로 기억된다. 이후 하나둘씩 점진적으로 영화를 위해 제작된 엽서 광고가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엽서는 전단과 함께 당연한 광고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전단들의 전환기
90년대의 예술영화 붐은 소극적으로나마 다양한 영화의 수용을 가능케 한 교두보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하다. 이후 극장에서는 이전까지 주를 이뤘던 무난한 상업 영화 이외의 작품들이 속속 눈에 띄게 되니 말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인터넷 문화의 발달로 인한 마니아들의 적극적 커뮤니케이션 등 사회문화 전반의 변화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즈음 전단들의 형태도 확실한 전환기를 맞는다. 이전까지의 B5와 380x180mm 사이즈는 점차 A4 사이즈로 평균화되기 시작했고, 비주얼도 오리지널 포스터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천재성을 확고히 다진 1994년 9월 10일 개봉작 <펄프 픽션>은 국내에 공식 소개된 그의 첫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전통적 드라마트루기를 과감히 벗어던진 대담한 연출과 대중문화를 영화예술 안에 효율적으로 접목시킨 탁월한 심미안으로 이제까지의 영화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홍보사는 오리지널 포스터의 이미지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전단만을 위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택, 부각시켰는데, 영화와는 별개로 촬영된 것이 분명한 우마 서먼의 요염한 자태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메인 전단과 함께 제작 배포된 브루스 윌리스 사진의 코팅 책받침은 지금 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의문의 홍보물이며, 개봉 이후 추가 제작된 영화평 전단은 영화의 재미를 만끽하면서도 생소한 영화적 문법에 혼란을 느꼈을 다수의 관객들을 위한 제스처로 충분해 보였다. 3종의 전단들은 개개의 완성도나 영양가를 떠나, 하나의 영화 제목 아래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96년 봄에 콜럼비아트라이스타를 통해 개봉한 <무언의 목격자>는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직배영화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의 예가 될 만하다. 일일이 판권을 계약하고 그 한 편에 회사의 흥망이 결정되는 국내 수입 시스템에서라면 이런 알려지지 않은 젊고 재능 있는 감독의 저예산 데뷔작을 제때 극장에서 필름으로 만날 기회란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위로는 <양들의 침묵>부터 아래로는 <스크림>까지, 입을 가린 여인의 얼굴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포스터 비주얼은 언제부턴가 잘 만든 스릴러영화의 암묵적 약속이 된 듯하다. 이중 <무언의 목격자>의 'Mute'라는 단어로 꿰매진 여성의 입은 더욱 잔혹하고 그래서 역설적인 코믹함이 혼재하고 있어 매우 강렬하다. 이후 <파리의 늑대인간>, 빌 풀먼 주연의 <길티> 등 수준 이상의 스릴러들을 꾸준히 연출한 안소니 윌러 감독이지만 이후 특별한 활동이 없음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새로운 물결
충무로 역시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실천하고 있었다. 박철수 감독이 기존의 주류 영화에 대항해 저예산영화들을 제작하기 위해 직접 설립한 박철수 필름은 첫 번째 작품으로 <301 302>(1995.04.22 개봉)를 내놓았다. 이 영화는 내용만큼이나 파격적인 마케팅 디자인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데, 전단을 언급할 때마다 국내외 작품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획기적이고 대범한 디자인으로 꼽는 영화다. 당시로는 드물게 B5 사이즈의 가로 2단 접지 형태로 4종류의 전단을 시리즈로 선보였는데, 상징적 이미지와 저돌적 카피가 영화광고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렸다.
또한, 국제영화제에서의 극찬과 <피아니스트> <히든> 등의 개봉작으로 이제는 국내에서도 상당한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대표작이자 국내 첫 개봉작인 <퍼니 게임>(1997.11.15 개봉)은 이제까지 국내 공개되었던 상업 영화는 물론, 대접받는 예술영화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낯설고 기괴하며, 무엇보다 매우 불편한 영화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 작품이 당시 여건에 공식적인 유통 경로를 통해 정식 개봉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퍼니 게임>의 전단은 A2 크기의 종이를 두 번 접은 A4 사이즈의 형태를 였는데, 독특한 종이 질감과 색감의 디자인은 영화의 가치를 최대한 고급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넓은 지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한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독특한 영화를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갖가지 정보들을 담고 있는데, 주로 영화의 가치를 인정한 외국의 리뷰와 수상 내력, 영화를 옳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키포인트, 낯선 감독에 대한 친절한 설명 등이 다양하지만 산만하지 않게 효율적으로 분배되어 있다. 필자가 97년 발행된 전단 중 최고로 평가하는 이 전단지는 당시 곤혹스런(?) 영화를 홍보해야 했던 이들의 고심을 역력히 엿볼 수 있어 즐겁기도 하다.
일본영화의 개방과 또 다른 변화
90년대 말은 뭐니뭐니해도 일본영화의 개방이 가장 큰 화두로 기억될 것이다. 충무로는 이전 UIP 상륙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다행히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정된 98년 10월 1차 개방 직후 처음으로 정식 소개된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1998.12.05 개봉)와 일주일 뒤 이십세기폭스에 의해 직배로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98.12.12 개봉)가 예상보다 헐렁한 흥행과 관객 반응을 거둠으로써 우려는 이내 가라앉았지만, 이듬해 2월 2차 개방으로 공개된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 레터>(1999.11.20 개봉)는 50만이라는 적잖은 관객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2000년 6월 3차 개방을 거치게 되면서 지금의 우리에게 일본영화는 다양한 일본 드라마와 함께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극장에서 일본영화를 본다는 것이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까마득하기만 할 뿐이다.
<하나-비>의 전단은 지금 봐도 상당히 괜찮은 디자인이다. 화려하지 않은 질감의 종이와 어울리는 차분한 톤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위에 언급한 <퍼니 게임>과 같은 형태로 A4로 접힌 전단을 두 번 펼치면 A2 사이즈의 오리지널 타입 포스터가 드러나도록 디자인됐다. 영화의 고급스러움과 차분함을 제대로 반영한 전단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국내 극장에서 최초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 일본 상업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기억하시는 분들도 더러 계시지만 놀랍게도 일본영화가 개방되기 한참 전인 91년 1월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다. 개봉 제목은 어이없게도 <폭풍소년>! 재패니메이션의 선봉장으로 불리는 오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이 대표작은 뻔뻔스럽게도 대만영화라고 거짓 심의를 받아 국내 개봉이 가능했다는데, 개봉 후 얼마 안 있어 사실이 들통 나고 영화사는 문을 닫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폭풍소년>의 전단은 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뒷면에 시간표를 인쇄한 카드 형태의 광고물은 배포돼 당시의 해프닝을 뚜렷이 기억할 수 있는 증거는 남기게 되었다. 겨울방학을 틈타 어린이용 만화영화로 위장 개봉한 이 영화는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약 80분 정도로 삭제되고, 두세 명의 성우가 더빙을 했는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구분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변칙적 유통구조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영화였을망정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상영 일본영화를 경험했다는 것과 <아키라>를 필름으로 봤다는 사실 자체는 개인적으로 두고두고 뿌듯한 추억이기도 하다.
디지털 혁명과 거대 홍보의 도래
21세기 들어서며 영화의 흥행은 홍보에 대한 투자의 규모로 결정된다는 공식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외국의 마케팅 기법을 흉내 내기 시작하며 무분별하게 진행된 홍보 관행은 직배사의 글로벌 마케팅과 몇몇 대형 배급사의 경쟁으로 하루가 다르게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영화라면 대형 배너와 스탠디, 포토존, VIP 시사회 정도는 해줘야 경쟁력 있어 보이고, 최근에는 공허한 제작발표회까지 성행하는 추세다. 이 같은 홍보의 대형화는 인터넷 영화 사이트는 기본이고 대형 포털과 방송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런 흐름 속에,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형태의 ‘찌라시’ 정도로만 뿌려졌던 전단들도 근래 들어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되기 위해 아이디어와 노력을 모아 변신의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추억의 놀이기구 딱지와 종이인형이 영화 홍보물로 환생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와 제목부터 키치적 감각을 전면에 내세운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 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2000)가 딱지와 종이인형을 홍보물로 사용한 것은 당시 사회 전반에 불붙었던 복고열풍을 짐작케 하는 뚜렷한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작은 민동현 감독의 단편 퓨전코믹판타지 <외계의 제19호 계획>(2001) 딱지 전단이다. 이 홍보물이 ‘처음’이란 것 이외에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던 독립 단편영화들의 시각과 한계를 과감히 지양하고, 영화만큼이나 전략적이고 본질에 충실한 유기적 홍보를, 자비를 털어가면서까지 실천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 홍보의 다양화와 대형화에 발맞춰 전단 역시 정해진 틀 안에서 다각적 고급화를 꾀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웬만한 대작의 이미지를 가진 영화들은 평균 A4 3단(6페이지) 이상의 묵직한 전단들을 필수적으로 제작한다. 또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티저 개념의 전단도 심심찮게 발견되는 요즘이다.
한편 심의문제로 제작연도보다 3년이나 뒤늦게 지각 개봉한 <스크림>(1999.01.16 개봉)은 시차적 핸디캡을 만회하기 위해 포스터와 전단 제작에 과감한 투자를 실천한 작품이다. 전단의 경우 크기는 A5(A4를 반으로 접은) 모양 3단으로 작게 제작되었지만, 전면 메인 이미지에 일일이 은색을 입혀 인쇄함으로써 일반의 것보다 훨씬 많은 제작비를 들여야만 했다. 이는 포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개봉한 <스크림 2>(1999.06.05 개봉) 역시 전략적으로 1편과 유사한 형태를 유지해 연결성을 살리고 있어 함께 놓고 보면 재미가 배가된다.
이즈음 또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 하나. 이제껏 국내에서 제작된 전단 중 단가가 가장 비싼 것은 무엇일까?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다. 2003년 신년 디즈니가 야심차게 개봉한 <보물성>은 한국전단역사상 전무후무한 CD롬 첨부 전단이었다. 이 작품의 홍보에 들인 디즈니의 물량공세는 2종의 다른 버전 전단과 파격적인 경품 이벤트를 동반했는데,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거대홍보가 언제나 만족스런 흥행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훌륭한 교훈을 증명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디즈니'로 대표되는 브에나비스타는 <보물성> 외에도 상당히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전단 마케팅을 펼치는 곳으로 대표적인 영화사다. 대부분의 주력 영화(주로 디즈니 장편 만화영화)에는 2~3종 이상의 전단을 단계적으로 내놓기도 했는데, 최근 개봉을 앞둔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의 경우는 A4 4단 접지의 묵직한, 그러면서도 전편과 통일성을 유지한 화려한 티저 전단을 선보여 전단 컬렉터들 사이에 찬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과감함이 흥행성이 확실시되는 영화에만 편중된다는 것은 아쉬움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랑은 계속된다
최근 들어 영화 홍보의 형태도 더욱 다각화되고 있다. 작년 말부터 몇몇 극장을 통해 배포되기 시작한 '필름 책갈피'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그러면서도 이보다 더 영화적일 순 없는 홍보물이다. 늘어난 상영관 수로 인해 필요한 수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단기간 활용되곤 수명을 다하고 마는 영화 예고편 필름 컷을 가공해 책갈피로 재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현실적이고 색다른 기획이다. <파랑주의보>를 시작으로 <야수>, <싸움의 기술>, <왕의 남자> 등이 관객들에게 영화의 필름을 직접 소장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했다. 다만 배포하는 곳이 많지 않고 생각보다 지속적인 배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치킨 리틀>(2006.01.26 개봉)은 오랫동안 사라졌던 카드 광고물을 다시 선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이게 뭔가 싶었을 빈약한 홍보물이었겠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컬렉터들에게는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는 뜻밖의 진귀한 아이템이 되었다.
현재의 영화 전단지는 A4 사이즈가 일반화되어 있다. 영화 홍보의 규모에 따라 장수와 버전(재판)의 수가 다르기도 하지만 이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에서 언급한 <아파트> 3종 세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모체인 영화와 발맞춰 전단지 역시 끊임없이 진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종이 위에 인쇄를 한다는 본질적 한계를 벗어날 순 없지만 그 안에서도 커지는 홍보비와 쉬지 않는 아이디어는 어제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경우 인물들이 롤러코스터에 탄 채 거꾸로 매달린 모습을 포스터에 담아 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더니, 재난영화 <포세이돈>은 아예 타이틀과 카피를 포함한 광고물 이미지 전부를 거꾸로 배치해 인쇄했다(개봉 날짜만은 제 위치와 방향을 찾고 있다). 극장 직원조차 비치대에 전단을 채워놓으며 위아래를 헷갈려하는 재미있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영화 광고에서는 이례적으로 볼 수 없는 파격적 선택임은 분명하다.
<아파트>보다 앞서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는 시리즈 형 인쇄광고물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전단이 아닌 엽서를 두 종류로 발행했는데, 이를 다 모았다는 증거 사진이나 스캔 이미지를 홍보사에 메일로 보내면 미국에서 제작한 스페셜 엽서 세트를 선물로 증정하는 이벤트까지 펼친 것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라면 크지 않은 선물을 향한 열정만큼이나 영화의 존재감도 함께 키워졌을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펼치면 포스터 이미지가 되는 초대장 모양의 티저 전단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이후 메인 전단과 추가 전단을 포함, 현재까지 총 세 종류의 전단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영화의 홍보 규모와 함께 흥행에 대한 수입사의 기대를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 하겠다.
앞으로는 과연 어떤 형태의 새로운 광고물을 볼 수 있을까? 또 어떤 특이한 전단을 보게 될 것인가? 그보다 어떤 영화를 만나게 될지가 먼저겠지만, 영화가 나날이 산업으로서 더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지금은 홍보도 영화의 일부가 돼버린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단지 창조와 그에 대한 애정의 행보 역시 끝없이 계속될 미래. 우리가 앞으로도 '찌라시'에 대한 사랑을 거둘 수 없는 명백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도 전단을 모으고 싶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 치고 전단지나 영화 관련 소품들을 모아볼까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수집이 그렇지만 잠깐의 치기나 호기심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괜히 자신의 나약한 한계를 절감하는 씁쓸한 경력만 하나 더 늘릴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지금부터라도 전단 수집의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낀다면, 다음의 몇 가지 팁에 귀 기울여 참고해볼 것.
1) 바로 바로 정리할 것 I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 무조건 쌓아놓는다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구겨지고 먼지 쌓이다보면 화장실 휴지보다 쓸데없는 종이일 뿐. 다소 피곤하고 번거롭더라도 바로바로 파일링하거나 박싱하는 것, 기왕이면 이런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리스트로 만드는 것은 전단 수집의 기본이자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원판보존의 법칙을 준수할 것 I 골동품이나 수집품에는 평가에 적용되는 공통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래의 모습 그대로가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 이는 전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존을 위해 코팅을 하건 참기름을 바르건 어차피 모으는 사람의 취향과 능력이겠지만, 결국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수집품은 가급적 손상이나 수정, 변형이 안 된 원래 모습 그대로의 것이다. 각자 편한 방법으로 보관을 하되 이 점을 절대 유념할 것.
3) 특화 컬렉션 I 일주일에 평균 예닐곱 편의 영화들이 개봉했다 사라지는 작금의 시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전단지를 모으겠다는 신념은 의도를 벗어난 스트레스와 소화 장애만 불러올 수도 있다. 당초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장르나 배우, 감독 등의 카테고리를 선택해 좀 더 여유 있게 신중히 수집해본다면 부담 없는 즐거운 컬렉션을 실현할 수 있다.
4) 욕심을 내지 말 것 I 전단이나 영화 자료를 모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를 금전적 취득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전단 역시 하나의 수집품으로써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나쁜 일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필요 이상의 과장과 비도덕적 거래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단순한 취미 이상의 욕심은 낭비와 성격파탄의 지름길임을 명심하시길.
그들만의 천국
인터넷과 디지털의 발달은 그동안 음지(?)에서 각개 전투를 하던 컬렉터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당신이 굳이 모으고 보관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선배들이 모아온 귀중한 자료들을 엿보는 것은 얼마든지 허락된다. 여기 눈에 띄는 대표적 블로그와 커뮤니티를 소개한다.
[카페] 영화자료 탐구 - cafe.naver.com/cinelove.cafe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열린 분위기와 적극적 운영으로 많은 컬렉터와 자료들이 모여 있는 곳. 회원들 스스로의 능동적 자료 업데이트와 정보 교환이 큰 장점. 하지만 냉정하고 철저한 회원관리가 이뤄지므로 부지런한 활동을 담보로 함.
[블로그] 소림사 십대제자 - blog.empas.com/asiafont
전단은 물론 오래된 잡지와 신문에 실렸던 영화 광고, 심지어 이번 주 TV영화 스케줄까지 폭넓게 제공하는 정보통. 운영자의 근면함과 영화 사랑이 물씬 풍겨나는 공간.
자료협력 손병운 | 사진 이휘영, 김대영
최원균(전단 수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