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더라도 찬찬히 읽어보시면 일본은 이미 임진란 이후부터 선진국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을 제외한 민족에게 틀 야만적이라는 표현을 단 조선이 일본만은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미 17세기부터 일본은 조선보다 앞선 선진국이었습니다.
동사록中
왜경에서 강호까지는 모두 육지인데 일변(一邊)은 바다를 끼고 지세가 평탄하며, 산천이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肥沃)하였다. 20일 동안 가는데, 여염이 연달아서 민호(民戶)가 만 호에 가까웠고, 연해 일대가 모두
그와 같았다. 웅성(雄城)과 거진(巨鎭)이 군데군데 바둑알같이 널려 있고 푸른 송죽(松竹)이 곳곳에 숲을
이루었다. 도로는 평탄하고 전답이 방정(方正)하며 밭의 네 귀에는 반드시 다초(茶草)가 심어졌다. 시장에는
물화가 산같이 쌓였으며 여염에는 곡식이 널려 있으니, 그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성함이 자못 우리나라
의 비교는 아니었다.
음식 범절은 또한 간결한 것을 숭상하고 많이 먹지 않았다. 밥은 두어 홉에 지나지 않고 찬도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 그릇에 담은 양 역시 아주 적어서 먹는 대로 다시 첨가해 주므로 먹다가 남는 일이
없었다. 그 풍속에 즐겨하는 것은 채소국과 생선회인데, 회는 매우 굵고, 먹는 음식에 초(醋)를 치는 것을
좋아했다. 식사 후에는 반드시 과일상을 들여다가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후에는 반드시 차를 들었다.
빈부와 귀천을 막론하고 하루에 두 끼를 먹고, 노역(勞役)을 하는 자는 세 끼를 먹었으며, 멀리
행역(行役)하는 자는 주먹만한 밥덩이를 불에 구워서 약간 말려 점심(點心)의 자료로 삼았다.
.....도둑질하거나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그 형벌이 참혹하여 십(十)자의 나무에 산 채로 묶어 놓고 혹은
창으로 난자(亂刺)하고 혹은 불로 단근질하는데, 형벌을 받는 자도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혹은 목을 늘여
칼날을 받는 자도 있으며 혹은 자결을 원하는 자도 있었다. 목욕하고 염불(念佛)하며 스스로 제 배를 갈라
손으로 오장(五臟)을 꺼내어 죽으면 모두 훌륭한 사람이라 이르고 그 자손도 또한 세상에 현달한다. 칼을
시험하는 왜인들이 다투어 시체 있는 곳으로 모여 칼로 난자하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없었으니, 그 습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범죄를 흔히 하지 않고 도둑도 적어서 바깥 문을 닫지
않고 나그네들이 한데서 자며, 시장에 물화를 밤낮 없이 드러내놓았으니, 이는 형벌이 혹독한 보람이었다.
궁실(宮室)과 거마(車馬)와 복식(服飾)의 제도는 존비(尊卑)와 귀천의 구별이 조금도 없어, 높은 자가 입은
것을 낮은 자도 또한 입고, 귀한 자가 하는 일을 천한 자도 또한 하였다. 종이 끈[紙繩]과 짚신 같은 것은
천한 자가 착용하는 것인데 관백도 또한 착용하였으며, 금은과 채단(綵緞)은 관백이 입는 것인데 천한 자도
또한 입어, 귀천이 뒤섞여 등급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명분(名分)이 일정하여 상하가 구별이 있고,
예모(禮貌)가 공손하여 태만함이 없으며, 명령을 받들어 감히 어김이 없었다.
이른바 예모라는 것은 곧 머리 위에 쓴 것을 벗고 허리에 찬 칼을 풀며,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맨발 벗고 다리를
드러내며, 입으로는 예예 하고 무릎으로 설설 기며, 종종걸음을 치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며, 예가 끝난
후에는 감히 돌아서 나가지 못하고 뒷걸음으로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 나라에는 원래 오르내리고 절하며
읍하는 절차가 없어 이것으로 절을 대신하고, 평등한 사람에게는 서로 손만 들어 보이고 혹은 서로 걸터앉아
예를 하였는데 그 형상이 기괴하여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천문(天文)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의 술수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중에
침술(鍼術)이 약간 정묘하였다. 이른바 매복(賣卜 점쳐 주고 돈 받음)하는 자는 종이에 팔괘(八卦)를 그려
길흉을 점치는데, 지나는 길 옆에도 간혹 있었다. 이른바 천문(天文)은 곧 역서(曆書)를 만드는 사람인데, 그
나라의 역서는 자못 우리나라와 같지 않았다. 대개 그 땅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가장 빨리 뜨므로
우리나라보다 1각(刻)이 길기 때문이었다. 이러므로 달의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차이가 있어, 우리나라의
15일이 일본의 14일이 되기도 하며, 절후의 들고 나는 것과 한서(寒暑)의 가고 오는 것이 또한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극한(極寒)의 날도 또한 심히 춥지 않으며, 밤에 눈이 한 자가 넘게 와도
다음날 아침에는 바로 녹아서 강에는 한 조각 얼음이 없고 도로도 얼지 않았다. 지나는 곳곳마다
추경(秋耕)이 한창인데, 무가 들에 가득하며 화초가 시들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비교해 보면 일본의 섣달
기후가 우리나라의 구시월과 비슷하였다.
대개 오민(五民) 가운데에 병민이 가장 편안하고 상민이 그 다음이며, 그 다음은 승인이요 그 다음은
농민인데, 물자가 풍부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생리(生利)가 매우 넉넉하였다. 사로잡혀 온 사람도 빈손으로
와서 수 년 사이에 재산이 혹 수백 금이 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 생업을 즐겨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뜻이
없었다. 나라 가운데 크고 작은 역사를 백성에게 부역시키지 않고 모두 고용(雇傭)하여 썼으며, 임금(賃金)이
또한 풍족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나갔다. 다만 축성(築城)의 역사는 병민ㆍ농민을 막론하고 모두
조용(調用)하였다. 관백 이하 여러 고을 장관(將官)에게 공봉(供俸)하는 물건을 민간에서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이 없고 출입할 때에 인마(人馬)를 징발하는 일이 없으며, 여관[舍館]ㆍ음식ㆍ가마 타는 따위의 제반
수용품이 모두 일정한 가격이 있어, 한 사람이 한 참(站)을 가는 값이 동전(銅錢) 50닢이었고, 말 1필의 값이
30닢, 백반 한 그릇에 1전, 술 한 병에 4전이었으며, 쌀이 귀한 때에는 10전에 1수두(手斗), 쌀이 천할 때에는
10전에 12수두라 한다. 이른바 수두(手斗)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2승 7홉이다.
남자가 매우 많은데 군병(軍兵)이 대부분이다. 용병(用兵)과 방화(放火)에 모두 묘기(妙技)가 있고, 더구나
생명을 가벼이 여기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의기(義氣)를 서로 흠모하니, 참으로 무적(無敵)의
강병이라고 하겠다. 그중에도 살마주(薩摩州)의 군사가 가장 용감하여 그 고을을 배반하지 않고 윗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아끼지 않으므로, 가장 오랫동안 승습하였고, 찬탈하는 일이 본래 없었다. 그리하여 수길이
통합할 때에도 여러 고을이 모두 복종하였지만 살마주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고, 가강이 대판을
에웠을 때에도 살마주의 군사는 마침내 에워싼 것을 뚫고 나갔다. 이러므로 국중에서 막강(莫强)의 군사라
이르며, 검졸(劍卒)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살마주를 손꼽고, 기병(騎兵)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갑비(甲斐)를
앞세우지만, 갑비의 기병이 오히려 살마의 검졸만 못하므로 관백 이하가 모두 두려워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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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조선통신사에 관한 일본에 남은 기록을 토대로 본 일본의 17세기
출처:다음 일본 방
음..중고등학교때 교과서로 배워오던 조선통신사에대한 지식과..좀 다른..면이..
막상 도서관에서 심심풀이로(?) ..조선통신사에고나한 당시 기행기를 번역 해석해놓은 책을 봤는데요..
음..생각보다.. 통신사 일행들이 일본에 대해 놀라워 했던 기록들이 많더군요.
특히 오사카에선 길가에 늘어선 상점가들에 대한 인상이 상당히 컸던 모양인데..(아마 당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지금도 있는.. 다이마루 혹은 미츠코시등.. 유명 상점들의 오사카지점들을 봤던 모양..)..아무튼.. 길게 들어선 상점가와.. 도심부의 대형 가부키 극장, 공중 목욕탕 등 서민 관련 문화시설 등에 대한 인상이 매우 강했던듯..(그런데 유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겠지만..)
아무튼..일본의 번듯번듯한 포장도로와 거대한 상점가, 가부키 극장등의 시설.. 그리고 호화로운 영주들의 건축물들에대해 상당히 신기해하면서도.. 결론은..일본은 신기한 문물은 많으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보고 배울것은 없다고 평가한 부분이 인상적이더군요.
그리고 한가지 재밌는건.. 훗날 근대 서구 예술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하이쿠를..무슨 장난같은 글귀로 치부하더군요..(뭐..요즘도 하이쿠를 접하지 않은사람들은 처음 하이쿠를 보면..뭔말인지 잘.. 와닿지가 않죠. 지금이야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동양 고전시가가 되었지만.. )
아무튼.. 통신사 일행들이.. 일본 시가에대해선 상당히 혹평을 하면서도 일본 그림들에 대해선 아주 좋은 평가를 하는 대목도 재밌더군요.
... 통신사 내에서.. 조선국왕과 에도 막부 쇼군 사이에 동등한 관계로 진행되는 일련의 통신사 사절 의식이..
만약 훗날 행여 일본의 천황이 정가에 복귀할경우..쇼군의 상위개념인 천황과 조선국왕과의 수평관계를 유지할수 없게될 여지가 있다며 이부분에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논쟁이 흥미로웠습니다.
일본쪽 자료를 보면.. 당시 조선통신사로 인해 조선의 한시등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은 아마 에도에 들어선 통신사 일행과 그들을 신기한듯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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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주쿠 메이지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