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엽서와 그림들 ♥
옛날 좋은 자료들 입니다 한번씩 읽어보세요
수확
: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점치는 풍경
: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한국인의 복장을 실질적으로 포현하지 못한것 같음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 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서울풀경
서울 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비인현감 이승열
직업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혀진 시기는 19세기 총다.
1926년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등 서해안 탐사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레의 접촉 기회를 갖었으며
극히 제한적 이였지만 해안지역을 방문했다
.
당시 이들으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918년 라이라오의 함장 바질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였다,
이 그림은 밪ㄹ홀 함장이 항핵에 ㄱ재된 긂으로
홀 일해의 상륙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햔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년8월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혜레나 섬에서 유배중 이였던 나폴레온을 방문 하였다.
나폴레옹과 홀 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파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아,이 긴 담뱃대,참 보기ㅣ가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 한다.
이때 홀은 대답하기를,이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이제까지 유서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으 나라를
침략해본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 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처들어가 보자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찿아 보리라"고 말했다.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신등이 그려져있다
소청도 주빈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것이다 뾰쪽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데를 들고 있는
조선안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여 있다.
배재학당 교사
어팬잴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엿장수 소년들
독일애서 발행한 엽서
추산마을
외국에서 발행한 엽서로 추산이라는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대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 아니라 '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 이라는 걍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 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문화 속에서
심지어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란 비법도 유명했다.
전녀위남법이란 "임신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방법"을 말힌다.
가문을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면
소박 맟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시절
후사를 잊기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 가운데 임신중 여아를 남아로 바꾼다는
이른바 전녀위남법 을 시행하게 된것이다.
이런 문화속에서 이해할수 이해할수 있는것이
가슴을 내 놓고 다니는 여인들 이다.
가슴을 내놓는 행위는 젖먹일 아들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였고 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기치를 높일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였던 것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매우 흥미롭게 이렇한 여인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 사울까지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도중에도
밖에 나와있는 여러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 되였다.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득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경우에는 매우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 "코레아 코레아"1904)
사골 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이 외출 할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의출한다는갓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
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라 위까지 녹색 잠옷을 뒤집어 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듯 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으면서 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 하겠다는
갸날픈 조선 여인들의 태도는 모스렘이나 터키 여인들 에게서는
찿아 볼수 없는 점이다.아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세에도
불구하고거북스럽고 불필요한 의상을 조롱이나 하듯이
유방을 내놓고 다닌다.(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 1901)
온돌,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다.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알러스트래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사진 구들장(온돌) 을 놓는 모습이다.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르로된 서민의 집은 찿아볼수 없다.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융하고 독창적안 것이다.
외국의집은 땅을 파고 기초공사를 하는게 아이라
지면위에 그냥 짖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너무나 집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 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코레아 코레아"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중 한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지나면서
충분이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방법도 간단하디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9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렇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만 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등 저렴한
것이며 이 마져도 없다면 잡초 ,나무잎등 어느것 이라도 땔검으로
활용된다.이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
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우ㅏㅅ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지 못할정도로
뜨거웠다. 100년전 우리나라를 여헹헸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이 뜨거움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 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계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 이였다
문이나 창문을 열어놓치 않으면 모랫동안 보온이 되여
상당히 편라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여
있는것 같았다.코리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자는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수가 없자 일아나 문을 열어 졌혔으니
얼마후 추워서 문을 다시 닫을수 밖에 없었고
5분후에 다시 똑같은짖을 반복할수 밖에 없었다.
허지만 이런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안에 아주 배여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때가 있어 그럴때는 속이
뒤집히려했다.(스웨댄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코레아>중)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란 것이다.
그곳은 열기와 벌레들 빨레할 더러운 옷가지들과 메주라고 하는
간장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는 콩. 그리고다른 저장물들로
가득차 있어 누워잘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은 남겨두고 있다.
밤이면 뜰레 밝혀진 너덜너덜힌 등롱과 방의 등잔불이 손으로
더듬거리며 활동할수 있을 정도의 조명을 제공한다,
조랑말의 말린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섭씨 33도 정도가 평균 온도 이며 자주35.5도로 올라간다.
나는 어느 꿈찍한 밤을 방문앞에 않은채로 새운적이 있는데
그때 방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었다.
지친몸을 거의 지지다싶이 덥혀주는 이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한국과 아웃나라들"1897)
조선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6척 높이에 넓이는 8척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써야 하는데도 빆의 기온이
영하 15ㅡ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 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돟방 밑에 4골을 만들고 그 우ㅏ애 얇고 넓다란 돌을 덥혀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사람들이 빵을 구워낼
만큼 뜨겁지는 않아도,방바닥은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레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떡하다가는 엉댕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곳 사람들이야 수백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렀차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써드의"서울견문록"중에셔)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1904년)에 시려있는 사진으로
"궁궐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미혼의 한국 소년
콘스탄스 테일러의책{1904년)에 실린 그림으로
미혼의 한국소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고종황제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 실려있는 고종황제의 사진
결혼한 한국 남자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실려있는 그림으로
결혼한 한국 남자리는 설명이 붙어있음
(셜명이 잘못 가재돤듯함)
궁궐에서 일하는여인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실려있는 그림으로
궁궐에서 일하는여인 설명 붙어있음
다양한 한국인들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실려있는 그림으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란여인 .겨울 모자를쓴 여인,궁중용모자. 엤 군인모자
지게를 진 남자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실려있는 그림으로
지게를 진 헌국 남자그림
황제의 시종들
콘스탄스의 책(1604년)에실려있는그림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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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엽서와 그림들 ♥|작성자 leekh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