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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tes view에서(1669m) 바라본 Death valley, 흰 부분은 소금밭
열대의 바다도 열사의 사막도 데스벨리 만큼 뜨거운 곳은 없었다. 데스벨리는 정말 화끈하게 뜨거운 곳이었다. 마치 핀란드식 사우나에 들어간 것 처럼 숨이 턱턱 막힌다. 사우나보다 열기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데스벨리에 도착한 때는 2009, 9, 22일. 9월 하고도 하순이면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는 찬 바람이 제법 선선할 때지만 데스벨리는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 그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바위, 대지 위를 달리며 열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피부를 따갑게 때린다. 날씨가 너무 더워 그늘로 찾아 들지만 그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비지터센터가 위치한 곳의 지명도 'furnace creek' 용광로다. 물론, 데스벨리에는 금,은,구리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해 아마도 어느 광물 제련 용광로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더위가 용광로를 방불케할 정도다. 그래서, 6월부터 9월까지는 데스벨리 여행을 자제하라고 하는데 이유는 자동차의 엔진이 열받아 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란다. 온도가 도대체 얼마나 높기에...
유타에서 캐년 여행을 하는 동안 쌓인 피로를 푸느라 라스베가스 숙소에서 한껏 늑장을 부렸더니 데스벨리 도착시각이 근 1시가 다 됐다. 때문에 라스베가스를 벗어나 사막으로 접어들자 벌써 수은주는 화씨 100도를 육박했고 데스벨리 비지터센터에 도착하면서 107~8도까지 오르더니 오후 2,3시쯤 미국에서 가장 낮은 땅이라는badwater basin에서는 112를 기록했다.
화씨 112도는 섭씨 40도. 역대 최고기온은 1913년 7월의 화씨 134도=섭씨 57도, 7월 평균기온은 화씨 115도이다. 기록처
<앗 뜨거, 살려줘!>
럼 데스벨리는 북미 전 지역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데스벨리가 저 위도 지역보다 더 더운 이유는 바로 특이한 지형 때문이다. 해수면보다 최고 85미터 낮은데다 동쪽에 amargosa, 서쪽에 panamint 등 동서남북이 높은 산맥으로 둘러쳐진 분지형 지형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내리쬐어 계곡내 공기가 덥혀져도 높은 산맥에 가로막혀 주위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정체돼 "찜통더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습도가 낮아 한국의 고온다습한 더위와는 차이가 있다.
더위 외에도 데스벨리는 미국 내에서 가장 낮은 땅이란 또 하나의 기록을 갖고 있다. 데스벨리 계곡내에 bad water라고 명명된 곳은 표고가 해수면의 높이 보다 85.5미터나 낮다.
<bad water에서 위로 올려다 보며 찍은 sea level 사진>
라스베가스에서 US 9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동쪽으로 2시간 가량 달리면 Amargosa사막 가운데 Beatty란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데스벨리의 동쪽 입구가 나온다. 동쪽 입구로 grapevine, funeral산맥을 넘어서면 눈 앞으로 광대한 데스벨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는 사막과 드 넓은 소금밭, 눈 앞에 보이는 듯 한달음에 닿을 것 같지만 차로도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만큼 계곡은 넓고도 깊다. 동쪽 입구에서 부터 시작된 40여도 가량의 경사길은 평평한 소금밭까지 계속되는데 자동차를 타고 시속 4,50킬로미터의 속도로 20분 가량 달려야 바닥에 닿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경사길에서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연신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차를 운전하면서 바다보다 낮은 땅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라스베가스에서 데스벨리 가는 길> <네바다의 사막>
<데스벨리 초입>
캘리포니아주 서쪽 끝에 위치한 데스벨리는 남북으로 150킬로미터가 넘고 전체 바닥면적이 7800제곱킬로미터나 되는 규모, 워낙 넓고 관광포인트도 많아 데스벨리를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일정을 몇일은 잡아야 한다.
데스벨리의 중심이자 가지런히 정리된 리조트가 갖춰져 있는 furnace creek 주위에는 devil's golf course와 golden canyon, artist drive, zabriskie point, badwater, dante's view 등 데스벨리의 자연을 대표하는 포인트가 모여있는 데스벨리 관광의 중심이다.
golden canyon 트레킹을 위해 차에서 내리자 마자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 막힌다. 태양은 대지를 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고 바람은 있으되 열풍이다.
땅은 열기를 잔뜩 머금은 채 코 앞에서 이글이글 아지랭이를 피워 올린다. 골든 캐년은 빙하가 바위를 깊게 깎아낸 지형으로 깎아지른 양쪽 절벽 사이로 폭 5미터 안팎의 길이 나 있다.
북미에서 가장 낮은 땅 bad water에 닿은 것은 3시 전후 더위도 절정에 달했다. 베드워터를 동쪽에서 병풍처럼 막아선 amargosa산맥의 중턱에는 바다의 해수면 위치를 알려주는 'sea level'이란 글자가 적혀 있고 산맥 앞으로 드 넓은 소금밭이 펼쳐지는데 바다의 깊이가 가장 낮았던 탓인지 이곳에 소금이 가장 두텁게 쌓여 있고 그래서인지 소금밭의 색깔도 새 하얗다. 소금밭과 산 사이에는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남아 먼 옛날 바다의 흔적을 보여준다. 소금밭 위를 걷고 싶다는 욕구에 이끌려 데스벨리의 중간 쪽으로 걸어나갔지만 소금에서 반사된 빛과 뜨거운 복사열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데스벨리는 신생대 4기 전반기 홍적세(the pleistocene epoch)까지 북미대륙의 내해 가운데 하나였지만 홍적세 중기를 거치면서 물이 모두 증발해 사막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벨리 내부에는 furnace creek와 amargosa 강이 있었지만 주위 산에서 깎여 내려온 모래와 흙에 덮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퍼니스 크릭과 베드워터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아티스트 드라이브는 정말 기묘한 형태의 바위산와 골짜기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절경으로 중간에 'artists palette'란 포인트가 있다. 차를 타고 이 곳을 드라이브 한다면 비단 예술가가 아니라 할 지라도 예술적 영감이 떠오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그런 곳이다.
<퍼니스 크릭>
<위 야자수 사진은 퍼니스 크릭, 아래 베드워터>
다시 퍼니스 크릭으로 돌아와 190번도로를 타고 약 40킬로미터를 달려 데스벨리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Dantes view(1669m)에 올랐다. 산 꼭대기에 주차장이 설치돼 있어 60도는 족히 될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쳐 자동차로 정상에 오른다. 데스벨리의 바로 가장 자리에 우뚝 솟은 단테스뷰에 서면 드넓은 소금밭과 황량한 사막이 파노라마 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데스벨리에는 금과 구리 등 각종 광물자원이 많아 계곡 서쪽에는 wildrose charcoal kilns란 가마가 있고 Ballarat town, Greenwater, panamint city 등 광산을 따라 여러 도시들이 명멸했고 일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개중에는 주민이 200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큰 것도 있었고 학교와 극장, 테니스 코트 등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Greenwater에서는 "the death valley chuckwalla"란 잡지도 발간했었다. 또한, 벨리의 북서쪽 가장자리에는 Scottys castle이란 성이 가볼만한 관광포인트다. 동부에서 이주해와 카우보이로 일하던 Scotty란 사람이 데스벨리에서 금광산 사업에 손을 대면서 시카고에 사는 보험왕 Albert Johnson을 투자자로 끌어들여 수천만달러를 유치한다. 하지만, 스카티는 금광사업은 커녕 보내준 돈을 다 써버리고, 투자자인 알버트 존슨이 '왜 이익금을 보내지 않느냐'고 물으면 "운송도중 사고가 났다"는 말로 핑계를 대곤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도저히 참다 못한 알버트 존슨이 직접 데스벨리를 방문했고 스카티는 어린시절 큰 사고로 건강이 좋지 않은 투자자를 말에 태워 극한의 데스벨리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지만 정작 알버트 존슨은 건조하고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데스벨리의 기후속에서 오히려 건강을 되찾는다. 그리고 데스벨리를 좋아하게 돼 1년중 1달 가량은 데스벨리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차에 그의 부인이 아예 데스벨리에다 좋은 별장을 짓자는 제안을 해 1920년대에 지어진 것이 Scottys castle이다. 알버트는 금광을 보지도 이익금을 받지도 못했지만 스카티에게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알버트는 타계하면서 성을 gospel재단에 기부했고 스카티는 말년에 2년동안 재단 관리하의 성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열기를 잔뜩 머금은 계곡의 대기가 뿌옇다>
데스벨리가 극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계곡도 산도 death valley, funeral mts으로 을씨년스럽다. 어떤 곳일까 기대를 갖고 가면서 아마 누군가 그곳에서 죽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봤다. 그러나, 사실은 데스벨리란 작명이 죽음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얘기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sutter's mill이란 곳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캘리포니아 이곳 저곳에서 금맥을 찾기에 혈안이 돼 있던 차에 한 곳에서 금맥이 터지자 이른바 gold rush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May flower호를 타고 Jamestown에 첫발을 내디딘 지 백여년이 흘러 사회가 안정되고 한 몫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줄어들자 미국인들은 노다지의 꿈을 쫓아 서부로 서부로 몰려들었다. 당시 서부로의 1차 관문은 Saint Louis, 최종 관문은 유타주의 Salt Lake City였다. 솔트 레이크 시티는 늘 노다지를 쫓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1849년 금을 찾아 서부로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해서 훗날 이들을 '49ers'라고 불렀다.
그해 10월 Donnor Party란 일군의 개척자들이(pioneer)솔트 레이크에 도착했지만 폭풍우에 갇혀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캘리포니아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막고 있는 sierra산맥을 넘지 않고 남쪽 끝으로 우회하는 "Old spanish trail"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산맥을 넘지 않으면 겨울에도 기다릴 필요없이 바로 서부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파이오니어 왜건 트레인이 한 번도 이 루트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간 적이 없다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수소문한 끝에 자신들을 안내할 사람을 찾았고 그로부터 '안내하겠다'는 동의를 얻은 뒤 서부로의 길을 재촉했다. 리더인 'captain jefferson hunt'는 빠른 속도로 무리를 이끌지 않았고 사람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대장의 운영방침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 젊은이가 답사여행에서 John premont가 그린 지도를 내놓으며 Walker pass란 곳에서 Sierra Nevada사막을 가로지를 수 있는 지름길을 보여줬는데 500마일의 여정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출발한 120대의 마차 가운데 대부분이 Cider city의 동쪽에 위치한 enterprise, Utah에서 이 루트로 방향을 틀었고 hunt대장은 나머지 마차를 이끌고 old spanish trail로 여정을 계속해 무리가 둘로 나뉘었다.
유타와 네바다의 경계지점에서 beaver dam wash란 간격이 넓은 canyon,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자 20대의 마차를 제외한 나머지는 hunt대장에게 합류하기 위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물도 찾기 힘들고 바른 길인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상황에서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됐다. Panaca Nevada, Bennetts pass, Delmar valley를 거쳐 Crystal springs in Pahranagat valley에 도착했다. 이어 Tikaboo valley, Groom lake in central Nevada에 닿는 동안 한달의 시간이 흘렀다. groom lake에선 또다시 물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가자는 쪽과 서쪽으로 가자는 두 무리로 갈리었다. 서부 개척자들은 물부족과 장기간 여행의 피로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84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death valley junction을 통해 데스벨리로 들어가 furnace creek에서 북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진 Stovepipe wells에 도착했다.
<베드워터 소금밭> <사막에 자라는 관목, 습기가 없는 극한의 환경에 적응 하다 보니 입사귀는 선인장 처럼 빳빳하고 윤이 난다>
지친 것도 지친 것이지만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한 것은 앞을 가로막은 도저히 넘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이 즈음 이들은 마차와 가진 모든 물건들을 버리고 오로지 맨몸으로 산맥을 넘어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데스벨리 sand dunes에서 마차를 버리고 소를 도살해 마른 고기를 만들었다고 해서 오늘날 이곳의 지명이 Burned wagons camp로 명명됐다.
다시 Emigrant pass와 Wildrose canyon을 지나 데스벨리 지역을 벗어나게 되는데 한 여인이 계곡을 돌아다 보면서 "Goodbye Death Valley"라고 한 것이 지명의 기원이 됐다.
Panamint valley와 길이 좋은 Indian wells valley에 다다라 시에라 산맥을 처음으로 보게 되고 운좋게도 그들의 본디 여정이었던 Walker pass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여정 가운데 최악의 루트였던 Mojave desert plateau에서 헤매다 Palmdale에서 길을 찾고 Santa clarita river drainage에서 스페인 카우보이 Rancho San Fernando를 만남으로써 3개월에 걸친 서부 대장정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0대의 마차가 3개월간 서부의 산맥과 사막을 지나면서 희생된 사람은 Culverwell 단 한 사람 뿐이다. 그도 데스벨리의 극한 자연 때문에 숨진 것이 아니라 네바다 사막을 넘으면서 겪은 고초가 사인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데스벨리는 사람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름인 셈이다.
미국 동부에서 조용하게 살던 사람들을 개척자의 대열에 합류시킨 것은 오로지 황금이란 인간의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서부의 대자연에 온 몸으로 맞서면서 극한상황을 극복해 나갔던 인간의지, 도전정신은 인류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