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蘭坡 洪永厚- 그리운 사람들- ]
金乙漢
“울밑에 핀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너무나 유명한 이 노래의 작곡가가 바로 난파蘭坡 홍영후洪永厚씨이니 그는 한국 사람으로서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제금가提琴家)였으며 또한 작곡을 가장 많이 한 선구자인 것이다.
그보다도 먼저 바이올린을 배운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본격적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홍난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서울 사람으로 청년회(YMCA)학관을 마치고는 조선정악회朝鮮正樂會와 동경상야東京上野음악학교를 나온 후 연악회硏樂會를 조직하여 음악 보급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때의 연악회의 순서를 볼 것 같으면 의례依例히 피아노 김영환金永煥, 피아노에 홍난파라고 쓰여 있어 그 두 분의 희귀했던 존재를 다시금 엿보게 하거니와 향학심向學心이 왕성한 난파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일본 유학을 가서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樂學院을 니온 후 동경교향악단東京交響樂團의 제일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가서 시카고에 있는 ‘씨엔웃드’음악학교를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미국 유학을 하기까지에는 한 가지 눈물겨운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은 첫 사랑에 실패하고 홧김에 미국 유학을 갔다는 사실이다.
난파가 서울에서 연악회를 조직하고 혹은 글도 쓰기도 하고 혹은 연주회를 열기도 해서 음악의 보급운동을 활발히 할 즈음에 그에게는 K라는 애인이 있어서 서로서로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K 양은 이화학당梨花學堂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음악과장 ‘미스 이엉’의 수양딸이었으므로 결혼을 하자면 그의 승인을 얻어야만 되었는데 ‘미스 이엉’은 어데서 들었는지 난파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결혼에는 반대하는 것이었다. 지금과는 달라서 그때만 해도 옛날이요 더구나 ‘미스 이엉’은 파트론이자 수양 어머니이므로 K양은 중간에 끼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필경 ‘미스 이엉’을 따라서 미국 유학을 가게 되니 실연의 상처를 안은 난파는 “오냐,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부랴부랴 온갖 무리를 다해서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 가서도 고학苦學을 하느라고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므로 난파는 그때부터 건강을 손상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자포자기 생활을 계속하다가 경성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에서 음악을 가르칠 때의 제자弟子이던 이대영李大永 양과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첫 사랑의 상처를 잊고 가정생활의 행복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난파의 백씨伯氏인 홍석후洪錫厚 박사는 다년간多年間 세브란스 병원의 과장으로 있던 유명한 선생인 만치 난파도 또한 의사醫師가 되기를 권하였으나 난파는 끝끝내 자기 주장을 고집하여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음악가가 된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숙부叔父의 영향을 받아서 홍 박사의 아들 삼 형제가 모조리 바이올린을 잘하여 음악가音樂家 일가一家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난파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음악가로는 가장 글을 많이 썼으며 그가 저술著述한 ‘조선동요백곡집朝鮮童謠百曲集 ’은 길이 전해내려 갈 명작名作인 바 그 중에서도 “고향의 봄” “봉선화鳳仙花” “성불사成佛寺의 밤”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난파는 바이올린의 독주獨奏에 만족하지를 않고 말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심포니 오케스트라(관현악단)를 지휘하여 컨덕터(지휘자)로서도 크게 명성을 날려서 장래 더욱 발전될 것이 기대 되던 바 과로 끝에 고질痼疾이었던 늑막염이 돋쳐서 필경 세상을 떠나니 44세- 한창 살 나이였다. 지금으로부터 7, 80년 전의 일인데 유족遺族으로는 이대영 여사와 따님 형제가 있다. =<聯合新聞> 1959년 11월 1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