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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전투를 벌일 때 적진으로 가 적의 배를 들이받고 화포 공격을 퍼붓던 돌격선이다.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거북선이라 부른다. 판옥선 위에 철침이 박힌 덮 개를 씌우고 배의 앞, 뒤 , 양옆에서 화포를 쏠 수 있 도록 만들었다.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의 거북선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 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나대용이 만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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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조선의 주력 군함으로 한꺼번에 100여명이 탈만큼 컸 다. 갑판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노를 젓는 격군이 타고 2층에는 포나 활을 쏘는 전투병이 탔다.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 무겁고 튼튼했기 때문에 화포를 쏜 뒤의 충격을 너끈히 견딜 수 있었다. 그러 나 일본군은 화포를 갖고 있지도 못했고 배가 가벼워 서 화포 공격을 받으면 여지없이 부서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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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년(선조 25)4월부터 1598년까지 2차례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말한다. 1592년의 제 1차 침입을 ‘임진왜란’ 1597년의 2차 침입을 ‘정유재란’이라고 하지만 통상적으로 1.2차를 포함하여 ‘임진왜란’이라고 말한다.
임진왜란 전쟁 초기 (1592년~1593년 4월) : 전쟁초기에는 불리한 국면을 역전시켰다. 강화교섭기 (1593년 5월~1596년) : 강화교섭기에는 전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정유재란기 (1597~1598년 11월) : 정유재란기에는 결정적인 두 차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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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 전투일 : 1592년 5월 7일 이순신이 참전한 최초의 해전.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출전하였다. 원균은 70척의 함대중 겨우 6척의 전선으로 합세하였다. 5월7일 12 시경 조선해군은 일본군함대 50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있는것을 보고 동서로 포위하여 빠져나오는 적함에 맹렬한 포격을 가해 26척의 적함을 격침시켰다. |
사천포해전 전투일 : 1592년 5월 29일 거북선을 최초로 실전에 투입하여 그 성능을 확인한 해전이다. 이때 총 2천 6백여명의 왜군이 죽고 전함 13척을 격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왼쪽 어깨에 조총탄을 맞았고, 거북선의 건조 책임자인 나대용도 총탄에 맞았다. |
한산도 대첩 전투일 : 1592년 7월 8일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은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 하나입니다. 연이은 패배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수군 격파 명령을 받은 왜군은 7월 상순에 견내량에 집결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에 견내량이 수로(水路)의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공격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뱃머리를 180도 돌려 그 유명한 학익진 전법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적을 둥굴게 포위한는 진법)으로 적들을 맞이하여 화포로 총공격을하여 적선 66척을 불태워 버 렸다. 그러자 적장은 불리하다고 여겨서 패선 10척을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이 한산도 대첩은 전쟁 국면이 조선에 유리하게 한 대첩이다. |
명랑 해전 전투일 : 1597년 9월 16일 이 전에 이순신장군은 수군통제사에서 파면되어 백의종군을 맞고 이에 원균이 그 자리에 올랐으나 칠천량 전투에서 패하고 원균이 죽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장군에 수중에는 12척의 배가 전부였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 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또한 92척을 파손 및 대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 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
노량해전 전투일 : 1598년 11월 19일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는 54살의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왜선 200여척이 격파되 고 이로써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
백의 종군 (白衣從軍) ‘흰 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다닌다. ’라는 뜻의 이 말은 모든 권리를 버리고 일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싸우거나 봉사한다는 속뜻을 가지고 있다.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평복으로 참전하는 처벌이다. 예전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색깔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2번의 백의 종군이 있었다. <1차 백의 종군> 1586년(선조 19) 42세때 조산보만호가 되었으나 여진족의 침입에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막지 못 했다. 그리고 이일은 아군측의 피해만을 기록하여 조정에 거짓장계를 올렸다. 잘못된 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결국 지난날의 공적을 참작하여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2차 백의 종군> 왜군(소서행장)의 첩자였던 요시라의 간계에 빠진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나가 가등청정의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워낙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작전을 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왜군 함대를 요격 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원균의 모함까지 이어져 조정은 이순신에게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박탈하고 투옥할 것 을 결정했다. 1597년 2월 26일 조정은 이순신을 압송하여 의금부에 구속시켰다. 선조는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하며 ‘스스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국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여러 차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로인해 이순신에게 극형만은 면하게 한 뒤 백의종군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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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元均 1540~1597)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이다.
평택시 도일동에 출생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부령부사, 경상우수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592년(선조 25년) 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 지휘를 맡는다. 부임한지 3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5월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 사천포, 당포, 율포 해전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조정의 상신·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있었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1595년 12월 그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고, 1596년 가을에 다시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1597년 정월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경상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시로 이순신이 맡고 있던 수군 통제사의 업무를 맡았다. 그해 6월 가덕도 해전에서 졌으며,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삼도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던 중에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이순신 모함설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옥포해전의 장계를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올린 것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원균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을 가로채기 위하여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이 사실은 원균의 인척인 윤두수가 이순신을 탄핵하기 위한 주요근거로 사용된다. 이때 윤두수는 위 사실을 원균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하며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장계는 '연명', 즉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 작성하는 게 가능한 '상소'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각각 단독으로 작성해서 올리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장계를 단순히 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임지의 책임자들을 비롯해 각지에 해당 장계를 서로 돌려보게 했기 때문에 정말 공이 있다면 장계를 단독으로 올린다고 남의 공을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좌의정 이덕형의 장계를 보면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이 장계에 나와있듯이 평소에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다닌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토 기요마사가 간첩 요시라를 보내어 어느 날 어느 섬에 가토 기요마사가 머무른다는 정보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유출하고, 김응서가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명을 내려 가토 기요마사를 체포토록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첩자의 말을 믿을 수 없고, 수군 출동은 작전상 불리하다.”라며 그 명령을 이행치 않았다. 뒤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문책한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이 결정된 후 원균은 자신과의 주장과는 달리 왜군과의 전투를 계속 피하였고, 일본 수군과 전투를 피한다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이 권율 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수습한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전멸하고 만다. 또한 그 와중 원균은 상륙 후 행방불명된다. 정확하게 죽는 모습을 확인한 기록은 없다.
이순신 어록
♣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옥포 앞 바다에서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옵니다"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자, 선조는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 수군이 존속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후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척의 배를 더 추가하여,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이충무공행록 기록)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큰 해전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장수들에게 굳은 정신력을 가지고 싸움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다음 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위와 같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하여, 13대 133이라는 엄청난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난중일기 1597. 9.15 기록)
♣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이충무공행록 기록)
♣ 한산도가(閑山島歌) (난중일기)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憮大刀 深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남의 애를 끓나니
♣ 한산도 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