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배경
1처용무의 기원
처용무가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신라의 헌강왕(서기 875~886)이후이다. 하지만 그 주술적 성격으로 볼때 처용무는 상고시대의 토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족이나 씨족단위로 무리를 지어 노래하면서 발을 구르고 춤을 추는 원시적 형태의 집단가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처용무의 의의는 처용설화에서 보다 구체화 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용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용은 본래 동해용왕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환생하여 왕정을 돕기 위해 궁녀와 정략적으로 혼인하였는데, 그의 아내를 흠모한 역신이 서라벌 달 밝은 밤에 사람으로 변하여 처용의 아내를 범하게 되었다. 이때 늦게 돌아온 처용이 그의 아내와 역신의 행위를 보고도 폭력보다는 너그럽고 위엄 있게 노래하며 춤을 추자, 역신은 그 마력을 상실한 채 처용의 인품에 탄복하여 앞으로는 처용의 현상만 있어도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처용설화는 표면적으로 처용과 그의 아내 그리고 역신의 삼각관계에서 생겨난 간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극적이고 주술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본의는 아내의 부정과 역신의 음모 등이 당신의 국가 위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동햐용왕은 호국신으로서, 그의 아들 처용은 국가의 위기를 경고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처용이 추는 처용무는 주술적 성격과 아울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지닌 예술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처용무의 주술성은 점점 정립되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발전되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부터 고려 말까지 470여 년간은 흑포사모의 1인무로 궁중에 들어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당시는 한 사람이 검정 의상 차림에 처용의 붉은 가면을 쓰고 처음과 끝에 창사를 하여 벽사진경의 의미를 상징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식으로 연행되었다. 이것이 조선조에 들어서는 2인이 추는 쌍처용무로 발전되었고, 세종 때 와서는 중국의 음양오행설의 영향을 받아 5인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었으며 세조, 성종 때는 접대무나 연례무 등의 오락무로 변화되어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라 하여 섣달 그믐날 제야의 나례 때 추던 장엄한 의식절차인 것으로 학무와 연화대무와 처용무 이 세가지 춤이 종합된 옴니버스적이고 장엄한 오늘날의 총체 예술적 양상을 띄게 되었다.
처용무의 변천과정
처용무는 삼국유사 권 3 처용랑 망해사조에 의하면 울주의 해변에서 헌강왕의 가전에서 찬덕헌무한 용왕의 일곱아들 중 하나가 입경하여 정사를 도왔다 하였고, 고려 때에 용제총화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입경한 한 사람이 머리에 사모를 쓰고 춤을 추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조선조 세종대에 들어와 오방처용으로 개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다음과 같은 문헌을 통하여 처용무의 변화된 특성을 시대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1)신라시대
신라시대의 우리 선민들은 종교적 제전, 정치적 의식, 기타 유흥오락 및 육체적 노동 등 잡다한 기회를 통하여 실로 유쾌히 노래 부르고 춤추며 뛰놀았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랑 망해사조를 보면, 처용이 역신을 노하지 않게 하고 춤과 노래로 무서운 역신을 감화시켜 물리 치는 것으로 보아 무용극적인 줄거리 이며 해학적인 웃음이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처용무의 긴 이야기와 그 밖의 춤의 명칭은 고대 한국 민족의 무용극인 극무의 한 형태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집단예술로서의 민속 무용이 여러 행사에서 예술의 삼분야 즉 음악, 무용, 시가 등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도 또한 가와 무의 불가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원시적 종교의식에서는 가면과 무용이라는 이중의 주술에 의하여 초인간적인 존재로 변모하려고 하여 종교적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고 강조하는 방법으로서, 또 동작 그 자체에서 창생되는 주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 방법으로서 무용과 가면은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존재였다. 원시적 무용과 가면의 발전 및 진화를 가져온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즉, 무용의 magical power를 효과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서 가면을 사용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초기의 가면은 이러한 귀면형으로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가면무도 초기에는 귀면형의 무서운 형상을 한 가면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시 귀면형의 처용면이 옹면으로 바뀌었는데 그 내면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처용면은 헌강왕 이후 전란을 겪고 고려의 안정기로 접어들면 상염무와 같은 이미 있던 옹면의 영향으로서 옹면으로 변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 혹은 처용무와 상염무가 합쳐져서 고려의 궁중무용인 옹면처용무로 정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처음에는 무서운 형상을 한 괴이한 처용면이었던 것이 그 후 신라인의 정신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또 문화생활이 발달에 따라 가면도 정신적 내면적 영향을 받아 보다 인간적인 덕스러운 옹면의 처용면으로 변천된 것으로 보여지며, 여기에 상업무의 간접적인 영향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와 함께 춤 또한 처음에는 귀면형의 가면을 쓴 주술적인 힘을 가진 귀신을 쫓는 원초적 처용무였던 것이 가면의 영향과 더불어 제무로서의 처용무가 행해진 것으로 보아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라시대의 처용무는 헌강왕 시대를 계기로 하여 이전의 원시 구나적 귀면형의 귀면무에서 탈피하여 고구려, 백제 등과의 연관과 함께 상염무와 상호 영양하여 옹면의 처용무로 차츰차츰 바뀌어서 마침내 고려의 안정기에 들어서 궁중무로의 양옹 쌍처용무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2)고려시대
궁중무용으로서 처용무가 국가의 행사에 어떻게 쓰였는지 그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고려시대에 국가의 최고 행사로서의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다.연등회는 상반년의 고려의 대제로서 이것은 본래 선조께 전배함을 기회로 해서 축수의 연향을 대설하는 것이며 이는 광명을 신성시한 우리민족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앙으로서 불을 소중히 하는 습속이었던 것으로 여기에는 불교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으나 후에 불교에 습합되어 형태를 불교에서 취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각각 소회일과 대회일이 있어 음악과 가무백희를 베풀었다.
팔관회에 대하여는 구정에 채붕을 세우고 가무백희를 하였는데 이 의식에도 소회일과 대회일이 있어 거기에는 신라의 고사인 사선락부 및 용봉, 상, 마, 차, 선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춤과 그 외에 민간의 온갖 잡희가 행하여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국가행사로서 가례인 연등회와 팔관회 외에 흉례에 속하는 나례가 있는데 이것은 연중의 제앙 및 병마의 근원인 사귀를 쫓아내고 즐겁고 경사스러운 신념을 맞이하기 위하여 음력 12월 제야의 궁중에서 행하는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처용무는 고려시대에 궁중의 구나와 여러 연에 연결되어 일대 성황을 보게 되었다. 또 신라시대에 있던 전기 일단 뿐이었던 처용가에 부연이 생겨 극시적 형식의 처용가로 바뀌었다. 그 내용은 전편의 서사, 가면의 양자를 용양하는 사, 처용의 제사에 관한 사, 처용의 역신에 대한 위력을 나타낸 것으로 고려시대의 처용무는 1인 혹은 2인의 옹면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3)조선시대
신라와 고려시대에 1인 혹은 2인무였던 처용무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오방처용무인 5인무로 추어진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세종, 세조에 의하여 전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대수정을 가한 유일한 궁중무가 되었다.
그후 성종 때에 완성된 악학궤범에 나타난 처용무는 연화대와 학무가 합설되어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먼저 문제시 해야할 것은 오방처용으로 변한 시기와 변하게 된 그 내면적인 문제를 살피는 일이다. 이혜구(1987)는 ‘무오방귀용백택’의 풀이를 토대로 무방오귀는 동(청), 남(적), 서(백), 북(흑), 중(황)의 신에 제하는 춤이 분명하고, 용백택은 그 백택이 신수의 뜻이므로 역시 제무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악학궤범 소재 전도 처용무는 학연화대와 같이 오락성을 띄지 않고 청, 홍, 황, 흑, 백 오방처용의 발바디작대무, 수양수오방무 같은 의식무로 되었음에 비해 후도처용무는 학연화대를 가졌고, 또 회무와 척답가무로 되어 오락적 색채를 농후하게 띄고 있기 때문에 무오귀는 악학궤범 소재 전도 처용무에 해당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악학궤범 소재 전도 처용무인 오방처용무는 고려시대의 무오방귀에서 영향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제무인 ‘오방무귀’는 어디에서 영향받은 것인가를 살펴보기러 한다.
김학주(1965)는 이에 대해서 중국에서 행해졌던 나례에 종규와 함께 오방귀사가 등장하던 일, 정보문헌비고 권64의 구나에 ‘소매수무’ 하는 점, 연화대가 송나라에서 수입한 자기무인 만큼 고려에서는 수입 당시라든지 기타 사회에 중국에서 이러한 무곡에 오방무를 결합 상연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학연화대에 오방처용무를 합설한 것은 역시 중국의 오방무를 모의한 것으로 보았다. 다만 중국에서의 오방무가 본래 오방처용무 그대로였다고 말할 수 없고 처용의 고사 자체에 외이래왕의 명의가 들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다시 오방무로 윤색 구성한 것이었으리라 보고 있으며, 또 악학궤범의 오방처용무의 방법이 송대 오방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감조절이 잇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오방처용무는 중국의 오방사상에서 영향 되어진 것으로 보아지며, 학연화대처용무의 합설무에 있어서도 그 형식은 중국식을 받아 들였지만 그 핵심에 있어서는 우리 고유의 처용무가 주가 되어 행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처용무는 역신을 몰아내는 주술적인 행위였던 처용굿에서 신라시대와 고려조를 거치면서 궁정의 비극적인 연행물인 처용가면극으로 발전되었으며 특히 고려조엔 주로 2인이 처용무였고, 조선조엔 궁중의 구나무와 연화무로 발전하여 오방처용무로 바뀌는 한편 세종, 세조에 이르러 ‘학연화대처용합설’인 종합 가면극으로 크게 종합되어 합설무와 오방무가 공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1910~현재
처용무는 악학궤범과 각종 홀기에 그 형태를 남기고 있으며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오면서 그 생성 목적에서 이탈하고 연례시의 무악으로서 궁중 정재로 정착되어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전승되었고 조선조의 진연에 반드시 채택되는 주요 종목이었지만 고종 때 열린 수 차례의 진연에는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가 망하자 처용무는 여타의 궁중음악과 함께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1923년 순종 황제 50탄신 축하 공연을 위해 당시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생들에게 학습을 시작한 것이 재생의 기회가 된다. 그후 5년 간격으로 아악부에서 새로 모집하는 아악생들에게 학습되어 전해졌고 해방 후는 구왕궁아악부와 1951년 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개창되어 이어져 오늘의 처용무가 전해졌다.
오늘에 이른 처용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항악정재이자 1971년 1월8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된 대표적 궁중무용이다. 이것은 198년 판 국립국악원 편 악학궤범에 고증되어있다.
현재 조사한 처용무의 계통을 밝혀보면 1923년 이왕직 아악부 시절에 아악사임 김영제, 함화진과 아악수장임 이수경 이 세 선생이 이조 성종때 발간 된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원의’와 숙종(1675~1725)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정재 홀기에 있던 것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재현시킬 당시 상황을 김천흥 옹이 회상한 것을 보면 위 세분이 직접 이 춤을 전수 받아 추지 않았던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그 이유로서 몇 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악학궤범의 홀기를 연구해 가면서 지도시킨 것
둘째, 한말까지 아악부에서 사용되며 전해온 진연홀기에는 처용무가 들어있지 않은 점
셋째, 처용무가 가면이나 의상이 보존되어 있지 않은 것 (당시 아악부에서는 각종 궁중무에서 쓰이던 의상과 무구가 보존되어 있었다.)
넷째, 보존된 무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면이나 의상을 악학궤범을 고증해서 제작된 것 등이다.
이상의 몇 가지 점을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오늘에 남아 있는 처용무는 악학궤범에 기록되어있는 그대로를 고증해서 연구하여 재생시킨 것이고 반면, 의상 등도 물론 여기에 의거해서 제작된 것이다.
이 춤과 조선조의 처용무가 직접 맞닿아 있는지는 불분명하며 악학궤범이나 여타의 홀기를 살펴보고 현행의 처용무 동작을 비교해 보면 문헌상의 작법과 실제 춤사위에서 표현되는 느낌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락성 짙은 처용무에 비하면 오늘날의 처용무는 악학궤범의 전도와 같은 엄숙함을 띄고 있으며 여기에 공연무로서의 예술성이 첨가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즉, 이왕직아악부의 악사들은 일시적으로 전승이 단절된 처용무를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에 바탕을 두어 안무하면서 문자기록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처용무의 본질을 심도 있게 해석하여 살아있는 춤사위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이해한 처용설화와 처용무의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민족사상이 내포된 처용 사상은 덕과 관용으로 마음을 감화시키고 승복시키려는 정신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물리적 혹은 직설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감으로 계시하려고 하고 있다. 즉, 그것은 싸움을 싫어하는 온유한 우리국민의 심성을 표출한 것이다.
♥무복과 장식
처용무의 복식은 조선시대 성현의 악학궤범 권 9 처용관복에 잘 나타나 있으며 현재에도 국립국악원에서 정기적으로 처용무 공연시 착용하는 처용무복 또한 악학궤범에 있는 내용을 고증해서 착용한다고 한다.
조선조 이후 처용무복 또한 그 원형은 고종 1923년경 이왕직 아악부 때의 아악사 김영제, 함화진과 아악수장임 이수경 등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탈색되어 여러 번 처용무복을 제작하였으며 오늘날 입혀지고 있는 것은 1990년 3월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처용무의 무복도 음양오행사상으로 청, 홍, 황, 흑, 백의 다섯 가지 색상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부터 고려말까지 470여년간은 흑포사모의 1인무로 궁중에 들어와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당시에는 한 사람이 검정의상차림에 붉은 가면을 썼다.
그 후 머리에 사모를 쓰고 위에는 상의를 입고 천의와 질경을 두른 다음 띠를 맨다. 아래는 속바지인 군을 입고 그 위에 상을 둘러 입으며 신발은 혜를 신는다. 악학궤범에 기록되어있는 처용 무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모>는 기면 및 모란 꽃, 복숭아 열매와 가지, 귀고리도 함께 붙인다. 사모는 대로써 망을 삼아 만든다. 보통 제도는 종이를 발라 채색을 써서 꽃을 그린다. 가면은 저포로 만들거나 혹은 칠포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을 한다.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를 건다. 사모 위에 꽂은 모란꽃 및 복숭아 가지는 세저포를 쓰고 복숭아 열매는 나무로 다듬어 만든다.
처용가면의 크기, 모양, 색상은 한국의 다른 탈과는 전혀 모양이 다르다. 처용탈에 대한 최초의 설명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남산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탈일 것이다. 처음에는 처용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후대에는 유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코가 높고 눈이 크며 입 또란 커서 전체적으로 어른다운 권세와을 과시하면서도 대단히 너그러운 대인의 풍모를 나타내고 있다.
<의>는 옷의 오방의 빛깔에 따라서 청, 홍, 황, 흑, 백으로 한다. 앞은 짧고 뒤는 길며, 목은 둥글고 넓으며, 가슴은 네모지고 길다. 앞과 뒤 및 두 소매에는 만화를 그린다. 동방은 청의로 목과 가슴은 홍금선을 쓰고, 가슴 양쪽가에는 연이 있어 녹단(서, 북, 중의 목과 가슴선도 같음)을 쓰고, 소매끝은 잇대어 흑단과 황초(서, 남의 소매 끝도 같음)를 꿰매고 안은 홍초(서, 북의 안도 같음)를 쓴다. 서방은 백의, 남방은 홍의로, 목과 가슴은 녹금선을 쓰고, 흉연은 남단을 쓰고, 안은 남초(중의 안도 같음)를 쓴다. 북방은 흑의로 소매끝은 잇대어 녹단과 황초를 꿰맨다. 중앙은 황의로 소매끝은 흑단과 홍초를 꿰맨다.
<천의>는 녹단을 쓰고, 만화를 그리며, 안은 홍주를 쓴다.
<질경>의 겉과 안은 모두 홍초를 쓰고 두 끝을 잇대어 녹단으로 엇붙인다.(동, 서, 북, 중앙은 같고 남은 흑초를 씀)
<상>의 치마는 황초를 쓰고 치마 가운데에는 녹단을 써서 휘장을 하고 천 밑은 홍금선과 황초로 하고 홍록당에 잇대어 홍초 끈이 둘이 있는데 끈에는 녹단을 댄다.(오방이 같음)
<군>의 바지는 동북은 홍단을 쓰고, 방슬은 흑단을 쓰며, 녹단으로 가장자리를 한다. 서남은 흑단을 쓰고 방슬은 홍단을 쓰며, 녹단으로 가장자리를 한다. 가운데는 남단을 쓰고, 방슬은 홍단을 쓰며, 녹단으로 가장자리를 한다.
<한삼>은 다듬은 백초로 한다.(오방이 모두 같음)
<대>는 홍정을 쓰고 나무로 갈고리를 하고 여자를 새겨 금종이를 붙인다.
<혜>의 신은 백피로 하고 끈이 이싸.(오방이 모두 같음).
처용의 가면은 처용무의 표현성과 상징성을 강하게 나타내나. 악학궤범에 나오는 가면은 현존하는 다른 가면들과는 그 모양에서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서 그 모양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를 심목고비한 아라비아 상인의 모양으로 추정한 이도 있지만 아무틈 그 모양이 괴기하여 악귀를 쫓아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삽입가요인 처용가에는 처용의 모습을 매우 트객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가면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즉 “머리에 가득히 꽃 꽃아 계시오사 하였는데” , 가면은 머리위에 사모를 쓰고 그 위에 모란꽃과 복숭아나무가지 및 열매로 장식하였으며, 무성한 눈썹과 서글서글한 눈, 우묵한 코, 웃는 입, 백옥 유리같이 흰 이, 복성을 찬하시어 밀어나온 턱 등의 묘사는 가면의 모습과 꼭 들어 맞는다.
“바람이 가득 불어 정원에 차 우그러진 귀”는 부처님 귀처럼 크고 넓어 후덕해 보이며 특히 양쪽 귀에는 납구슬, 주석 귀거리를 걸고 있다. 또한 처용가면은 피나무를 새겨서 만들거나 옻칠한 베로 껍데기를 만들어 채색하며 양기가 가장 강한 적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홍도화 같이 붉으신 모양”과 어울리고 고대로부터 음기인 귀신은 적색을 싫어한다는 관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머리에 꽂은 도목 역시 벽사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처용가면이 대면이라는 점에서 신라 오지희의 가면과 비교하여 처ㅣ용무와 대면희의 관계를 살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가면의 크기에 있어 유사점이 이TSms 것이며 대면희의 가면은 황금색으로 그 모양도 처용가면과는 다르다.
이렇게 처용가면의 크기가 공연자의 신체조건과 어울리지 않게 큰 것은 처용설화와 연결시켜 볼 때 내면의 고통을 상징화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인고의 후덕함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4)주된 춤사위
처용무의 춤사위는 정재무로서 정재무가 갖고 있는 재반요소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민속춤에서 보여주는 소박하고 투박한 자연적인 미와 자유분방함 속에서 표현이 되는 강한 개성의 모습과는 달리 처용무는 정. 중. 동과 극히 농축되어있는 내면적 심성을 표현하는 절제된 기능으로 추어지는 것이다.
처용무의 구성형식의 핵심을 이루는 춤사위 면에서는 악학궤범은 현행에서 볼 수 없는 내족, 외족과 같은 발 디디는 방법과 내수, 외수, 광검, 첨검과 같은 현재의 춤사위와 다른 기법을 찾을 수 있었고 곡진, 직진, 원진, 방진등의 진법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으나 현행에서는 이러한 진법을 버리고 곡마다 서로 다른 춤사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춤사위의 변화와 방향전환 등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악학궤범은 격박으로 구분하고 궁중정재무도홀기와 현행은박의 용어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춤사위가 점점 다양하게 세분되어 세련미를 더해가면서 본래 궁중무의 주요 형태인 상면, 상배, 회선등의 구성으로 군왕의 위한 목적과 엄격하고 존엄한 궁정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의도의 형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5)무용구성
처용무는 원시시대의 종교적인 제의에 동원된 가무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벽사와 불과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1-춤사위의 특징
최초의 원시 종교적 형태에서 궁중무로 발전된 처용무는 그 춤사위로 볼 때 여러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제의에서부터 궁중무까지 면면히 이어 sofuldh는 처용무에서 특징적인 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용무는 궁중무용에서 유일하게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이는 처용무 초기의 벽사진경이라는 주술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용이 남성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그 동작의 선과 폭이 크고 굵으며 남성적이고 따라서 너그러운 기품과 의젓한 위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공간 구성 면에서 볼때, 황을 중심으로 한 좌, 우의 청, 홍, 흑, 백의 오방처용무로서 이는 통일성 또는 안정성과 아울러 균형을 유지하는 뚜렷한 조형감으로서의 공간미를 나타낸다. 특히 궁중무의 부드럽고 중후한 춤사위는 이러한 아름다운 공간미 속에서 더욱 빛난다.
오방은 중국 사상인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보다 종합적이고 공간적인 미로서 표현되며 여기서 처용무의 춤사위는 더욱 더 깊은 의미를 주게 된다.
춤사위에 있어서도 처용의 호탕한 인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크고 넓은 뿌림새를 이용한다. 이것은 처용무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처용무는 시작과 끝의 창사로 독백하듯이 주제가 나타나며 이것은 원시종합예술(BALLED DANCE)의 시, 가, 무의 총체성을 잘 나타내 주며 이는 처용무의 주술과도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춤사위에 있어서 우선 곧은 허리로 단아하게 추는 여성적 궁중무와는 달리 단전과 허리부위의 몸을 비틀어 추는 등 상체를 비교적 많이 움직이며, 동작이 나선혀으로 곡선적이면서 힘차고 활달하다. 그리고 한삼을 끼고 손목을 이용하는 뿌림새를 사용하여 강함을 낱내 주고 있다. 이는 역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발 동작은 발뒤꿈치부터 무겁게 옮겨 짚고 두 발을 장중하고 위엄있게 내려 누르면서 무릎은 구부리는 동작으로 이어진다.
나선형, S자형 등의 선을 그려 뿌리는 춤사위는 힘찬 춤사위와 아울러 부드러움을 조화시키고 있다.
겉보기엔 상체의 움직임이 강조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 전체의 균형을 하체의 움직임에 두고 발바닥에서부터 무릎을 통하여 단전호흡에 의해 허리와 늑골 등 어께 부위를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춤추게 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용무 춤사위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긴 한삼을 이용한 뿌림새는 매우 남성적이며 호방하고 힘차다.
2-구성형식의 특징
현행 처용무의 구성형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처용무는 규칙적인 오방형, 일렬, 원, 사방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적 통일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선명한 개념 즉 목적이 있는 구성을 하고있다.
둘째, 처용무는 상면, 상배, 회선 등의 반복을 통해서 군왕의 위엄과 업적을 용축하기 위한 명백한 목적을 나타내주고 궁적의 우아하고 엄격하며 존엄한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는 획일성 반복형식을 이용하여 단조롭고 흥미가 없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포근히 가라앉히고 진정 시켜주는 효과가 있으며 강한 통일성과 명백하고 강조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26박에서 34박까지의 반복동작은 심리적 만족과 쾌감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처용무는 상대무, 다음에는 상배무가 이어져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넷째 , 처용무는 잦은 움직임에서 큰 움직임으로 단순동작에서 복합동작으로 부드럽고 어색하지 않게 연결시키고 있다.
다섯째, 처용무는 장중하고 힘찬 수제천곡으로 시작하여 향당교주, 세령산과 삼현도드리, 용구시지곡으로 이끌었다.
여섯째, 처용무는 인간생활에나 자연생활에 있어서 가장 양적으로 많이 존재하는 형식인 대칭 형식을 활용하겨 안정성과 완정성을 추구 , 특히 산화작대무(사방작대무)의 8박, 9박, 10박, 11박, 12박의 동시성 대칭협은 엄격한 형식감, 통일감, 안정감, 정돈된 미의 공간형식이 묘사되어 언제나 평온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일곱째, 처용무는 정재로서 정서적이고 안정감이 잇으며 흐트러지지 않는 조화미가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궁중무용은 민속무용에 있어서와 같이 자유분방한 표현양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간적인 효과에 강조를 주며, 양식이 우아함에 보다 취중하고 있는 바, 이것은 엄격하고 존엄한 분위기의 영향인 것처럼 보이며 처용무에서도 그러한 면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4. 처용무의 기능
1)주술적 기능
모든 예술의 발생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표현본능과 목적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원시의 예술들이 주술 종교적이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무용에도 이러한 성격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주술적 기능이란 인간의 기록적 본능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그 응답을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는 기능을 의미한다.
처용무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처용무에 내제되어있는 벽사진경의 주술적 기능 때문이다. 처용무의 주술적 기능이란 처용무의 발생에서부터 연유한다.
처용무는 신라시대에 이미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전의 주술적 기능을 갖던 토속신앙이 용신사상과 결합되어 처용무의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용설화에 따르면 역신이 처용의 인품에 굴복하여 처용의 화상에는 침입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즉, 처용의 당당하고 위엄 있고 포용력 있는 자태로서 모든 액운을 막고 경사스러운 일만을 맞겠다는 벽사진경의 주술적 기능을 잘 표현한 것이다. 처용무가 갖는 기능은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게 변화되어 왔다.
상고시대에는 무속의 한 형태로서 대자연의 변화에 대한 공포심을 막고 기원을 드리는 부락제의 의식이었다. 처용형상의 가면과 춤, 그리고 창사 등은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는 무당을 의미하며 이는 주술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춤은 주로 강신에 의해 신과 인간이 공감대를 이루어 나타나는 내적인 감성의 변화에 따른 표현이 중심이었다.
그것이 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처용이 보다 인간화되어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물리적인 힘보다는 인간적인 힘, 즉 선의 가치로서 승복시키는 단계로 발전되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주력숭배, 악을 제압하려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역신을 노래와 춤에 의해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서정범(1970)은 “처용은 노래와 춤으로 쫓았으니 당시로서는 샤먼이 이에 속할 것이며 , 노래와 춤은 굿의 행사라 하겠고 역신을 쫓는데 부른 노래는 곧 무가”라고 했다. 이는 주술적 기능을 의미하면서 종합예술의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춤동작에 있어서도 처용의 발동작은 무겁고 크게 들어 올려서 위압적으로 위풍으로 장엄하게 움직이는 발 동작과 당당하고있게 양손을 허리 위에 올려놓은 자세와 한삼을 끼고 악귀를 내쫒는 듯한 움직임으로 내치듯 뿌리면서 팔을 벌려 밀고 당기는 동작 이면에는 액운이 범하지 못하게 하는 벽사진경의 주제적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이 처용무는 춤으로써 모든 부정을 쫒아내고 막아주는 표현성이 강한 춤사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신을 꾸짖는 창사 역시 축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원시 종교 의식에서는 초인간적 존재로 변모하여 종교적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고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가면을 사용하였다. 처용무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용과 함께 가면을 사용함으로써 주력(magical power)을 증진시킨 것이다. 또 한 가지 처용의 주술적 의미는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다.
처용은 사악(邪惡)을 물리치는 벽사의 주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제웅’으로서 사악을 짊어지고 대신 버려짐으로써 신을 맞이하게 하는 진경의 주력을 갖는 복합적인 신격(神格)이다.
2)예술적 기능
무용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시 예술의 형태 즉, 시. 가. 무의 종합적 형태의 한 분야였다. 특히 한민족의 경우 멋과 풍류를 아는 민족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예술적 능력이 탁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용무 역시 신라시대 이전 원시 예술 형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미 살펴본 주술적 기능이 그것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처용무가 신라에 들어서 용신사상과 결합되어 하나의 춤으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은 헌강왕 당시의 시대적 필요와 아울러 예술적 가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려조의 처용무는 조선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하게 된다. 신라,고려에 1인 또는 2인무였던 처용무가 오방처용인 5인무로 추어졌다(최현실, 1988).게다가 학무(鶴舞),연화대(蓮花臺)와 합설되어[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되면서 형태가 격상되고 그 예술적 지위를 완전히 점유하게 되는 것이다.
처용무는 궁중무로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초기의 자유분방함 보다는 표현양식을 정제함으로써 엄격하고 준엄한 느낌을 주게 된다. 이는 헌강왕이 직접 산신굿이나 용신굿처럼 처용탈굿을 직접 연출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제.정일치사회(祭.丁一恥事會)였으므로 이는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왜 처용부가 헌강왕 때에 정착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며, 이는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헌강왕 개운포 사건 이후는 왕권이 이미 약해지고 진골과 육두품의 계층적 갈등과 지방 호족이 발호하던 시기였다. 즉 정이, 사회적으로 집권 보수 세력과 혁신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인 것이다. 헌강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며 이에 주술적 성격을 지닌 처용무를 춤으로써 신을 위로하고자 했다. 즉, 반대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벽사의 의미를 지닌 처용무를 춤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의 침입이 있었음에도 강화도에서 처용무가 공여되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춤이 갖는 사회적 기능은 정치, 사회적 상황에 의해 변화되나. 신라 헌강왕 후기 때의 정치적 혼란 시기에 처용가는 보수 세력의 정권 유지라는 차원에서 행해졌으나 고려시대의 안정기에 들어서는 보다 정제된 형태로 그리고 국가적 연희와 마찬가지로 일반 국민들에게 중요한 유희의 성격을 띄게 된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궁중무로까지 격상되었다.
즉 고려, 조서시대에는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무용 본래의 기능인 예술성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국민을 묶어주는 사회,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5. 처용무의 여러 가지 견해
1) 연극적 견해
처용이 헌강왕을 따라 서라벌로 갔다고 했으니 처용극이 서러벌에서는 헌강왕 때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처용극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굿에서 극으로의 전환을 겪은 연극이지 어느 시기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조동이,1987)
서라벌로 가기 전에는 개운포 쪽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었을 것 같으며 그 본래의 기능은 고기잡이나 농사가 잘되게 하는 굿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헌강왕 때 서라벌에서 공연된 처용굿 또는 처용극이 개운포 쪽에서 온 것이라고 패도 본고장의 것을 충실히 이식, 재현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헌강왕은 나라의 위기를 굿으로써 해결하기 위해서 사방에서 굿을 거행하고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는 굿을 새로이 등용해서 ‘보좌왕정’ 하는 구실을 맡겼다고 생각되는데 헌강왕의 의도가 나라가 당면한 위기의 해결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의도와 관련된 부분만 따왔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역신, 아내, 처용 셋은 반드시 있어야 할 배역이므로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처용의 고민을 나타내는 처용극으로서의 의미를 배제할 수 없었고 서라벌에서도 처용굿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처용극은 다만 처용굿에 포함되어 있기만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료의 문헌에서는 이러한 추정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처용극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처용극이 헌강왕의 처사와 어떤 관계를 가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인데 이 문제는 극의 내용과 헌강왕이 처지를 관련시켜 해석하는데서 해결된다. 밝은 달에 밤새 졸다가 아내를 빼앗긴 고민에 사로잡힌 처용의 고민은 번영의 영화를 누리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한 헌강왕의 처지와 별개의 것은 아니다. 헌강왕뿐만 아니라 서라벌의 귀족들은 모드 처용처럼 위기에 몰렸다. 역신은 서라벌의 영화를 위협하는 지방의 반란세력일 수 있다. 이러한 역신은 물리쳐야 하고 굿에서는 물리쳤으나 극에서는 물리칠 수 없던 존재이다.
개운포 쪽에서는 지방의 새로운 움직임과 관련된 보다 활기에 찬 내용이 원래의 처용극에는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서라벌에서의 처용극은 그럴수 없었을 것이다. 호족의 아들이 병든 서라벌에서 살 수 없었던 것이 아니고 호족의 연극인 처용극이 병든 서라벌에서는 살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서라벌로돌아온 처용극은 고려의 처용가무로 즉, 다시 조선왕조의 처용가무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 과정에서 서라벌의 처용극이 지녔던 연극으로서의 의의나 현실적인 의미는 망각되었다. 그러나 유대의 탈춤은 이러한 몰락을 겪지 않고 오히려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므로 후대의 탈춤과 연결 될 수 있는 것은 서라벌에서 온 처용극이 아니고 원래의 초용극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r,라니 심극유사가 전하는 서라벌에 온 처용극은 그것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자료를 통해서 신라 때에는 하층민의 연극이 아닌 귀족이 출연자 노릇을 하는 귀족의 연극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한 탈춤이 원래는 현실 인식 위주의 희극만이 아니고 이상주의적인 성향의 연극 또는 비극적 성향의 연극이기도 했던 점도 아울러 알아볼 수 있다.
2) 정치적 견해
처용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먼저 용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할 석인가 하는 문제에서 정치학적 시각은 결정된다(이우성,1969). 우리는 신라에서 수많은 용의 등장을 본다. 신라의 용은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라 중앙에 있어 신라국가와 국교를 지키고 도와주는 용이고, 다른 하나는 변경(邊境)에 있으면서 우선은 신라에 복종하고 있는 듯하나 언제 반중앙적, 반신라적 자세를 위할지 모르고 크고 작은 용들이다. 전자는 중앙을 수호하며 신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경주 귀족 원력의 상징이며 변경의 용들은 지방의 잠재 세력으로 족단(族團)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용은 국가 또는 왕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지방호족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신라 말기 내지 고려 건국기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갈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헌강왕 때는 오랫동안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열과 항쟁을 일삼던 중앙 귀족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위하여 상호간 상당한 모순을 내포한 채 연립적 결합을 이루게 된다. 이는 지방세력의 위협에 대처하는 자기방어의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그만큼 지방호족의 세력이 성장한 셈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앙에서는 화랑들의 순유를 통하여 호족들이 동향을 살피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 자신이 직접 지방을 순시하면서 사전에 난의 조짐이니 들뜬 미심을 진정시키고 중앙 통제 강화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므로 처용의 정체는 이러한 반 중앙적 지방호족의 아들이며 헌강왕이 처용을 데리고 서울에 온 것 역시 지방세력에 대한 일정한 타협의 성립 즉, 불사를 창건케 함으로써 용과의 타협을 도모한 것과 더불어 이 타협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환락의 도시에서 밤늦도록 노닐며 다녔다하는 처용은 신라사회에 대한 하나의 아웃사이더(Out-Sider)였으며 비록 소극적이기 하지만 현실에 저항하는 반항아였다고 볼 수 있다.
처용가는 헌강왕 때 신라에 포섭되어 질자로 입경하고 보좌왕정한 역사적 현실을 설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처용설화가 고려에 접어들면서 변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이미 변해진 처용을 가지고 신라 처용의 진면목을 복원시킬 수는 없다. 고려 이후의 처용가, 처용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주술적 무용극에 의하여 원래의 처용설화 속에 나오는 사신들 가운데 역신과 처용의 관계만을 발전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로써 처용은 열병신을 몰아내는 하나의 무부로 전락되고 말았다. 사실 고려 이후에 나례 속에 증장하는 초용아비나 이제현 등의 시인들이 즐겨 시의 제재로 삼았던 처용.옹은 신라의 지방호족의 아들인 젊은 처용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된다.
3)역사적 견해
역사적 입장은 삼국유사에 용의 조화로 이뤄진 것으로 여겨지던, 기상의 급변을 치르고 출현한 용과 용의 아들을 울산만에 포착한 선박과 탑승원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다(이용범, 1984). 삼국유사에는 용의 아들을 7인으로 하였으나 처용의 충현과 동이사건을 다룬 것으로 생각되는 삼국사기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4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륙한 인원이 결코 한 사람이 아니 다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여러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용은 수중의 정령으로 해로와 불가분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개운포 벽해 중에 출현한 처용은 삼국유사에서 동해용의 한 아들로 본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울산만은 배후에 신라왕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경주를 두고 다시 이 나라의 산업심장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조건과 아울러 천연적인 항구로서의 호조건, 또한 내륙교통선상의 요지였다는 조건까지 갖추고 있어 경주 중심의 신라에 있어서는 국제항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며 그 입구가 바로 개운호였다. 이러한 개운포는 아라비아상인들이 운집했던 당나라 말기의 국제항인 양주까지 배를 이용하기엔 용이하였다. 그리고 이들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금이많이 산출된다는 신라국은 당연히 당대해상무역을 독점하다시피한 그들의 상로 개척욕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처용은 그 당시 양주, 명주등이 양자강 하류에서 무역에 종사하다가 금이 많고 토지가 대단히 이익이 많은 신라라는 나라를 찾아온 앏상인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처용의 입장에선 신라인에게 확실히 충격적 사건이며 벽해에서 출현한 신기한 손님을 용자에 견주어 미녀를 짝지어 준 사실도 수궁이 간다. 허나 타의에 의한 이국인과의 결혼이 행복하리란 보장은 없다. 하물며 유교적 규범이 아직 민중에 물들지 않은 신라의 비교적 개방죈 남녀관계에 서 처용 아내의 행동은 자유분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용이 웊산만을 거쳐 연조왕정하기위해 입경한 헌강왕 초는 바로 신라가 사회, 경제적으로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래서 무너져 가는 신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이재술에 능한 이슬람상인을 급간이란 벼슬을 주어 국정을 보좌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신라의 경제는 비범한 수면의 이재가의 힘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서 실의속에 번미하디 사라진 처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충격젹 이슬람 사건의 포착전설인 처용실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불교의 용신사상 같든 것으로 채색되고 신비화한 것을 승려 일연이 채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첨언한다면 처용의 입국과 보조왕정은 한반도의 경제적 변혁기에 있어 그 파탄의 징후를 예고하는 역사적 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3.처용무의 미적 요소에 관한 고찰
1.무용의 미적 요소
일반적으로 춤은 예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적 개념으로써 평가된다.
그러므로 춤의 수행에 대한 미적 요소의 구분은 미적 개념 분석과 함께 그것의 가치를 파악하는 일차적 수단이다. 다음과 같은 미적 요인들이 춤의미적 요소로서 간주할 수 있다.
1)통일성(Unity)
인간은 과학, 철학, 예술을 통하여 자기 세계의 통일을 구하고 창조하고자 하는 정신적 욕구를 표현한다. 예술가로서의 인간은 시간, 공간, 정신,물질 등을 서로 조직함으로써 미학적 통일, 혹은 인공적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무용에서의 리듬, 조화, 우아함과 같은 비한 정적인 말들은 방향 감각 면에서 통일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리듬이란 율동을 뜻하는 것으로서 통일된 질서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리듬은 동적인 에너지에 의하여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흐르는 살아있는 힘이기도 하다.
미적 요소의 분류에 있어서 리듬, 조화, Form, 흐름, 우아함과 같은 말들은 보통 통일성의 개념에 속한다. 통일은 마음의 움직임의 이중성과 상반되며 더욱이 통일은 단순하게 외형적인 측면에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차원과의 역동적 균형의 시각에서 인식될 수 있다.
통일은 선명한 개념 즉, 목적이 되는 개념이 있어야 하고 내용상으로는 하나로 잘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통일성은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미적 요소이므로 통일적 경험은 시간과 강세의 정리된 균형과 조화에 의하여 느껴지는 것이다. 심미적인 표현 내에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통일은 균형 잡힌 대칭성 또는 비대칭적일 것이다.
Robinson(1964)은 통일은 하나의 형태 또는 또 다른 형태로서 인간의 모든 생각이나 행동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신체와 정신의 관련성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체 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신체 운동은 단지 육체적인 행위로만 강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정신과 신체의 총체적인 경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또는 행동적으로 똑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우아함은 통일된 신체 행동의 완벽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의 미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운동선수의 근육이 최고로 발휘되는 지점에서 그 선수는 우아하게 보일 수 있다.“ 는 경우도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무용수들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기술이 신체 동작을 통하여 완벽하게 나타나 보인다는 것은 바로 우아함에 대한 미적 양태가 표현되는 경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용의 우이함에 대한 미적 요소를 알고 있는 것은 최고조의 절정의 순간에 무용에서의 우아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형태(Form)
Hume(1964)은 미는 즐거움을 생산하는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 고 있다. 즐거움은 미의 정수이고 즐거움을 생산하는 힘은 미이므로 예술 작품에 있어서 바로 그러한 힘은 형태(Form)와 미(Beauty) 둘 다를 의미 한다. 또한 형태와 미로서의 힘은 탄력성을 나타 낸다.
예술 작품의 형태와 내용은 따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형태와 내용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변형시켜 하나의 예술 효과를 창조하는 것이다. 형태에서의 구성은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훌륭하게 세워진 작품 속에서 이 요소들은 전체의 흐름을 통일되게 해준다.
공간과 인체의 균형과 모든 움직임에 따른 인체의 여러 부위에 관련된 균형 등이 구성에 의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무용의 형태를 논할 때 우리는 그러한 형태가 갖고 있는 미적 내용 없이 그것을 말 할 수 없다. 의미 없는 형태는 존재할 수 도 없고 형태는 언제나 지향적인 예술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작품은 형태가 잘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형태와 의미가 조화롭게 구성됨을 말하는 것이다.
3)흐름(Flow)
미적 요소 가운데 흐름은 두개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연법칙에서 의미의 축소와, 둘째는 다이나믹한 활동의 비교적인 자각이다. 무용에서의 흐름은 두개의 공간 외면 사이의 상태를 말하며, 춤이나 스포츠에서 율동의 선으로 사용될 때 흐름은 [계속적인 기능] 으로서의 장점에 의해 조화와 동일시 여겨지는 미적 요소이다.
비교적인 자각으로서의 흐름은 다이나믹한 자세에서 이루어지며 극단적인 컨트롤, 균형, 타이밍 등의 인상을 보여준다.
연속적인 전개를 행함에 있어서 이전의 동작으로부터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또한 유기적으로 발생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흐름은 동작의 형태를 이어가고 하나의 무용 현상을 전개해 나아가는 표현 방법인 것이다.
4)자세(Pose)
신체활동을 수행하는 자들의 자세는 행위자 자신과 상황에 대한 컨트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Gross와 Stone(1964)에 따르면 사회적인 포즈는 공간, 받침대, 장비, 의복, 신체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 신체의 자세는 좋은 수행(Performance)을 위한 일관성 있는 외양이라고 할 수 있다. 무용 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몸의 자세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미적 요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작은 그 동작이 지닌 질, 방향, 범위 그리고 시간과 역학적인 구조에 의해 중심적인 무용 주제가 밝혀지고 강조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진다.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처음 사용되었던 힘은 집중되거나 리듬감 있는 모형을 만들 수 있다. 모든 동작은 힘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서 민감성, 우연성, 또는 강하거나 약하게 이루어진다. 즉, 동작의 가변성이란 전신 또는 신체의 어느 부분에 의해서 에너지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무용에서 말하는 자세는 기능적인 측면을 유발하는 역학적 차원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것은 미적 가치를 결정 지우려는 기본적인 요소를 수반하고 있다. 위에서 논의한 통일성, 형태, 흐름 등의 미적 요소들은 그것의 미적 기준을 자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세는 미적 가치 기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2. 처용무에 내재된 미적 요소
처용무는 그 발생이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의 음악과 무용이 적절 히 결합된 형태이다. 즉 초기의 제의(祭儀)에서 쓰이던 굿의 성격과 놀이의 성격이 혼합된 형태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잘 나타난 무용극이다. 처용무의 복식 뿐 아니라 축귀의 성격을 띈 뿌림새인 춤사위, 그리고 역신을 꾸짖는 창사 등은 후대 한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 탈춤이나 산대극 등에 스며들어 있다. 즉 서민적인 처용무 정신은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와 잘 어우러졌으며 이는 전통 탈춤이나 산대극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들의 춤사위나 해학성 등은 고려 시대의 처용무가 서민들의 놀이로서 가진 오락성과 조선시대의 전통 질서에 대한 해학적 묘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중요한 예술적 특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1)통일성의 미
무용에서의 통일성은 미적 요소로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요소이다. 무용은 미술, 음악을 포함하고 종합예술성을 띄고 있으므로 한 작품을 위해서 통일성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정재에서 나타난 통일성은 동양 무용 즉, 한국 무용, 일본 무용, 중국 무용의 대부분은 무용을 하는 사람과 반주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다 같은 무대위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궁중음악은 3현 6각을 이루면서 정재무용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을 봄으로써 무대 위에서 무용과 음악이 통일된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서양음악은 마디를 잘게 나누어 진행되지만 국악은 이와 같이 잘게 나누지 않고 한 장단을 기준으로 한다.
장단의 변화는 가락의 리듬 변화에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고 연주자와 반 주자의 호흡과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춤의 내용을 노래로써 설명하며 춤의 진행도 음악에 따라 좌우된다. 음악을 지휘하는 집박악사가 밖으로 무용도 함께 지휘하는 것이다. 박을 한번 치면 음악이 시작되고, 박을 또 다시 한번 치면 춤이 시작되며, 창사를 부르기 전과 끝날 때에는 박을 세 번 치고, 마지막으로 춤이 끝날 때 박을 세 번 친다. 이렇듯 춤과 음악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처용무의 반주 장단으로는 수제천, 세령산, 삼현도드리, 처용가곡,송구여지곡이 있다. 느린 템포에서는 무게와 너그러움을 갖는 느린 동작으로 안정감을 주고, 빠른 템포에서는 동적이고 경쾌한 동작을 함으로써 유기적인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처용무복은 춤의 내용을 선명하게 하고 무원의 용모를 한층 더 아름답게하며, 시각적인 공간 처리에 중후한 감각을 주고 의물과 무복의 색깔을 조화시켜 무용의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무복에는 음양오행사상으로 청(동쪽 . 여름), 홍(남쪽 . 여름), 황(중앙 . 사계절), 흑(북쪽 . 겨울), 백(서쪽 . 가을)의 다섯 가지 색상을 사용하였는데 의상 색조는 뚜렷한 각 방위와 계절을 춤언어로 나타낸다(이현정,1993).
이렇듯 처용무에 있어서도 통일성의 미적 요소는 장단과 의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인의 처용이 모두 동일한 가면을 쓰고 각 방위와 계절을 나타내는 의상을 입음으로써 짙은 제의성과 놀이적 공동체 의식을 가중시켜 처용무 형성과정의 춤사위는 친화력이 있고 건강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2)형태의 미
무용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무용의 미적 요소 즉, 움직임이 한 작품이 되기 전에 기본적인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 형태는 그 작품의 기본적인 무대 구성의 뼈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성들을 통해서 한 작품이 통일성이 있게 진행되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미적 요소 중 형태 즉, 무대구성을 처용무를 통해 보겠다.
처용무의 구성이나 형태는 상대, 상대와 혹은 4방, 5방형으로 형성되며 다양한 형식을 나타내는데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힘을 모두 고르게 의식, 배분시킨다. 이것은 특히 정방형의 틀을 갖게 됨으로써 극도의 균형 감각을 유지해 가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김태원1987). 처용무의 시작시 일자형으로 무대의 지평 부근에서 5인의 처용이 서 있다가 점차 정방향으로 이동 변화해가면서 중앙의 황처용이 청, 홍, 백, 흑 처용과 대무해 가면 어느 특정한 방향만이 아닌 전 방향을 다 이용하여 춤으로써 절제감 속에서 균형감과 역동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인식은 공간에 대해 상징성과 의미를 부여하며 그 공간과 한정된 장소가 아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우주적 의미가 담겨진 것을 암시한다.
황을 중심으로 한 좌, 우의 청, 홍, 흑, 백의 위치에서 춤추는 ‘심메트리(Symmetry)와 ‘아심메트리(Asymmetry)'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즉 ‘심메트리(Symmetry)’는 통일성, 안정성이 있는 반면 딱딱한 느낌이 있으므로 ‘심메트리(Symmetry)’를 깨뜨리면서 ‘밸런스(Balance)’를 유지해 가는 ‘아심메트리(Asymmetry)'로 그 결함을 보완하게 되는 바, 이는 공간 구성 면에서 미적(美的) 형성이다.
결론적으로 처용무의 무대 구성은 일렬무, 대무, 사방무, 오방무, 회무 등의 뛰어난 공간미와 정적인 통일미 그러면서도 단순하고 밀도 있는 춤이 특징이며 황을 중심으로 한 청 . 홍 . 흑 . 백으로 구성된 통일성 및 안정성을 유지하여 균형을 이룬다.
3)흐름의 미
미적 요소 중 흐름의 미는 신체의 움직임 즉, 자유롭게 계속적으로 움직이거나 정지된 상태와 어떤 한계 속에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정재는 개국과 동시에 예와 악을 중시하게 되자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닌 문인들이나 공신들이 조정을 찬양하는 악장을 지어냄으로써 그 악장을 진상하기 위한 의식적인 절차로서 창제되었다(김효신,1989).
그러므로 정재의 흐름은 짜여진 틀 속에서 기.승.전.결의 형식미를
갖추면서 춤을 춘다(홍혜선,1987).
[기]는 무용의 도입부로서 무원들이 나와 인사하고 어떤 내용의 춤을 추겠다는 것을 알리는 형식을 취한다.
[승]은 연결부로서 무원들이 춤을 추고 여러 가지 대형을 만들기도 하는 무원들이 움직임이 활발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은 무용의 진행 상 중요부로서 춤의 절정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춤에 따라서 중무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춤을 추기도 하고 창사도 하는 그런 형태를 이룬다.
[결]은 종결부로서 무용의 끝을 알리고 인사하고 퇴장하는 춤의
끝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결과와 같이 향악정재에서의 처용무의 흐름은 짜여진 틀 속에서 기.승.전.결의 형식미를 갖추면서 이루어졌다.
4)자세의 미
자세는 미적 요인의 구성 요소로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서양의 무용 형식은 선과 점의 형태로서 이루어지는 자세의 형성이 미적 요인으로서 근본개념이다. 그러나 전통무용인 우리의 정재에 있어서는 이러한 자세의 개념은 소위 춤사위라는 형태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각각의 정재에서 수행되는 움직임의 형태가 곧 춤사위이며 그것들이 바로 춤을 구성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용무의 모든 춤사위는 귀신을 쫓아내는 형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처용무는 다른 탈춤이나 굿에서 나타내는 춤사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처용무는 귀신에게 무원들이 처음부터 권세, 힘, 어른스러움, 고압족인 압도 등으로 귀신을 굴복시켜 쫓아내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이승열,1992).
처용의 발 동작은 무겁고 크게 들어 올려서 장엄하게 움직인다. 당당하고 품위 있게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자세와 한삼을 끼고 악귀를 내쫓는 듯한 움직임으로 내치듯 뿌리치면서 팔을 벌려 당기는 동작 이면에는 액운이 범하지 못하게 하는 벽사진경의 주제적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처용무는 남성들에 의해 추어진 춤이므로 다른 궁중무보다 동작이 크고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며 한삼을 끼고 손목을 이용해서 넓게 뿌린다.
무릎 굴신과 다리 드는 동작이 많이 있으며 처용의 탈을 씀으로써 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또한 무릎을 크게 들어 올려서 발뒤꿈치부터 무겁게 옮겨 짚고 두 발을 내려 누르면서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은 작품 전반의 흐름을 장중라고 위엄 있게 만들어 준다.
이처럼 처용무는 하체에 중심을 두고 양손에는 한삼을 사용해서 상체의 움직임을 강조함으로써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균형미는 작품 전반을 안정되게 흘러가게 한다. 2.음악
처용무의 등장은 수제천 곡ㄱ에 맞추어 등장하고 처용가 중 연락장 가사(歌詞)를 부른다.
향당교주, 세령산, 삼현도드리, 장단으로 이어져 다시 창ㅇ가를 부르며 송구여지곡(세환입으로도 불림)으로 마친다.
형대심리학에서 가령 으뜸화음 도.미.솔은 한꺼번에 눌렸을 때 느껴지며 화음은 도+a;_+ 솔의 집합이 아니라 각 화음의 집합, 총화 그 이상의 것으로 으뜸화음의 선율로 도.미.솔의 집합이 아니라 도.미.솔. 집합 그 이상의 어떤 다른 화음체게를 만들어 내고 있다.
수제천의 음악적 특징은 주선율을 연주하고 피리가 한 장단을 끝내면 피리이외의 악기군이 다음 장단의 시작 전까지를 이어 가는 연음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두개의 효과를 낸다.
이 선율적 특성은 우리문화의 속성인 선적인 측면의 적나라한 구현이요, 우리민족의 기질인‘은근과 끈기’의 음악적 현현이다. 민족 기질을 토양으로서 배양되고 직조된 음악이 수제천의 선율이다. 또한 사람이 지은 음악이되 이미 인공의 차원을 뛰어넘으려, 예술적인 기교에서 출발하되 이미 무기교의 기교로 접어들며 순수 자연에 합일된다.
향단교주 장단으로 더덕(격채) 쿵(북)+더덕+쿵 +쿠뭉(겹북) 더러러러(채굴림) 더(찍는점)이 연속되어서 구성된 장단으로 전체 10박(拍)과 +30 빠르기로 구성되어져 있다.
세령산 장단은 덩(함) 덕(채) 더러러(채굴림) 더 덩 더덕 (겹채)서가 합쳐진 장단으로 10박(拍)으로 되어있고 +45 빠르기로 모두 4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제1장 4장단과 2장 3장단
한 장단은 10/2 혹은.10/4으로 표기된다.
3장은 3장단, 4장은 4장단으로 구성된다.
세령산은 중령산의 변주곡으로 중령산5장 17박 이후와 같은 속도로 연주한다.
세령산 각 장의 마지막 장단은 모두 동일한 선율로 되어 있기 때문에 종지형 또한 같은 선율이다.
합주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피리나 젓대의 독주곡으로 또는 2~3개 악기의 중주곡으로도 연주되며 선율의 진행은 담담하면서도 미묘한 변화를 구사하는 가운데 안정감을 유지한다. 또한 잔가락을 많이 넘어서 변주된 곡으로 잘게 나누어 장식음을 많이 붙여서 더욱 정교함이 만들어 졌다.
현란한 장식음의 특징으로 섬세한 선율이다.
진행부의 음악은 향단교주의 느린장단에서 세령산, 삼현도드리로 점점 빠르기가 점차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므로 선율적인 고조감을 느끼고 삼현도드리는 보허자들의 곡에서 쓰이던 ‘환입(換入)에서 온말로 반복을 뜻한다.
보호자는 한국 전통적인 곡조로 동화되면서 처용무 장단중 가장 비중있고 핵심적인 장단으로 가장 당당하고 선율적인 힘이 있어 춤과 함께 한층 더 긴장감을 준다.
마지막 송구여지곡은 6박의 =10빠르기로 쿠쿵,더덕, 쿵, 더러러러, 더의 구성으로 미환입을 8도 올려 연주하고 각장의 장단수와 그 음계 등 미환입과 같다. 초용무의 반주곡으로 사용된다.
3.춤사위
전체적인 음악의 형태는 서정적 선율의 창사와 악기들이 음색의 고조와 대비되면서 장단의 점차적 비트감과 조화는 비애감과 함께 역동적인 긴자의 고조와 대비되면서 노래와 시가 합쳐진 입체적 공연양식의 종합무극으로 형태적 역할을 한다.
춤사위란 ‘춤동작’, ‘춤모양’, ‘춤과 춤의 사이’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때 ‘사위’는 ‘짜임새’, ‘걸음새’,‘박음새’ 등 춤 모양이나 맵시. 동작 등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