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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울려 중심을 뒤흔든다는 것
― 박철영 평론집 『층위의 시학』을 읽고
이승철(시인, 한국문학사 연구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이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를 찾아내는 일이다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자기체험을 하게 된다.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현재적 삶에 얽힌 제반 풍경들, 하루하루 일상적 체험과 갖가지 추억들은 우리 머리(가슴) 속에 기억돼 쌓이게 된다.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일상적 체험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내면적 상처를 안겨준다. 이때 시인이나 작가는 가슴 속에 쌓여 있으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글로써 표현하고픈 욕망을 지닌 사람이다.
백석 시인이 말했듯이 시인(작가)이란 존재는 ‘슬픈 사람’이어야 한다. 혹여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은 사건과 존재에 대해 슬퍼할 줄 아는 영혼(마음)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하찮은 미물과 벌레, 쓰레기통, 버려진 소주병을 통해서도 그 존재, 그 풍경에 내장된 ‘비밀’을 밝혀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존재의 비밀을 밝혀내려면 사물을 허투루 보지 않고, 세상을 슬픈 눈으로 바라봐야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마음, ‘갑’이 아닌 ‘을’의 시선으로 세상을 껴안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인과 작가는 이 세상의 전모, 총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이다. 현상이 아닌 본질, 허위가 아닌 진실, 불의가 아닌 정의를 추구하고 수호해야 마땅하다. 권력의 금기에 도전해야 하고, 팩트적 사실을 유언비어로 치부하려는 음모와 맞서야 한다. 보통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세상사의 비밀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한 편의 문학작품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려면 지금껏 누구도 체득하지 못한 새로운 진실, 존재의 비밀을 발견토록 해주어야 한다. 이때 문학은 ‘없는 사실’을 공연히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세계 속에 감추어지고, 은폐돼 있는 사실, 타자의 입장에서 말하고픈 존재의 염원, 거기에 감춰진 이면의 진실을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
자본주의(資本主義)의 속성은 지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평가, 치부되는 ‘돈본주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물신주의(物神主義)’를 불러온다. 인간의 생애와 존재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돈의 유무, 그의 사회적 위치, 신분적 지위의 높낮음으로 평가되기 일쑤다. 그러할 때 세상은 황폐화, 약육강식화된다. 문학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는 평등주의를 추구해야 마땅하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악마와 천사, 동물성과 인간성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 존재의 속성을 폭넓게 인식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선한 세상, 살만한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뭇 존재들의 아우성(저항)과 염원(희망)을 담아내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 당신의 어머니께서 그에게 던져준 질문― “써먹지 못한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 바 있다.
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진즉부터 권력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김현은 주장했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고 있으며,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김현은 진단했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하며,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이 글에서 김현은 “문학은 그러나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무지와의 싸움을, 의미론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는 문학에게
문학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떠난 자가 이 세상을 걷다가 만난 풍경이고, 이야기이다. 세상 한가운데에 감성과 인식의 깃발을 꽂되, 지금껏 우리가 음미해보지 못한 새롭고 충만한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것이다. 자기만의 문체, 자기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새로움을 펼쳐내야 한다. 독창성과 개성, 전혀 예기치 못한 그 무엇을,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들을 ‘수태고지(受胎告知)’ 했음을 알려주는 것이 문학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시간과 만남, 사건을 통과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문학은 자신의 육신과 정신이 한 시대, 한 세월을 어떠한 방식으로 통과하고, 어떻게 견뎌냈는가의 기록이다. 이때 문학은 그 세월을 통과하면서 마모된 것들, 버려진 것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그 상처와 뼈아픈 고해성사를 아름답게 재현해 주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문학의 출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은 시대정신, 지배질서의 순응이 아닌 참여의식, 분단체제 국민으로서 민족의식이 요구되었다.
참다운 문학이란 반편화(半片化)된 현실사회의 갈등을 그리되, 궁극적으로 인간해방, 민족해방에 기여해야 한다. 한국문학은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권력자의 그 어떤 탄압으로도 결코 짓밟힐 수 없다는 자각 속에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자 모진 수난을 겪어왔다. 1970년대 문학에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수난에 힘입어 우리는 오늘 날의 표현의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용서와 포용, 희망의 언어를 추구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에 문학은 ‘죽임’의 언어가 아니라, ‘살림’의 언어여야 한다.
정보화시대,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으로 글쓰기는 이제 너무나 보편화되었다. 평범한 대중과 시민이 자기표현의 매체를 갖게 된 것은 21세기의 혁명적 변화이다.
이제 아무도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메일과 카톡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서 글쓰기는 이제 생활화되었다. 작가와 독자라는 구분과 경계마저 무너졌다. 그러나 글쓰기의 민주화는 모국어의 심각한 오염과 죽임의 언어를 양산하기도 한다. 악플이 선플을 구축하는 현실,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주는 상처는 상대에게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또한 순수문학은 외면되고, 대중의 흥미만을 좇는 ‘장르소설’이 문학시장의 한복판에서 어엿하게 자리 잡고 있다.
허나 문학은 감성의 도락주의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과 팩트의 전달이 아니다. 신문과 신문지 사이, 사실이 아닌 진실의 추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문학은 타자와의 연대, 이웃의 상처가 바로 자신의 상처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다. 외롭고, 그늘진 것들, 삶의 변방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감춰진 상처를 자기화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철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휴머니즘을 구현하며, 인생의 진실을 참답게 보여줄 때 문학이란 존재는 영원할 것이다.
변방을 울려 중심을 뒤흔들고자 하는 박철영의 평론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창성, 개성, 자기만의 문체와 형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문학은 새로운 창조이지, 유사작품의 복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누군가 썼던 세계, 기존 문학작품에서 이미 형상화된 아류가 아닌 지금껏 그 누구도 그려보지 못한 세계, 이 세상의 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문학은 현실세계와 무관한 뜬구름을 좇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평범한 일상, 세상사를 소재로 하되, 그 표현은 상투적이어선 안 된다. 그러나 창조는 전통의 계승을 통해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 치듯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철영은 지난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2016년 『인간과문학』으로 평론 활동을 전개한 등단 20년차를 넘어선 중견 문인이다. 시인으로서 그는 시집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 『월선리의 달』, 『꽃을 전정하다』 등 3권과 산문집 『식정리 1961』 등을 펴냄으로써 문단적 입지를 굳혔고, <순천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계간 『시와사람』 편집위원, 『현대시문학』 부주간으로 활동하면서 시보다는 평론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평론가로서 박철영은 첫 번째 평론집 『해체와 순응의 시학』(2020, 인간과문학사)에 이어 3년 만에 두 번째 평론집 『층위의 시학』을 ‘작가’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는 그동안 시를 써 오면서, 지역 시인들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왔고, 문단의 평가에서 소외된 시인들을 눈여겨 살펴왔다. 말하자면 지역(변방)에서 활동 중인 시인들의 경우 오랜 기간 문학 활동을 했더라도, 중앙문단(서울)에서 주목 받을 기회가 차단된 문단 풍토를 그는 안타깝게 여겨왔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소하고자 비평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박철영 두 번째 평론집 『층위의 시학』은 광주전남 문학의 외연을 확장함은 물론 그 깊이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1980년 ‘5월항쟁’을 거치면서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수많은 시인들이 출현했지만 참다운 비평적 안목을 지닌 평론가가 부족한 탓에 비평적 대상에서 소외되어야 했다. 허나 박철영 평론가의 출현으로 광주전남 지역의 문인들(예컨대 문병란 김준태 시인 등 광주문학의 원로에서부터 나종영 나해철 박몽구 이영진 최두석 등 <5월시> 동인, 고재종 조진태 박두규 임동확 조성국 정윤천 송태웅 박관서 이상인 김인호 김지란 시인 등)의 시정신과 ‘5월문학’의 위상이 적극 탐사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문태준 이정록 함민복 김명인 손택수 기형도 신용목 박준 김경주 시인 등 한국시단의 중요한 문학적 텍스트들에 대해 그 나름의 진단과 해석을 가하고 있다.
특히 기형도의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에 대한 박철영의 진단과 해석(「영원히 상실된 불립의 언어들」)은 이 시집에 대한 김현의 글(「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과 비교하여 텍스트 해석의 의미망을 찬찬히 살펴보면 박철영의 시각이 진보의 측면에서 훨씬 진일보한 해석을 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평(詩評)’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집의 ‘발문’ 격으로 주례사 비평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인들과 출판사의 부탁으로 시평이 써지고 있기도 하다. 이 때 획일화된 혹은 상투화된 목소리에서 벗어나려면 시평자가 시인, 시적 대상과 혼융일체된 득안(得眼)의 눈으로 시인의 마음과 시적 의지를 어떻게 읽어내는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문자 텍스트 이면에 담긴 역사적, 사회적 의미와 창작 주체의 정신사적 궤적을 포괄해 내지 않고서는 시평이 과연 인간의 문제에 얼마나 진보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발견하다
박철영은 등단 20년 만에 세 권의 시집을 선보였고, 평론가로서 두 번째 평론집 『층위의 시학』을 출간했다는 것은 그가 문학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철영의 평론은 시인들의 건강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시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저의에 귀 기울임으로써 시 속에 내재된 문학적인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또한 그는 이번 평론집에서 시적 기교보다는 시 속에서 발현된 시의(詩意)가 우리사회의 건강한 삶에 얼마만큼 기여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근래 들어 분열적인 사회에 편승한 문학 진영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그는 통합의 시정신으로 문학적인 위의를 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철영은 시의 유형 변화를 ‘해체와 순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식욕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의식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확인하고 존재에 대한 통찰적 맥락을 함께 하기 위한 ‘해체’와 ‘순응’은 기존의 모든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형태를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을 통해 시대와 사회현실에 맞게 변화하여 존재하는 시인들을 주목하고 있다.
박철영의 두 번째 평론집은 “시인의 마음과 가장 닮아 있는 시적인 고유성을 ‘시간’과 계절의 중첩인 ‘층위’ 안에서 상상력을 통해 작품이 형상화된다는 것을 추적하고 있다.
박철영 평론집은 말하자면 변방(지역)을 울려 중심(서울)을 바로잡고자 한다. 『층위의 시학』은 중앙(서울)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시인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자기화하고, 그들이 지닌 문학적 총기를 발견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위용과 공감을 확대하고 있다. 저 밑바닥 어딘가에 한없이 귀중한 문학적 텍스트가 내장돼 있지만 그걸 허투루 보는 이즈음의 문학적 풍토 속에서 그가 설파하는 ‘시간과 계절 속의 층위의 시학’은 우리들의 눈길을 잡아 끈다.
제1부 <풍경과 사유>에서는 박관서, 김종, 강경호, 노창수, 송복련, 이승하 시인 등에 대한 작품론을 실었고, 제2부 <시적인 것>에서는 조동범, 정민나, 김수진, 황희경, 이영춘, 허형만 등의 작품을 밀도 있게 평했다. 제3부 <상상력과 상관성>에서는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양희진, 이령, 장철문, 문정영, 김금란, 박수림, 김명학, 주선미, 김은우, 권선희, 김명리, 권오성, 김춘리, 박성규, 이창훈, 이효애 등의 시세계를 조명했다. 이어 제4부 <형상과 표상>에서는 김정옥, 박수원, 한성천, 곽문호, 김수열, 오현정, 복효근, 김봄서, 박주이, 서지숙, 권오영, 김영희, 심승혁, 박위훈, 박봉철, 이윤희, 나호열, 김건화 등의 시세계가 당대 시단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박철영은 시간과 상관된 계절의 변화 속에서 시인들의 다양한 사유가 감상에 그치지 않고 시적인 상상력으로 어떻게 상징, 발현되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결국 시의 지점은 계절로 이어지는 시간의 층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시인의 변별적인 시적 사유에서 발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1930년대 문단에서 『시문학』 창간을 주도하고, ‘임화’와 ‘춘원’의 문학논리를 되받아칠 정도로 탁발한 비평적 안목을 지녔던 ‘박용철’ 시인의 문학적 후예로서 박철영 평론가에 거는 문학적 기대가 자못 크다.
변방을 울려 중심(서울)의 가치를 흔들어 놓겠다는 박철영의 문학적 결심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난, 기대하고 있다.
끝으로 박철영의 평론집을 읽고 내가 느낀 소감은 참다운 문학은 변방 끝 모서리에서 서럽게 우짖어 태어났다는 거였다. 변방에서 외롭게 싹 틔운 문학적 총기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위용과 공감을 확대하는 것이 비평적 역할이다. 지역의 문인들이 ‘불운’과 ‘절망’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그가 어찌 시인이겠는가. 저 밑바닥 어딘가에 한없이 귀중한 문학적 텍스트로 내장돼 있지만 그걸 아심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박철영은 이번 평론집을 끝으로 보다 확실한 자기 변신과 함께 자기 목소리를 보여주는 선도(先導) 비평을 기대하고 있다. 1980년대 채광석 평론가가 온몸을 던져 비평적 질서를 재정립한 것처럼, 이제 박철영은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억압과 압제의 정체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오직 그만이 보여줄 수 문학적 미래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이승철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무크 『민의』 제2집으로 등단. 시집으로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당산철교 위에서』, 『오월』,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산문집으로 광주전남 근현대문학사 100년을 조명한 『광주의 문학정신과 그 뿌리를 찾아서』 등.
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