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북단, 소백산 아래 첫 동네, 소백산 남녘 자락에 안긴 풍기(豊基)는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터이다. 위도상 36도30에 위치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렸하며 웬만한 장마에도 홍수가 들지 않고, 백두대간이 북녘을 가린 덕에 때때로 녈비(지나가는 비)가 내려 가뭄이 들지 않는 천혜의 자연과 좋은 기후가 있다. 거기에다 진흙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섞인 모래진흙땅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죽령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단양이 석회암지대이지만, 그 남쪽 풍기 땅은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사양토이다.
▲풍기인삼
풍기가 풍요로운 땅이 되는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인삼이 으뜸이다. 인삼은 백약의 영초(靈草)이며 만병의 영약이다. 인삼중에도 풍기인삼은 예로부터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풍기인삼을 담았던 종이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인삼 내가 풍긴다고 했고, 두세 번 달여먹어도 좋을 만큼 약효가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삼은 열여섯 냥, 금산삼은 열 냥, 풍기삼은 여덟 냥을 한 근으로 쳐서 값을 매겼다고 한다.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의 300그램을 다른 지방의 인삼 375그램과 같게 쳤을 정도였다. 모양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두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말린 인삼을 구부린 정도로 보아 산지를 구별했다. 강화,김포,개성 인삼은 곧은 그대로인 ‘직삼’이며, 금산인삼은 완전히 구부린 ‘곡삼’이고, 풍기인삼은 그 중간쯤으로 꼭 절반을 구부리는 ‘반곡삼’이다. 이 구부림은 약효보다는 그 지방의 습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곡삼인 풍기인삼의 뿌리는 소백산의 산삼에 닿아 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산삼은 이름난 진상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734) 당나라에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가에서도 즐겨 썼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산삼을 바치라고 성화를 부렸고, 풍기사람들은 산삼을 진상하기위해 얼마나 애를 썻겠는가? 산에서 케는 산삼만으로는 모자라기에 소백산 산삼 씨앗을 받아서 기르게 된 것이 풍기인삼의 시초라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산삼 씨앗을 구해 풍기읍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주세봉 선생이 처음으로 풍기에서 인위적으로 인삼재배 기술을 국민들에게 개발보급하여 그공적을 기리고 송덕하기위해 풍기인삼협동조합에 송덕비를 세웠다
▲풍기인삼밭
인삼은 ‘반음-반양’ 즉 그늘과 햇볕이 적당히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또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물이 잘 빠져야 한다. 땅이 너무 기름져서도 안 되고, 밤낮의 기온 차도 커야 좋다. 이런 조건은 사과 농사에도 좋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봄이면 녈비가 내려 가뭄 걱정이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울타리는 역시 소백산이 어깨 펴고 있는 백두대간이다. 흔히 죽령을 넘어온 풍기 바람이 세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이고, 대부분의 삼밭이나 사과밭은 소백산에 등을 기대고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으니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풍기를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해서 뭍의 제주도라 불렀다. ‘풍기 삼다’ 중 바람과 돌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도 여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여자’는 십승지지에 그 뿌리를 둔 곁가지에서 비롯되었다.
▲금계바위
본디 승지는 경치 좋은 곳이나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다. 하지만 승지는 풍수의 시각으로 보아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한다. 신라 말의 도선을 비롯해 고려 말의 무학, 조선 중엽의 남사고, 이지함들이 이른바 최고 풍수 도인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열 곳의 승지, 즉 십승지를 꼽았다. 십승지로 꼽히는 곳은 조금씩 다른데, 남사고의 십승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소백산에게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절을 했다던 그 사람이다. 그가 첫번째로 가리킨 곳이 바로 풍기인삼의 텃밭이자, 훗날 정감록마을이 된 금계동이다.
조선시대의 비결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남사고의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동인 것은 같다. 하여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감록>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를 찾은 때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6.25 때 피난 와서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도 큰 피해가 없었고, 6.25 때도 스쳐가는 정도였다니 십승지의 ‘영험’ 덕을 톡톡히 봤다.
▲풍기인조공장
팔도에서 온 이들로 넘쳐나던 그 시절 풍기사람 열에 여덟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특히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풍기는 ‘이북5도’라 불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명주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1930년대부터 ‘쪽닥베틀기(족답기)’ 한두 대씩을 가지고 인견사(人絹絲)를 원료로 한복 속옷감 따위로 쓰이는 인견직을 짰던 것이 ‘풍기인견직’의 시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대도시를 비롯해 전국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0년도에 100대 정도에 불과했던 쪽닥베틀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1,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었다. 풍기인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6.25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공장들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충당하느라 집집마다 인견직을 짜는 베틀소리로 밤을 밝혔다. 요즘은 그 베틀기를 이은 100여 개의 섬유공장에서 인견직.나일론.폴리에스터 생산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인견직 기술의 품질향상과 개발이 활발하여 지역경제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금선정
본디 풍기에는 황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 황씨를 바람과 돌과 함께 ‘풍기 삼다(三多)’로 꼽았다. 하지만 인견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천 명을 넘어서면서 황씨 대신 여자를 삼다에 넣었다. 백두대간 산자락의 자그마한 마을과 섬유공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 방직공업은 원료 산지나 시장이 가까운 대도시 근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풍기인견은 교과서적인 상식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풍기의 풍요는 소백산 울타리에 그 뿌리를 두고, 이곳의 바람과 물과 세월의 흔들림이 버무려낸 것이다. 십승지에 어울리게 이처럼 딱 떨어지는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풍기역 뒤편으로 비로봉 가는 길에 금계리가 있다. 한때 정감록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옛날도 잊은 듯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십승지로 풀이하자면 소백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으며 금선계곡을 타고 온 비로봉의 옥수로 몸을 적시는 땅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비로사가 있다.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로사는 풍기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그 창건유래는 알 수가 없다. 이절에 당간지주,진공대사의 보법탑 석조 비로차나 불상,아미타블상,목각영정, 그리고 영조때 조성된 불화등이 있다
▲희방사
신라선덕여왕 12년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만든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관해 왔던 절이다. <월인석보> 1권 머리에 붙은 <훈민정음>의 것까지 모두 200장의 판목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령과 소백산에서 싸움이 치열했던 1951년 1월 13일,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희방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그 <훈민정음> 판목으로 찍어 만든 책 한 벌을 잿더미 속에서 나중에 가까스로 건져냈다고 한다.
정감록으로 풍성한 터를 일구어낸 땅 풍기. 약속의 땅 풍기를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살아낼 방법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찾아왔다. 평안도 영변사람이 베틀기를 들고 왔다면, 황해도 개성사람은 개성상인의 사업수단을 품고 왔으며, 대구사람들은 사과를 손에 움켜쥐고 찾아왔다.
이렇게 풍기사람들은 소백산 칡넝쿨 얽히듯이 정겹고 풍요로운 삶의 터에 태어나 씨를 뿌리고 살어 왔고, 살어갈것이다
현재 풍기인구는 만이천여명, 호적상 풍기출신이지만 삶의 터를 옮겨사는 이가 오만, 그리고 원적변경등 모두 계산한다 해도 풍기가 고향인 사람은 칠만정도 이다. 지키는 사람과 떠난 사람 모두의 고향, 우리가 자랑하는 인삼,사과,인조의 특별한 역사를 바탕으로 더 힘차고 발전하는 고향이 되기를 소원하고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읽어 볼 가치가 있군요... ^_^
헐~ 내가 찍은 사진도 있네! 사진중에 제일 엉성한 "금계바위"사진 2003년 여름휴가때 삼가동서 내려오다가..ㅎㅎ
그랬니껴?? 앞으로 선배님의 활동이 기대되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