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화폐전쟁' 책 내용 中 에서 부분 발췌>
로스차일드의 첫 번째 뭉칫돈
메이어 암셀 바우어(Mayer Amschel Bauer)는 1744년 2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Amschel Moses Bauer)는 유럽 일대를 떠도는 골동품상이자 대금업자였다. 메이어가 태어나자 모세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메이어를 위해 그의 아버지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돈과 대출에 관한 상업적 지식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죽자 메이어는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친척들의 격려를 받으며 하노버로 가서 오펜하이머 가문의 은행 수습생으로 일했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문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업체 드비어스를 설립해 100년 동안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가문 메이어는 뛰어난 감각과 부지런함으로 은행의 온갖 전문 기능을 빠르게 습득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영국에서 전해진 각종 금융업의 기상천외한 부분까지 모두 소화했다.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메이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배경이 탄탄한 고객들과 친분 관계를 쌓았다. 그 중에는 훗날 그의 운명을 바꿔줄 에스토르프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메이어는 정부와 국왕을 상대로 대출해주는 것이 개인을 상대로 한 대출보다 훨씬 수익도 크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출 금액이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낯선 금융 이념은 메이어에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몇 년 후, 젊은 메이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아버지의 대부업을 계승한다. 그는 자신의 성씨를 로스차일드(Rothschild : 독일어로 ‘rot’는 ‘붉은색’, ‘schild’는 ‘방패’를 의미함)로 바꾸었다. 그는 에스토르프 장군도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으며 윌리엄 왕자를 보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관계를 잘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어를 다시 만난 에스토르프 장군은 몹시 기뻐했다. 장군 본인도 화폐 수집가였다. 메이어는 집안 대대로 골동품상을 해왔으므로 이 분야라면 훤했다. 고대의 화폐를 화제로 이야기할라치면 장군은 얼굴이 상기되어 듣곤 했다. 더 신나는 일은 메이어가 희귀한 금화를 장군에게 아주 싼 가격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으며, 에스토르프 장군은 메이어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다. 메이어는 왕실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면서 관계를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에스토르프 장군의 소개로 윌리엄 왕자를 알현했다. 왕자도 금화 수집가였기 때문에 메이어는 에스토르프 장군에게 하던 식으로 왕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메이어가 희귀한 금화를 싼 가격으로 계속 공급해주자, 윌리엄 왕자는 고마운 마음에 자기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이때다 싶은 메이어가 왕실의 정식 대리인이 되게 해달라고 청했고, 마침내 그의 뜻은 이루어졌다.
1769년 9월 21일, 메이어는 자신의 명패에 왕실의 엠블럼을 새기고 그 곁에 ‘M.A.로스차일드, 윌리엄 왕자 전하의 지정 대리인’이라고 써 넣었다. 그때부터 메이어의 신용은 더 좋아지고,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역사적으로 윌리엄 왕자는 부를 축적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군대를 빌려주는 ‘용병’이 성행했다. 윌리엄 왕자는 유럽의 왕실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영국 왕실과 곧잘 사업을 벌였다.
빚이 많은 영국 정부는 외국에서 돈을 벌어들이려고 늘 용병을 파견했다. 그런데 영국 병력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윌리엄 왕자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훗날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워싱턴 측이 상대해야 할 독일 병사 수가 영국 병사보다 많을 정도였다.

▲ 빌헬름 9세- 윌리암 왕자
윌리엄 왕자는 이 사업을 통해 유럽 왕실 사상 최고로 많은 2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윌리엄 왕자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냉혹한 대부업자’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윌리엄 왕자의 측근이 된 메이어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얼마 후 프랑스혁명(1789~1799년)이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점차 주변 군주제 국가에까지 미쳤다. 이에 윌리엄 왕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이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폭도에게 재산을 약탈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왕자의 우려와는 다르게 메이어는 프랑스혁명을 반겼다.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그의 금화 유통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창끝이 신성로마제국을 겨누자, 독일과 영국의 무역 중단으로 수입품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자 메이어는 영국에서 물건을 들여다 독일에 판매함으로써 거액의 차익을 챙겼다.
메이어는 유대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도층 인물이었다. 매주 토요일 밤, 교회의 예배가 끝난 후 메이어는 유대인 학자들을 그의 집에 초대해 밤늦도록 포도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메이어는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단결이 잘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하여금 그토록 정복욕과 권력욕에 집착하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일까?
1800년에 이르러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일가는 유대인 갑부가 되어 있었다. 메이어는 그 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수여하는 ‘제국 왕실 대리인’ 칭호를 부여 받기도 했다. 이 칭호 덕분에 그는 제국의 각 지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으며, 유대인들에게 부과되는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의 회사 직원들은 무기를 소지할 수도 있었다.1803년에는 메이어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를 더 돈독케 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 내용인즉 윌리엄 왕자의 사촌형 중 덴마크 국왕이 있었는데, 그가 윌리엄 왕자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윌리엄 왕자는 자신의 재산이 노출될까봐 빌려주기를 꺼렸다.
메이어가 이 사실을 알고 왕자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즉 왕자가 돈을 내놓되 메이어가 나서서 로스차일드의 명의로 덴마크 국왕에게 대출을 해주고, 이자는 메이어가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왕자는 그럴듯한 아이디어라며 좋아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데다 원금을 떼일 걱정도 없었다.
메이어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 국왕을 상대로 한 대출은 안정적 수익뿐 아니라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출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덴마크 왕실에서 신청한 여섯 건의 대출이 메이어를 통해 성사되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특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정치에 몸담은 후로 윌리엄 왕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윌리엄 왕자는 분명하지 않은 형세에서 섣불리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윌리엄 왕자의 가족인 헤스와 캐더를 유럽 통치자 명단에서 빼버리고, 프랑스군을 보내 국경을 위협했다.
이에 윌리엄 왕자는 황급히 덴마크로 망명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300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메이어에게 보관시켰다. 이 돈이 바로 메이어에게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져다주고 금융제국을 세우게 한 첫 번째 뭉칫돈이다.메이어는 잉글랜드은행보다 더 큰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윌리엄 왕자에게 거액을 받자마자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마치 다섯 발의 화살처럼 유럽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다섯 개 지역에 파견되었다. 큰아들 암셀은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지키고, 둘째 살로몬은 빈으로 보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도록 했다.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으로 보내 대국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넷째 칼은 나폴리로 보내 근거지를 세우게 했다. 형제들은 늘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이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한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의 업무를 관장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금융제국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워털루전투와 로스차일드 가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는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로, 다섯 형제 가운데 식견과 담력이 가장 뛰어났다. 1798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로스차일드 가의 은행 업무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는다.
네이선은 학식이 깊고 성격이 과감한 은행가였는데, 그의 내면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에 천부적 소질을 갖춘 네이선은 1815년 신출귀몰한 수단으로 런던에서 손꼽히는 은행의 거두로 성장한다.
네이선의 큰형 암셀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로스차일드은행 본점을 창립했다. 로스차일드의 둘째 아들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에 지점을 세웠고, 넷째 아들 칼은 이탈리아 나폴리에, 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운 은행은 세계 최초의 국제은행 그룹이 되었다.
다섯 형제는 1815년 유럽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이때 유럽에서는 대륙의 운명을 결정할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다면 프랑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유럽의 주인이 되고, 웰링턴 장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르면 영국이 유럽의 형세를 주도할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로스차일드 가는 멀리 내다보는 눈으로 필요한 전략 정보를 수집할 정보망을 구축해놓았다. 이 방대한 비밀 정보망은 산업 스파이들로 구성되었다.
유럽 각 나라의 수도와 주요 도시뿐 아니라 중요한 교역과 상업 요지에 파견된 그들은 갖가지 상업과 정치 정보를 수집해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를 오가며 전달했다. 이 정보망은 효율과 속도 및 정확성에서 웬만한 정부의 정보 조직보다 훨씬 뛰어났고, 다른 상업적 경쟁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로스차일드은행은 거의 모든 국제 경쟁에서 뚜렷한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마차와 배가 유럽 각지와 해협을 누볐으며, 거리마다 로스차일드은행의 스파이들이 배치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어마어마한 현금과 채권, 정보를 주무르는 금융가의 큰손으로 군림했다.
그들이 독점한 최신 정보는 순식간에 증권시장과 상품시장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워털루전투의 결과였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 전개된 워털루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한 판 승부였다. 또한 수많은 투자자가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도박에서 이기면 천문학적인 돈을 움켜쥐지만, 지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초조하게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consols)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로스차일드의 스파이들은 양측 군대 내부에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들 중에는 최신의 전황을 가까운 로스차일드 중계 지점으로 전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 측의 정보 전달원은 즉시 브뤼셀로 말을 달려 오스탕드 항에서 배로 갈아탔다. 그가 특별 통행증이 있는 로스차일드 가의 쾌속선에 뛰어올랐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이때 영국해협은 풍랑이 무척 거셌다.
2,000프랑의 비용을 치르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해협을 건네주겠다는 선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보 전달원이 6월 19일 새벽 영국 포크스턴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직접 부두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네이선은 급히 편지 봉투를 뜯고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나서 즉시 런던의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네이선이 빠른 걸음으로 주식거래소로 들어서자 초조하게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모든 사람의 눈은 네이선의 무심한 듯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주시했다. 네이선은 갑자기 걸음을 늦춰 ‘로스차일드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거래소를 가득 메우던 소란스러움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모두가 네이선의 눈초리에서 뭔가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네이선이 주변에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거래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거래원들은 묵묵히 거래 창구로 가서 조용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홀 안은 술렁거렸다.귓속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수십만 달러어치의 영국 국채가 맹렬한 기세로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국채 가격은 눈깜짝할 새 바닥으로 뚝 떨어졌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국채를 팔아댔다. 그때까지도 네이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기대어 있었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로스차일드가 알아냈다! 웰링턴이 전쟁에서 패했다!”
이 소리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놀란 사람들은 앞다투어 투매에 나섰다. 투매 열기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모두가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값도 안 나가는 영국 국채를 당장 팔아야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볼 것 같았다. 몇 시간에 걸친 투매 광풍이 휩쓸고 지난 후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네이선은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한 번 번뜩였다. 오랫동안 훈련받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신호였다. 거래요원들이 이번에는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Henry Percy)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 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프랑스는 이제 끝장난 것이다!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나 늦은 후였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워털루전투로 네이선은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했으며, 그때부터 공채 발행을 주도하고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실권을 장악했다. 영국 국채는 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근거다.
이제 영국인들은 그동안 정부에 내던 세금을 로스차일드은행에 내야 했다.
이 같은 징수 형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한다. 다시 말해서 영국 정부는 화폐 발행 권한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민간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8%의 이자를 내야 했다. 원금과 이자는 모두 금화로 계산했다.
네이선이 영국 국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국채 가격이나 영국 전체의 통화 공급량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영국의 경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다.야심가 네이선이 오만한 대영제국을 보기 좋게 정복한 것이다. "나는 해가 지니 않는 잉글랜드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통화 공급을 통제하는 사람이 곧 대영제국의 통치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등장한 시대 배경
 "수표나 신용화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극소수의 사람은 그 시스템이 형성하는 이윤에 큰 관심을 두거나, 그 시혜자인 정치가와 결탁해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시스템으로 파생되는 자본이 가져오는 거대한 이익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전혀 불만을 품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시스템이 자신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지도 않는다."
-로스차일드 형제 1863년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퍼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성장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금융의 실체와 개념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새로운 금전의 실체와 개념은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 모험 정신이 충만한 은행가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전반에 걸쳐 금전의 개념과 형식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1694~1776년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선보인 것을 계기로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가 유통 중인 금속화폐의 총액을 사상 처음으로 넘어섰다. 산업혁명은 철도, 광산, 조선, 기게, 방직, 방위산업, 에너지 등 신흥 업종에 거대한 융자 수요를 창출했다.
그 규모는 금이나 귀금속을 전문으로 다루던 장인들로부터 시작된 골드스미스 은행사(Goldsmith Banker)의 해묵은 저효율과 극히 제한된 융자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신흥 은행가들은 이렇게 중요한 기회를 포착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현대 금융업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1625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내전과 정국의 혼란으로 영국의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1689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결혼한 윌리엄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가장 심각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전쟁까지 치르느라 윌리엄 1세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때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을 비롯한 은행가들은 네덜란드에서 배워온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 즉 민영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해 국왕의 방대한 지출을 위한 융자를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민영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은 정부의 ‘영구적 채무(perpetual loan)’가 되었다. 금리는 연 8%에 4,000파운드의 관리비를 책정했다. 이렇게 하면 정부는 매년 10만 파운드만 내고 그 자리에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을 쓸 수 있었으며, 원금을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되었다.
정부는 물론 더 많은 ‘특혜’를 제공해서 잉글랜드은행이 국가가 승인한 은행권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게 했다.그동안 골드스미스 은행가에게 가장 유리한 부분은 은행권 발행에 있었다. 은행권은 골드스미스은행에 금화를 보관했다는 영수증이었다.
많은 양의 금화를 휴대하기가 매우 불편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금화 보관증으로 거래를 하고, 골드스미스은행에서 이 보관증을 금화로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굳이 은행에 가서 금화로 바꾸는 대신 보관증을 화폐로 삼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골드스미스 은행가들은 매일 금화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다가, 실제의 금보다 많은 보관증을 발행해 은밀히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겼다. 대출받은 사람이 원금과 이자를 갚고 나면 차용증을 회수해 폐기해버림으로써 아무 일 없는 양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이자는 그들의 호주머니에 이미 들어온 후였다. 골드스미스은행의 금 보관증은 유동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받아주는 곳이 많아지면서 이윤도 점점 커졌다.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유통 범위는 다른 은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가가 인정한 이 은행권이 곧 국가의 화폐였다.
잉글랜드은행은 주식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2,000파운드 이상을 구매한 사람은 잉글랜드은행의 이사 자격을 부여받았다. 공모를 통해 1,330명이 잉글랜드은행의 주주가 되었고, 14명은 은행 이사가 되었다. 여기에는 윌리엄 패터슨도 끼어 있었다.
1694년에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은행에 왕실 특별허가증(Royal Charter)을 내주었고, 최초의 현대적 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잉글랜드은행의 핵심은 국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채무를 국가의 영구적 채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잉글랜드은행이 채무에 기반을 둔 국가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은 전쟁에 필요한 돈을 확보했으며, 정부도 뜻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그동안 꿈꿔오던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했다는 점이 옥에 티였다.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 정부의 적자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1670~1685년에 영국 정부의 재정 수입은 2,480만 파운드였고, 1685~1700년의 정부 수입은 두 배 넘게 증가한 5,570만 파운드였다.
그런데 같은 기간 영국 정부가 잉글랜드은행에서 대출한 액수는 17배나 급증해 80만 파운드에서 1,380만 파운드가 되었다.아이러니적 국채를 묶어놓는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이자를 갚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테고, 그 돈은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과연 영국 정부는 그때부터 다시는 채무를 갚지 않았다. 2005년 말 현재, 영국 정부의 채무는 1694년의 120만 파운드에서 5,259억 파운드로 늘어나 영국 GDP의 42.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토록 거액의 돈을 위해서라면, 국왕이나 대통령이라도 민영화한 국립은행의 길을 막는 사람은 제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런던 금융시티를 장악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하면서 다른 분야도 거의 장악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 전체의 재정 수입을 담보로 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 모든 국가의 국왕과 정부 각료가 이들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 수상. 1844년 런던 금융시티는 그레이터 런던 지역 중심에 있는 약 2.6제곱 킬로미터 면적의 지역이다. 18세기 이래 줄곧 영국 및 세계의 금융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곳은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바티칸공화국과 유사한 ‘국가 속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비좁은 이 지역에는 잉글랜드은행 본점을 포함한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운집해 있으며, 현재 영국 GDP의 6분의 1을 창출한다. 이러한 런던 금융시티를 주도하는 사람은 영국을 주도하는 셈이다.
네이선이 영국에 도착할 무렵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치하면서 양국의 무역이 단절된 상태였으므로 영국 상품이 유럽에서 비싸게 팔렸다. 네이선은 프랑스에 있는 동생 제임스와 손을 잡고 화물을 영국에서 프랑스로 되팔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 후 네이선은 영국 재무부 관리 존 해리스로부터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프랑스로 진격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으나, 유일한 문제는 군비 부족이었다. 물론 영국 정부의 담보가 있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은행은 웰링턴이 내미는 은행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군의 군대에는 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상황을 지켜보던 네이선은 큰돈을 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방으로 금을 알아보았다. 때마침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실어온 금을 팔려고 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구매하려 했으나, 금 가격이 너무 비싸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네이선은 윌리엄 왕자의 현금 300만 달러와 영국과의 밀수로 벌어들인 거액을 들여 동인도회사에서 80만 파운드의 금을 사들였다. 그러자 금 가격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금 가격은 내릴 기미도 안 보이는데 군대에서는 화급을 다투는지라 영국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네이선에게 비싼 가격에 황금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거래로 네이선의 금고는 더욱 두둑해졌다. 네이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나섰다. 자신이 판 황금을 웰링턴 장군의 군대로 직접 호송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삼엄한 경계로 영국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송 길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영국 정부는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황금을 옮기기를 원했다. 네이선은 겨우 열아홉 살 난 동생 제임스를 시켜 황금을 프랑스로 운반하겠다는 사실을 프랑스 정부에 통지했다. 영국 정부가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자칫해서 프랑스로 금이 흘러 들어가면 영국의 재정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가 경찰을 보내 호송대 보호까지 자청할 정도였다. 내로라하는 프랑스 관리들도 뇌물을 받고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네이선 일행이 운반하는 황금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당당하게 프랑스의 은행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환영 만찬에 참석하는 한편으로 황금을 웰링턴 장군이 쓸 수 있도록 은밀히 보내 금화로 환전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로스차일드의 운반 통로를 통해 스페인의 영국군 수중에 전달했다.
그 수법이 얼마나 치밀했던지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였다.
프로이센에 주재하는 한 영국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런던 금융사무에 대한 로스차일드의 입김은 놀랄 만큼 세다. 그들은 런던 금융시티의 외환 거래 가격을 완전히 쥐고 흔든다. 은행가인 그들의 권력은 상상 이상이어서 네이선이 화가 나면 잉글랜드은행도 벌벌 떨 정도다.”
어느 날 네이선이 형 암셀이 경영하는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를 잉글랜드은행에 제시하고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는데, 잉글랜드은행은 자기 은행 수표만 환전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를 괘씸히 여긴 네이선은 이튿날 아침 일찍 아홉 명의 은행 직원을 대동하고 잉글랜드은행으로 갔다.
그리고 이 은행이 발행한 수표를 제시하고 현금을 요구했다. 그 결과, 단 하루 만에 잉글랜드은행의 금 보유액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네이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튿날 더 많은 수표를 가지고 갔다. 걱정이 된 잉글랜드은행의 고위급 책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수표를 교환하러 오실 겁니까?” 네이선이 차갑게 대답했다. “잉글랜드은행이 내 수표를 거절했는데, 내가 당신네들 수표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소?” 그의 말에 놀란 잉글랜드은행은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공손한 태도로 네이선의 앞에 선 고위급 책임자는 앞으로 로스차일드은행의 모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겠다고 알렸다.
네이선은 워털루전투를 통해 런던 금융시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경제 명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황금 가격을 포함한 중요한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제임스 로스차일드, 프랑스를 정복하다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나폴레옹. 1815년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가족 운송 네트워크를 세워 영국의 상품을 파리로 밀반입했다. 웰링턴을 도와 금을 운반하고 영국 국채를 수매한 후로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 후 로스차일드 파리은행을 설립하고 스페인의 혁명 자금을 암암리에 공급했다.
1817년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점령한 많은 영토를 잃고 정치적으로도 곤경에 처했다. 국민 경제 또한 갈수록 피폐해졌다. 사방에 빚이 깔려 있던 루이 18세의 정부는 재정적인 안정을 간절히 원했다.
이때 프랑스 은행 한 곳과 영국의 베어링스은행(Barings Bank)에서 프랑스 정부에 대규모의 융자를 지원했다. 로스차일드은행이 융자 프로젝트에서 외면을 당한 것이다. 제임스는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1818년이 되자 전년도에 발행한 프랑스 정부 채권은 파리와 유럽의 도시에서 가격이 올랐다. 큰 이득을 본 프랑스 정부는 융자를 받은 그들 두 은행에서 다시 융자를 받으려고 했다. 로스차일드 형제도 그 틈에서 융자 건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오만한 프랑스 귀족들이 고귀한 혈통을 내세워 시골 출신의 벼락부자에 불과한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거래를 꺼렸던 것이다. 제임스는 파리에서 큰돈을 벌고 호화로운 집과 옷으로 치장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짐작한 제임스는 프랑스 귀족들의 오만함에 치를 떨었다.
제임스는 곧바로 형제들과 함께 프랑스 귀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 귀족들은 오만하기만 했지 머리가 아둔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업신여기던 귀족들은 그들의 금융 실력이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18년 11월 5일, 그동안 줄곧 안정적으로 오르던 프랑스 국채 가격이 갑자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정부의 다른 채권도 그 영향을 받아 하락세를 보였다. 전에 없던 이상 징후에 투자자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이 현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심해졌다.
거래소 안에 떠돌던 소문들은 유언비어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갔다. 나폴레옹이 다시 집권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부의 세수 부족으로 이자 상환이 어렵다고 점치거나 새로운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루이 18세의 왕실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채권이 이런 기세로 급락하면 정부의 지출은 장차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거만한 귀족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그득했다. 모두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오직 두 사람만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임스와 그의 형 칼이었다.
영국에서의 악몽을 되새긴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채권시장을 조작하지 않았나 의혹을 갖기 시작했고, 의혹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1818년 10월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탄탄한 재력을 기반으로 유럽의 각 도시에서 프랑스 국채를 은밀히 사들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채는 조금씩 가격이 올랐다.
그 후 11월 5일부터 그들은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 국채를 대량 투매하여 시장을 공황에 빠뜨렸다.자기가 보유한 채권 가격이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루이 18세는 자신의 왕관도 그렇게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때 황실에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이 국왕에게 진언했다. “천하의 거부 로스차일드은행에게 이 국면을 타개해보라고 하심이 어떠할까요?” 어찌할 바를 모르던 루이 18세는 왕실의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으므로 당장 제임스 형제를 접견했다.
이날 엘리제 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오랫동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제임스 형제는 어느새 존경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은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었다.과연 제임스 형제가 손을 쓰자마자 채권의 붕괴 국면이 진정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전국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에 패한 이후 그들은 경제위기에서 프랑스를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온 국민의 찬양과 환호에 제임스 형제는 마음껏 취했다. 형제가 입은 옷도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으로 유행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로스차일드은행으로 대출을 받으러 갔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의 금융가를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재산은 6억 프랑에 육박했다. 프랑스에서 개인 재산이 그보다 많은 사람은 8억 프랑을 보유한 국왕 한 사람뿐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다른 은행가들의 재산을 모두 합쳐도 제임스보다 1억 5,000만 프랑이나 적었다.
이런 재산은 자연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언제라도 정부 내각을 쓰러뜨릴 정도였다. 그 유명한 티에르(Thiers)정부도 그들 손에 실각했다. 살로몬 로스차일드,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리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눈에는 전쟁도 평화도 없으며 구호와 선언도, 희생과 영예도 없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하는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딛고 일어설 디딤돌만 있을 뿐이다. 윌리엄 왕자가 그중 하나요, 또 하나의 디딤돌은 메테르니히(Metternich)다.
-프레더릭 머튼(Frederic Morton) 살로몬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둘째 아들로서, 유럽의 대도시를 돌며 각 은행을 조율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형제 중 외교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말을 할 때도 단어를 가려 쓸 줄 알았으며, 대단히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었다. 살로몬과 가깝게 지내던 한 은행가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와 만나서 불쾌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에게 유럽의 심장인 빈의 은행 업무를 맡겼다.
빈은 유럽 정치의 중심이다.
거의 모든 유럽 왕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복잡한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실을 위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체코, 슬로바키아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400여 년이나 통치한 유럽 정통의 왕실 혈통이었다.
나폴레옹이 비록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고는 하지만, 그의 계승자인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중부 유럽의 거두로 군림하면서 다른 왕실들을 오만하게 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통 천주교 교리까지 더해 영국과 프랑스 등 신흥 기독교가 성행하는 국가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이런 귀족 가문과 트고 지낸다는 것은 윌리엄 왕자와 맺은 교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과거 합스부르크 왕조와 거래를 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살로몬이 다시 빈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제 유럽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차례로 굴복시킨 전력을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살로몬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직접 거래를 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디딤돌’이 바로 19세기 유럽 정계를 풍미한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였다.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후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체계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긴 평화를 구가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가 점점 쇠락하고 강적으로 둘러싸인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묘한 줄타기로 평형을 유지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에 잔존하는 황실의 정통이라는 점을 강하게 호소하며 이웃 나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신성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재기를 막고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꿈틀거리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을 억제해 오스트리아 국내의 다민족 분열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1818년에 열린 아헨열국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는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한 후 유럽의 장래를 의논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프랑스 등에서 온 대표들이 프랑스의 전쟁 보상과 동맹국의 철수 문제를 결정했다.
살로몬과 그의 동생 칼도 이 회의에 참석했고, 살로몬은 메테르니히의 오른팔 겐츠(Gentz)의 추천으로 메테르니히를 만났다. 그 후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살로몬 특유의 부드러운 화법과 적절한 칭찬이 크게 기여했다.
메테르니히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탄탄한 재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살로몬은 물론 겐츠와도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메테르니히와 겐츠의 적극적인 추천에다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의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에 힘입어 살로몬은 드디어 합스부르크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 왕실은 고정적으로 살로몬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으며, 살로몬은 빠르게 그들과 한울타리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22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네이선을 제외한 로스차일드 가의 4형제에게 남작의 칭호를 수여했다.살로몬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여러 분쟁 지역에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안 그래도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오스트리아는 더 깊은 채무의 늪에 빠졌고, 살로몬의 금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1814~1848년의 유럽은 ‘메테르니히의 시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메테르니히를 움직이는 막후에는 로스차일드은행이 있었다.
1822년에 메테르니히와 겐츠, 그리고 살로몬, 제임스, 칼의 3형제는 베로나회의(Verona Congress)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로스차일드은행은 수익성이 높은 중유럽 철도 프로젝트의 자금 융자 은행으로 지정되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했다.
“오스트리아에는 페르디난트 황제와 살로몬 국왕이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1843년에 살로몬은 비트코비체 연합 광업회사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련회사를 인수했다. 이들 두 회사는 당시 세계 10대 중공업기업으로 손꼽히는 큰 기업이었다. 1848년, 살로몬은 오스트리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는 거물로 성장했다. 로스차일드 휘하의 독일과 이탈리아 나폴레옹이 철수한 후부터 독일은 그동안 흩어져 있던 300여 개의 작은 봉건국가를 합병해 30여 개의 큰 봉건국가로 구성된 도이칠란트연방으로 거듭났다. 프랑크푸르트에 남아 있던 로스차일드 가의 큰아들 암셀은 도이치연방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22년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에 봉해졌다.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은 독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암셀은 후계자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 암셀의 전폭적 신임을 받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현대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독일의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다.
암셀과 비스마르크는 진짜 부자지간처럼 가까웠다. 암셀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스마르크 배후의 은행가 새뮤얼 블라이흐뢰더도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이다.
한편 넷째 칼은 로스차일드의 다섯 형제 중 가장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가족 간의 연락을 도맡아 유럽 각지를 오가면서 소식을 전하고 다른 형제들을 도왔다. 1818년 다섯째 제임스가 국채를 둘러싼 경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 후로, 칼은 가문을 대표하고 있던 셋째 형 네이선으로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세우라는 명을 받는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형제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메테르니히에게 이탈리아의 혁명을 진압할 군대를 보낼 자금을 대주는가 하면,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 이탈리아 정부에 손을 써서 점령군의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친구 메디치가 나폴리 재정장관 자리를 되찾도록 돕기도 했다. 이탈리아 왕실의 재정적 기둥이 되어가던 칼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미쳤다. 그는 바티칸 교황과 상업적으로 왕래하기도 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칼을 만났을 당시 발을 내미는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손을 내밀어 입을 맞추도록 했다. 로스차일드 금융제국 너희 형제들이 단결하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은행도 너희와 경쟁이 안되며, 너희를 해치거나 너희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함께 있으면 세상의 어떤 은행보다 큰 위력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데이비슨이 네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1814년 6월 24일 M.A.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이 엄격한 유언을 남겼다. 1. 가문 은행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아야 하며, 외부인을 써서는 안 된다. 가족 가운데 남자만이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2.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 (이 규정은 초기에는 엄격히 지켜졌으나, 나중에 완화되어 다른 유대인 은행가 집안과의 통혼까지로 범위가 확대됨).
3. 재산 상황을 절대로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
4. 재산 상속 시 변호사의 개입을 절대 금지한다.
5. 집안의 모든 장자는 각 집안의 우두머리이며, 가족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 에만 차남을 후계자로 할 수 있다.
이 유서의 내용을 위반하는 자는 재산 상속권 일체를 박탈당한다. 중국에는 “형제가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족 내부의 통혼을 통해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100여 년 세월 동안 가족 내부의 통혼이 18건이었으며, 그중 16건은 사촌 남매간의 결혼이었다.
1850년을 전후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총 60억 달러의 재산을 축적했으리라 짐작된다. 수익률을 6%로 계산하면,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 가족의 자산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가족의 엄격한 통제, 은밀한 물밑 작업, 기계처럼 정확한 협조, 빠른 시장 정보 수집 능력, 냉철한 이성, 금권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반을 둔 금전과 재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천재적인 예지 능력 등이
로스차일드 가가 200년 동안 전 세계의 금융 및 정치와 전쟁의 냉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약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금융제국을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20세기 초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이 통제한 재산은 당시 세계 총 재산의 절반 정도로 추정된다.
로스차일드은행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 분포하고 있다. 그들은 치밀한 정보 수집 및 전달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유럽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도 때로 그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금융 청산 시스템을 처음으로 설립해 전 세계 황금시장을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
그들은 가족 은행 체계 중 처음으로 실물 황금을 운반할 필요가 없는 계정 청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세상에서 로스차일드 가문만큼 황금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황금 정가 시스템에서 물러나겠다고 선포한 2004년, 그들은 장차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금융위기의 중심에서 슬며시 벗어나면서 자신들과 황금 가격의 관계를 떼어놓고 있었다
빚더미에 앉은 달러 경제와 사방에 위기가 도사린 세계의 법정화폐 체계나 외환보유 체계는 한바탕 청산의 폭풍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안 되는 황금을 보유한 아시아 국가들이 몇 년 동안 축적한 재산은 미래의 승리자에게 ‘재분배’될 것이다.
헤지펀드는 재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다만, 이번 대상은 파운드화나 아시아 통화가 아니라 세계경제의 기둥인 달러가 될 것이다.은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큰 호재다. 평화 시기에는 감가상각이 느리게 진행되던 각종 고가의 시설과 물품이 전쟁 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이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 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때부터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121년 동안(1694~1815년) 영국은 56년을 전쟁 가운데 보냈으며, 나머지 시간의 절반은 전쟁 준비에 할애했다.
전쟁을 책동하고 그 자금을 대는 것은 은행가의 이익에 들어맞는다. 로스차일드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근대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주요 서방 선진국의 최대 채권자다. M.A. 로스차일드의 부인 구틀 슈내퍼는 세상을 뜨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공업국가의 화폐 발행 권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신성한 군주의 권리가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되었다. 이때 대서양 저쪽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아메리카 대륙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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