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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에 대하여
[정리, 편집 /현항석]
[출생]
(1882년1월 25일 ~ 1941년3월 28일)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이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사람이다.
[생애]
울프의 결혼 전 이름은 아들린 버지니아 스테판이며,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테판 《18세기에 있어서의 문학과 사회》의 작가였으며, 어머니는 줄리아 덕워스이다.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이용할 수 있었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울프는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울프는 두번째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투신자살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하고 1915년 《출항》을 출판한 뒤 1919년에는 《밤과 낮》을 간행했다. 1925년에는 《댈러웨이 부인》이 큰 인기를 받았고 1927년에는 《등대로》, 1928년에는 《올랜도》가 호평을 받았다.
1941년 3월 28일 우즈 강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는데, 강가에 울프의 지팡이와 발자국이 있었다. 이틀 뒤에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서재에는 남편과 언니에게 남기는 유서가 있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허탈감과 환청, 정신이상 발작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추정된다.
[작 품]
◦ 《댈러웨이 부인》(1925년),
◦ 《등대로》 (1927년),
◦ 《올란도》 (1928년),
◦ 《자기만의 방》 (1929년),
◦ 《파도》 (1931년),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
버지니아울프는 심한 우울증과 정신문열증을 앓고 있었다.
정상적이다가 한번씩 발작을 하곤했는데,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남편에게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란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갔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내 상처를 이해해 준 그대에게..."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레오나드 울프. 제 처녀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테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주었던 레오나드. 그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테판은 첫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려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 애가 작은 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수치감과 혐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맘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닥쳤죠. 어머니는 이웃 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세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주던 이복 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 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뭇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적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 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하였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 버지니아 울프]
사랑이란 생각이다
사랑이란 기다림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사랑은 슬픔이다
사랑은 벌이다
사랑은 고통이다
홀로 있기에 가슴 저려오는 고독
사랑은 고통을 즐긴다
그대의 머릿결
그대의 눈
그대의 손
그대의 미소는
누군가의 마음을 불태워
온 몸을 흔들리게 한다
꿈을 꾸듯 생각에 빠지고
그대들은
그대들의 육체에 영혼에
삶에
그대들의 목숨까지 바친다
둘이 다시 하나가 될때
아 그대들은
한쌍의 새처럼 노래한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창작 기법]
‘개인의 발견’은 20세기 초 유럽의 한 정신사적 현상이였다.근대정신의 한 귀결점인 1차 세계대전 은 인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고,확신에 차서나부끼던 온갖 플래카드들을 촌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근대를 지 탱했던 사회적·역사적 인격이 물러난 자리에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개인이 들어섰다.프로이트나 프루스트 이후,의식이란 알 수 없는 열정과 끊임없는 무의식의 작용 아래 놓여졌다.또한 부르주아 윤리는 새로운 계급분화와 더불어 찢겨져나갔다.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생애가 걸쳤던 곳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이런 환경은 울프에게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했고,그는 세기 초의 유행 속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문학과 삶을 통해 이 유행의 한 전위를 이끌어나갔다. 이같은 전위는 물론,오성과 신성의 빛을 남성이 독점했던 근대적 남성쇼비니슴이나 “여성의 영광은 화제에 오르내리지 않는 데 있다”는 부르주아윤리,이런 당대의 상식들과의 부단한 싸움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이것이 울프로 하여금 20세기 지성사에 두가지 중대한 기여를 하게 만들었다.그의 문학은,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창작기법으로,다른 한편으론 페미니즘문학을 통 해 이후 세계문학사에 영향을 드리웠다.
버지니아 울프와 페미니즘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딸로 태어난 울프는 당시 여성에게는 대학 입학이 허용되지않아 주로 아버지의 서재에서 희랍어와 러시아어를 익혔다.스물다섯살에 처녀작「출항」을 쓰고,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한 울프는 20세기초 TS엘 리어트와 경제학자 케인즈 등이 모였던 「블룸스베리그룹」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정신질환으로 1941년 자살하기까지 소 설 9편과 평론,희곡,에세이 등을 남겼다.울프는 D.H로렌스,올더스 헉슬리 등과 함께 영국 주요 작가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고,그녀의 작품은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 구미에서 왕성하게 재해석되고 있다.최근 서구에서 그녀에 대해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버지니아 울프를 광풍처럼 불고있는「 페미니즘 문학」의 대모라고 보는 시각 때문이다.국내에서도 연극무대에 오른「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그러나 실상 버지니아 울프는『인간 모두가 평등하게 해방돼야 비로소 여성도 해방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페미 니즘」이란 말자체를 혐오했다고 한다.그녀의 작품은「인간 내면에 흐르는 의식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점에서 울프는「의식의흐름」을 좇은 조이스와 포크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의식의 흐름 따라 울프가 추구한 주제는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였다.그녀는삶이란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며,이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이렇게 울프는 근본 문제를 탐구하면서도 사회 부조리와 여성문제를 고발하는 것도놓치지 않았다.
[당대의 상식과 부단한 싸움]
브론테 자매들이 남자의 필명을 써야 했던 19세기 상황에 비해,울프의 등장은 이제 새로운 여성의 세대 가 출현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썼고,당대 문인 예술가들과 서클을 만들었으며,남편과 함께 출판사를운영하면서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삶에는 19세기와 20세기,빅토리아시대와 에드워드시대,봉건과 현대,개인주의와 페이비어니즘,남성과 여성이 공존 했고,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몇 개의 팽팽한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어쩌면 이런 갈등과 긴장이 물론 체질적인 섬약함과 더불 어,이 천재 작가에게,간헐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로 마감하는,개인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 모른 다.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940년 버지니아 울프가 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그런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이 집에서는 빅토리아와 에드워드시대라는 두 세대가대치했다.아침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 나는 플라톤의〈공화국〉을 읽거나 고대희랍의 코러스를 읽었다.그러나 오후 4시30분쯤 빅토리아 사회는 압력을 가해왔다.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저녁 파티의 손님들을 위해 이야깃거리를 준비해두어야 했다.8시,목이 드러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거실로 가면 조지 오빠가 야회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내 옷을 검열 했다.빅토리아 사교계가 시작됐고 만찬은 고문이었다.나와 언니는 박수를 치고 복종할 뿐이었다.테이블 둘레에는 조지와 제럴드와 잭이 우정성과 출판부와 법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남자 친척들은 모두 빅토리아시대풍습게임에 능 통했다.나 역시 그 규칙을 너무도 철저히 익혔고,나중에 내가 쓴 글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다.어떤 유순함 공손함 엇비스 듬한 접근이 그것이다.” 1900년쯤 하이드파크 게이트 22의 어느 하루에 관한 글이다.
버지니아의 집안은 중상류층에 속했고 아버지 레즐리 스티븐은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였다.그의 집에는 당대의 유명한 작 가들이 드나들었다.학교 교육을 받지않은 버지니아에게 가장 절대적인 교사는 부친이었다.부친은 딸에게 주로 전기물을중심으 로 많은 책들을 골라주었고 책들을 읽고난 뒤 꼭 자신과 토론하게 했다.
그의 부모 양쪽 모두 두번째 결혼이었고,그는 의붓·이복형제와 함께 자랐다.어머니는 그가 13살 때,아버지는 22살에 세 상을 떠났는데,버지니아가 정신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잇단 불행이 몰고온 가족의 해체는 그를 신경쇠약에 빠뜨렸지만,동시에 19세기적 강제로부터 해방시켰다.그것은 하이드파크 6층 저택의 파티들,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불우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여성이라는 부르주아 규범의 화신이었던 어머니,그에게 드레스를 골라주고 사교계로 끌어냈던 의붓 오빠,그런 울타리에 갇혔던 어린시절과의 결별을 의미했다.가족의 해체와 결혼,1 차 세계대전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60년을 전후반으로 뚜렷이 갈라놓고 있다.이제 30대 이후의 울프에게는 창작비평활동 과 블룸즈버리 서클과 호가스 출판사와 헌신적인 남편이 기다렸다.
[결혼 후의 작품세계]
30살 되던 1912년,그녀는 유대인 문예비평가 레너드 울프로부터 청혼받았고곧 결혼했다.이미 7년 째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그해 봄 세번째 발작을 일으켜요양소에 입원했던 터였다.버지니아는 이 결혼으로 남편과 간호부 를 함께 얻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생리주기와 몸무게를 일일이 기록했고 교제와 집필활동까지 적절히 통제했다.그들은 신혼 초부터 육체 없는 결혼생활을 했지만 버지니아는 이것 자체를 불평한 적이 없었다.그는 오히려 주변의 다른 여성에게 연정을 느꼈는데,소설〈올 란도〉는 양성연애자였던 시인이자 소설가 비타 니콜슨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로서 영국문학사에 이름을 등재한 것은 1915년,33살되던 해였다.데뷔작은 〈항해〉.그러나 작가 로서 전성기는 40대에 찾아왔고,그는22년작〈야곱의 방〉,25년작〈댈러웨이 부인〉,27년작〈등대〉,28년작〈올란 도〉,29년작〈자기만의 방〉으로 제임스 조이스나 서머싯 몸,로렌스,포스터등과 더불어 당대 영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 가군에 끼었다.
인물과 시간과 줄거리가 완전히 해체된〈야곱의 방〉은‘의식의 흐름’기법을 본격적으로 실험한 그의 첫 작품이었다.그는 1917년 남편과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냈고,이후 모든 작품을 이곳서 출판했는데,〈등대〉는 그같은 형식실험이 고전적인이야 기구조와 적당히 타협해 당대로서는 가장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일가족이 보내는 섬에서의 여름 한철을 그린 이 작품에서 버지 니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삼아 부르주아시대의 여성규범을 풍자한다.작품 속에서 램지 부인은 젊은 학자인 남편의 까 다로운 성미를 가라앉혀주고,아버지에게 화가 난 아들의 기분을 달래며,젊은 연인들을 한자리에 만나게 주선해주는 선행으로 하루를 보낸다.
[평론을 통한 사회문제 개입]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과 연 5백파운드의 고정수입이 있 어야 하며 경제력은 참정권보다도 중요하다”고 썼다.이 작품은 여학생을 입학시키지 않는 명문대학들,여성의 열등함을 입증하 려는 학문적 업적 등을 신랄하게 비꼬았다.그는 1932년 이후 케임브리지대학의 강연요청과 맨체스터대학,리버풀대학의 명 예박사학위를 모두 거절했다.비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지급한 대가였을까?
레너드 울프는 1960년에 쓴 자서전에서 아내에 대해“정치와 무관하게 산 정치적 동물”이라고 썼다.점진적 사회주의 서클 인 페이비언협회에 그를 소개시킨 사람은 남편이었다.그러나 레너드가 노동당 집행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이었던 데비해, 버지니아는 한걸음 물러서서 평론을 통해 정치와 사회문제에 개입했다.그는〈배움의 전당〉〈예술과 정치〉〈여성노동자협의회 에 관한 회고〉라는 세권의 평론집을 통해,위대한 문인들이 대개“중산계급에서 태어나 비싼 교육을 받은”수혜자들이었다고 천 재의 계급성을 추출해내는가 하면,가부장적 통치를 떠받드는 다양한 제도와 상징들을 폭로한다.
또한 국내의 가부장제와 전지구적인 식민지가 영국 상류층 남자들에게 본토에서건해외에서건 교장이나 장군 혹은 각료나 판사 같은 신분을 보장해준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자살로 생애를 마감]
버지니아 울프가 서섹스 시골집에서 아침산책을 나갔다가 근처의 오즈강에서 주머니 속에 돌을 채워넣고 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됐던 1941년 3월,그는 교정으로만 여러해를 끌어오던 마지막 소설〈세월〉을 탈고한 뒤였다.〈세 월〉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극단적인 만족과 절망 사이를 오가던 그는 한 기록에서“다시 환청이 들려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그는 남편 앞으로“더이상 당신의 삶을 망쳐놓을수는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에 의해 몇편의 대표작이 보태진‘의식의 흐름’문학의 영향은,입담 좋은 이야기꾼처럼 사건들을 엮어나갔던 19세기 소설 과,인물의 내면묘사에 주력하는 20세기 소설을 결정적으로 구별시켰다. 또한 최근 〈올란도〉의 영화화나 〈자기만의 방〉의 연극화는 페미니즘 문학의 20세기를 열었던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의 권위를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3기니/버지니아 울프 지음 태혜숙 옮김]
전쟁·폭력 발생의 근본원인 밝힌 소설로 전쟁과 폭력이 단지 남성의 왜곡된 심성때문에 파생하는 것이 아 니라 남성을 왜곡시키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와 문화에서 야기되는 것임을 지적한 소설이다.
한 전쟁방지단체로부터 받은 전쟁방지를 위한 자문과 기부금을 요청하는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가상적인 사실을 소재로 쓴 장편으로 전부 3부로 나누어 1부에 1기니씩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데1기니는 여성의 교육을 위한 여대증축기금,1기니는 여 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취업을 돕는 단체에 대한 기부,그리고 나머지1기니를 전쟁방지단체에 주기로 결정해 전쟁과 폭력 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을 되묻는다.
여성의 사회적 가능성 실현 역설한 책으로 울프는『세월』등의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여성문제에 대 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에세이나 일기 등을 통해 더욱 명성을 굳힌 작가다.페미니즘의 상업화가 팽배한 가운데 20,30년 대에 활동한 페미니스트의 사상을 통해 현대의 페미니즘을 점검해 볼수도 있다.
이 책 제목의「집안의 천사」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다.자신의 세계보다 남편과 자녀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는 여 성,남성에게 상냥하게 구는 여성들을 말한다.울프는 여성을 이런 상황에 묶어두는 것을 가부장적 문화라고 지적하고 여성도 현 대사회가 열어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라고 역설하고 있다.울프가 제시하는 사회 개선은 인간의 정신이나 가치관 등 사회문 화의 변화다.
[‘델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본 ‘일상’의 의미]
<델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 발표한 작품이다.
당시 울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매료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천부적 재능을 항상 의심했던 울프는 일기에 “이번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그렇지만 프루스트에 비하면 물론 그러지 않겠지”라고 썼다. 그럼에도 프루스트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조이스 소설보다 덜 난해한 이 작품은 울프의 우려를 넘어 현대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야기는 1923년 6월 어느 날 하루를 서술한다.
주인공 클라리사 델러웨이 부인이 저녁파티에 사용할 꽃을 사러 집을 나서는 아침에 시작하여 파티가 진행되는 저녁에 끝난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은 전혀 없다. 프루스트나 조이스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델러웨이 부인>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주관적 체험과 생각,
감정 등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원래의 제목이 ‘시간’이었던 이 작품에는 런던탑에 걸린 빅벤이 시간마다 알려주는 ‘외적인 시간’과 인물들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내면적 시간’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상가를 걸어가던 클라리사는 갑자기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낭만적 사랑을 떠올린다. 이때 빅벤이 울리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회상에서 깨어난다. 이후에도 그녀는 다시 또 다른 회상에 잠기다가 예컨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일들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클라리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빅벤의 종소리를 따라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외적 시간 사이에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이나 예측 같은 내적 시간들이 마치 땅속에 묻힌 감자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와 내면의 세계, 일상성과 내적 성찰이 뒤섞인 진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기법을 울프는 ‘터널 파기’라고 이름 지었다.
클라리사는 특이한 인물이다. 중견 정치가의 “완벽한 안주인”인 그는 외적으로는 허영에 가득 찬 사교계를 대변한다. 이날 밤에도 마치 버킹엄 궁에서 손님을 맞는 여왕처럼 파티의 중심에 섰다. 그래서 옛 애인인 피터 월시조차 그를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사실상 속물들이 득실대는 사교계를 참기 어려워한다. 이처럼 현실과 내면이 불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그는 작품의 다른 주요 인물인 셉티머스 스미스와 맥이 닿아 있다. 전쟁에서 얻은 정신적 상처에 시달리는 퇴역군인 셉티머스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태자가 지나가는 공간과 때마다 빅벤이 울려대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주목할 것은 셉티머스와 똑같은 삶에 대한 공포ㆍ무력감ㆍ혐오감에 억눌리면서도 클라리사는 파티를 끝내고 “평화와 안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든 것을 불안하고 무의미하며 혐오스럽게 만드는 시간에 대항하여 “끝끝내 살며” “조용히 걸어가게” 하는 그의 놀라운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울프는 스스로 던진 이 ‘진지한’ 물음을 뒤로하고 1941년 어느 화창한 봄날 우즈 강에 몸을 던져 셉티머스를 따라갔다. <델러웨이 부인>의 미국판 서문에 울프는 셉티머스가 클라리사의 ‘분신’이라고 썼다. 거짓말이다. 셉티머스는 울프 자신의 분신이었다. 클라리사는 오히려 “저 하늘, 저 장엄한 하늘”,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들, 그리고 순간마다 “그 순간의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추억들, 한마디로 ‘일상이 주는 덧없고 사소한 기쁨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의자를 바로 놓고 책을 한 권 책장에 밀어 넣으면서 일상에 골몰하여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다가도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것을 보며 문득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비길 만한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심벨린>의 후렴을 빌려 “이제는 뜨거운 햇빛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스스로에게 충고도 했다.
바로 이것이 “새처럼 겁이 나서 몸을 웅크렸다가도 차차 생기를 회복하여 한없는 기쁨의 불꽃을” 일으키게 하는 비결이었다. 물론 새로운 지혜는 아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도 일상의 소중함을 교훈했다. 카르페 디엠! 열매를 따듯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다. 뜨거운 햇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상을 사랑하자. 마지막 순간 울프는 클라리사가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봄이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화단이나 화분에 좋아하는 꽃들을 심어보자.
지난 일들도 떠올려보자. 이런 일상의 사소한 기쁨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다. 김용규 /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페미니스트 에세이]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 박 희 진
모더니즘의 기수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울프가 마흔일곱이라는 나이에 내어놓은 이 글은 비소설류의 산문이다. 1928년 5월 울프는 옥스포드의 여자대학 뉴넘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케임브리지의 여자대학 거튼에서 또 한 번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을 토대로 그것을 수정 보완한 글이 이 에세이이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118쪽의 이 책자는 주제나 형식면에서 모두 특이하다. 이 글은 오늘날 1920년대 영미계 페미니즘의 결산으로 간주되어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 청탁받은 강연의 제목이 ‘여성과 소설’인데 왜 ‘자기만의 방’으로 고쳤는가에 대해서 추궁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위의 제목이 지나치게 거창하니까 차라리 자그마한 의견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옥스브리지에서 점심 초대가 있는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300여 년간 잘 다듬어진 잔디 위는 남자만 걸을 수 있고 여자는 거친 자갈길만 다닐 수 있으며, 여자는 도서관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같은 날 저녁식사는 여자 대학인 뉴넘에서 하게 되어 있었는데, 두 군데서의 식사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2장의 세팅은 대영박물관이다. 화자의 숙모가 사망해서 연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다. 이날(1919)은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던 날이기도 하다. 고정 수입 500파운드가 생긴 이후 필자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검은 뱀인 분노가 증오와 함께 스러지고, 화자는 그 동안 그렇게나 분노를 끓게 한 남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또한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독점한 돈과 권력은 그 속성상 소유한 자들의 간을 뜯어내고 허파를 쪼아먹기도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공포와 한에서 연민과 관용의 단계를 넘어 가장 위대한 해방,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역사가에게 구체적으로 엘리자베스 조 영국에서 여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고 하면서 여성 문학사를 더듬는다. 유명한 영국의 사학자 트레벨리언 교수의 『영국사』에 기록된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1470년경부터 고찰해 나간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누이동생 주디스도 이 장에 등장한다.
4장의 세팅은 아직도 대영박물관이다. 드디어 18세기 말엽 아프라 벤(Aphra Behn, 1640~1689)이 등장해서 처음으로 직업 작가가 된다. 이 사실은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난관들을 극복해 나갈 방향 제시를 하고 있는 5, 6장은 이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울프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5장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처음으로 카마이클이라는 여성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글을 쓴다. 필자는 앞으로 100년은 더 지나야 참다운 여류시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한다.
마지막 장인 6장의 때는 1928년 10월 26일이고 장소는 런던이다. 필자는 ‘양성론’을 들고 나와 결론을 대신한다. 작가란 모름지기 셰익스피어와 같은 양성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작가 자신의 성에 대해서조차 걸림이 없이 글을 씀으로써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울프는 이 책자에서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인 독립은 투표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생각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척추 속의 램프, 즉 우리의 정신활동에 불을 밝힐 수 없다”고 힘주어 이야기하는데, 이 견해는 작품 도처에 되풀이되어서 나타난다. 즉 소설 예술이라는 것이 거미줄과 같은 것이어서, 가볍게이기는 하지만, 네 귀퉁이가 모두 실생활에 달라붙어 있다고 운을 뗀다. 계속해서 예술이 보기보다 건강, 돈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물리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한 경제적인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독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은 물론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이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저자는 여기서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남성처럼 글을 쓰고 남성처럼 살고 남성처럼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자기만의 방은 닫힌 공간이면서 동시에 열린 곳이며, 모든 사람들의 동의하에 그리고 여성 자신이 그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남성의 아량에 의해 얻은 방은 결코 정신적인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만의 방이 부여하는 긍정적인 고독 안에서 예술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양성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면을 살펴보면 우선 여섯 개의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각 소품에는 논평이 따라붙고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한 해설이 뒤따른다. 특기할 사항은 화자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화자가 단일한 주체임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화자 ‘나’는 자기주장을 열심히 펴나가는 듯하다가는 줄임표(…) 뒤로 슬쩍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진지하고 심각해지는가 싶으면 장난기 어린 유희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글의 방식은 설명적이지 않고 암시적이며, 겸양의 제스처를 드러내며, 공격적이지 않고 방어적이다.
분노와 같은 검은 감정은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련미 넘치는 표면구조와 시공을 넘나들며 구술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스트 기법의 심심찮은 등장은 이 에세이가 다름 아닌 20세기의 글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런 스타일 자체가 절대로 사치가 아니라 무서운 비수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건이다.
그러니까 그 옛날(1579) 베이컨이 쓴, 다분히 경구적인 최초의 영미계 에세이로부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에세이라는 장르의 글이 실로 멀리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리하여 역사, 풍자, 문학비평 그리고 자기 고백이 뒤섞여 있는 이 글은 작가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내게 된다. 싸르트르가 말하는 소위 작가의 ‘상황(situation)’의 분석을 가능케 해 준다. 즉 울프라는 작가가 그녀가 받은 교육, 그녀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문학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성장한 인물인가, 그녀는 이 모든 역류에 어떤 방식으로 항거하며 자신을 주장했으며, 이 항거 자체가 그녀의 인격을 어떻게 연단했는가를 우리는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원래 그 정의가 헐렁한 에세이라는 장르가 최근에는 장르 허물기의 경향마저 두드러져서 이와같이 특이한 형태의 에세이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버지니아 울프 일기]
1938년 3월 12일 토요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즉, 어젯밤 10시 그의 군대가 저항없이 국경을 넘었다. 오스트리아의 국가가 마지막으로 라디오에서 들렸다. 우리는 비엔나로부터 무도곡을 잠깐 들었다. 이 사실은 더러운 물방울들이 뒤섞이듯이 러시아의 재판과 섞여서 나의 아침에 가시를 박았다. 노트를 보면서 보낸 까다로운 아침이었다.
9월 13일 화요일
아직 전쟁은 아니다. 히틀러는 허풍떨고 붐을 일으키지만 아직까지 진짜 한 방을 쏘지는 않았다. 단지 격렬한 지껄임, 그리고 잠잠해진다. 우리는 끝까지 들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야만적 울부짖음, 그리고 청중들로부터의 울부짖음, 그리고 더 사이를 떼어놓은, 더 잰 듯한 문장들. 그러자 또 다른 고함 소리. 곤봉으로 지배되는 환호성. 그 얼굴들을 생각하니 겁이 났고 그 목소리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 연설은 용두사미격이었고 우리는 한두 마디만 알아들었다. 다음이 일반적인 예언인 것 같다. 즉, 히틀러는 감히 경계선을 넘지 못한다. 그것에 바짝 가까이 서서 모욕적인 언사만 떠들어대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넌센스를 참아낼 수 있는가? 만약 어쩌고저쩌고 하면 그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하에 협상을 진행중이다.
9월 16일 금요일
쳄버레인이 히틀러를 만나러 갔다. 대부분 안도와 승인. 아직 뉴스는 없다. 사람들은 이것이 평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어제 런던에서 『이브닝 스탠다드』지 자막에 크게 평화라고 씌어져 있었다. 에디의 책을 위해서 내가 마분지를 살 때 롱 에이커 가게 주인이 전쟁은 없을 거요라고 말했다. 로신스키는 그들이 양보할 거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자기 평판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희생될 것이다. 전쟁은 1년 간 지연될 것이다. 그러나 라디오가 방문의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는―그리고 오늘 밤 또 다른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오늘 밤 우리는 또다시 일을 멈추고 들을 것이다.
1939년 1월 29일 일요일
그래, 바르셀로나가 함락되었다. 히틀러는 내일 연설할 것이고 다음번 리허설이 시작되겠지. 나는 지난 사흘 간 폴리낙 공주와 마리 스톱스와 필립과 피핀 그리고 프로이트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또한 톰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파티에 갔다.
프로이트 박사는 나에게 수선화를 주었다. 꼼꼼하게 정돈되고 반짝거리는 커다란 책상 위에 작은 조각들이 있는 거대한 서재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환자처럼 의자에 앉았다. 그는 비틀어지고 쪼그라든 아주 늙은 노인이었다. 빛나는 원숭이 눈을 하고 마비된 간헐적인 움직임. 말은 분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주의 깊었다. 히틀러에 대해서. 독이 작용하려면 한 시대가 필요하지. 그의 저서에 관해서. 명성? 나는 유명하기보다는 악명이 높았지. 그의 첫 저술로 50파운드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대화였다. 그리고 인터뷰. 딸과 마틴이 도왔다.* 거대한 가능성―내 말은, 예전의 불길이 이제야 깜빡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떠날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거론했다―당신들은 어떻게 하려고 하오? 그 물음은, 즉 우리 영국인들과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 역주 : 여든두 살인 프로이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자신의 제자인 그리스 조지 왕의 부인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의 도움으로 나치 치하의 비엔나를 작년 여름에 떠났다. 막내딸인 안나 프로이트(1895~1982)와 함께 그는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마틴은 프로이트의 큰아들(1889~1967)이다. 호가스 출판사는 1924년 이후 프로이트 작품의 영어판 출판사였다.
1월 30일 월요일
당신들이 전쟁에서 이기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더 나빠졌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우리는 때로 죄의식을 느낀다고 나는 말했다. 아마 히틀러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 우리가 졌더라도요. 그럼, 그렇지 않지라고 그는 매우 강조해서 대답했다―그자는 무한히, 훨씬 더 형편없었을 거야.
그들은 3개월 간 떠날 생각인데 24시간 안에 마음을 정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판사가 범죄자에게 프로이트 책 중 20권을 읽으라고 판결을 내렸다는 사건을 레너드가 언급하자 그는 아주 관심을 보였다. 보나파르트 공주가 그에게 이 거대하고 조용한 햄스테드 저택을 주었다고 에이드리언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비엔나에 있는 우리 아파트만큼 이곳이 좋지는 않아요"라고 안나가 말했다. 어떤 부담감. 모든 피난민은 가능한 빵부스러기를 향하여 주둥이를 내미는 갈매기와 같다. 마틴과 그의 소설. 안나와 그녀의 책. 후원자로서 우리도 역시 부담스럽다.
4월 13일 목요일
나는 어린 시절과 등등에 관한 첫 40페이지를 일주일도 안 되어 썼다. 하지만 그건 거의 자서전이다. 이제 정치가 절박하다. 오늘 하원에서 쳄버레인이 연설할 것이다. 전쟁이 당장 내일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 같다. 오늘 찰스턴으로 차를 마시러 간다. 레너드는 어제 브라이튼으로 가서 병상에 누운 로빈스 양과 오래 이야기를 했는데 매우 흥미 있었다고 했고, 그래서 내가 그걸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여기에 홀로 남아 있게 되어 기뻤다. 만약 열흘 동안 나 자신을 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나흘 동안 21도가 넘는 완전한 여름의 열기 끝에 이제 날씨가 약간 어두워진다. 벽 위에서 쉼표 모양의 나비가 해를 쬐고 있다. 레너드의 두드러기가 나아졌다. 우리는 마카로니만 먹고 산다.
8월 28일 월요일
공굴리기를 하고 나는 여기 밖에 머물면서 말하려 한다―무엇을? 아마도 이 평화의 마지막 밤이 될 지금에 관하여. 오늘 밤 9시 뉴스가 이 모든 것을 끝낼까?―우리의 삶과, 오, 그래, 앞으로 50년 동안의 모든 것을. 이 마지막 날에 대하여 모두들 쓰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야를 걸었다. 옥수숫대 아래 누워서 텅 빈 땅과 완전히 푸른 여름날 오후 하늘에 떠 있는 분홍 구름을 쳐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길에서 일꾼들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한 사람은 찬성이고 한 사람은 반대였다. 그래서 공굴리기를 했고 나는 행복했다. 나는 바깥 정원에서 뭐라고 할까? 멍한 상태다. 비타는 처음에는 공포와 전율이 되살아나다가 그 다음 꺼져버렸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재 작은 섬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 중 누구도 육체적인 두려움은 갖고 있지 않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광활하고 고요하고 차가운 암울함이 있다. 그리고 긴장감. 마치 의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같은. 그리고 젊은이들―젊은이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하지만 요점은, 우리는 너무나 마비되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런던은 활기 차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멍한 채 표면적으로는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휴 슬레이터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고 어제 말했다. 늙은 클라이브는 테라스에 앉아서 "난 전쟁을 겪으며 살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했다. 자신은 이미 최고로 좋은 때를 경험했다면서 자신의 인생이 물러간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아주 만족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더없는 기쁨이다. 그래서 행복한 채 저녁을 요리하고 책을 읽고 공놀이를 한다. 애국적인 감정은 없다. 전쟁 동안 어떻게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8월 30일 수요일
아직 전쟁은 아니다. 어제 의회가 열렸다. 협상. 우리는 단호하다. 잠시 휴식. 레너드와 나는 방송에서 들은 것을 토의하면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매우 어두웠다가 그 다음 좀 나아졌다. 오늘 아침 레너드는 나보다 더 비관적이다. 그는 히틀러가 도발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한다. 어젯밤 독일로부터 분노하는 목소리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가 맹렬한 독설을 퍼부을 때 작년의 광기 서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동시에 8페이지의 답신이 내각으로 어젯밤 보내졌다. 이번에 프랑스는 빠졌다.
9월 1일 금요일
오늘 아침 우리에게 전쟁이 닥쳤다. 히틀러가 댄지그를 점령했다. 폴란드를 공격했고, 또 공격하고 있다. 우리 의회가 오늘 밤 6시에 모인다. 런던에서 하루를 의심과 희망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이걸 쓴다. 어젯밤 우리는 폴란드에 대한 조약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면 약간의 희망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1시인데 나는 안에 들어가서 전쟁이 선포되는 것을 들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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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마와 숙녀란 시를 접하고 작가가 되겠다고 국어시간에 넋을 잃고 말았었답니다. 시간 내어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다시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울프..세계2차대전의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불안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결국 템즈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친 여류작가를 생각하며 박인환님이 목마와 숙녀라는 만가형식의 명시를 남겨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많이들 즐겨 읊는 시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공부하고 갑니다.
버지니아울프의 <목마와 숙녀>를 만나는 아침,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