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광주안씨 시조 기록들을 잘 종합한 것이 조선조의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선생이 편찬한 광주안씨 경술보(庚戌譜, 1790년)의 시조 기록이며, 이는 그후의 병인보(1866년), 임술보(1922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벼슬하여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여러 족보를 보니 고려 때 한 광주(廣州) 사람이 성주(城主)를 죽이자, 공(公)이 의병을 일으켜(倡義) 토평(討平)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져 이로서 관향(貫鄕)이 되었다. 혹은 광주 지방의 관리(州吏)로 뛰어 났다고 한다. 영남지방 족보(嶺譜)에는 "공(公)이 일찌기 평양(平壤)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원수(元帥)의 직을 받고,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3세(世)를 연이어 4명의 군(君)이 세록(世祿)을 이어 받았다고 하나 족보(族譜)가 없어져 상세한 것은 알수 없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사간(司諫) 휘(諱) 구(覯)의 가장(家藏) 구초(舊草)에서 나온 것이다. 태만(苔巒)은 옛날로부터 멀지 않으니 그 말이 믿을만하므로, 이제 이를 옳은 것으로 한다(以此爲正). ○ 영남본(嶺本)에서 비록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광릉은 한양(漢陽)의 별호(別號)로 사실과 어긋날까 두려워 이제 여러 기록을 따라(從諸本) 광주군(廣州君)으로 한다. ○ 전의[傳疑] 여러 족보를 살펴보니 혹은 묘가 광주(廣州) 갈마치(渴馬峙)에 있다고 하고, 혹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15리에 양안촌(兩眼村)이 있는데, 지금은 장단(長湍)에 속하며, 광주안씨(廣州安氏) 시조묘(始祖墓)가 있고, 안재궁(安齋宮)이라는 이름의 재궁(齋宮)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미상(未詳)이다.
상실(爽實) : 사실(事實)에 어긋남. 사실(事實)과 다름 재궁(齋宮) : ①향교. 지방(地方)의 문묘(文廟) ②재실(齋室) 갈마치(渴馬峙) : 경기도 성남과 광주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술보의 사간공(思簡公, 휘 성[省], 1344-1421) 묘소 기록 중 순암공의 아들 경증(景曾)공이 기록한 덕곡 선묘기(德谷 先墓記)에 사간공의 묘가 있는 곳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갈마치(渴馬峙) 영장산(靈長山) 남록(南麓)이라 하였다. "廣州府慶安面渴馬峙靈長山南麓卽思簡公葬地名僧自超禪師號無學所占也"
시조 기록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대다수 안씨들이 신라 경문왕 때 중국서 온 이씨 아들 3형제에 기원한다는 설이 근거없는 낭설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변무(辨誣, 거짓임을 밝히는 글)가 있고, 그 다음으로 시조 이하 결세를 증거할만한 문헌이 없어 전중시어사공(殿中侍御史公)을 1세로 한다고 한 후 후손 계보를 싣고 있다. 변무(辨誣)의 번역 및 해설 : 안정복 선생이 본 농서이씨설 참고
경술보의 광주안씨 선대 기록은 대역사학자인 순암 선생이 일생 동안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면서 알게 된 광주 안씨 선대 관련 기록들을 역사학자의 안목으로 시비를 분명히 가려서 종합 정리한 것으로, 역대 광주 안씨 족보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경술보 시조 기록은 순암공이 광주안씨 무오보(1738)나 그 이전의 비문, 행장 등에 보이는 것들을 종합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족보나 문중 기록에서 시조에 대해 언급할 때도 여기에 없는 내용을 함부로 덧붙여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이 기록에 나오는 주요 내용이 처음 수록된 문헌으로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고려(高麗) 대장군(大將軍)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호당공(湖堂公 휘 潤孫, 1450~1520) 비문 蘇世讓, 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 1540년경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 ........... 공의 성은 안씨, 휘는 윤손, 자는 홍조이며, 본관은 광주로. 고려 대장군 방걸의 후손이다.... [陽谷先生集卷之十一 碑○碣, 한국문집총간 권 23, p.464d]
경술보에서 말하는 영남지방 족보(嶺譜) 또는 사간(司諫) 휘(諱) 구(覯, 1458-1522) 가장(家藏) 구초(舊草)라는 문건의 원본은 전하지 않는 것 같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정보종합시스템의 순암종택문서 "안서우 가장(安瑞羽 家狀)"에 실려 있는 "태만공전기 선세사적 등서초(苔巒公傳記 先世事跡 謄書草)"라는 기록에 같은 내용이 있어 그 필사본으로 보인다. 순암공과 그 선대는 밀양, 영천의 태만공 후손과 왕래가 잦았으므로 원본을 보고 필사했을 것이다. 이 내용이 태만공이 직접 기록한 것이 맞다면 가장 오래된 최초의 시조 기록이 된다.
苔巒公傳記 先世事跡 (태만공이 기록해 전하는 선세 사적) 始祖 諱安邦傑 奏捷于平壤國 有再造之功 授元帥印 封廣陵君 墓在廣州 連三世四君 襲封世祿 恩寵特深 置諸六卿之位 而亂中族譜殘缺 其詳未知
시조(始祖) 휘(諱) 안방걸(安邦傑)은 평양국(平壤國)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어 원수(元帥)의 직을 받고,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3세를 연이어 4명의 군(君)이 세록(世祿)을 이어 받았으며, 은총(恩寵)이 특히 두터웠다. 모든 육경(六卿)의 지위에 있었으나 난중(亂中)에 족보(族譜)가 없어져 상세한 것은 알수 없다.
원문 및 번역 : 태만공전기(苔巒公傳記) 선세 사적 참고. 시조가 평양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사서(史書)에는 보이지 않으나, 사실이라면 역사적으로는 거란(契丹)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데, 이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는 또 시조가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고 했으나, 안정복 선생의 지적대로 광릉(廣陵)은 고려 성종(成宗)이 명명한 광주(廣州) 아닌 한양(漢陽)의 별호이므로 사실로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정호(鄭澔, 1648 - 1736), 參奉安公[應龜]墓碣 (辛丑 1721) ....廣州之安。遠祖曰邦傑。麗初有仗義討叛之功。爵大將軍。封廣州君。.... .....광주안씨의 먼 조상은 방걸(邦傑)이며, 고려 초에 의병을 일으켜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丈巖先生集卷之十六 墓碣, 한국문집총간 권 157, p.385d]
시조의 광주지방 반란 진압은 시조의 공적으로 자주 거론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1500~1600년대의 초기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1700년 이후의 이 기록에서부터 나타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시조가 평양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는 태만공의 기록보다 훨씬 늦게 나타나는 이 기록을 더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고려 태조 초 한 고을 사람이 주의 목사(州牧)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의병을 일으켜 토평하여(倡義討平) 군공(軍功)으로 대장군(大將軍)직을 받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져 이로 인해 광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묘는 광주 갈마치(葛麻峙)에 있다고 하고, 혹은 장단(長湍)의 양안촌(兩眼村)에 재궁(齋宮)이 있었다고 하나 미상(未詳)이다. 갈마치(渴馬峙)는 갈마치(葛麻峙)로도 쓴다.
시조 기록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바, 주요 쟁점들에 대해 정리해 본다.
광주(廣州) 득관(得貫) 유래
관향이 광주(廣州)로 된 것은 시조의 광주군(廣州君) 봉군(封君)에 기인한다고 전해오나, 봉군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신라나 고려 초에는 봉군제도가 없었다고 하며, 사서나 금석문에도 고려 초의 봉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몇몇 성씨들은 광주안씨의 경우와 같이 선조가 고려 초에 봉군받았다고 주장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광주군 봉군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조가 광주에 사셨던 분이기에 광주가 관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안씨(安氏) 득성(得姓) 유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성씨는 신라 때는 박(朴), 석(昔), 김(金)의 왕성(王姓)과 사로육촌(斯盧六村)의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 등 6촌성(六村姓) 및 김수로왕(金首露王)과 왕후 허황옥(許黃玉)의 후손인 김해 김씨(金氏), 김해 허씨(許氏)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말에 안씨(安氏)가 있었다는 명문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시조가 안씨 성을 선대로부터 물려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아래는 신라말에 안씨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금석문이다.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 안처현(安處玄) ...........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888년)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스님과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일 것이다. 스님의 휘(諱)는 석초(釋超)이고, 속성은 안씨(安氏)이니 중원부(中原府)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尼藻)로서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건화(乾化) 2년(912년) 후량(後梁) 태조(太祖) 임신(壬申) 10월 15일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 건덕(乾德) 2년 세재(歲在) 갑자(甲子)에 세수 53세..(입적)
시조가 광주지방의 반란을 평정하여 대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을 두고 고려 개국이나 후삼국 통일의 공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명문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새로이 내 놓아서는 안된다. 관향인 광주의 지명이 고려 개국(918년)은 물론 후삼국 통일(936년)보다 후인 940년에 처음 생겼으므로, 이에 비추어 보면 시조의 광주 지방 반란 진압도 940년 이후일 가능성이 크며, 고려 개국이나 후삼국 통일과는 무관할 수 있다.
또 시조가 평양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고려 개국이나 후삼국통일과는 무관하고, 약간 후대의 거란의 침입과 관련된 전공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