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관음성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주산열도(舟山列島) 경치 좋은 섬, 보타도(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심지어 바다가 없는 티베트에서는 키추(Kichu) 강을 바다로 가정하고 강 유역에 있는 라사(Lhasa, 拉薩)를 보타낙가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기도도량에 얽힌 설화와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남해 보리암, 서해 강화 보문사,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여수 향일암 등이 모두 바다에 면해 있고, 그래서 관음신앙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는지도 모르겠다
남해 금산 보리암
우리 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신라 문무왕 3)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 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普光宮)이라 한 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고 하였다.
그 후 1660년(조선 현종 1)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하여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1901년에는 낙서(樂西),신욱(信昱) 스님이, 1954년에는 동파(東波) 스님이 각각 중수하였고, 1969년에 양소황(梁素滉)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옆에는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인 ‘이씨기단(李氏祈壇)’이 있는데 매년 가을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이름이 바뀐 금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창건하기 전,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성지에서 기도를 올렸다. 계룡산과 지리산에서의 기도가 응답이 없자 마지막으로 보광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절박한 심정이 된 그는 “나의 기원을 들어준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산신령에게 약속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던지 이성계는 훗날 개국해 왕이 되었다.
나라를 새로 열고 갖가지 제도를 정하고 궁을 옮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기도했던 남쪽 끝의 작은 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약속도 생각났다. 그러나 상민들에게 평생 한 두번 만져볼 기회가 올까 말까 한 비단으로 산을 덮는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답답해진 태조는 묘책을 짜내고자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신하들도 뽀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어느 신하(정도전<鄭道傳>이라는 설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해도 그 산을 비단으로 직접 감싸지는 못합니다. 어명을 내리어 이제부터 산 이름을 비단 금(錦), 뫼 산(山)자로 해 금산이라 부르게 함이 옳을 줄 압니다. 뭇 사람들이 그 산을 금산이라 부르면 실제 비단을 두른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묘책이었다. 왕도 매우 흡족했다. 이후 보광산이란 명칭과 함께 금산이 혼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부분 금산이라 쓰여지고 있다.
보리암에는 현재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의 당우가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상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상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보리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이다. ‘빛(光=깨달음)을 널리 펴겠다’는 의미를 가진 보광전은 바로 관음보살의 중생구제 원력을 현실화시킨 당우다. 칠난삼독(七難三毒)에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겠다는 서원이 담긴 건물이다. 보광전 뒤편에 있는 간성각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옆에 있는 산신각도 간소하기는 마찬가지다.
보광전 맞은 편 바위 끝에 있는 해수관음상은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옆에 있는 3층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寶珠)만이 놓여 있다. 높이는 2.3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며 원효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세울 때 건립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보리암의 기도는 하루 네 번, 한번 시작하면 1시간 30분동안 계속된다.
오전 3시 반과 9시, 오후 2시와 6시 반에 시작되는 기도시간에 맞춰 사찰측은 수송차량을 남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운행한다. 장기(長期) 기도를 올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요사채를 기도객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
무지개 같은 석문에 들어서니 거기가 깨우침의 도량
우리 나라 많은 산들은 풍수지리의 형기론이나 전설을 그 이름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대 임금이 산에 이름을 하사한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남해 일출의 대명사며 "깨달음을 얻어 도에 이르는 곳"이란 뜻의 "보리암"이 있는 "금산"은 그 산명을 태조 이성계로부터 하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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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홍문에서 내려다보는 산하가 아름답다. 보는 이에 따라 여인의 눈웃음처럼 유혹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해골에 뻥 뚫린 공허한 구멍으로 보일 수도 있는 한 쌍의 굴은 높이가 7~8m쯤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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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錦山)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으로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창건하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후 이성계가 이 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리며 조선의 개국을 기원하게 되고, 태조의 뜻대로 조선이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 데서 "금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마친 후 자신의 기도를 받아준 영험한 산에도 하사품으로 비단을 내릴 것이니 온 산을 비단으로 덮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 때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성계에게 이르기를 비단이란 것이 처음 두를 때는 아름답고 보기 좋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빛은 퇴색하고 나중에는 보기 흉한 꼴이 되기 쉬우니 세세손손 비단을 두른 듯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붙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신하의 설명을 들은 이성계가 그 뜻을 받아들여 금산이란 산명을 하사하니 그 때부터 이 산을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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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굴 중 또 하나의 석문. 금산의 명치를 드나드는 관문이며 자연이 만들어 낸 보리암 일주문이 쌍홍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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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그 이름을 하사할 정도로 기도발이 잘 선다는 유명한 산, 산과 바다 그리고 기암의 어우러짐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보여주는 한려수도 남해의 금산 좋은 곳에도 어김없이 절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과 자비로운 해수관음보살의 포근한 미소 도량으로 소문난 보리암이 바로 금산의 정맥자리에 들어선 절이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종교가 불교지만 나약한 인간들이 어디 깨달음만 추구하랴. 그러기에 불교는 원을 구하고자 하는 구원의 종교라 해도 크게 반박할 여지는 없을 듯하다. 많은 불자들이 "성불"이라 일컫는 단계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려운 수행에 힘쓰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루고자 하는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부처님이나 보살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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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쏟아질 듯한 기암의 틈새에 보리암은 자리를 잡았다. 이 바위들은 보리암의 신장이며 금산의 혈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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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구원을 들어주는 부처님 가운데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의지했던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으로 어려움에 처한 중생이 언제 어디서나 구원을 요청하면 어떠한 도움인들 다 들어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불자들은 평소는 물론 어려움에 처할 땐 소리를 내어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며 구원을 요청한다. 아기들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소리내어 찾듯 그냥 "관세음보살"하고 불러주기만 해도 구원의 손길을 내 준다는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이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음신앙이 형성, 퍼져 나가기 시작해 6세기말에는 신라, 백제 등 삼국 모두에 뿌리 깊은 신앙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관세음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관음신앙에 대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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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층층이 쌓아올린 극락전이 경이로우면서도 이질감을 준다. 급 비탈에 건물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느라 그 층수가 높아진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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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관음신앙의 3대 성지, 즉 3대 기도도량은 남해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강화도 보문사다.이들 3대 관음도량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두 신비한 창건 설화와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기에 요즘도 뭔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자 진지한 마음으로 매달리듯 찾아가는 귀의처 같은 기도도량이다
보리암에 가는 길은 남해 상주면 상주해수욕장에서 올라가는 길과 앵강고개를 넘어 이동면 복곡저수지를 지나가는 길 두 군데다. 쉽게 가려면 복곡저수지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가면 아무래도 절 찾아가는 맛이 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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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해수욕장과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수욕장이 마치 복주머니 형의 반구를 이루고 있다. 기와지붕의 가지런함이 마음조차 가지런하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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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힘이 들더라도 금산의 진미를 눈과 가슴에 담으려면 상주해수욕장 가는 길에 있는 매표소를 통해 올라가는 게 좋다. 매표소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지만 가파른 편이며 1시간 30분 가까이 올라야 한다.
오르는 길 중간중간 간지럼을 태우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내려다보는 남해바다 풍경은 일품이다. 쭉 뻗으면 닿을 듯한 남해의 청옥색 바다에서 하얀 파도가 연거푸 눈꺼풀을 끔벅대듯 바닷가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옥색 비단에 장식처럼 박힌 작은 섬들과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고기배들이 자연 속에 꾸리는 삶의 한 장면을 매끈하게 그려낸다.
기암괴석의 산자락은 청보리 빛 해안에 그 끝을 담그고 있다. 펄렁이는 앞치마를 두른 듯 흔들리는 산하의 수목이 만들어 내는 짧은 떨림과 잎새의 물결들이 아름다운 율동을 만들고 있다. 이렇듯 기암절벽과 해안의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산은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명산 중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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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 끝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삼층석탑. 지금껏 보았던 어느 석탑보다 마음과 눈길이 끌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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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비단길을 걷는 촉감을 느낄 만큼 주변의 풍광이 좋은 곳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그렇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보리암 직전에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을 통과하게 된다.
금산의 명치끝을 드나드는 관문이며 자연이 만들고 있는 보리암 일주문이다. 옛날엔 천양문이라 불렀으나 신라 초기 원효대사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雙虹門)이라 부른데서 지금껏 그렇게 부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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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어느 곳에서고 "어머니"하고 외치면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기꺼이 내주던 어머니처럼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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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에 따라 여인의 눈웃음처럼 유혹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해골에 뻥 뚫린 공허한 눈구멍으로 보일 수도 있는 한 쌍의 굴은 높이가 7~8m쯤 된다. 올라온 길도 더듬어 볼겸 걸음을 멈추고 굴속에서 뒤돌아보는 산하의 풍경이 아름답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이 안고 있는 바닷물에선 쪽빛인 듯 청보리 빛인 듯 푸르스름한 방광이 일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있는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석가 세존이 금산에서 깨우침을 얻은 후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인도로 가기 위해 무념무상으로 하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하산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세존이 가까이 가자 갑자기 그 커다란 바위에 무지개 같은 구멍이 생기며 가는 길을 열어 주어 이 길을 통해 석가세존이 인도로 갔다는 전설이 간직된 석문이 바로 이 쌍홍문이다.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의 장군암과 사명대사의 행방을 알기 위해 보연, 보배, 보원 세 비구니 스님이 기도한 끝에 경남 거제 앞 바다 연화도에서 사명대사를 친견했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음성굴"을 지나 몇 걸음 더 올라가면 보리암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사실 보리암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경내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리고 기암과 수목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불상이며 법전이니 그냥 눈길 닿는 곳 모두 경내라 하고 싶지만 부득불 삼층석탑과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는 곳부터 자투리 평지가 조금씩 있으니 이곳부터를 경내라고 표현한다.
벼랑 끝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삼층석탑, 지금껏 보았던 어느 석탑보다 마음과 눈길이 끌린다. 이 탑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삼국시대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태비가 월지국에서 우리 나라로 돌아올 때 타고 오던 배의 밑바닥에 깔았던 돌로 신라 초에 탑을 세웠기에 신라삼층석탑이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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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락거리는 이 산죽길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다는 기도 터가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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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은 바다를 건너오며 모진 풍랑에 방향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연의 흐름조차도 무시할 만큼 커다란 도력을 가졌는지 신기하게도 이 탑 앞에서는 나침반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이 탑의 밑변 돌 위에서는 나침반 바늘이 정상으로 움직이지만 윗변 돌 위에서는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기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확인을 해 보진 못했으나 탑석의 일부가 자철광처럼 자성(磁性)을 띤 광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층석탑 바로 앞에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금산의 온갖 형상의 기암과 파스텔 산색을 배경으로 서있는 보살상의 미소에는 어머니의 무한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곡선의 몸매에선 여인의 아름다움보다는 어머니의 강하고도 따사로운 모습이 느껴진다. 언제라도 "어머니!"하고 부르면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내주던 어머니처럼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자비로운 모습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등 이런저런 전각들이 나온다. 종무소 앞에서 아래쪽으로 나 있는 대나무 사이의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 보라. 바스락거리는 산죽을 스치며 내려가다 보면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던 장소에 그의 후손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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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던 자리에 후손인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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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에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의상대사와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방방곡곡 금수강산을 흐르듯 돌아다니다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듯 빛나는 금산의 승경에 이끌려 입산하여 초가집을 짓고 수행을 한 보광사에서 창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인 허황옥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장유선사는 허황옥 공주의 삼촌으로 지리산 칠불사에서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한 장유선사가 금산의 천태만상 변화에 매혹되어 금산에 터를 잡아 인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 보리암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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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의 기암과 푸른 산 빛 그리고 웅크리듯 들어선 전각들이 한 폭의 풍경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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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어느 곳에서 둘러봐도 망막에 맺히는 산하는 명화며 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리암에서 구원도 얻고 어떠한 깨우침도 얻었으리라. 우둔한 필자조차도 금산 보리암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란 것을 알게되니 이 또한 세속의 삶에 아름다움을 느낀 작은 깨우침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쫓기듯 허겁지겁 오르느라 미처 눈길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돌과 수목들이 한마디 하는 듯하다. "여보게 뭘 그리 서두르나. 어차피 인생은 뚜벅뚜벅 걷고있는 걸. 앞서려 서두르지 않으면 인생이 여여(如如)롭네"하고 말이다.
강화 낙가산 보문사
보문사는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
‘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설을 맞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수 십명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겨우내 꽁꽁 얼었던 임진강이 갑자기 녹아 얼음덩이가 외포리 바다로 흘러내렸다. 배는 빙산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 추위와 굶주림은 날로 더하고 성난 파도는 더욱 거세게 뱃전을 때렸다.
죽음의 공포가 배안에 가득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리 모두 보문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고 외쳤다. 사람들은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보문사를 향해 절을 했다. 그러자 홀연히 낯선 스님 한 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얼음덩이를 밀어내고 노를 저었다. 배는 순식간에 보문사 앞바다에 이르렀다.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승객들 중 다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관음성지 보문사는 특이하게도 영험있는 나한기도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9년(640) 4월의 일이다. 어느날 매음리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어부는 그물을 쳤다가 한참만에 걷어 올렸는데 고기는 없고 이상스럽게 생긴 돌들이 그물에 가득하였다. 어부는 그 돌들을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다시 그물을 쳤다.
한참 만에 어부는 그물을 걷어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돌덩이들이 그대로 그물에 걸려 있었다. 놀란 어부는 황급히 그물을 바다에 털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는 꿈을 꾸었다. 해맑은 얼굴에 수려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천축국(天竺國)에서 왔느니라. 나를 포함한 스물 두 명의 성인이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의 그물에 따라 올라왔는데 그대는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무진(無盡) 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법을 전하기 위해서다. 마을 뒤 낙가산에 가보면 우리가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이 인연과 공덕으로 그대의 후손들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어 노스님은 낙가산으로 어부를 인도, 보문사 앞에 있는 석굴을 보여 주었다. 스님은 이곳에 쉬게 해달라고 다시 이르고 바다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어부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웠다. 어제 석상들을 던져 버린 곳에 그물을 쳤다. 조금 후 가슴을 조이며 걷어 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석상 22위(位)가 고스란히 따라 올라 왔다. 어부는 정성스레 석상을 모시고 뭍으로 올라와 물로 깨끗이 씻고 꿈에 본 석굴로 향했다. 굴 앞에 다가서니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굴 안은 마치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좌대가 있었다. 좌대에 석상을 모시고 어부는 거듭거듭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날밤 노스님이 다시 어부의 꿈에 나타났다.
“그대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함부로 쓰지 말며,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 들일 것이니라. 그대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보문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이다.
보문사에는 고려 때 왕실에서 하사한 옥등이 있었다. 이 옥등은 석굴 법당의 안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사미가 실수로 법당 바닥에 떨어뜨렸다. 등은 마치 칼로 자른 듯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기름이 흘러내렸다.
사미승은 울면서 주지 스님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옥등은 절에서 소중히 여기던 것이었으므로 주지 스님도 깜짝 놀라 석굴 법당으로 뛰어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두워야 할 법당안이 환하게 밝았다. 의아하게 여긴 주지 스님은 불리 켜진 등을 만져 보았다. 바로 그 옥등이었다. 깨어졌던 옥동이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등에는 그전보다 더 많은 기름이 채워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문사에 전하는 사지에 의하면 635년(신라 선덕여왕 4)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懷正) 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스님이 이곳에 와서 산세를 살펴보니 인도의 보타낙가산과 비슷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보문’, 산이름을 ‘낙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정 선사는 옛 기록에는 전혀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근대에 작성된 <유점사본말사지>에 “금강산 보덕굴을 고려 의종 10년(1156)에 회정 선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이 회정 선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옛 고려 조정에서는 보문사를 지키는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려 현종 1년(1095)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혜인(惠忍) 스님이 31인의 성인과 함께 낙가산의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고려 조정에 간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친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신성시 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1812년(순조 12)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다진다.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 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그 후 1928년 주지 선주(善周) 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명실 공히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 관음전,종각,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천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암반인 천인대가 있다. 길이 40m, 촉 5m의 위용을 자랑하는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절에서 1km 가량 뒤쪽으로 올라간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 32척, 너비 11척인데, 각각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고해(苦海)에 허덕이는 중생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는 대비보살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외호하는 천혜의 지붕으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의 볼거리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다.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는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보문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와 홍련암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창건주는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625~702)이다. 창건연기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제3권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 조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는 곧바로 낙산의 해변을 찾는다.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해변의 굴 안에 상주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해에 간 스님은 재계한 지 7일만에 좌구(座具)를 물 속에 띄웠더니, 천룡 등 8부 신중이 관음굴 속으로 스님을 인도했다. 굴 속에서 공중을 향해 예배하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므로 받아 가지고 물러 나왔다. 동해 용으로부터 여의주 한 알을 받았지만 관세음보살의 진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7일 동안 지국한 마음으로 염불정진하자 마침내 바다에서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고, 그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말했다. “좌상(座上)의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다.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대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스님은 대가 솟은 곳에 낙산사를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했다.
뒷날 원효스님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를 찾았다. 도중에서 스님은 벼를 베고 있는 흰 옷 입은 여자를 보았다.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벼가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다며 희롱 섞어 대답했다. 계속 걷다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속옷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스님이 먹을 물을 청하자 여인은 피빛 어린 물을 떠주었다. 물을 더럽게 여긴 원효스님은 냇물을 떠 마셨다.
그 때 소나무에 않았던 파랑새가 “제호(醍호=佛性) 스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라고 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짚신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스님이 절에 이르러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신 한 짝이 벗겨져 있는 것을 보고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스님이 성굴(聖窟)에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하니,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도력에 있어서 원효 스님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상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원효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낙산사와 관련된 영험담은 이것말고도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梵日)스님의 정취보살 친견기와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꾸몄던 조신(調信)의 설화다.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간 범일스님이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는 스님 한 분이 말석에 앉아 있다가 말을 붙였다. “저는 신라사람인데, 집은 명주 익령현(지금의 양양)의 덕기방에 있습니다. 스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
847년(문성왕 9)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범일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선(禪)을 전하기에 여염이 없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858년 2월 15일 밤, 중국에서 보았던 스님이 창문으로 와서 말하는 꿈을 꾸었다.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저의 부탁을 승낙하셨거늘 어찌 실천이 그리도 늦습니까?” 스님은 잠을 깬 즉시 익령현으로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마침 낙산 밑의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하였고, 그녀의 8살된 아들이 들려 준 말을 스님께 전한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아이는 돌다리에 이르러 물속을 가리켰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돌부처가 있었다. 왼쪽 귀가 없는 것이 중국에서 만난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정취(正趣)보살이었던 것이다. 간자(簡子)를 만들어 모실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좋다고 나와 3칸의 불전을 지어 모셨다.
정취보살과 관음성지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그 비밀이 있다. 선재동자가 도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 스물 여덟 번째로 만난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스물 아홉 번째로 만나는 분이 정취보살이다. 다른 선지식들은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만났는데 정취보살은 금강산에서 관세음보살이 계신 보타낙가산까지 일부러 와서 선재동자에게 보살행을 가르쳐 주었다. 낙산사를 찾는 이들을 선재동자라고 생각하면 설화의 의미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한 그들에게 정취보살은 새로운 확신과 구도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낙산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소실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뜻 있는 이들의 원력으로 관음성지의 맥을 이어왔다. 고려 초기에는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으나 관음상만은 약간의 화를 입었다. 1468년(조선 세조 14) 세조가 학열(學悅) 스님으로 하여금 중창하게 했다. 1631년(인조 9) 화재로 다시 불타자 종밀(宗密). 학조(學祖) 스님이 중건했고, 1643년(인조 21) 다시 불타자 도원(道源), 대주(大珠) 스님등이 중건했다. 현대에 들어 오현(五鉉), 지홍(知洪) 스님 등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보타전과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 마두(馬頭)관음, 11면관음, 준세(准提)관음, 여의륜(如意輪)관음의 6관음과 관세음보살 32응신상(應身像) 등을 봉안했다.
낙산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이다. 돌과 기와 흙을 함께 이용한 낙산사의 담은 소박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그 밖에도 세조 12년(1466)에 세운 홍예문, 최근에 다시 중수한 의상대, 1972년에 착수해 5년 만에 완공한 해수관음상 등도 관음도량 낙산사를 돋보이게 하는 문화재들이다.
낙산사의 산내 암자인 홍련암(紅蓮庵)은 의상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다.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 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여의주를 바친 용도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홍련암에는 신비로운 창건설화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이적들이 계속 나타났다. 1185년(고려 명종 5) 독실한 불교신자인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 앞에서 분향하고 배례했을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렸다. 관음굴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면 청조가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자량은 크게 감격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바다 벼랑 높고도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 보문은 닫아도 닫히지 않네 명주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나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을 뵈옵게 하옵소서
홍련암의 이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683년(조선 숙종9)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는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 오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이를 목격하고 환희에 찬 석겸(釋謙) 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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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맙소사!’,‘아이구, 하나님!’이라거나 ‘어머나!’를 외친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나무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었다.5일 식목일, 한국 관음도량의 진원지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보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관음보살은 화마도 물리친다는데….
지난해 10월 낙산사를 답사했지만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라는 생각에 막상 글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해의 ‘관해 1번지’는 두 말할 것 없이 낙산사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곳이라 오히려 수학여행 코스에서 빠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고찰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도량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진심으로 부르기만 해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관세음보문품’에 부처께서 이르기를 “선남자여! 많은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음을 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 활활 타는 뜨거운 불길에 갇힌다 해도 타지 않으니, 관세음보살의 위력 때문이다. 큰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관음을 부르면 곧 안전한 땅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큰 일 닥쳤을 때 저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은 이런 관음 영력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한국 3대 관음도량이자, 세계 8대 보타성지다. 그 중 관음신앙의 원조는 아무래도 낙산사다. 의상조사가 세운 가람이기 때문이다. 순조시절의 범해(梵海)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 같이 의상의 행장을 밝히고 있다.“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실려 입당, 화엄의 2대 조사인 종남산 지엄의 방에 들어가 함께 화엄경에 관해 문답하였다.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논함에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해부, 분석하니 가히 청출어람 격이었다.”이렇듯 해동 화엄종의 시조라 하여 그는 의상조사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원효와 가까웠던 도반이다. 뜻을 같이 해 중국유학길에 오르다 원효는 되돌아오고, 의상은 건너갔다.661년에 산둥반도 끝에 있는 무역항 등주로 들어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30대 후반.
오늘날까지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애송되는 그 유명한 법성게도 바로 의상조사의 창작이다. 화엄경의 심오한 진리를 7언시 30구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본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니,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인 당대에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사찰의 영화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런 그가 세운 가람이 바로 낙산사이다. 설악산의 준수한 줄기가 양양쪽 동해로 흘러 내리다가 빚어낸 오봉산 품안에 넉넉하게 자리잡아 산은 작되 옹골지며, 산세가 수려하여 송림이 우거졌고, 동해를 벗하여 가히 해산(海山)의 격조를 말해 준다. 벼랑 때리는 파도를 벗삼아 잠들고, 다시금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는 가람이다. 오봉산은 본디 보타산 낙가산이었으니,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산다는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으로, 낙가산 혹은 낙가로도 불린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 관음 계시로 낙산사 지으니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온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펼칠 마땅한 땅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다. 해변 석굴에 관음 진신이 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100자가 넘는 해식 단애의 깎아지른 바위 틈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드나드는 험한 곳. 그곳에서 관음 진신을 만나길 간구했으나 뜻을 못이루자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마침내 관음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진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건냈으며, 동해 용왕도 여의보주 한 알을 내렸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이렛동안 진심으로 기도하여 마침내 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은 의상에게 굴 위 산꼭대기에 쌍죽이 솟아날 것인즉, 그곳에 절을 짓도록 계시한다.
낙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보타산을 알아야 한다. 관음도량인 보타산은 오대산 문수보살, 아미산 보현보살, 구화산 지장보살 도량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다. 바다 가운에 꽃처럼 피어있는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항주 이남의 영파에서는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은 보타산의 여러 사원 가운데 중심이며, 조음동사원은 우리 낙산사와 주위 경관이나 지형이 너무도 흡사하다. 동해 일출의 관해지인 의상대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동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이 너무 비슷해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의상이 일찍이 중국 보타산을 순례하고 그곳 지형과 거의 흡사한 동해안에서 바다로 돌출한 해식 동굴을 찾아내 그 위에 건물을 올렸던 것이 다양한 연기설화로 전해진 것은 아닐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081%2F2005%2F04%2F11%2FSSI_20050410173145.jpg) |
중국 보타산 조음동사원은 낙산사 홍련암(위)의 다른 모습을 보는 듯 해 의상조사가 이곳에 관음 도량을 세운 까닭을 알 수 있게 한다.낙산사와 더불어 동해 관해의 제1 명소인 의상대(두번째)는 낙산사가 불타 없어지면서 당분간 홀로 바다를 지키게 됐다.화마에 의해 자취?/font> | 그동안 불긍거관음원을 세운 유래를 불조통기(佛祖統記)란 자료를 통해 일본 승려 혜악(慧鍔)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설이 주류였으나, 신라 상인들이 지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1124)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불상을 조성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배가 암초에 걸려 더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 놓았다. 관음원의 승려 조악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아가 기도하매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적었다. 글은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주도량이며, 항해를 위한 기도도량으로 조성된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관음원 앞바다에는 신라초(新羅礁)로 불리는 조그마한 암초까지 남아 있다. 의상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중국유학, 보타산과 비교되는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의 신라인 흔적은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왕성한 교류를 잘 암시한다.
●중국 보타산과 주위경관·지형 흡사
낙산사에는 관음과 얽힌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 역시 낙산의 관음 참배에 나선다. 낙산 근처에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기에 원효가 다가가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흉작이라 줄 수 없다고 답한다. 다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서답을 빨고 있기에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니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주는지라 원효는 냇물을 새로 떠마셨다. 그랬더니 들판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와상아”라고 말하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아래에 방금 전에 보았던 짚신이 한 짝 있음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여인이 관음임을 깨닫는다. 원효가 다시 암굴에 들어가 관음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을 떠나야 했다. 원효의 관음 친견까지 더해 관음도량 낙산사의 격을 한층 높이는 설화다.
관음의 주장처이면서도 정작 낙산사는 늘 편치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 관음상도 부서진다. 오대산에 자주 나다니던 세조는 원통전 석탑을 7층으로 늘리고 중창 불사를 단행한다. 그로부터 20년 뒤(1485)에 낙산사를 찾은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면, 그 때까지는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고, 관음굴에는 파도가 돌을 쳐대는 전각도 있었으며, 그 시대에도 낙산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일출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치렀으니 최소한 600년이 넘는 전통이다.
●여러번 화마에 휩싸였던 낙산사 또 ‘고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절은 다시 무너진다. 광해 11년(1619)에 관음굴을 중건하며, 인조 9년(1631)에 재건하여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 모습은 겸재 정선이 힘찬 필치로 그린 낙산사와 관음굴에 잘 남아 있다. 이후 낙산사는 중건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의상대까지 세워 동해 일출의 적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삼팔선 근역에 위치, 한국전쟁의 격전지가 되면서 다시금 금석물과 원통전 앞 원문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불타버린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려시대 불상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362호)을 모신 원통보전도 전쟁 이후 새로 세운 것이다.
연꽃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관음이니, 낙산사 홍련암이란 검푸른 동해에 떠있는 붉은 연꽃, 즉 관음의 분신이렸다. 홍련암 마루바닥에는 10㎝ 가량의 구멍이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이 한 여름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해일이 몰아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쳐도 홍련암만큼은 버텨 왔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동해 용왕이 여의주를 내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이상하게도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세운 홍련암은 온갖 병화에도 끄떡없다. 그것 또한 관음의 원력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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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자,세계 8대 보타성지로 의상조사의 자취가 서린 동해 제1의 관해처(觀海處) 낙산사가 화마로 그 모습을 잃고 말았다.중국에 불교의 성지인 불긍거관음원과 조음동사원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낙산사가 있어 ?> |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번 산불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낙산사는 본디 애초의 출발지였던 관음굴로 되돌아 간 셈이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해수관음을 상징하던 보타루도 사라졌다. 한가롭게 바다를 굽어보며 차를 마시던 솔숲이 흉물스럽게 그을렸다. 바닷가 홍련암 요사채도 사라지고 관음굴만이 화마를 피했으니 본디 낙산사의 원점으로 회귀한 폭이다. 붉은 장송이 하늘을 가린 아름다운 솔밭길을 올라가면 해수관음상이 있는 신선봉이 나오는데, 그 솔밭도 그만 타버렸다.1977년에 700여t의 돌을 들여 높이 16m로 세운 해수관음만이 남아있어 먼 동해를 굽어보며 서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의 원력을 시험하려고 하심인가.
●집채만한 파도 몰아쳐도 버텨온 홍련암
죽어 자빠진 소나무의 몰골들이 귀신을 부를 것만 같은데 화마가 훑고 갔어도 낙산의 일출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으니, 그 아름다운 관해의 1번지를 모두의 공력으로 다시 세울 일이다. 관해의 명당이어서 만은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규모로나 동해안 사찰의 태두 격인 낙산사의 화마 소식에 실로 안타까운 헌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덧없음을 갈파한 낙산사 조신설화처럼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말 못하는 문화유산도 덧없는 것이런가. 아름다운 원장(垣墻)이 처참하게 불에 그을린 채 동해를 굽어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