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발간된『광주안씨파보(廣州安氏派譜)』는 위위주부공(衛尉注簿公) 안창(安昌)을 중시조로 하는 위위주부공파(衛尉注簿公派)의 파보(派譜)인 것으로 짐작된다.
안방걸(安邦傑) --- 안유(安綏) - 안지(安祉) - 위위주부공(衛尉注簿公) 안창(安昌) - 안사충(安社忠) - 안정(安鼎) - 안처선(安處善) - 안엄경(安淹慶) - 안억수(安億壽) - 안여효(安汝孝) - 모렴당(慕濂堂) 안인(安忍)으로 계통을 보이는 문중으로 위위주부공(衛尉注簿公) 안창(安昌)의 증손자인 안처선(安處善)의 둘째 아들 안완경(安完慶)이 계유정난(1453)에 사사된 후 큰 아들 안엄경(安淹慶)과 그의 아들 안억수(安億壽)가 경상도 밀양의 삽포[鈒浦, 현 경상남도 밀양시(密陽市) 부북면(府北面) 사포리(沙浦里)]로 이주해서 살게 되면서 세거지 지명을 따라 밀양사포파(密陽沙浦派)라고도 한다. 그 후 만포(晩浦) 안유중(安瑜重,1802∼1868) 때 다시 밀양시 단장면 태동리로 이주한 지파(枝派)가 있는데 이들을 태동파(台洞派)라고 한다.
조선 태종때(1401~1418)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안(安)씨. 이름은 엄경(淹慶). 호는 둔옹(遁翁). 광주안씨 삽포파(鈒浦派) 중조(中祖) 안유(安綏)의 6대손이고 청백리 안처선(安處善)의 아들이며, 그의 맏형 안여경(安余慶)은 지평감무(砥平監務), 경상관찰사(慶尙觀擦使),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호조참판(戶曺參判)·공조판서(工曺判書)에 이르렀으며, 1417년 조선 태종때 감찰어사(監擦御使)로 있으면서 어사를 지낸 사람 19명과 총마계(總馬契)를 조직하고 그 서문을 지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께서 총마계첩(總馬契帖)에 시 3수를 실었다. 1452년 단종 계유정란 때 그의 사위 홍달손(洪達孫)이 협찬하니 그를 몰래 불러 꾸짖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호를 둔옹(遁翁)이라 하고 화를 면하였다. 그의 동생 안완경(安完慶)은 충청도 관찰사로 쫓겨났다가 다시 양산에 유배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과 더불어 적소(謫所)에서 죽음(賜死)을 당하였다. 둔옹(遁翁)은 그의 아들 안억수(安憶壽)와 더불어 밀양 삽포(鈒浦=부북면 전사포리 )로 옮겨 살면서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현재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에는 둔옹정(遁翁亭=강학소)이 현존해 오고 있다.
조선 중종때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인(忍). 호는 모렴당(慕濂堂). 광주 안씨 중조 시어사 안유(安綏)의 9대손이고 예안현감 안억수(安億壽)의 손자이고 만호(萬戶) 안여효(安汝孝)의 맏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숙부인 정암(貞庵)공이 안평대군과 더불어 양산 적소(謫所)에서 같이 화를 당한 뒤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또 자손에게도 벼슬길에 오르지 말기를 경계 하였는데 그는 1507년(중종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사림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원대한 앞날을 기대하였으나 조부의 유훈을 받고 부터는 과거에 올라 벼슬하려는 생각을 아주 버렸다. 일찌기 천거를 받아 익찬(翊贊) 벼슬로 불렸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삽포(부북면 사포리)마을에 숨어 살며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 못 가에다 정자를 지어서 모렴당(慕廉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염계(灑溪) 주돈희(周敦희-송나라의 학자) 선생이 연을 좋아하던 뜻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가 조용히 앉아 태극도통서(太極圖通書)를 마음새겨 읽으면서 성리학의 다함없는 묘리를 연구하였는데 못의 물빛이 추녀와 뜰에 비치고 연꽃의 향기가 안석과 문간에 스며들어서 끝없는 풍월과 더불어 말없는 중에 주(周)선생과 합치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족형 태만(苔巒) 안구는 사간(司諫) 벼슬에 있다가 퇴직해 있었고, 복재(僕齋) 김유(金紐)는 점필재 선생의 손자인데 그와 더불어 이웃에 사는 벗이 되어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고을 선현을 일컬을 때 반드시 그의 벗들을 한 시대의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의 묘소는 밀양시 삼랑진읍 율동리에 있다.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유중(瑜重). 자는 국서(國瑞). 호는 만포(晩浦). 일찌기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숲속에서 독서하며 식견과 경륜을 넓히고 포용력을 기르되 출세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고향땅 마을에 서숙(書塾)을 창건하여 생도들을 교수하고 향교에서 강학하여 사림(士林)을 고동하니 한 고을이 스승이라 일컬었다. 우애가 두터워 맏형 성재공(省齋公) 묘 아래에 집을 지어 단연(壇然)이라 편액하여 수학과 수도에 전념하였다 모렴당(慕濂堂)을 중수하여 기문과 상량문을 지었고 문집 3권이 간행되었는데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이 서문을 짓고,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가 발문을 쓰고, 만파(晩坡) 손종태(孫鍾泰)가 행장을 썼다. 1868년(고종 5) 11월 27일 세상을 떠나니 묘는 양산군 구황산(舊黃山) 안산(案山) 독록(獨麓) 갑좌(甲坐) 고을 사람들이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루니 긍재(肯齋) 참판(參判) 이돈우(李敦雨)가 묘갈(墓碣)을 지었다.
위위주부공파(밀양사포파)의 파보는 지파(枝派)인 태동파(台洞派)의 안희원(安禧遠,1846~1919)이 1907년 파보의 서문을 지었다.
조선말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희원(禧遠). 자는 길수(吉수). 호는 시헌(時軒).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언론이 빼어나고 기상이 너그러웠으며 조정에 나가거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중망이 쏠렸다.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선임 되었는데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대사간(大司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부응교(副應敎), 통레원(通禮院) 좌통례(佐通禮)를 역임 하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직하고 귀향 하였더니 1903년(광무 7)에 관찰사 박제흥(朴齊興)의 주천으로 비서원승겸장레원장례(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를 제수하였다. 갑신정변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元世凱)가 왕에게 독대(獨對)를 청하자 분개하여 진언하기를 "원의 공이 비록 중하지만 외국의 사신이고 신 등은 못났어도 시신인데 어찌 외신(外臣)과의 독대를 용납하겠습니까?" 하고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1909년에 능에 친히 제사 드릴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서 집존(執尊)한 공로가 있어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1918년에 병산서원(屛山書院) 원장에 피임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융희처사(隆熙處士)로 자처하며 두문불출 하더니 삽포(부북면 사포리)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全集)을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시헌유고(時軒遺稿) 5권이 있다.
1907년 광주안씨파보(廣州安氏派譜)의 별록(別祿)을 보면 순암 안정복에 의해 주도된 경술보(1790)의 별록에 남겨뒀던 광주안씨 12대 결세 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을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조(始祖) 안방걸(安邦傑)부터 중시조 안유(安綏)사이에 결세 된 12대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안국신(安國信) - 안여중(安礪仲) - 안보평(安輔平) - 안헌사(安憲思) - 안무성(安武成) - 안경립(安慶立) - 안석창(安石昌) - 안필몽(安弼夢) - 안홍미(安弘美) - 안익상(安益相) - 안학성(安學成) - 안충계(安忠季)에 이르는 12대 결세(缺世)의 기록을 전의록(傳疑錄)으로 별록(別祿)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안필몽(安弼夢)의 아들 대의 기록에서 장남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안홍미(安弘美)이고, 차남은 안자미(安子美)인데, 順興安氏始祖 官 保勝別將上護軍[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관직은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고 상호군(上護軍)에 추봉되었다.]이라는 기록도 역시 남겨두고 있다.
순암 안정복의 변무를 받들어, 타 문중에서 인정하고 있던 농서이씨설(중국이씨 기원설)을 반대했지만 순흥안씨가 광주안씨에서 갈려나갔다는 기록 역시 별록이긴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 두고 있다. 이 기록은 경술보(1790)의 별록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다면 순암 안정복에 의해 전의록의 형태로 전한 별록에는 순흥안씨 선계가 광주안씨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말로 생각된다. 경술보를 볼수가 없어서....
경술보(1790) 에서 순암 안정복은 중국이씨기원설과 12대결세전의록을 변무했지만, 광주안씨 안필몽의 둘째 아들 안자미가 순흥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술보 이후 광주안씨 문중에서는 중국안씨기원설은 배척했고, 12대결세전의록은 받아들였고, 최근에 광주안씨에서 순흥안씨가 갈린 것을 부정하는 단계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