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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구로구 항동 33번지 일대(푸른수목원 예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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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법 | 지하철 7호선 천왕역 2번 출구. 철길 차단기 나올 때까지 직진 후 철길 따라 좌회전. 마을버스 구로07, 구로14번 오남중학교 하차 |
기차는 일주일에 한 번 군수품을 싣고 지난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걷는다. 철길 따라 낭만을 찾는다. 궤도 위에서 장난스럽게 한걸음씩 내민다. 아파트 사이를 지나고 숲을 지나 도착하면 또 어느 한적한 시골이다. 군산이나 목포가 아니다. 서울시 구로구 항동이다.
군산에 경암동이 있다. 주택가 사이로 기찻길이 지나는 마을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로 시작하는 동요의 풍경이다. 하루에 한두 번 느린 걸음의 기차가 판잣집 사이를 가른다. 기차가 지나가면 다시 철길 위에 고추를 말리고 빨래를 내다 건다. 출사족들 사이에 잘 알려진 동네다.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찻길이지 싶다. 다가서기 쉽지만은 않다. 그들의 삶이 깃든 까닭이겠지. 점점 늘어나는 빈집 탓이겠지.
그래서일까, 구로구에 있는 항동 기찻길이 반가운 것은.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기찻길, 낡고 녹슨 외선의 철로, 침목 새로 피어나는 잡풀들의 싱그러움이라니. 우리의 삶으로부터 조금은 빗겨난 길이다. 믿기지 않는 거짓말처럼 서울의 기찻길이다.
누구나 기찻길에 대한 향수가 있다. 철로에 귀를 기울여 기차의 다가섬을 가늠하는 추억이 아니더라도 길게 줄 지어 달리는 그것에는 여느 탈것에 비길 수 없는 매력이 넘실댄다. 너른 창으로 지나가는 느린 풍경 때문이겠지. 정해진 철로를 달려야만 하는 운명이 우리네 일상을 닮은 탓이기도 하겠지. 그리고 말로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그 무수한 감성이 곧 기찻길의 로망이겠지.
구로구 오류동에서 부천을 잇는 오류선 기찻길이 특별하고 소중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서울의 삶과 일상 속에서 스크루지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건네진 뜻밖의 인사다. 일상의 환기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지나가는 기차 시간을 피해 걸으며 유년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든다. 하기야 그것을 어찌 착각이라고만 말할까.
천왕역을 나와 걷는다. 너른 대로와 나란한 길. 기차가 지날 틈새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비로소 건널목 차단기가 지표처럼 섰다. 용도를 상실한 차단기는 마치 간이역처럼 존재한다. 일주일에 한번쯤 기지개를 켜듯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차들을 막아서겠지. 이제는 ‘멈춤’이라는 주의 표시도 항동 기찻길로 이끄는 안내판처럼 여겨진다.
건널목의 왼쪽으로 기찻길을 따라 들어선다. 그저 낡은 골목이다. 아파트 단지와 나란한 길이다. 절반쯤은 사람의 길이고 그 곁으로 무성하게 자란 잡초다. 그 가운데로 무심한 듯 기찻길이 지난다. 콘크리트 침목과 자갈과 긴 쇠막대로 엮어진 선로. 그 위로는 거침없이 풀들이 자란다. 침목을 고정하던 자갈들도 잡초가 자랄 길을 열어준다. 그 외길 위를 위태하게 걷는다. 카메라를 어깨에 멘 정처 없는 걸음도 있다. 다정한 연인의 나란한 걸음도 있다. 애완견과 산책 나온 동네 아저씨의 팔자걸음도 있다. 하나같이 느릿한 걸음들이다. 살며시 굽이쳐 흐르는 철로 곁에 새치름하게 피어난 들꽃이다. 비켜설 기차의 행렬이 없으므로 모두 철길의 낭만을 만끽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찻길은 야트막한 산자락의 한가운데를 지난다. 항동 기찻길의 백미다. 철로의 양쪽으로는 얕은 옹벽이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아선다. 어느덧 높게 자란 나무는 금세라도 철로로 달려들 기세다. 그 새로 묵묵히 지나는 기찻길이다. 마치 지평선을 향하듯 곧게 뻗어나간다. 그리고 시선의 끝자락에선 나뭇가지와 철길이 화해하듯 하나로 모아진다. 그 너머에는 또 어떤 풍경이 숨었을까.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다.
군산의 경암동도 갖지 못한 철길의 모습이다. 기차여행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어느 산이거나 숲이다. 때로는 지루하게 반복되던 창가의 경치였건만.
그 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철로 위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우거진 숲을 둘러보며 낯선 서울을 기꺼워한다. 서두를 이유가 무에 있으랴. 마음마저 내려놓자 비로소 옹벽을 따라 푸르게 자란 이끼들이 보인다. 콘크리트의 벽을 물들인 초록의 무늬라니. 그 곁에는 작은 수로다. 비 오는 날에는 물길이 생기겠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양산을 쓴 아주머니가 철로 위를 지난다. 일상이라는 듯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가 철로 옆을 지난다. 이제 기차가 지나지 않으므로 기찻길이 아닌 그저 철길이겠구나. 길 위의 옛 궤도겠구나.
숲 같은 기찻길을 지나자 시야가 넓게 열린다. 철길은 변함없이 곧게 뻗어나간다. 주변으로는 너른 논과 밭이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철로는 전원의 풍경을 보이려 걸음을 안내한 듯하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드니 마음마저 한층 맑아진다. 다시 차근차근 걸음을 낸다. 논두렁에는 해바라기가 삐쭉하다. 햇볕이 노란 꽃잎 위로 기운다. 괜스레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왔던 길도 돌아본다. 정확히 산등성의 중간을 가른 철길이다. 그 위로 웃자란 나무들이 손을 맞잡을 기세다.
길은 다시 두 갈래다. 기찻길을 따라 좀더 걸어도 좋다. 철길의 호젓함을 누리기에는 분명 아직 모자란 걸음이다. 조금 더 내디뎌볼 만하다. 철길에서 내려서 오른쪽의 샛길로 빠질 수도 있다. 항동 저수지로 이어진다. 흙을 밟고 걷는 오솔길이다. 살랑살랑 굽이치며 이어진다. 그에 앞서 원두막 한 채가 유혹한다. 진짜 시골스러움이다. 누구도 쉼을 막아서지는 않는다. 편하게 쉬어가라 한다. 그 정취 또한 놓치기에 아깝다. 신발을 벗고 올라앉는다. 한량처럼 풍경을 살핀다. 저만치 항동 저수지다. 무료 낚시터다. 무료한 시간도 낚을 수 있겠지. 목가적이다. 항동에는 기찻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쁜 서울의 진짜 옛 풍경이다. 그 예스러움이 곧 자연스러움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 또한 변화를 겪게 되리라.
항동 저수지 주변으로는 ‘푸른수목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식물원과 습지원, 잔디광장 등을 만든다. 2011년 완공 계획이다. 그때까지 주변의 논밭은 코스모스나 유채꽃밭으로 꾸며진다. 계절의 화사함을 드러내겠지. 다행히 항동 기찻길은 보존될 듯하다. 다만 또 조금은 달라진다. 레일바이크를 도입해 새로운 체험 시설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다. 우선은 느릿한 걸음으로 아주 가끔씩 찾는 기차를 대신해 기찻길의 안부를 물어도 좋겠지. 이 세상 어디에 철길보다 따스한 길이 있으랴. 기차는 지나가도 기찻길은 그 자리에 말 없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