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왕호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고구려인의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족속인데 나중에 고구려에 부속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다.
당은 668년(고구려 보장왕 27)에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遼東)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遼河) 서쪽인 당의 영주(營州)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즉 그는 당의 전후(戰後) 수습책에 희생되어 요하의 서쪽 영주에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은 일찍부터 지정학적 또는 국방상의 가치 때문에 전국시대 연(燕)의 진개(秦開)가 정복한 이후 역대 한민족 왕조에서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려는 비한족세력(非漢族勢力)을 가로막는 요충지였으며 동방 침략의 근거지였다. 마침 이무렵의 영주 부근에는 고비 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던 투르크족의 돌궐과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거란족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은 이들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통치방법을 써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했다. 당은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에게 송막도호(松漠都護),
손만영(孫萬榮)에게는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주어 무마하면서 통치하고 있었으나, 당시 영주도독
조홰(趙翽)는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이진충과 손만영은 696년 요서지방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예속민들이 굶주리자, 거란의 무리를 이끌고 예속민의 호응을 받아 조홰를 죽인 뒤 당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당은 토벌군을 보내어 그해 10월에 이진충을 죽였으나, 손만영 등은 반항을 계속하여 이듬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이끈 당 군대를 격파했다. 이 난은 돌궐의 힘을 빌려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 천문령 전투). 그리고 요서지역 거란족의 난으로 신성(新城)의 안동도호부가 공격을 받게 되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의 힘을 빌렸던 당이 결국 이 지역에 있어서 거란 및 해족(奚族)까지 포용한 돌궐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 본국과 요동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당으로서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비단 전략상의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노성(盧城)의 벼와 고대 전쟁에서 최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솔빈(率賓)의 말, 위성(位城)의 철(鐵) 등의 특산물 생산지였다. 대조영은 동으로 빠져나와 먼저 이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점령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야욕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대조영의 자립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력으로 적대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에 당 중종(中宗)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長行岌)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의 수도에 가서 입시(入侍)하게 되었으며, 당과의 평화적 외교의 기틀이 잡혔다. 당과의 화해는 대조영으로서도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돌궐과의 불안한 동맹에서 벗어나 왕국의 영속성을 찾고 발전된 당의 문화 유입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당에서는 대조영을 곧 책립(冊立)하려 하였으나, 거란·돌궐의 침구가 잦아 진국과의 교통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당 예종 2) 최흔(崔忻)이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의 뤼순[旅順]에 상륙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곧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