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창 3·1운동을 이끌었던 이재락(李在洛)은 울산을 대표하는 부자였다. 문중 사람들은 이재락 재산이 3000~4000석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천석꾼으로 울산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던 이재락은 석계에 있는 ‘학성 이씨 근재공 저택’에 살면서 남창 3·1 운동을 주도했고 또 심산 김창숙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많이 내어 놓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부자들은 처신이 어려웠다.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받으면 그날로 집안이 망했기 때문에 총독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그들 편에 서면 매국노가 되어 주위 사람들의 멸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부자들은 주위 눈치를 보면서도 총독부의 지시를 묵시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재락은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이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했다.
이재락은 1886년 8월26일 생으로 학성 이씨 시조 이예(李藝)선생의 17세손으로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울산을 대표하는 유림으로 서울에서 열린 고종 황제 인산에 참석했다가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울산으로 온 그는 신밤리에 사는 이수일(李樹一)에게 고종황제의 인산과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이수일은 마을로 돌아가 그로부터 들은 얘기를 이씨 문중에 보고했고 이씨 문중 어른 8명이 봉기에 서명함으로써 남창 운동을 학성 이씨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당시 학성 이씨는 웅촌을 대표하는 문중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이 중에서도 이재락은 대표적인 문중 인물이었다.
웅촌 사람들은 이재락 집을 ‘율동댁’이라고 불렀다. 조선 말기 울산을 대표한 유림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울산에 와 군자금을 마련할 때 누구보다 앞장서 군자금을 내어 놓았고 스스로 군자금 모금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인물이 수려하고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에 걸맞는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인심 또한 후해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가 움직일 때면 고을 전체가 훤했다는 얘기가 유림들 사이에 전해 오고 있다.
그의 논밭은 그의 집에서 가까운 석천 마을에 주로 있었지만 남창과 서창 일대에도 적지 않았다. 이 외에도 온양읍 내광리와 청량면 도솔암, 심지어는 신정동에도 산이 많았다. 지금도 신정동 은월봉 일대에는 문중 산소가 있다.
이재락의 조카인 이동호(李東浩·70)씨는 “우리들이 어릴 때만 해도 묘사를 지낼 때면 곳곳에 재실이 많아 오랜 시간 울산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고 회상한다.
경제적으로 이 집안을 가장 부유하게 만들었던 사람은 이예 선생의 11세손인 의창(宜昌)이었다. 이 집안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집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풍수지리가들은 의창이 처음 집을 지어 들어갔던 ‘학성 이씨 근재공 저택’을 재물이 늘어날 명당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풍수지리가들은 이 집이 앉은 자리가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집 양편으로 적당한 높이의 산이 둘러싸고 있는 ‘소쿠리형’이 되어 재산이 증식될 수 있는 지형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의창은 풍수가의 말에 따라 당초 자신의 보리밭이었던 이곳에 집을 앉혔는데 이후로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울산의 지방 문화재가 되어 있는 석계의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은 의창이 건립했고 장찬(璋燦)이 중수했다. 나중에는 이재락이 살면서 살림채와 사랑채를 수리했다.
진사였던 장찬은 중앙의 세도가였던 김병기, 김병학 등 안동 김씨들과 필담을 나누었을 정도로 이들과 친교가 있었는데 그때 김씨 문중에서 장찬에게 보낸 서책을 아직도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집안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둘이나 되고 진사도 여러 명 나왔다. 대과 급제는 이예 선생의 12세 손 근오(覲吾)와 16세 손 석진(錫瑨)이 했다. 둘째 근오가 급제했던 때가 정조 13년(1789)으로 이때 다산 정약용도 함께 급제했다. 일반 문중에서는 한 명도 배출하기 힘든 대과 급제를 2명이나 했다는 것은 이 문중이 오랫동안 학문에 힘썼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급제했을 때 임금으로부터 받은 어사화는 오랫동안 석천 이씨 고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지금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동호씨가 갖고 있다.
이재락 집안이 명가였다는 것은 그의 사돈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첫째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를 모두 대학 설립자 집안에서 얻었다. 이재락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동립은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심산 김창숙 집안에 장가를 들었고 둘째 동선은 대구대학을 설립한 경주 최부자 집으로 장가를 갔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림이었던 심산의 딸 덕기(悳基)가 울산으로 시집 온 것은 당시만 해도 울산이 영남의 대표적인 유림사회였기 때문이다.
울산은 60년대 이후 산업도시가 되면서 유학 분위기가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많았다.
울산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농업이 울산 경제를 지켜 주는 원동력으로 영남의 주요 곡창지대였다. 따라서 유림사회에서 보면 경북의 안동과 경남의 진주만큼 뿌리가 깊지 못했지만 유림들이 울산 사회를 이끌었다.
이 같은 사실은 해방 후 심산을 중심으로 유림의 대표들이 성균관 대학을 건립했을 때 울산 유림들이 대거 참여해 기금을 낸 것에서 알 수 있다.
울산은 해방 후에도 소위 양반으로 불리는 뿌리 깊은 성씨(姓氏)들이 많았다. 박윤웅을 시조로 모시는 울산 박씨, 이예를 시조로 모시는 학성 이씨, 임란 때 공신을 낸 광주 안씨, 파평 윤씨, 김해 배씨, 제주 고씨, 아산 장씨, 밀양 박씨, 고령 김씨, 평해 황씨가 이들로 이들 씨족들은 대대로 향촌을 이끌어 왔고 임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배출했다. 또 전후에는 고을을 되살리는데 앞장섰다. 울산 향교를 반구동에서 교동으로 옮기고 부패한 관학을 대신해 사학을 세운 이들도 이들 가문이었다.
심산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재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심산과 이재락은 개인적으로는 사돈 간이었지만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때문에 심산은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석천에 있었던 이재락 집을 여러번 방문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차 사고가 났을 때도 석천으로 왔고 이재락이 부산 좌천동으로 이사를 갔을 때도 심산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산으로 가 그를 만났다.
이재락이 처음 군자금을 낸 것은 1925년 심산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해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모금 운동에 나섰을 때다. 이때 그는 200원을 1차로 내었고 이후 800원을 더 내는 등 모금에 협조했다.
그러나 당초 20만원을 목표로 했던 군자금이 미달되자 1926년 3월 이재락은 범어사에서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소액의 돈을 내어 놓은 부호들에게 더 많은 돈을 내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밀의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다음해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 받았다.
독립운동은 이재락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아들 동립도 아버지 뜻을 받들어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동립이 군자금 모금에 나섰던 것은 아버지가 왜경에 체포되기 전인 1926년 1월이었다. 이 때 심산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허리를 다쳐 입암에 있는 손후익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심산이 사위 동립과 정수기, 이종락에게 연락해 군자금을 모을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2월에는 입암에서 이재락 집으로 몸을 피했으나 왜경의 추적을 받아 새벽에 딸 덕기(悳基)만 만난 후 다시 피신했다.
심산이 다친 몸을 이끌고 찾아 왔던 입암의 손후익 집은 손질이 잘 되어 지금도 입암에 있다. 손후익은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에서 비서로 일했다.
이재락 집안의 제일 큰 자랑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혼을 지켰다는데 있다. 이재락 집안이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하는 것은 가족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일제 말기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문중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만 보아도 이 집안이 얼마나 뼈대가 있었던 집안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집안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이재락의 손자 대에 들어오면서다. 동립은 유환과 성환 등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성균관대를 졸업한 유환이 부산에서 부산과 동래중 교사로 있다가 나중에 사업을 벌였는데 이 사업이 잘되지 않아 가산이 많이 줄어들었다. 유환은 현재 서울에서 어렵게 살고 있고 성환은 20여 년 전 타계했다.
많은 재산을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썼던 이재락은 1960년 9월25일 75세로 타계했는데 그에 대한 표창은 이 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