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현안, 특히 경제 및 정치와 관련한 사회 문제들에 관하여 천주교 교종 프란치스코가 그동안 발언한 내용들을 언론인 미켈레 찬추기가 편집하여 펴낸 [돈과 권력(Potere e Denaro)](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펴냄)을 일곱 차례에 걸쳐 요약합니다.
빈부 격차와 환경의 파괴 등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민감한 현안들에 대하여는 그동안 천주교 교종들이 <교종 회칙>이라는 문서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으며,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점에 있어서 훨씬 강도높은 내용의 발언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책 [돈과 권력(Potere e Denaro)]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제안들을 정리한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기업가와 노동자
현대의 예언자들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은 모든 경제 정책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종종 그저 정치적 담론을 그럴듯하게 꾸미려고 덧붙이는 부록으로만 취급됩니다. 윤리 문제를 제기하는 것, 세계 연대를 촉구하는 것, 재화의 분배를 거론하는 것, 노동 보호와 힘없는 이들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 정의의 투신을 말하는 것,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안이한 무관심은 우리의 삶과 말에 담긴 모든 의미를 공허하게 만듭니다.
악과 남용을 고발하고 선과 배려를 가리키며, 권위에 맞서 악에서 파생되는 것들에 저항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마피아에 맞서 싸우는 기자들, 노숙자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거리의 신부들, 주저없이 진리를 말하는 학자들, 이민이나 장애인들과 일하는 단체들,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어머니들과 같이 현대에도 예언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큰 다행입니다.
예언자는 결코 편안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과 권력 사이에는 해소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불의를 고발하고 치부를 드러내며 문제점을 밝히기 마련입니다. 사회가 권력을 통제하고 남용을 규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예언자들이 비판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권세가들이나 여론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희망을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외칩니다.
권세가들은 악인은 아니어도 모든 차원에서 직권을 남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진 자가 특권을 누리려고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악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직권남용이 자행될 때, 가난한 이들과 더 힘없는 이들을 해치는 방향으로 권력이 이용될 때 누군가는 권력에 맞서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의 파라오에 해당하는 현대의 권세가들로는 경제 금융계의 큰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추상적인 권력, 곧 얼굴 없는 금융 자산 권력이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은 그저 경영역할만 위임받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들 현대의 파라오들은 거대 슬롯머신에서 석유로, 광산에서 무기 제조나 마약으로 쉽게 흘러듭니다. 생산품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저 돈이 돈을 그것도 더 많은 돈을 낳는다는 사실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자금, 자본, 은행, 다국적기업은 오직 한 가지 자신들의 불로소득만 불릴 줄 아는 사람들 계급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 금융 투기꾼들은 합법적이든 아니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즉각 현직 정치인과 통화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오늘날 권력의 추상적인 차원, 그 비인격적인 차원은 경악할 정도입니다.
눈물 흘리는 기업가들
경제활동의 주축으로 부각되는 이들은 바로 기업가들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창의성, 회사를 향한 사랑, 그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만들어낸 성과물에 대한 열정과 자긍심, 이 모든 것이 기업가를 좋은 경제의 주역이 되게 해 줍니다. 좋은 기업가들이 없으면, 창조 활동에 참여하는 그들의 역량이 없으면, 건실한 경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가가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자질은 노동자들의 능력과 미덕을 아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각자 노력에 따라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보수가 더 많을수록 일도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노동자들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노동의 품위는 돈이 아니라 개인의 존엄과 영예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업가는 먼저 한 사람의 노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업가에게 노동의 품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는 결코 좋은 기업가가 되지 못합니다. 기업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뛰어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사가 위기에 놓일 때 간단히 인력감축으로 해결하려는 자는 좋은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상인, 투기꾼,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오늘 자기 사람을 내다 팔면 내일은 자신의 존엄도 팔아치울 것입니다.
기업가의 성장주기
기업가를 이끄는 것은 이익이나 사치나 안락한 삶보다는 창의성이 더 중요합니다. 이들은 안정된 자리를 추구하기보다 독창적인 무언가를 발명하며 살아갈 돈을 벌고 새로운 부를 창출합니다. 그러나 회사가 성장하고 직원들이 많아지며 수익이 증가하게 되면, 기업가는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권력을 갖게 되고, 때로는 그권력을 남용하기도 합니다. 무(無)에서 기업을 성장시킨 기업가는 머지않아 권력가가 됩니다. 그는 회사 성장에 대한 열정으로 기업가 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의 행동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투기꾼은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 또는 권력의 일부나마 장악해보겠다는 일념으로만 사업을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일확천금의 유혹에 굴복하여 기업가가 아닌 투기꾼이 되는 선택을 합니다.
시장은 특권을 벌어들일 수 있는 좋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기업가가 곧바로 금융 투기꾼으로 변해가지 않는다면, 그의 권력은 절제 있고 온건한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기업가는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장인(匠人)으로, 노동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기업가가 회사에 머물며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땀 흘리고 수고할 때, 그가 어떤 권력을 소유하더라도 그 권력은 선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장을 멀리하고, 전 세계를 돌며 요트 위에서 불로소득으로 살고, 노동과 땀의 현장을 멀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업가는 ‘노골적인’권력을 지닌 냉혈한으로 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투기꾼과 장사꾼
많은 기업가들이 점점 투기꾼으로 변해가는 현상은 세계화 경제의 심각한 병폐입니다. 투기꾼은 자기 회사도 자기 노동자들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언제나 더 많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간주합니다. 그래서 직원을 해고하는 일, 회사의 문을 닫는 일, 유령 회사를 차리는 일, 예고된 죽음을 조장하는 악덕 회사를 차리는 일,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투기꾼은 이윤만을 목적으로 사람들과 수단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며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투기꾼들의 손에 넘어갈 때는 모든 것이 뒤바뀝니다. 투기꾼 때문에 경제는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노동자들의 얼굴도 잃어버립니다. 투기꾼은 결정을 내릴 때 사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해고 숫자 이면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구체적인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면 무자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역설적으로, 경제 주역은 모두 정직한 일꾼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라는 가설에서 국가가 관료주의와 단속을 강화할 때, 정치체제가 노동을 신뢰하고 노동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노동을 이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새로운 단속 제도를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은 부정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은 계속 억울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와 법률이 오히려 정직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이익 가운데에서도 청렴하고 덕망있는 기업가들은 계속 정진합니다. 이탈리아 대통령을 지낸 경제학자 루이지 에이나우디(Luigi Einaudi)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천수만 명의 개인들은 우리가 아무리 그들을 괴롭히고 방해하고 좌절에 빠뜨리려고 온갖 궁리를 해도 꾸준히 노동과 생산과 절약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갈망만이 아니라, 바로 타고난 소명이 그들을 이끄는 힘입니다. … 그러한 기업가들은 다른 데에 투자하면 더 확실하고 손쉽게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도 자기 회사에 자신의 모든 자본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공동선을 위한 노동조합의 역할
오늘날 특히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 공동선을 위한 근본 역할을 전개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시대적 도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첫 번째는 노동조합의 본질, 곧 노동조합 본연의 소명에 관한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고, 가장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짓밟는 권세가들과 투기꾼들의 가면을 벗기고, 이민들과 가장 작은 이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옹호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노동조합은 이런 소명들을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가들과 너무도 비슷해져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판하거나 규탄하지 않습니다. 함께 싸운 아군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결국 정치인이나 정당과 흡사해져, 그들의 행동과 방식을 모방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쇄신입니다.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노동을 지켜야 하지만, 그 밖에 있는 이들의 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동조합이 울타리 안에 있거나 있었던 이들만 보호한다면, 사회 혁신의 본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소명에는, 아직 노동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즉, 실업자, 노동에서 배척당하는 이들, 힘겹게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 민주주의 울타리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권리도 수호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특히 금융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사회적 죄악은 노동조합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와 기업의 사회적 본성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기업, 삶, 유대, 합의의 사회적 본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삶의 변방에서, 버림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민들 한가운데에서 청년 소외의 자리들에서, 울타리 밖에 있는 이러한 자리에서 더 싸워야 합니다.
노동조합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상당수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마음에 부정부패가 스며든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임무도 사명이 아니라 재산을 증식시키는 방편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조합은 변방에서 지내며 한가운데에서 활동하는 것을 자신의 새로운 활동전략,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좋은 노동조합 없는 좋은 사회는 없습니다. 삶의 변방에서 날마다 쇄신되지 않는다면, 경제가 내버린 돌을 모퉁잇돌로 바꾸지 않는다면, 좋은 노동조합이라 할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sindacato)은 그리스어로 ‘정의’를 뜻하는 diké와 ‘함께’라는 뜻의 syn의 합성어로, 어원상 ‘함께하는 정의’라는 뜻입니다. 배척받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한, ‘함께하는 정의’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