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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연수기
2004. 9. 3. 이상훈(여수YMCA 사무총장)
하루하루 그냥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체감을 하기란 그리 많은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땅, 그 중 한 가운데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금강산을 내 발과 마음으로 올라선다는 것, 이것이 어떻게 꿈엔들 엄두라도 낼 일이었는가. 불과 몇 년 전만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금강산에 다녀온 지 1주일이 지났지만 별로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하긴 3일간에 걸쳐 본 금강산은 그냥 산으로서 금강산이었지 별다른 사람들, 북한동포들이 사는 사회는 아니었다. 지도원, 안내원, 상점 점원 몇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도 그냥 관광지의 기념품 정도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것도 실감을 마비시킨 한 이유였으리라.
통일은 그렇게 감칠맛만 내면서 아직 저만치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 여행이었다는 것으로 이 기록의 처음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미 다녀온 사람이 70만 명을 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볼 수 있는 땅, 금강산에 대한 기록이 특별하지 않거니와 그래도 아직 마음뿐 갔다 오지 못한 분들에게 작은 간접경험으로 남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담담히 적을 것이기 때문에 맥 빠진 글이기도 하다.
한국YMCA 평화와 생명의 운동으로 통일을 열어가기 위해...
매년 여름 한국YMCA 간사들은 하나로 모여 연수를 한다. 3년여 전부터 이 연수를 금강산기행으로 하자는 의견이 분출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배편으로 가는 여행상품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육로관광길이 열리면서 118명의 간사, 실무자 가족들이 시간과 돈을 내면서 드디어 의견이 계획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지난 8월23일, 전국의 참가자들이 속초청소년수련원에 모였다. ‘관광’을 거부 또는 넘어서는 ‘평화를 여는 사도들의 행진’이라 의미부여를 했으므로 하루저녁을 ‘평화와 통일’을 고민하는 워크샵을 갖고 다음 날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관광을 평화통일로 포장하려해본 워크샵의 분위기를 만들기는 쉽지가 않았다. 때마침 열린 올림픽 탁구 결승전에 마음을 뺏긴 참가자들의 단합된 힘에 의해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올림픽 공동응원으로 흘렀다. 하긴 적수가 고구려 역사문제로 밉보이고 있는 중국 선수였다.
아무튼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정세에서 우리나라의 통일운동을 어떻게 벌여가야 할 것인지, 그 안에서 YMCA의 역할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은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그래도 제법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염원은 하나이지만 그 방식이나 의미부여는 저마다 다른 것이 우리의 통일문제이기도 하다. 유홍준 선생이 그랬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통일이 그러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
동포이면서 가장 낯선 얼굴들을 만나다.
다음날 속초와 고성경찰서의 도움으로 참가자들의 차량 30여대가 줄을 이어 차량행진으로 금강산콘도까지 가서 출입증(여권)을 받고 환전카드에 여비를 충전한 후, 다시 시내버스로 통일전망대까지 가서 한쪽에 별도로 마련해놓은 ‘동해출입국 사무소’에서 통관절차를 밟았다. 그야말로 외국에 나가는 절차와 똑 같았다. 아니 더했다. 카메라가 고성능인지 검사하고, 짐을 투시하고, 영어문구가 박힌 옷이나 가방은 안 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새 것을 구하느라 분주하고, 휴대폰 관광사 측에 맡기느라 우왕좌왕하는 분위기가 그나마 우리가 가는 곳의 특이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통관을 거쳐 나오니 20여대의 버스가 늘어서 있다. ‘금강산관광’이라는 로고가 박힌 버스는 일률적으로 33인승으로 차 마다 현대아산 직원명패를 단 안내원(조장이라 했다)이 한사람씩 배치되어 있다. 남자인 차도, 여자인 차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20살을 갓 넘긴 젊은 사람들이었다. 버스기사는 대체로 중국연변 동포들이란다. 매우 반갑게 친절을 보이는 것이 몸에 배인 듯했다.
버스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한 줄로 늘어서서 드디어 출발한 것이 오후4시20분! 몇 분 후 우리 군인들이 서 있는 비무장지대를 지나자 조장아가씨가 ‘저것이 군사분계선 표시입니다!’라고 외쳤다. 깜짝 놀라 창밖을 보았지만 보이지를 않았다. 설명을 더 듣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망하게도 조그만 나무표지판에 조잡한 글씨로 뭔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허망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군인들도, 웃통을 벗어 제치고 작업을 하거나 쉬고 있는 군인들도 최전방의 긴장감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대개의 군인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장난기 섞인 몸짓으로 반가워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분계선을 막 지나자 갑작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다가선 군인들이 있었다. 바로 인민군 복장을 한 그들이었다. 길가에 삼삼오오 늘어선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있었고 관광객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눈치였다.
길은 이제 막 포장되어있었고 북측 군인들이 길 가로 연두색 페인트칠이 된 철망을 설치하는 모습이 죽 이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비포장도로였는데 현대가 포장을 하였고 철망은 북측 사람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강산관광도로 전용임을 표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길 저편으로는 철로 공사가 간간이 진행되고 있는데 아마 내년쯤에는 개통일 될 남북한 경협철로이다. 도로든 철로든 모든 자재는 남측이 대고 노동력은 북측이 대는 합작품이라는 것은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속옷차림으로 곡괭이나 삽질을 하고 있는 인민군들은 얼핏 봐도 15~6세부터 많아야 20세 전후로 보이는 앳띤 얼굴들이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둑길 위에는 몇 백 미터 간격으로 정복을 한 군인들이 한명씩 도열해있다. 혹시 우리를 환영하는 의전군인인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버스 안에서 밖을 촬영하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한 손에 빨간 기를 들고 있다. 만일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이 발견되면 이 기를 들게 되고, 그러면 모든 일행이 멈춰서야 한다. 촬영한 사람을 색출해내 카메라를 압수하고 벌금을 매긴 다음에야 다시 다음 일정이 진행이 되도록 되어있단다.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통문을 지나야한다. 먼저 다가온 문이 ‘금강통문’! 우리 측 군인들이 검문하는 곳이다. 이 곳은 형식적으로 군인들이 차안을 밖에서 들여다보고 통과시켜주는 의례적인 곳이다. 이 곳을 지나 멀리 금강산 1만2천봉 중 제1봉우리라는 구선봉이 보인다는 안내조장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바로 ‘구서통문’이 나온다. 북한 측이 검문하는 곳이다.
버스가 두 줄로 맞춰 세우자 맨 앞 버스부터 인민군 장교 두 명씩 짝을 이뤄 차안으로 들어와 검문을 한다. 장교이기 때문에 예를 갖춰 씹던 껌을 버리고 자세를 바로 해달라는 안내조장의 사전 부탁이 분위기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무뚝뚝하게 뒷좌석까지 둘러본 그들은 기사에게 ‘짐칸 봅시다.’하더니 내려서 짐칸을 들여다보았다. 짐칸을 조사하는 도중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우리 버스의 안내조장 아가씨, 이제 스물세 살로 귀엽고 야무지게 생긴 아가씨인데 얼굴을 붉히더니 검문장교 중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잘 걸고 언젠가는 윙크도 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풀리면서 이 아가씨의 깜짝 고백에 다들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 아가씨가 창 밖 저쪽을 가리키면서 ‘저 아저씨예요’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가 이쪽을 쳐다보는가싶더니 윙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슬쩍 하는 윙크가 아니라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힘을 준 윙크였다. 순간적으로 버스 안은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그로부터 버스가 출발한 뒤에도 한 동안 안내조장 아가씨에 대한 부러움과 놀림이 계속되었다. 이 아가씨는 “서로 좋아하면 뭐해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통일이나 빨리 되면 모를까...” 하며 옅은 한숨을 쉬는 것이다. 관광버스 안내양의 이벤트가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목하 스물세 살, 남한의 건강하고 성실한 처녀 김은혜 씨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안내아가씨와 인민군 장교의 사랑이 정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통일 아닌가하는 생각도 뒤따랐다. 무뚝뚝하게 시선을 외면하는 인민군들, 그리고 이 장교의 한 아가씨에 대한 관심의 표현.... 오늘의 남북이 마주보고 있는 현주소를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너무 비약되는 것 같아 서둘러 접고 창 밖 경치로 눈을 돌렸다.
북녘 땅!
창밖으로 보이는 북녘 땅은 어찌 보면 평범한 우리의 시골 풍경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취가 사뭇 다른 낯선 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별로 나무가 없어 황량해 보이는 산과 들, 그 밑과 옆으로 해금강중학교, 정미공장 등 간간이 건물들이 보이고 시골길 위로는 소달구지와 자전거가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유일한 강으로 ‘남강’이라 불리는 하천이 있는데 둑 옆으로 방목하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하천 곳곳에서는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 낚시하는 사람들 몇이 보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손을 흔들어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멀리 전쟁 전 남한의 우체국이었다는 ‘봉화체신문서국’ 건물이 낡은 채로 보존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금천리 마을로 금천중학교와 소학교도 그 옆으로 서 있었다. 한 건물에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큼직하게 붙어있었는데 ‘금강산 청년역’으로 예전에는 ‘외금강역’이라 했는데 이 곳 청년들이 보수공사를 했다 해서 이름을 그렇게 바꿨단다. 주택은 낡은 빈민가의 그것들을 연상할 정도였는데 다만 집 모양들이 똑 같아 그래도 질서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금강산 샘물공장’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제법 큰 건물이 그 중 눈에 띄었는데 맑은 금강산 물을 다시 6차례나 정수해서 최고로 맑은 물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한다. 산 한쪽을 까내 눈썰매장을 만들었는데 올해 눈이 별로 오지 않아 아직 개장을 못했다고 하는 것도 보였다.
이런 저런 경치를 보면서 몇 분인가를 달렸는데 드디어 금강산의 웅장한 자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 머리처럼 생긴 ‘매바위’는 이 곳 온정리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 바위로 여기면서 소원을 비는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수령 외에 미신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배운 바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 헛것 배웠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야했다.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은 남한 측 교과서에 1,638미터로 나온단다. 그런데 북측은 그 보다 1미터가 더 높다고 우기면서 남한 측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단다. 그만큼 자기들의 것에 대해 자존심이 높은 기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온정리에 들어서자 비로소 금강산의 줄기 줄기가 가깝게 눈에 들어온다. 그 중 큰 바위에 역시 그만큼이나 큰 글씨가 새겨져있어 들여다보니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는 하얀 글씨이다. 먼 곳에서도 한 눈에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크게 파놓은 것인지 짐작이 갔다. 김정일 위원장의 회갑 기념으로 새겨놓았단다. 그 뒤로는 햇빛이 수정처럼 영롱하게 비친다하여 이름 붙여진 ‘수정봉’이 700여미터 자태를 드리우고 있다.
금강산? 현대타운?
남한 명으로는 장전항, 북한 명으로는 고성항에 들어섰다. 예전 해로 관광이라면 배가 들어서는 항구, 바로 그곳이다. 버스는 항구 맨 끝 쪽에 지어져있는 세관서 앞에 섰다. 세관서 앞에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간판이 서 있다. 북측 세관들은 군복차림인데 여자들도 있었다. 세관절차나 규정이 까다롭고,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수백 명 전체가 해결될 때까지 묶여있어야 하니 주의하라는 사전교육을 너무 강하게 받아서인지 생각보다 느슨한 것 같았다. 아마 이들도 매일처럼 수백 명의 관광객들을 조사하다보면 이력이 날 만도 하겠지...
절차를 거치고 밖으로 나오니 현대 직원들이 줄을 서서 환영인사를 했다. 스피커에서는 북한노래 ‘반갑습니다’ 등과 한국 유행가들이 번갈아가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최초의 금강산관광호텔로 수상에 지어진 ‘해금강호텔’이 서 있고 그 맞은편으로 최근에 지었다는 ‘금강산 팬션’ 20여 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금강빌리지’와 역시 최근 준공된 금강산호텔 등이 숙소의 전부이다. 우리가 묵을 금강산 팬션은 한 동이 약20여 평 되는데, 남한의 관광지 숙박업소와 거의 유사한 시설로 위성설치 덕분에 모든 TV방송이 다 나오고 있었다.
금강산에 온 모든 관광객들은 위의 몇 숙박시설을 이용하며 이제 관광은 온정각이라는 말하자면 센터에 모여서 시작한다. 숙박지에서 수시로 셔틀버스가 운행되어 약 5분정도 가면 온정각이 있다. 이 곳에는 면세품 쇼핑센터, 식당, 문화관, 청소년야영캠프 텐트장 등이 있고 심지어 ‘패밀리마트’까지 있어 국내 마트와 똑 같은 상품을 팔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온천을 즐기며, 문화관에서 매일 1회 열리는 평양모란봉교예단 감상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해진 모든 관광코스(구룡연, 만물상, 해금강, 삼일포 등)에 가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버스가 출발한다.
관광상품은 당일코스, 1박2일 코스, 2박3일 코스로 정형화되어있어 사전에 관광객은 이중 상품을 선택해 계약을 하고 오게 되며 여행사는 코스별로 관광객을 인솔하고 안내한다. 2박3일 코스를 예로 들면 첫날 오후 4시경 통일전망대 출발, 오후6시에 도착하여 식사와 온천욕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튿날은 오전에 정해진 관광코스 중 한 곳을 등반하고 점심 후 온천이나 휴식 다음에 오후4시30분부터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감상을 한다. 다음 날 오전에 다시 정해진 관광코스 중 또 한 곳을 등반하고 점심을 먹고 출국수속을 한 후 이 곳을 떠난다. 그래서 남한 측 통일전망대에 다다르면 오후 3시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 금강산 관광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북한은 다음 몇 가지로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1)금강산 그 자체 중 일부(그야말로 북한체제가 아닌 우리의 산이며 자연이다) 2)경비를 하는 북한군인들과의 표면적인 스침 정도의 만남(이들과 야밤에 이야기를 해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구경거리이다) 3)등산로 곳곳에 배치된 남자지도원과 설명을 해주는 여성안내원(이들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구체적인 북측 동포이다) 4)북한음식과 토산품들(그것도 현대 측이 직영하는 뷔페를 선택하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 토산품 역시 종류가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은 현대가 가져간 기념품들이다. 현대가 토속성을 보완하기 위해 온정리 주민 몇 사람이 직접 나와 만들어 파는 말린 생선구이, 전복, 녹두전 등이 그나마 정겨운 것들이다.) 5)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 감상(관람비 25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은 감동적이고 수준 높은 공연이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나머지는 모두 현대아산의 상품이다. 속리산이나 해운대 등 우리 관광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라는 이야기가 이 사람 저 사람 입에서 흘러나왔다. 밤하늘에 고즈넉이 달이 떠올랐다. 그것도 남쪽에서 본 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첫날 저녁
긴 줄을 서서 현대아산에서 직영하는 뷔페로 북에서의 첫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이므로 당일코스 관광객들은 돌아갔을 것이고 1박과 2박 손님들만 해도 식당 안은 가득 차서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로 계모임일 법한 노인들이 많았고 스카우트나 아람단 등 청소년단체의 아이들도 많았다. 식당 밖에는 로비에 테이블들이 늘어서있어 사람들은 쇼핑센터나 패밀리마트에서 구입한 술과 앞마당에서 북한 주민들 몇이서 구워서 파는 안주들을 놓고 감회를 나누었다. 쇼핑센터 안에서 상품을 파는 점원들은 현대아산 직원들과 조선족 사람들이었다. 현대아산은 경제성과 상징성 두 가지 모두를 고려했겠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조선족 사람들로 채용했다. 대개 1년 계약직인 이들은 월40만원의 박봉으로 버스기사에서부터 상점점원, 안내원, 막일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이들 근무조건이 너무 열악해 불만이 많다고도 하고, 현대 측 정규직원들은 그들대로 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 골치라는 하소연도 들렸다. 현대가 사업을 위해서 북측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고 조선족들은 힘이 센 북측 관리자들과 심정적으로 유대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그런다는 부연설명도 있었다. 아무튼 또 다른 삶과 애환의 고리와 덩어리가 그 사회에서도 얽혀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직영하는 목란각의 냉면만은 모든 종업원들이 북한 사람들이었다. 이 곳에서 북측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들만이 유일하게 김일성 빼지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역과 영역, 그러니까 온정각과 숙소로 이동하는 사이사이에만 인민군들이 서 있을 뿐이다.
북한에 왔다는 신기감과 생각보다 덜 되는 긴장감이 교차해 그저 두리번거리다가 밤이 깊어졌다. 10시 경에 숙소로 돌아오니 팬션 앞마당 여기저기에 북한 술, 한국 술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민군 장교와 악수도 하고 이야기도 꽤 길게 나눴는데 그 벅찬 감동이 아직 남아있다느니, 그런데 대화 맨 끝에 그 인민군 왈 산삼 한 뿌리 살 생각이 있냐는 제안에 맥이 빠져 내일 밤 약속에 나갈까 말까 고민된다는 이야기 등으로 ‘꿈에 그리던 금강산’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있었다.
금강산에 들어가면서
이튿날 아침 서둘러 아침밥을 챙겨먹고 온정각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는 현대아산관광사에 내는 기본경비에 포함되어있는데 숙소 근처에 ‘금강산 횟집’이라는 간판을 건 현대 직영식당에서 하게 되어있다. 기본경비로는 이동 차량비, 아침식사 두 끼만 해결할 수 있을 뿐, 점심과 저녁식사, 온천욕 비, 교예단공연감상료 등은 모두 별도 개인부담이다. 그래서 관광안내서에는 별도로 10만원 정도를 준비해야한다고 되어있다.
온정각으로 가니 그 날 관광에 오를 사람들과 버스들이 모두 모여 있다. 우리 일행의 그 날 코스는 구룡연 폭포. 버스로 약10여 분간 가니 구룡연 입구가 나온다. 안내원이 구룡연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데 기억나는 것은 화장실(이곳에서는 위생실이라 부른다)에 관한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 무료 위생실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 모두 유료니까 알아서 하란다. 남자소변은 1달러, 대변이나 여자는 4달러이다. 누군가 성 차별이냐 하니까 안내원 설명이 걸작이다. 입석과 좌석 비용이 다르지 않느냐... 와아하고 웃었지만 사실은 보다 깊은 사정이 있다. 금강산에서는 담배꽁초하나 침 한번 뱉을 수 없다. 계곡물에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하물며 직접적인 오염원(?)인 배설물을 버리려면 그 비용이 거의 벌금 수준이다. 그 비용을 물고 버린 배설물은 위생실 밑 비닐봉투에 버려지고, 북한 관리원이 그 봉투를 금강산 구역을 벗어난 곳에 마련된 위생처리 시설을 거쳐 처리하게 된다. 그 비용이 1달러, 4달러는 든다는 것이다.
자고로 금강산에는 손톱만한 오염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남한 사람들 관광지에서의 행태에 대해 이들이 잘 알고 미리 삼엄한 원칙이라도 세운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폭포 근처에서 만난 지도원에게 물어봤다. “금강산 계곡 물에 손도 못 담그게 관리한 게 언제부터인가?” “해방 후 공화국이 집권할 때부터 지금까지이다” “정말 아무도 손을 담근 적이 없단 말인가?” “사람이 하는 일이니 꼭 그렇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까지 엄하게 관리하는 이유가 뭔가?” “이 물을 저 아래 인민들이 모두 식수로 쓰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먹는 물에 손을 담근단 말인가”
자연보호니 환경친화운동이니 하는 단어들이 순간적으로 무색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명쾌한 판단인가. 먹을 물에 손을 담그는 바보는 없다. 그렇다면 남측에 계곡물은 우리가 먹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먹는 물에 발도 씻고 샴푸도 하고 삼겹살 기름도 씻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보호하자, 환경운동하자 그러는 것이다. 입구 쪽에 마련된 재떨이 앞에서 피운 후 몇 시간 째 피우지 못한 담배생각이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아홉 마리 용이 산다는 구룡폭포 - 팔상담에 올라서서 보다.
구룡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앞에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안내원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빙 둘러서있다. 작은 핸드마이크로 담담하게 구룡연 오르는 코스와 볼거리들을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TV에서본 낯익은 풍경이었지만 직접 보니 꽤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초입에서 길 설명 정도해주는 이 안내원은 나중에 만나는 여러 안내원들에 비하면 재미가 별로 없었다. 땀이 조금 배일 정도로 올라가니 한 구비 바위자락에 기다리고 있던 처녀 안내원이 몇 사람씩 그룹이 만들어지면 반갑게 맞아 산세를 설명해준다. “저기 보이는 저 바위가 코끼리 바위라고 합니다. 저 선생님은 안 보이는가 보지요? 원래 마음이 고약하면 안 보이는 법입니다. 저 선생님 마음이 많이 고약한 모양입니다. 아직도 못 찾는 것 같습니다....” 한참 설명하다가 설명을 안 듣고 그냥 올라가는 관광객 한 사람 뒤통수를 잠시 쳐다보더니 “저 선생님은 내 설명보다는 선녀 만나는 일이 더 급한가봅니다. 참 서운합네다. 하지만 어떡하갔습니까. 저 선생님 입장도 있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내가 양보하지요...” 모두 와아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예쁘장한 처녀 입에서 구수하게 흘러나오는 재담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 같다. 유치원생들은 또 유치하게 조르기 시작한다. 노래 한곡 부탁합니다. 몇 번 빼던 안내원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갑습니다’를 꾀꼬리처럼 불어제친다. 박수와 환호, 웃음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친다. 또 올라오는 일행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어서면서 나도 유치한 부탁을 해봤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되겠습니까?” 했더니 수줍게 웃으면서 “안 됩니다. 통일되면 우리 원 없이 사진 많이 찍지요” 한다. “통일되기 기다리다 예쁜 아가씨 할머니 되면 어떡하지요?” 하고 떠 봤다. 그랬더니 바로 답변이 날아온다. “통일 내년에 됩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게 신심을 갖지 않고서 무슨 통일이 되겠습니까? 우리 함께 신심을 갖고 통일을 위해 노력합시다.” 금방 두 손이라도 잡고 설득하려는 듯이 진지하게 말하는 통에 그만 무안해지고 말았다.
금강산은 설악산과 느낌이 조금 달랐다. 설악산이 섬세하고 기교적이라면 금강선은 선이 더 굵고 웅장한 느낌이다. 계곡역시 담소가 많고 물은 그야말로 옥빛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산을 이룬 큰 바위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기리는 글씨가 빨갛게 혹은 하얗게 새겨져 있다. 흉측하다고 소문난 전경들이다. 대체로 그들이 다녀간 다음에 몇 개월에 걸쳐 새긴 것들로 대충 새긴 것이 아니라 명필과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설명 뒤에 보니 획에 힘들이 배여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요소요소에 ‘표식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주로 김일성 주석 등이 왔다가 남긴 이야기나 시, 지시 등을 새겨놓은 것도 있고, 그 계곡이나 바위에 얽힌 전설, 천연기념물 지정내용 등을 알리는 글들도 있다. 그 표식비에는 테두리를 두어 함부로 만지거나 올라서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1시간 정도나 올라갔나싶더니 갈림길이 나온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과 상팔담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구룡폭포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니 우선 상팔담 오르는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거의 깎아지른 듯한 길이다. 철 계단이 죽 이어져있어서 망정이지 그냥은 못 오를 정도로 가파른 길을 끙끙거리며 한참을 올라야했다. 드디어 정상 상팔담에 오르니 위로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있고, 사방에는 금강산 봉우리들이 드리워져 있으며 아래로는 깊은 계곡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물이 8개의 옥빛 담소를 거쳐 가는 것이 보인다. 담소가 8개여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이 곳 이름이 팔상담이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다. 과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고 싶은 욕심을 낼만도 하겠다.
별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몇 장 찍어야겠다는 욕심이 부쩍 생겨 이 배경 저 배경 고려해 찍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큰 박수소리가 난다. 우리가 본 안내원 중 유일하게 남자인 안내원이 설명 후에 노래 한 곡을 시작한 것이다. 너무 높아 여자안내원은 못 올라오고 남자가 배치되었나보다 짐작되었다. 남자 안내원은 여자안내원 못지않게 노래를 잘 하고 미남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몇 사람이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지만 안내원은 끝내 사양하였다. 대신 집어준 사탕 한주먹은 고맙습니다하며 받았다.
경치에 취해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옆에 지도원 한 사람이 한가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안내원과 달리 이 사람들은 왠지 조심스럽다.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도 그렇고 인상들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한 마디 붙여보고 싶어 안녕하세요 했더니 의외로 반갑게 인사를 받아준다. 벌써 몇 번째 받는 질문이지만 YMCA가 뭐하는 단체냐고 물어왔다. 궁색하게 대략 설명을 하다가 문득 엊저녁 온정각 마당 전광판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온다는 안내문이 생각나서 그와 유사한 성격의 단체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금방 반색하면서 “아, 문규현 신부 소속단체 말이지요?” 한다. 그 분을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 잘 알지요. 훌륭한 분 아닙니까?” 하는데 표정이 새삼 밝아진다. “YMCA는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데 좋은 일 하는 단체인 것 같습니다. 남측에는 단체가 하도 많아 외우려고 노력하는데도 다 못 외우겠습니다.” 하면서 웃는다. “그런데 인권운동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남측이 인권을 말하려면 국가보안법부터 폐지해야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기습적으로 물어온다. 순간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정치 이야기는 절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표정을 살펴보니 그저 떠보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싶게 “맞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악법이라고 생각하는 남측 국민들이 많습니다. 양심적인 사람들이나 사회지도자들 대부분도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아 아직 논의 중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즉각 “반대하는 세력 눈치 볼 것 뭐있습니까? 그저 하루빨리 없애버리고 우리가 통일 한 길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한다. 아차, 이러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것 아냐?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천하 명산 금강산 봉우리에서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며 나눈 이야기들이 깊게 뇌리에 박혀 내려오는 길을 깊은 상념에 빠지게 했다.
길을 다시 잡아 74미터 웅장한 비룡폭포 앞에 섰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를 이룬다. 폭포 앞에 구경을 잘할 수 있도록 정자를 만들어두었는데 관폭정(觀瀑亭)이라 이름 붙여놓았다. 실타래가 풀어져 내리는 것처럼 쏟아 내리는 폭포에 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 폭포수 밑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 해서 이 곳을 구룡연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평양냉면 먹고 삼일포를 휘돌아 오다.
내려오는 길에 자리 잡은 ‘목란관’은 북측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다. 메뉴는 냉면과 비빔밥 단 두 가지, 고민 끝에 냉면을 주문했다. 몇 년 전 TV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먹고 싶었던 냉면인가. 하지만 맛있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고, 그렇다고 형편없었다고 한다면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니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한 마디로 입맛 차이인 것 같았다. 특히 냉면은 집에서 해먹는 일이 없는 요리이니 남한 식당의 맛 내기위주의 조리법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에 조미료라고는 없을 북한냉면이 입에 맞을 리 없을 것이다. 현대 직원 설명에 의하면 처음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기대를 잔뜩 품고 온 남한 관광객들이 뭔 맛이 이러냐며, 북한냉면 맞느냐고 항의하는 통에 혼줄 깨나 났단다. 하긴 전라도 음식 다르고 경상도 음식 다르지 않는가. 북한 사람들은 맛있게 먹으니 그렇게 유명해진 것 아닌가. 비빔밥도 사정은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 중에도 맛있다고 연신 추켜대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입맛 탓이었다.
점심 후 일정은 온천욕과 삼일포 관광 중 택일이었다. 어제 온천을 먼저 한 사람들의 평가가 둘로 갈리었다. 과연 물 좋고 기분전환이 확 될 정도로 좋은 온천이라는 사람과, 남한의 온천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차라리 언제 또 볼지 모를 삼일포를 보러가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이 있어 누구 말이 맞는지 혼돈스러웠다. 후자를 택했다.
삼일포로 가는 버스는 북측 민가 쪽에 좀더 가까운 길로 달렸다. 번호판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보다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북의 자전거는 우리 자가용 수준이어서 번호판이 달려있단다) 넓은 옥수수 밭 사이사이에는 드물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청년돌격대원이라고 했다. 우리로 치면 공익요원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도 몇 년째 연일 보는 관광객들이 그다지 신기하지 않는지 우리 버스를 멀거니 보거나 외면하는 듯 했다.
신라 경순왕이 놀러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삼일 간 머물렀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는 다소 싱거운 사연이 담긴 삼일포는 산 중에 담긴 연못처럼 특이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바닷물이 든 포구였는데 지금은 민물이 되어 커다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포구를 죽 돌면서 경치를 감상하도록 길을 만들었는데 한쪽 산길을 조금 올라가 내려다보는 전망이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드넓은 호수에 오롯이 떠있는 몇 개의 조그만 섬들과 나무, 그것과 절묘하게 맞닿아 구물구물 드리워진 산자락,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 한 수, 노래 한 자락 절로 읊어낼 경관이었다. 몇 사람은 철퍼덕 주저앉아 ‘나 못가’ 했고 저만치서 한국YMCA에서 노래꾼으로 일등인 익산 유희영 사무총장의 기다란 가곡 한 곡이 뽑아지고 있었다. 어김없이 바위마다 적기가 가사, 김일성 찬양, 김정숙 찬양 글자가 새겨져있고, 길목 몇 군데 수더분하면서도 예쁘장한 안내원들이 서 있다가 준비한 안내를 열심히 해준다. 스물세 살이라는 한 아가씨는 흔한 ’반갑습니다‘ 대신 ’다시 만나요‘를 애절하게 불러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음양의 조화일까, 금강산 밑자락에 삼일포가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어 그 웅장함을 깊이 품고 있었다.
차라리 가슴이 아픈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
오후4시30분에 시작되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교예공연을 보기 위해 삼일포에서의 출발을 독촉하는 안내원들의 사전 예고편은 공연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몇 명의 무희들이 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공중발레를 하는 개막장면부터 이미 관객들은 충분히 감동하고 박수를 마음껏 치겠다는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철봉대에 해군복을 한 15명의 젊은 남자들이 매달려 마치 다람쥐나 원숭이처럼 자유자재로, 그러면서 절도 있는 행동통일을 하면서 보여주는 묘기, 그네를 이용해 공중을 날아다니며 서로의 호흡을 맞추는 묘기, 공과 굴렁쇠로 사람을 웃기는 두 남자의 코믹연기, 중간 중간에 관객을 무대로 불러올려 자기들의 묘기를 해보도록 유도하여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만드는 분위기 연출로 1시간30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 경험을 한 것도 드물다. 중간에 어려운 묘기로 ‘우리는 하나다’가 새겨진 플랜카드를 펼치고, 한반도기를 펼칠 때는 거의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음악과 음향도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관객석 2층에서 직접 연주를 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드디어 모든 배우들이 나와 ‘또 만납시다. 통일되어 만납시다.’를 합창하는데 그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 눈물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는 뜨거운 동포애 또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저토록 정교하고 환상적인 묘기를 보여주기 위해 그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과 고생을 감내했을까하는 데에서 오는 애잔함이었다. 나중에 현대아산 안내원들의 설명으로는 동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들은 인민배우로서 거의 장차관급의 대우를 받으며 훈련이나 생활이 초특급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이나 어려움 없는 생활을 하고 영웅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특급 대우받으면 훈련이 쉬워지는 것은 아닐 터였다. 평양모란봉교예단은 한 팀당 50여 명씩 4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1960년대에 김일성 주석이 인민을 기쁘게 해줄 교예단을 만들라는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배우들은 어려서부터 발굴되어 피나는 훈련을 거쳐 정식 교예단이 되며 4팀이 번갈아가며 공연을 한다. 북한통치의 한 수단이었을 문화공연단이 북측 인민들만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측 국민들까지 즐겁게 해주고 있으니 통일이 되면 기쁨이 어찌 이것뿐이랴.
한국YMCA 통일기원 금강산예배
어제 멋모르고 현대아산 뷔페식사로 아까운 한 끼를 허비했던지라 일찌감치 예약해 둔 금강산호텔 식당 뷔페로 향했다. 금강산호텔은 지난 7월4일 개장했다는 플랜카드가 아직까지 걸려있는 새로운 호텔이다. 짓기는 현대가 지었지만 대부분의 운영자들이 북한 사람들이다. 여름이어서인지 식탁이 2층 야외옥상에 마련되어있었다. 김치, 나물, 생선, 국 등 모두 북한 음식들이며 주방장도 북한사람이라 했다. 지배인 격인 현대아산 직원만이 테이블을 다니면서 음식 맛이 어떤가, 불편한 것은 없냐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견 나온 지 꽤 되었는데 집에 자주 갈 수 없어 남한 고향이 그립다는 그 지배인은 대화에 굶주렸는지 우리 테이블 옆에 서서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북측 사람들과의 문화와 생각 차이로 느끼는 애로사항, 현대 직원은 달랑 11명인데 현지 고용한 북한사람들이 3백 명인데다 말을 잘 안 들어 골치 아프다는 하소연, 까다로운 규정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 등부터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까지 다 들어준 다음에야 음식 맛을 찬찬히 맛볼 수 있었다. 정말 화학냄새라고는 전혀 없는 담백한 맛이었다.
만족스런 만찬 후 해금강호텔 소연회장에서 열린 한국YMCA 통일기원 금강산 예배에 참석하였다. 연회장 문 안내판에는 기도회 대신 ‘세미나’라고 적혀있었다. 북측이 기독교 예배를 어떻게 볼지 몰라서였다. 차분하고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기도와 찬송이 이어지고, 남한 각 지역에서 미리 떠온 물과 금강산 어귀에서 흐르는 물을 합수하는 의식도 가졌다. 몇 분들이 북녘 땅을 딛고 서있는 소회도 발표하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생각들을 교감하는 친교 시간도 가졌다.
YMCA가, 아니 남한의 시민운동진영이 통일을 위해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할까. 현대라는 한 기업에 의존하여 경제적 방식으로밖에는 접근이 안 되는 현실 속에서 과연 고상한 철학과 열정뿐인 시민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국가보안법, 핵, 완전히 다른 속성의 두 권력,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 그 아래서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양 측 국민들, 그것들의 틈새는 무엇일까. 밤늦도록 바닷가 방조축대 옆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행들의 표정에서 한결같이 읽을 수 있는 때 아닌 고뇌였다.
만물상, 휘둥그레지는 눈으로 본 기암괴석 들
마지막 날 오전은 만물상에 오르는 일정이다. 금강산에 온지 만 이틀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것이 익숙해진 듯 밥 먹는 일도, 버스에 올라 이동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버스로 구불구불 한참을 올라가는 길은 울창한 숲이 우거져 꽤 깊은 산 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도 모를 나무종류가 다양해 걸어도 지겹지 않겠다싶었다. 금강산 관광버스들은 모두 33인승이다. 길이 좁아 더 큰 대형버스들은 맞지 않아 중형을 택했다고 한다.
중턱쯤에 다다라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버스가 섰다. 이제부터 등산로이다. 입구에는 어김없이 여성 안내원이 작은 핸드마이크로 코스 설명을 하고 있다. 만물상은 이름 그대로 바위와 봉우리 형세가 만 가지 형태를 띠고 있는 기암괴석이 파노라마를 치고 있는 명산이다. 금강산을 흔히 1만2천봉이라 표현하는 것은 이에 기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오르는 길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며 안내원은 ‘힘깨나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상까지 가 보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초입의 귀면암에만 올라도 이 산의 70%는 볼 수 있으니 찬찬히 쉬면서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 권유했다. 중간에 약수터가 있는데 ‘한 잔 마시면 10년이 젊어지고, 두 잔 마시면 애기가 되고, 세 잔 마시면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니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설명도 천연덕스럽게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어제 구룡연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등산객이 많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아 등산로는 기다란 행군 대열처럼 두 줄 세 줄이 되어 왁자지껄하는 분위기이다. ‘힘깨나 쓰실 것 같지’는 않아 보이시는 분들인데 여기까지 와서 오르지 않으랴하는 심정인지 귀면암에 주저앉는 분들은 거의 없었다. 길이 자주 막히는 덕분에 열 걸음 가다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두어 걸음 가다 올라온 만큼 밑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 때마다 눈에 보이는 산은 이렇게 저렇게 변한 모습이었다. 오밀조밀한 바위들로 이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커다란 병풍처럼 늘어서있어 세밀함과 웅장함이 함께 어우러진 장관이었다. 길 중간에 남측에서 온 여류화가 한 분이 화판을 걸쳐놓고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유화나 수채화가 아니라 찰흙과 작은 돌을 섞은 소재를 입체적으로 붙이는 작품이었다. 대체나 저 산을 평면으로는 그려낼 재주가 없겠다 싶었다.
땀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올라서니 이제 바위로만 뭉뚱그려진 정상만 남았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르게 놓여있는 철 계단 난간 한줄기를 잡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거친 코스다.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산세가 펼쳐져있는 금강산이었다. 바위틈에 뿌리 한 가닥을 박아놓고 의연히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그 자체만으로도 넋을 빼놓을 만 하였다. “저거 하나만 해도 10만원은 더 받겠네.” 하는 앞 줄 아저씨 말에 흥이 깨지고 말았다. 이 봉우리 말고도 등산로는 몇 개의 봉우리로 더 연결되지만 우리 일정 상 더 가지는 못하고 하산을 해야 했다. 금강산의 최고봉 비로봉은 온정각에서 너무 멀어 그 코스만을 선택한 관광객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는 본격적인 등산장비를 갖춘 전문가들이나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금강산을 뒤로 하고...
만물상에 몸을 파묻었던 감동으로 쉽게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제 서둘러야 한다. 점심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는 것이다. 아무리 유쾌한 여행도 볼 것 다 보고나면 집으로 향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쉽다. 이제 뭔가 좀 보이는가싶은데... 온정각 한 쪽에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표지판도 그 때서야 봤다. 「정몽헌 회장 추모비 입구」! 물론 현대 측에서 세운 것이겠지만 북측 땅에 서 있다는 것은 북한정권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니 그 의미가 각별하였다. 시간이 없어 볼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뿐인가! 온정각 저 쪽 편으로 유달리 높은 10층 정도의 「김정숙 관」 건물! 과거에 많은 국제적 행사가 치러진 유명한 건물이다. 지금은 온정각에 파견 나온 관료나 군인들이 숙소로 쓰고 있다는데 한번은 꼭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결국 겉만 보고 말았다.
버스 앞에서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행사가 이곳에서 있다더니 문규현 신부님이다. 그리고 몇몇 활동가들도 보인다. 국내에서 만나도 그럴 텐데 금강산에서의 상봉이라니... 북측이 신뢰하고 남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이런 분들이 계시는 한 통일의 희망은 계속될 것이다. 진심으로 건강을 기원하며 인사를 드렸다.
현대아산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버스는 오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버스 안내원 김은혜 씨는 다시 북한 검문 장교를 만날 생각에 머리를 매만지며 홍조를 띠고 있었고 우리는 잘되기를 바란다고 장난 섞어 격려를 해줬다. 우리 중 누가 인민공화국 홈페이지에 이 사연을 올려 국제결혼이라도 추진해보자고 제안했다. 우리의 기대 덕분이었는지 검문대에 도달하자 예의 그 장교가 우리 버스에 올라 김은혜 씨에게 나갔다 언제 오느냐며 다정스레 말을 붙였다. 그 장교가 나간 후 우리 버스 안은 환호성이 올랐다.
갈 때는 낯선 길이라 한참 걸린 것 같았는데 되돌아올 때는 금방이었다. 금방까지도 인민군들이 보였는데 갑자기 우리 국군들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복장이나 표정, 걸음걸이가 너무 달랐다. 어떤 군인은 아양스럽게 양 팔을 머리 위로 하트모양을 그리며 우리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그래 너 군기한번 잘 빠졌다...
통일전망대 옆 동해출입국사무소는 들어갈 때와 달리 기다리거나 지체하는 시간도 없었다. 너 잘 갔다 왔으니 이제 집에 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허망했다. 뒤쪽에 금강산의 여운이 당기고 있었고, 앞쪽으로는 이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리나케 핸드폰들을 찾아 전원을 켜고 여기저기서 안부전화, 업무전화들이 시작되면서 ‘당김’은 ‘일상’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우리의 연수는 끝났다.
금강산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으면 좋겠다. 금강산뿐만 아니라 평양, 개성, 신의주, 압록강, 백두산 등 곳곳에 우리의 발길이 많이 닿으면 그만큼 통일은 당겨질 것이고 일체감이 커질 것이다. 그것을 현대라는 기업 하나가 다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퍼주기 논쟁일랑은 이제 거두고 함께 나누는 일이 통일의 시작이다. 동남아, 아프리카 등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민족들에게도 관심 갖고 함께 나누고 살아갈 것을 걱정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더구나 북한은 우리가 뭔가를 주고 싶어도 줄 방법이 별로 없는 특수한 상황이다. 관광이라 해도 좋고 단체연수도 좋다. 체험학습도 좋고 산행 즐기기도 좋다. 우선은 현대가 안정적으로 이 일을 확장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함께 하고, 이를 모델로 다른 기업들도 안심하고 함께 투자하며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면 좋겠다.
이 글이 개인적인 기행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러분들께 드리는 이유도 그런 마음에서이다. 내년에는 백두산엘 가고 싶다. 아니 가야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