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화목제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화목제의 뜻
화목제의 원어가 “셀라임”으로 “샬롬”과 같은 어근입니다. 영어로는 “sacrifice of peace offerings”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위한 제사이며, 살롬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샬롬을 이루고 싶으면 영적인 화목제를 드리시면 됩니다.
▶ 다른 제사는 단수인데 화목제는 복수로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화목제가 다른 피의 제사에 비해 많은 암수의 소, 양, 염소가 희생양으로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사람들과 오래동안 화목하라고 많은 희생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봉헌식 때 화목제물을 엄청나게 드렸습니다.
[열왕기상 8:63]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또 성막을 지은 후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드린 희생양을 보면 다른 제사에 비하여 많은 량의 화목제물을 드린 것을 알수 있습니다.
[민 7:27]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 28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 29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의 헌물이었더라
→ 화목제의 희생양의 종류와 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화목이 필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 조금은 말씀의 포커스와 다르지만 마치 이것은 화목해야 할 자에게 화목제물을 한 마리씩 끌고 가서 나누어 먹으라고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남자에게는 수컷으로, 여성에게는 암컷으로, 나를 들이받는 자에게는 염소를 끌고 가면 어떨까요? 요새 부위별로 먹는 한 마리 개념도 있으니까!
(농담) 나하고 문제있는 분들 빨리 끌고 오세요, 용서해 줄테니까
아무튼 화목제는 죄인인 인간들이 번제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구분하여 드린 구원을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다양한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오늘날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없다면 이분은 화목제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 참고로 번제는 구원의 시작을 기타의 제사는 구원을 받은 자가 드리는 것입니다. 이후에 소제는 감사의 삶을, 화목제는 화목한 삶을, 속죄제는 의도하지 않게 지은 죄에 대하여 속죄하며, 속건제는 성물이나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해를 입혔을 때 보상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 하나님과 화목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판단 기준이 말씀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 화목되지 않은 사람들은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도 화목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 말씀과 같은 원리입니다.
[요한1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분명한 것은 한 화목제를 드리므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동시에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이 같이 이루어 지는 것이 화목제입니다. 따로 다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화목제를 드려야 하고,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한 화목제를 또 드려야 하는데 성경은 한 화목제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데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않다라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화목제가 복수로 기록된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화목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고 가르칩니다.
[고린도후서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제 화목제의 절차를 통하여 화목제의 의미를 세밀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2. 화목제의 절차
1) 화목제에 사용될 제물은 흠없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수컷이나 암컷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 화목제의 특징은 다른 희생제사는 대체로 수컷이 드려지는데 (평민을 위한 속죄제는 암컷도 사용됨) 화목제는 암컷, 수컷 구분없이 드려집니다.
이 제사는 화목을 위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영적으로 본다면 남녀 노소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딤전 2:4)
▶ 화목제에 피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희생제물이 필요한데, 피의 제사인 번제를 드리고 또 피의 제사인 화목제를 왜 드려야 합니까?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제사는 피가 필요합니다. 소제도 피의 제사와 함께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를 계속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① 동물제사는 불안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제사때 마다 동물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히 9:12).
② 그러면 한번의 제사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린 지금은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지금도 동물의 피는 필요하지 않지만 바로 우리들의 죄성 때문에 예배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죄성의 DNA가 믿는 우리들 가운데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 죄성이 무엇인지 쉽게 예를 들면, 만약에 어떤 부부가 눈으로 죄를 범하여 두 사람의 양쪽 눈을 다 빼어냈다고 합시다 (마 18:9). 그리고 두 눈이 없는 그들이 자녀을 낳는다면 자녀가 눈이 없이 태어날까요? 아닙니다. 지금 그들 부부의 눈에는 눈이 없지만 두 눈의 DNA가 있기에 태어나는 자식은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성도 이와 같이 유전되는 DNA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바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딤전 1:15) 라고 고백했는데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직후에 한 고백이 아닙니다. 사역의 마지막 때, 그의 사역의 절정에서 한 고백입니다.
바울이 주후 67년 경에 순교했다고 본다면 순교 4년 전에 1차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 디모데가 에베소교회 목회자로 있을 때 한 고백입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끊어지면 지금이라도 다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하는 구원파는 맞지 않습니다.
성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을 보면 죄인됨을 계속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슨말씀을 하고 있나요? 모든 제사에는 피가 필요하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저 모임입니다.
2) 다른 피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예배자는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예배자의 모든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는 행위입니다.
→ 죄가 있으면 화목할 수 없습니다. 인간 관계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욕심, 정욕, 미움, 다툼 등 모두 죄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에 인간 대신 죄를 지고 죽어야 하는 동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하십시오. 예수님께 죄를 전가시키십시오. 안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시느이 죄를 믿음의 고백으로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3) 제물을 회막문 앞에서 잡습니다.
회막문 앞은 하나님 앞이란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막문 앞 제단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이 단계를 거쳐 물두멍을 거쳐 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분향단에서 기도할 수 있고 떡 상 앞에서 말씀을 먹을 수 있고 촛대 앞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가 눈으로 보이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막문 앞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계속 번제단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힘이 듭니다. 한번에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앉고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희생양이라면 계속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 과거에 망나니가 칼로 목을 쳐서 사형을 집행할 때, 죄수의 가족이 망나니에게 뇌물을 준답니다. 고통없이 한번의 칼로 죽게 말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아 여러번 칼로 친다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 따르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자아가 죽을 때에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자아가 센 상대방과는 잘 화목하기 어렵습니다.
힘 자랑하고 잘 난체 하면 화목하기 어렵습니다. 군림자가 되기 쉽습니다.
힘이 있어도 겸손한 자세로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합니다.
바울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막 9: 42-50절 말씀에도 화목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일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 또 손, 발, 눈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리라. 죄를 짓는 성한 손과 발과 눈으로 가지고 지옥가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난해구절의 하나입니다.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모든 사람들을 불로서 소금치듯 하겠다는 것입니다. (미래, 수동).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앞뒤 문장 전체를 놓고 의미를 부여하여 쉽게 정리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화목하지 못하게 하는 손, 발, 눈을 그냥 두면 지옥에 가게 된다. 그래서 성령의 불로서 소금에 저리듯이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금에 저린 것과 같이 자아를 죽여 서로 화목해야 한다”
자아가 죽지 아니하면 화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옥에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성령의 불로 자아를 죽이지 아니하면 결국에는 지옥불로 태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성령의 불로 자아를 죽이세요. 지옥불로 태워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도 제물이 죽는 것처럼 예배자 자신의 자아가 죽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자들은 너무 자아가 살아 있어 문제입니다.
4) 그 피를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예배자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번제와 같습니다.
더렵혀진 장소에 부리는 것입니다.
피 뿌림이 있어야 거룩함을 입습니다. 죄를 덮어 쓰고 희생양이 죽은 제단을 거룩하게 해야 하고 예배자에게도 그 마음에 피 뿌림이 있어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더렵혀진 장소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마음에 뿌려지는 것을 “회개”라고 했습니다. 회개한 자가 참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렵혀진 장소에도 뿌려야 합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