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3:1-10>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자,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중 성령을 체험한 이후에 그들에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2:43).
※ 오순절을 칠칠절이라고도 하는데, 유월절 이후 7번의 안식일을 지난 다음날(50일 째)입니다. 칠칠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 중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으로 그는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그가 일어나 걷고 뛰고 성전에 들어가 찬송하는 이적이 일어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합니다.
1.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자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4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에 들어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기 위하여 앉아 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 주목하다 (아테니조, 열중하여 보다, 응시하다, 관찰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육의 눈, 영의 눈으로 세밀하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그 미문을 지나다니면서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중 일부는 동정심을 가지고 동전 몇 닢을 던져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베드로와 요한처럼 주목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다리가 고쳐져 걸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갖거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지 못하는 그를 영적인 눈으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앉은뱅이 본인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관심을 갖기 보다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나면서부터 불구로 태어나면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그렇게 태어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소수의 사람들이 그나마 육적인 동정심으로 동전 몇 닢을 주었을 것이지만 걷지 못하는 자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본인도 타인도 주목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도 성령 받기 전에는 그를 지나쳐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한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①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입니다.
실제 불구입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성전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레 21:17-23절에 보면 신체가 불구인 자는 제사장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구별하고 있습니다.
정결법에 따르면 신체적인 불구가 있는 자를 부정한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체의 불구로 걷지 못해서 성전에 못 들어 간 것도 있지만 또 영적으로 부정하여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육적인 불구, 영적인 불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육적인 장애를 입고 교회공동체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과 육신은 멀쩡한데 영적 장애가 있어 나오지 못하는 분들 말입니다.
이들은 이래나 저래나 스스로는 도저히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런 자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스스로 때가 되면 나오겠지? 아닙니다.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는 자가 많습니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어야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자들을 주목하여 일으켜 세워주는 사명을 가진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② 성전 미문에 앉아 날마다 구걸하며 육적인 양식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가서 ”우리를 보라“하니 그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루 하루 살기 위하여 육적인 양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소망이 없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육적인 양식을 위함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먹고 살기 위하여 온 인생을 다 보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100억 재산 가져서 무엇을 합니까? 부족해도 안되겠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영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나요? 주님 앞에 갔을 때 ”너 무엇하다가 왔느냐?“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은 자신을 위하여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자가 되지 말고 또한 그런 자들을 주목하여 일으켜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육의 양식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위하여 살수 있도록 말입니다.
[요한복음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은 육신의 질병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질병도 고쳐진 것입니다. 즉시 걷고 뛰고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목할 자가 많습니다. 영적인 불구, 육적인 불구가 있는 분들을 주목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고쳐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으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구하는 것을 알아 차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먼저 선포합니다.
▶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부자된다. 모든 것이 잘 된다 등등. 우리들은 전도할 때에 불신자들에게 그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동안 부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다녔지만 금방 부자가 되지 않을 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될 만한 믿음이 있어야 그 부자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라고 속이면(?) 안됩니다.
▶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사역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역에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돈보다 더 앞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사역자의 ”믿음“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에서 너무 분명하게 이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나은 것도 베드로와 요한의 권능과 경건이 아닙니다(12). 그 이름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예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16)
먼저가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돈은 순전히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보조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전도 보고에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보고합니다.
[마태복음 10: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마가복음 6: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누가복음 10:4]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누가복음 22: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전도할 때에 돈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돈도 필요한데 부족함이 없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 참고로 눅 22:36절에서는 그동안 말씀하신 내용과 반대되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전대도 가지고 검 없는 자는 겉옷까지 팔아서 사라“ 까지 하십니다.
[누가복음 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검“ (마카이라, 작은 검)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전도할 때 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다가 이제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하셨는데 (마26:52) 이제는 밤에 덮고 자야 하는 그 중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순 같지만 아닙니다. ① 먼저는 예수님 계실 때와 안 계실 때의 전도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실 때에는 정말로 전대에 금 은 동이 필요 없고 검도 가지고 다닐 필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필요한 것들이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 계실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② 눅 22:37절에 그 이유가 명백하게 나옵니다.
이사야 53: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와 같이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사람들이 취급하는데 전도하는 제자들 너희들도 얼마나 핍박을 받으며 어렵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③ 이 부분을 오늘날 영적으로 해석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성령님) 계시면 전도에 필요한 것이 충족됩니다. ”부족함이 없나이다”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도 생명의 보호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적인 양식이 공급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이 공급되어 지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안 계시고 성령 충만함이 없으면 다 부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육적인 필요도 채워지지 않고 영적으로도 말씀의 양식 도 떨어지고 성령의 검, 말씀의 검도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사역의 열매
성전 미문과 앉은뱅이의 이미지는 맞지 않습니다. 성전 미문과의 맞는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이 걷고 뛰어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 미문은 ”아름다운 문“입니다. 잘 지어진 문입니다.
요즘 영적으로 본다면 그 아름다운 이름과 삶의 모습이 서로 이미지에 맞지 않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진 겉으로는 아름다운 직분, 이름, 신분에 맞는 삶의 이미지를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과 이미지가 맞지 않게 앉아 구걸하고 있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일으키니“는 ”에게이렌“으로 능동 과거형입니다. 이미 고쳐진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오른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고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미 고쳐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니 현재형으로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성전 미문이라는 이름의 문과 그의 모습이 어울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가졌으나 그렇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의 이름에 걸맞도록 이미지를 고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죄로 인하여 형상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고 잡아 일으켜 걷고 뛰고 성전에 들어가 찬송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좋은 열매를 거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성령충만의 체험입니다. 그리고 매일 드리는 습관적인 그들의 기도입니다 (3,6,9시 기도), 그리고 일으킬 자를 하나님의 눈으로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믿음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앉은뱅이가 걷고 뛰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히 놀라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0-12). 우
우리들의 사역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