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초상(初喪)
이 강 산
웃는 상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마침내 찾았다. 일 년 만의 일이다. 세상을 다 뒤질 듯 작정하고 나선 게 작년 구월 말이었으니까, 정확히 일 년 이 개월이 지났다. 개인 상가를 포함해 얼추 스무 번쯤 장례식장을 드나든 끝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상주를 만나지 못했다. 웃는 모습은커녕 얼굴조차 못 보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지 삼십 분 남짓 지났을 것이다. 고인께 인사도 올리지 못한 채 짐짓 엄숙하면서도 한편 들뜬 마음으로 401호 접견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올갱이국밥을 휘젓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세 숟가락이나 떠먹었을까. 올갱이 몇 알을 오물오물 삼킨 게 전부였다. 오후 세 시면 점심이나 다름없었다. 식사를 주문하지 말까 싶었지만 상조회 여직원은 막무가내로 한 상을 차려냈다. 마치 상가의 법도가 으레 그렇다는 것처럼. 어쨌든 나는 배가 불렀고, 추도 예배가 끝날 때까지는 당장 할 일도 없었기에 접시에 담긴 음식물을 세기 시작했다. 방울토마토 일곱 개. 귤 두 개. 인절미 다섯 개. 접견실에 물끄러미 앉아 삼십여 분을 기다리는 일이 이토록 지루한 줄은 몰랐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어이없게도 그 생각이 몇 번인가 반복되었을 무렵, 탁자의 음식물에 눈이 갔다. 돼지고기 수육 여섯 조각. 새우젓 종지 하나. 종이컵 일곱 개. 더 필요한 것 없으세요? 마른안주 접시의 땅콩을 세려는데 청년이 허리를 굽혔다. 상주의 아들이거나 조카인 듯했다. 물 한 병 주세요. 금박으로 상조회 이름이 새겨진 조끼를 입은 여직원이 청년을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빈소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땅콩 세는 것을 그만두고 장례식장을 둘러보았다. 입구 쪽과 등 뒤는 자리가 꽉 찼다. 내 맞은편, 주방 쪽만 한 자리가 차고 비었다. 다들 먹고, 마시고, 떠드는데 열중했다. 그러고 보니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싶었다. 혼자 앉은 탓인가. 수십 명의 문상객들이 쏟아내는 소음으로 시끌벅적한 상가. 제가 여기 왜 왔죠? 누군가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쾌재를 외쳤다. 찾았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웃는 상주를.
사실 나는 이 죽음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고인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향년 몇 세인지 알지 못했다. 영일고 윤민호 선생님 모친상. 빈소 : 은혜원. 발인 : 12월 1일. 휴대폰 문자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그저께 오후 문자를 읽으며 어라, 4일장이네, 했을 뿐. 누가 전송한 거지? 그런 의문조차 없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고물상 정리를 마친 뒤 그냥, 지나가다 들른 것처럼, 이곳에 왔다. 은혜노인병원 장례식장. 여기서 웃는 상주를 만나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못했다.
윤 선배의 모친상에 꼭 와야만 하는 필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따지고 들자면 안 와도 그만일 터였다. 칠팔 년 동안 서로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그랬으므로 주변에서 누가 시비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배의 경우, 경황없이 장례를 치른 뒤 부의금 봉투에서 내 이름을 찾지 못하거나 맞절을 나눈 문상객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오지 않았군, 하며 잠시 서운한 생각은 할 테지만. 나 역시 언젠가 선배를 마주칠 때, 못 가봐서 미안해요, 하면 그뿐. 흔히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모든 걸 세월 탓으로 돌리면 그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왔을까. 불쑥 안부가 닿은 과거 속의 사람 때문에? 아니면, 단순히 장례 품앗이로? 그것도 아니라면, 일 년 새 부고가 날아든 상가를 빠뜨리지 않고 문상을 다니는 어떤 목적 때문인지도 몰랐다.
등 뒤에서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그 폭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상객들이 일제히 웃고 떠들었다. 구석에서 카드 판을 벌인 이십 대들은 지폐를 쥐었다 놓았다하면서 키득거렸다. 바로 옆 탁자 주변에선 유족들 대여섯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휴대폰 게임을 하는지, 문자를 주고받는지, 육십 대를 훌쩍 넘긴 노인부터 손녀딸 같은 애송이까지 모두들 휴대폰을 꺼내든 채 소리를 죽여 웃어댔다. 바위……. 유족들을 지켜보자니 다들 검은 상복을 입은 채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바위 같았다.
웃는 바위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한때 윤 선배와 나는 동지였다. 그러나 이젠 옛 이야기일 뿐이다. 동지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좀 무리인 줄 알지만 그렇다고 동지라고 하기엔 더 무리일 것 같다. 선배도 나도 동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고, 선배와 나 사이에 동지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 게 아무래도 타당한 일이 아닐 것만 같다.
그러나 어찌됐든 우리는 동지였다. 십여 년 가까이 어깨동무를 하고 지낸 동지. 기자단 파업 사흘 째, 윤 선배는 핸드마이크를 잡고 신문사 중앙 로비에서 파업 격려시를 낭송했다. 그날 호외엔 내 판화와 지방 문예지를 통해 막 등단한 윤 선배의 시가 나란히 실렸다. 머리띠를 두른 건장한 청년 둘이 어깨동무를 하며 구호를 외치는 목판화. 파업이 끝나고 그 목판 프린트 한 점을 윤 선배에게 증정한 게 벌써 십오륙 년 전의 일이다. 지금까지 윤 선배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칠팔 년 전에 안부가 끊긴 뒤로 지역문화단체나 행사장에서 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새 나는 신문사를 떠났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다시 조각칼을 들었지만 윤 선배가 여전히 시를 쓰는지도 의문이긴 마찬가지다. 다만, 아직까지 예전의 학교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긴 했다. 두 자녀를 나란히 명문대에 진학시켰다고 소문난 사람이 윤 선배였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강이라면 건네주고 산이라면 넘어 주자. 함께 가자, 함께 가자. 그 엇비슷한 노래와 맹서들이 낡은 간판의 글씨처럼 시나브로 빛을 잃는 동안 죽은 듯이 헤어져 살았고, 둘 다 무사히 살아남았다.
언제부턴가 엉덩이가 뜨거워지면서 정강이 언저리에 살짝 땀이 뱄다. 장례식장이 노인요양병원에 딸린 탓인지 난방이 잘된 접견실 바닥은 군불을 지핀 아랫목처럼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양복 윗도리를 벗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이미 겉옷 하나씩을 벗어 든 상태였다. 나는 옷을 다시 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루한 시간도 죽일 겸, 맑은 공기도 쐴 겸,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휴게실이나 한 번 둘러보자는 생각이었다. 빈소에서 찬송가가 또 들려왔다. 영정 앞에 빼곡히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한 명도 실내로 들어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예배가 끝나려면 아직 먼 것 같았다. 나는 신발을 신으면서 실내를 휘둘러보았다. 상조회 여직원과 유족들이 일찌감치 차려놓은 식탁 대여섯 개의 음식들이 눈에 꽉 들어찼다. 저 음식 그릇 수나 세어볼까. 나는 피식 웃으며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장례식장 1층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절전을 위해 듬성듬성 형광등을 꺼 놓아 어둠침침한 천장. 괴괴한 느낌마저 드는 암회색 유리창 블라인드. 이따금 출입문을 드나드는 문상객 외엔 아무 인기척도 없는 정적. 4층 빈소에 견주면 로비 풍경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상가를 잘못 찾아온 사람마냥 묵묵히 소파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윤 선배의 얼굴만 떠올렸다. 꽤 오랜 시간동안 안부를 나누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유족과 문상객의 표정만으로 보아 호상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401호 접견실에 앉아 웃고 떠드는 사람들처럼 선배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영정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를 마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표정이 못내 궁금했다.
근상아, 이제 그만 색깔 좀 바꿔라.
불현듯 윤 선배의 얼굴에 상가 풍경이 겹쳐졌다. 작년 가을이었다. 두 번째 판화전이 끝난 뒤 보름쯤 지나서였다. 시 쓰는 후배가 부친상을 당하던 날, 같은 문화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사이에 술잔이 돌았고, 취기가 막 오를 즈음 ‘좃’ 얘기가 붕붕 날아다녔다. 일흔 여덟에 운명했지만 위암으로 삼 년을 자리보전한 고인이었기에 장례식장 분위기가 그다지 무겁지는 않았다. 그래서 술잔이 빠르게 돌았을 것이다. 한바탕 파안대소가 끝나면서 글씨를 쓰는 친구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박근상. 죽을 때까지 깃발만 날릴 거냐구.
좀더 부드럽고 가벼운 주제로 작품을 생산하라는 얘기였다. 사십 고개도 절반을 넘어섰고, 식솔도 딸렸으니 이젠 먹고 살 생각 좀 해라, 그 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돌리려던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야, 임마. 나더러 죽으라는 얘기냐? 죽으라는 게 아니라 살라는 말씀이다. 뭐? 색깔을 바꾸라면, 그게 곧 무덤파라는 얘기 아냐. 무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 눈엔 세상 색깔이 바뀐 게 안 보이냐? 세상이 뭐 어째? 이 자식, 변했네. 너 요즘 아줌마부대 덕분에 글씨 장사 잘 되는 모양인데, 너야말로 붓 똑바로 잡아 임마. 뭐야? 니가 언제부터 세상 색깔을 걱정하고 살았냐? 이 자식이…….
야, 야, 그만들 둬. 그만 두고 좃 얘기나 마저 하자.
엉겨 붙은 나를 친구들이 겨우 뜯어말리자 술잔을 또 털어 넣었다. 식도에 불이 붙은 것처럼 온몸이 뒤틀렸다. 어려웠던 90년대, 함께 노래하고 함께 쓰러졌던 친구들이었다. 지금은 비록 어깨동무를 풀고 뿔뿔이 흩어져 먹고 사는 데 경황이 없었지만.
야, 근상이 이름에 근짜가 무슨 근짠 줄 아냐? 남근 근짜여. 뭐? 하하하.
‘좃’의 원작 제목은 ‘귀가’였다. 일에 지친 노동자가 귀가하던 중, 한 손으로 벽을 잡고 한 손으론 성기를 거머쥔 채 벽을 향해 오줌을 내깔기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목판이다. 전시 작품을 둘러본 사람들마다 오줌발에 놀라 펄쩍 뛰어오르는 개구리의 모습이 압권이라는 평을 했다. 실제로 ‘귀가’는 건축 공사장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노동자가 자신의 뜨거운 오줌발에 놀라 뛰는 개구리를 발견하면서 언젠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 개구리 때문에 목판을 세 번씩이나 박살내며 조각칼을 갈았다. 초상을 당한 후배가 전시 전부터 작품에 관심을 가졌고, ‘좃’으로 제목을 바꿔 부른 뒤부터 사람들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전시실 문이 닫힐 때까지 ‘좃’에 빨간 딱지가 붙지 않은 것은 충격이었다. 다들 노동자의 열망을 담아낸 역동적 작품이라며 침을 튀겼지만, 정작 소장을 원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시실에서 작품을 내리며, 후배의 장례식장을 오가며, 친구들과 낄낄대면서, 나는 줄곧 세 번째 판화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 색깔을 바꾸자. 더 이상 과거의 방식에만 집착하지 말자. 작품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자는 게 아니다. 아픔과 소외를 표현하되 직설 대신 은유와 역설로 담아내자. 그 다짐의 어느 순간엔가 판화전 주제도 정해졌다. 즐거운 초상, 웃는 상주.
전시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 슬픔도, 눈물도 없는 죽음. 유족이든 문상객이든 고인에 대한 애도의 눈빛을 발견할 수 없는 죽음. 그 죽음에 대한 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상주의 미소. 그 모습을 새기리라. 나는 마음이 들떠 술에 취한 듯 흥청거리며 해를 넘겼다. 지난 해 늦가을부터 한꺼번에 네 군데를 다녀온 이번 달 문상을 포함해 내게 부고가 닿은 상가를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정확히 기억되진 않지만, 대략 스무 번쯤 상주와 맞절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고인의 영정을 훔쳐보면서, 상주의 안면을 힐끔거리면서.
……양에 안 찬다고 때려치우면 어떡햐. 아, 복숭아씨를 삼킨다고 뱃속에 복숭아 열매가 열리나? 그러게 말여.
오십 대 여인 둘이 말다툼을 하듯 떠들며 로비로 들어섰다. 날이 추워지는가 보았다. 연신 손을 비비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물어뜯었다. 사람이 제 뱃속만 채울 줄 알지, 어째 동서남북 살필 줄을 몰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뒤 나는 빈소 안내문 앞에 섰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곧장 빈소로 올라갔기에 안내문이 궁금했다. 안내문은 크게 두 줄로 나뉘어져 있었다.
501호. 고인명 박금례. 상주 김두현. 발인 일시 2009. 11. 30. 8:00 AM.
401호. 고인명 오순임. 상주 윤민호. 발인 일시 2009. 12. 1. 7:30 AM.
발인은 휴대폰 문자에 찍힌 대로 내일 아침, 월요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망인 한 분이 떠났으므로 장례식장엔 윤 선배 빈소만 남은 셈이었다.
현관 자동문이 열리면서 점퍼 차림의 남자가 성큼 들어섰다. 남자는 한동안 안내문을 들여다보았다. 특실, 일반실이 꽉 들어찬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견주면 턱없이 초라한 노인요양병원 부속 장례식장이었다. 안내문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는 것일까. 나는 슬그머니 남자의 시선을 따라잡았다. 아, 그러고 보니 윤 선배 옆과 아래로 이름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가로 네 명씩 세로 네 줄, 자그마치 열여섯 명이나 되었다. 고인이 다복하셨구나, 하면서 첫 줄을 다시 훑어보니 남자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자 이름이 셋째 줄까지 이어진 다음에야 사위인 듯한 남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 선배가 외아들이었나?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언젠가 외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일찍 판을 접고 우리 곁을 떠난 것인가. 노모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십여 명이 왁자지껄 쏟아져 나왔다. 노인 두엇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내 뒤쪽 탁자에 앉아있던 일행들 같았다. 어따, 아직 한낮이네. 날이 더 추워지려나 봐. 팔순 잔치나 결혼식 피로연을 다녀오는 것처럼 다들 가볍고 즐거운 얼굴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자동문 앞에서 안경 쓴 청년이 꾸뻑, 허리를 꺾었다. 사무실 직원인 모양이었다. 표정은 싱글벙글하면서도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나 둥글게 밀어 낸 두발 형상이 흡사 공익근무요원 같았다.
“직원이세요?”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시 로비가 텅 비고 무료해져서 나는 청년을 불러 세웠다. 안경을 벗어 닦으려다 떨어뜨린 청년은 안경을 줍지도 않은 채 예, 하고 부동자세를 했다.
“안경 줍고 상복 좀 안내해줘요.”
청년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하마터면 안경을 밟을 뻔해서 나는 뒷걸음질쳤다. 청년은 싱글벙글했다.
상복 대여 방식은 세 가지임다. 정장 상복, 전통 베옷 상복, 그리고 정장 상복에 건과 행전을 추가한 것임다. 정장 상복은 남녀 구별 없이 한 벌에 삼만 원. 전통식 삼베옷은 육만 원이지만 할인 혜택이 있슴다. 요즘엔 신앙과는 상관없이 다들 간편하게 정장 상복을 입는 추세라서…….
삼만 원짜리 정장 상복을 입은 마네킹 앞에서 일사천리로 필요한 말을 다 늘어놓을 때까지 청년은 웃는 표정이었다. 경박한 태도는 아니었다. 본래 타고난 성품인 듯싶었다. 그럴 리가 없을 줄 뻔히 알면서도 공익이세요, 하려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양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장애인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접견실 벽 쪽에 기대어 있던, 일행이 웃고 떠드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자였다.
나는 남자 뒤를 따라서 현관 밖으로 나왔다. 남자와 나를 한 데 묶어버릴 듯 바람이 몰아쳤다. 남자의 몸이 한순간 기우뚱, 뒤틀렸다. 십일월 마지막 날, 초겨울 날씨로 적당히 쌀쌀한 바람이었다. 이대로 목을 꺾은 채 길만 보고 걷는데 어디선지 이제 막 생을 마감한 꽃잎 하나가 발끝에 날아와 앉으면 놀랍고도 반가울, 그런 바람이었고 날씨였다.
이곳에 왜 왔을까. 장례식장 앞 둑길을 서성대며 곰곰이 짚어보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
따지고 들면 그랬다. 세상의 모든 장례식이 다 엄숙하고 비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주마다 대성통곡을 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들 초상집에 다녀오면 호상이다, 악상이다, 말하지 않는가. 호상은 호상대로 악상은 악상대로 장례 의식을 갖추기만 하면 될 터였다.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상이 즐거웠으면 싶다. 물론 모든 초상이 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환이나 지병으로 떠난 고인과 그 유족들만큼이라도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지금보다 좀더 가볍고 즐거웠으면 한다. 아버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 드셨죠. 이제 편히 떠나세요. 곡(哭) 없이도 기분 좋게 염을 하고, 가볍게 하관도 하면서 말이다. 즐거운 초상. 웃는 상주. 그게 꼭 고인에 대한 불손이고 경박한 풍습이랄 수만은 없지 않은가.
401호 빈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향해 다시 올라간 것은 네 시 반이 막 지나면서였다.
나는 어느 쪽이 잘 어울릴까. 정장 상복? 전통 삼베옷? 아니면, 그 중간? 아무려면 어떠랴.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서서 묻고 답하는데 문이 열렸다. 문상객 다섯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주방 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었다. 기도를 하는지 찬송가는 들리지 않았다. 한창 식사 중인 것도 같았다. 흡연 장소와 빈소 입구에 놓인 의자에 중년 남자와 초로의 여자들이 둘씩, 셋씩 앉아 있었다. 곧장 빈소로 들어갈까 하다가 빈 탁자에 걸터앉아 벽을 보았다. 추동마을 일몰. 탁자 앞에 걸린 사진의 제목이다. 대학병원 임상병리실에 근무하는 친구가 살고 있는, 시내의 동쪽 호숫가 마을 풍경이었다. 점점이 박혀 있는 마을과 거대한 호수의 수면 모두가 진홍 일색이었다. 언뜻 보면 진홍빛 한지를 오려붙인 설치미술 같기도 했다. 사진은 친구의 집에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눈에 익을 뿐 들여다볼수록 환상적인 풍경이어서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저 일몰의 깊이는, 환상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벌써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옮겨 다니는 장례식장도 마찬가지였다. 소음과 찬송가와 정적이 뒤섞인 장례식장. 추동마을 일몰 풍경처럼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자동문 밖인지, 안인지. 빈소인지 접견실인지. 침묵인지 소음인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십여 년쯤 지난 일이었다. 시 쓰는 친구가 아들을 잃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외아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교문 앞 문방구에 들려 수업 준비물로 토끼가면을 사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직행버스에 치였고, 즉사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친구는 기어이 장례식장에 아들 사진을 걸어두고 이박 삼일을 꼬박 울었다. 화장터에서도 강물에서도 울었다. 전립선 수술을 받고 기저귀를 찬 채 빈소를 찾았던 나는 오줌을 질질 싸면서 따라 울었다.
내가 아들을 죽였어. 시 쓴다고 아들 준비물을 챙겨주지 못한 내가 죽인 거야. 장례 기간 내내 입에 거품을 물었던 친구는 아들을 강물에 뿌린 뒤 절필했다. 절필의 사유는 명백했다. 어린 자식 하나 못 지켜주는 문학은 사치이고 비현실이었다. 장례를 치른 뒤 어쩌다 만난 친구는 비장하게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아들보다 더 절실한 현실은 없어. 그 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빈소에서 사타구니가 흥건하게 젖은 채 앉아있던 내 몰골이 지금까지도 꿈인 듯 여겨지는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춘천을 다녀왔다. 생존해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작은외삼촌이 운명한 것이다. 향년 여든 아홉,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숙환으로 눈을 감았지만 어머니는 처절하게 울었다. 작은오빠, 죄송해요. 살아생전에 자주 못 보고…… 오빠한테 죄를 지었어요. 큰절을 올린 뒤 영정 앞에 털썩 주저앉아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작은외숙모는 휠체어를 탄 채, 상주는 선 채로 어머니 곁에서 눈물, 콧물을 쏟았다. 내가 어머니를 부축해 접견실로 모실 때까지 다들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울고 또 울었다. 자리를 옮긴 뒤 어머니는 유족들과 밀린 안부를 나누며 차츰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었다. 빈소에서 접견실은 직선거리로 5미터나 떨어졌을까. 영정이 뻔히 보이는 그 짧은 공간을 경계로 상가의 풍경은 극단적인 대조를 보였다. 통곡과 폭소, 침묵과 소음.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진실 같기도 하고 둘 다 허위 같기도 했다. 스멀스멀 취기가 뻗쳐오르는 한밤중까지 그것은 내내 모호하기만 했다.
“고인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흔한 살 되십니다.”
추동마을 일몰에서 눈을 떼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내 뒤를 따라 나서는 나이 지긋한 유족에게 물었다. 윤 선배를 만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지만 지금 당장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걸 왜 상주에게 묻지 않고 내게 묻는 거요?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고 유족은 정중히 답해주었다.
“아흔 한 살이라도 정정한 분이셨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들뜬 상가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유족의 공손한 태도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예를 갖추어 답례를 했다. 아흔한 살이라면, 어떻게 살아왔든 장대한 생이다. 어떻게 운명을 했든 호상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던가. 유족이나 문상객이나 다들 그렇게 기분 좋게 먹고 마시며 떠드는 것인가.
아버지, 얼른 일어나셔야지요.
지난 봄, 천식과 고뿔이 겹친 나머지 기력이 쇠잔해진 아버지가 기저귀를 차고 달포 가량 누워있을 때, 기저귀를 갈아 채우면서 나는 주문처럼 지껄였다. 올 해만 넘기시면 아흔이에요. 아흔은 채우고 가셔야지요. 왼쪽 귀가 어두운 아버지의 목을 왼쪽으로 뒤틀어 누인 뒤 오른쪽 귀를 향해 소리쳤다. 제발, 일어나셔요. 말할 기력조차 바닥난 아버지였다. 멀뚱멀뚱 아들을 바라보던 당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왼쪽 귀밑까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그대로 지켜보았다. 세기의 명장이 투명한 먹줄을 때려놓은 것 같은 눈물 자국이 저승꽃조차 시든 노구의 안면에 한동안 새겨져 있었다. 미어질 듯 가슴 속에 슬픔이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내 손아귀에 든 것은 한 인간의 육체의 일부가 분명했음에도 그게 마치 육체의 전부인 양 내 손과 함께 아버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 일어나셔야 돼요. 아흔을 채우고 떠나셔야죠. 군고구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배설물로 묵직해진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 귀를 향해 외쳤다. 고작 한 줌에 잡히거나, 기저귀를 차거나, 군고구마 냄새를 풍기는 육체가 장대한 아흔 살의 생이라니. 혼잣말로 마구 지껄이기도 하면서.
야이 새끼야. 내가 왜 돈을 내. 딸은 출가외인인데 돈을 왜 내!
아버지 생일상을 차린 날이었다. 음력으로 시월 이십사일, 이 달 초순이었다. 만 원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만성 위염으로 사흘째 밥을 건너 뛴 양친이 번갈아 링거를 꽂는 중에 차려진 생일상이었다. 아내와 내가 출근하면 빨래부터 청소까지 집안 뒤치다꺼리는 고스란히 두 노인의 몫으로 남았다. 노인들이 하루아침에 자리에 누워버렸고, 급하게 사람이 필요했다. 대안으로 꺼낸 것이 파출부였다. 일주일에 오 남매가 만 원씩만 각출해줬으면 해요. 필요한 몸통만 툭 내던진 내 말이 화근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란 게 집 한 칸이 전부였기에 큰 탈 없이 살아온 오 남매의 우애를 생각해 머리와 꼬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중소기업 주부사원인 아내가 신경성 위염으로 끙끙대는 마이너스 통장과 아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내 수입 명세표를 조목조목 나열했어야 했다. 아니면, 조금만 도와주세요, 하면서 두 손을 벌렸던가. 니가 부모님 모시고 산다고 위세 하는 거냐? 왜 누나들 보고 돈을 내라 마라 해, 새끼야. 생일상에 오른 맥주와 소주 서너 병을 섞어 마신 큰누님은 취기가 바싹 올라 있었다. 주사를 모르는 척 넘겼어야 했다. 만 원을 안 주면 될 것이지, 아버지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 뭐여? 이 새끼가. 접시가 날았고, 깨졌다. 멱살이 잡혔고, 단추가 떨어졌다.
만약 아흔 살을 넘긴 아버지가 봄이나 가을쯤 눈을 감는다면 우리 가족도 윤 선배의 유족들처럼 웃고 떠들 수 있을까. 누구든 호상이라고 입을 모을 아버지의 죽음. 맏상주인 내가 과연 사람들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열아홉에 출가 해 손녀딸을 본, 아직도 임대주택을 못 벗어난 큰누님은 또 어떨까.
윤 선배의 문상을 하루 미룬 채 어제 저녁엔 냄비를 들고 영양탕집에 다녀왔다. 양친의 이틀 분 양식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엔 파출부가 다녀갔고, 내일은 아버지가 세 번째 링거를 꽂는 날이다. 링거 수액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질 즈음, 어머니를 모시고 내과 특진을 받아야 한다. 귀가 후엔 군고구마 냄새가 찌든 변기를 닦고 양친 방의 가습기와 전기장판을 점검해야 된다. 비상 대기 중인 기저귀와 비닐 패드와 워커(walker)의 위치를 확인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다음, 삼남매 학원 가방을 챙겨주고…… 일곱 채의 이불을 펼치면, 그러면, 오늘 하루도 안녕했다, 가 된다.
지붕. 아버지의 지붕.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펼쳐지는 일곱 채의 이불과 겹겹이 쌓이는 일곱 채의 이불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풍경들에 ‘아버지의 지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의 사타구니에서 마지막 기저귀를 걷어낼 즈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같은 제목의 판화 한 점을 마무리했다. 풀어헤친 기저귀 속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성기를 양각으로 새긴 그것은 ‘좃’을 창고에 처박으면서 내가 그토록 다짐했던 역설이라든가 은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전에 없이 강건한 직설이었다. 물오징어 다리 같은 그 직설을 가족들 몰래 꺼내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지붕에서 탈출할 날을 암암리에 가늠해보았다. 때때로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쓸 데 없이 조각칼 날을 세우기도 하면서.
우연이었지만, 조각칼 날을 세울 때면 여지없이 악몽에 가위눌리곤 했다. 아버지의 지붕 끝에서 내 정수리를 향해 송곳 같은 고드름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 악몽의 여진처럼 큰누님과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파김치가 되도록 니가 한 게 뭐냐. 나무 조각이나 파먹으면서 돈 지랄한 거 밖에 더 있어!
애들 학비 때문에 허리가 휘청거리는데 무슨 미련 때문에 조각칼을 놓지 못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마이너스 통장으로 버틸 거냐구요!
악몽과 악몽의 여진과 나의 침묵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다. 봄은 짧았고, 여름은 지루했으며, 가을은 봄보다 더 짧았다. 어느덧 겨울이었다.
“근상아, 오래 기다렸지?”
윤 선배였다. 추동마을 일몰을 다시 보면서 어쩌면 저게 일출일 수도 있겠다, 하는데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 선배는 내가 온 줄 알고 있었다. 예배 도중에 빈소 입구를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윤 선배, 별 일 없었어? 나는 하마터면 상주에게 그 말을 던질 뻔 했다.
“고생 많으셨죠?”
“미안하다. 조용히 살았어.”
십 년이 좀 모자라는 세월이 흐른 뒤의 해후였다. 한 마디씩 주고받은 안부가 첫 인사의 전부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될지 몰라서 그랬는지, 딱히 할 말도 없어서였는지 둘 다 입을 다문 채 빈소를 향해 걸었다. 빈소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걸린 시계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4시 53분이었다. 권사 오순임. 영정 앞에 발을 모으는 데 접견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기도 사나운데 상을 당하셔서 애통하시겠습니다.”
“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께서도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무슨 지병이라도 앓으셨는지요? 아니면, 노환으로…….”
“노환이셨습니다.”
“그러면, 이 요양원에서 요양을 하시다가…….”
“아니, 먼 데 계셨습니다. 일주일 전에 집으로 모셨는데, 이렇게…….”
이렇게, 에서 윤 선배가 마른기침을 했다. 나는 무릎이 결렸다. 책에서 읽은 대로 상주와의 첫 대화를 시작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이다. 이쯤에서 일어나 빈소 밖으로 나갔으면 싶었다. 기억컨대 이토록 오랫동안 무릎 꿇고 상주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먼 데서 요양하시다 집에 오셨는데 닷새 만에 운명하셨어.”
“예.”
“집에 가고 싶다고 내 손을 잡으시기에 집으로 모셨는데…….”
윤 선배의 어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쉽고 편안해지면서 속도도 빨라졌다. 그제야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신 지 나흘째 되던 날 임종을 지키라며 자식들을 부르더라고.”
“어머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만큼 건강이 좋으셨나 봐요.”
“그랬지. 그랬는데…….”
윤 선배는 심호흡을 했다. 호흡이 깊어 영정을 두른 국화에까지 숨이 닿을 듯싶었다.
“불러놓고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아주 평화롭게 떠나셨어.”
“당신 스스로 숨을 놓으셨군요.”
“그런 것 같아. 올 해 아흔 한 살이신데,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떠나겠다고 당신께서 날을 받으신 것 같아.”
“그랬군요. 장지는 어디로?”
“화장하기로 했어. 당신 뜻대로.”
“예…….”
화장터와 납골당 얘기를 마칠 때까지 윤 선배는 담담하기만 했다. 눈물이 고였는지 미소가 잠겼는지 들여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표정을 유지했다. 좀더 시간을 두고 마주앉으면 표정이 달라지긴 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도 시 쓰세요? 빈소를 나서며 그 말을 꺼내려다가 꿀꺽 삼켰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문사 그만두고 뭐하고 살아? 윤 선배 역시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삽화기자라는 어정쩡한 자리 때문에 구조조정 때 잘리고 지금은 구멍가게만한 고물상 운영하면서 프리랜서 판화가로 활동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입에 오물거렸던 긴 답변을 그대로 뱉어냈다면 얼마나 우스웠을 것인가. 접견실 바닥에 앉았을 때처럼 손바닥에 땀이 뱄다.
“일이 있어서 일찍 가봐야겠어요, 선배.”
말을 꺼내고 보니 여기선 더 볼 일도 없으니 그만 갈게요, 라고 들릴 수도 있었다. 윤 선배에게 무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마주한 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기껏해야 오 분도 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시간 반가량 선배를 기다리며 그랬듯이 선배 역시 나를 추억했을까. 신문사 재직 시절에 가졌던 첫 번째 판화전 때 밤새 자작시 낭송을 들려준 윤 선배였다. 그에게 두 번째 판화전 초청장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일까.
“여보.”
신발을 꿰고 빈소를 나서는데 윤 선배가 형수를 불렀다. 검은 상복 치마저고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생 많으시죠?”
“아닙니다. 다 겪는 일인 걸요.”
“여보, 이 친구 작가야.”
“아, 예. 소설 쓰시는군요.”
“아니, 조각 작가.”
“예. 그러시군요.”
“이것저것 나무나 파면서 먹고 삽니다.”
“예. 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수는 빈소 밖까지 따라 나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사람에 대한 예의란 이런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듯한 형수의 태도는 말하자면 그랬다. 그 모습 때문에 윤 선배의 조각 작가를 깜박 잊을 뻔 했다. 불과 5분여 만에 문상을 마치는 관계. 한때 동지였던 판화가를 조각 작가라고 소개하는 관계. 그게 우리들의 관계였다. 가슴이 아렸다.
“안녕히 가세요.”
형수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극진(極盡). 형수에게 답례를 한 뒤 돌아서면서, 나는 극진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극진에도 향기가 있다면, 형상이 있다면, 오늘 저 검은 상복을 입은 낯선 여인에게서 그 두 가지 모두를 찾을 수 있겠구나……. 아흔한 살의 시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이승의 연을 스스로 끊어버린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할 만 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윤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형수는 허리를 굽혔던 자리에 선 채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장례식장 로비는 텅 비었다. 대개의 상가가 그렇듯 문상객들이 몰려드는 저녁까지는 한두 시간이 남았다. 지금쯤 윤 선배는 영정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어머니, 하고 부른 다음, 임종의 순간처럼 깊고 고요한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그 눈물 끝에, 살그머니 웃으면 안 될까. 평생을 모셨고, 평화롭게 떠나셨으니, 이제 좀 웃어도 되지 않을까.
맞은 편 건물에서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녀 서넛이 노인병원 입원실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흰 벽에 부딪쳐 반사되는 웃음소리가 떨어뜨린 안경을 밟은 것처럼 섬뜩했다.
주차장 밖 멀리, 서쪽 하늘이 살짝 붉어 있었다. 주홍 수채화물감을 적신 붓끝이 한 번 긋고 지나간 듯한 노을이었다. 고물상에 갈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오늘은 전선이 들어오는 날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전선을 부려놓고 밤엔 조각칼을 벼려야 한다. 나는 삼층 주차장으로 두 계단씩 뛰어올랐다. <끝>
---------------------------------------------------------
약력)
이강산
o 1959년 충남 금산 출생
o 1989년 『실천문학』(시), 2007년『사람의 문학』(소설)으로 등단.
o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물속의 발자국』
o 소설 「금반지」,「칼자국」,「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황금비늘」, 「즐거운 초상(初喪)」 , 「진주조개잡이」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