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 S여고는 청정구역이었던 만큼 규제가 엄격했다. 레스토랑 출입조차 보호자 동반 하에서만 가능했으며 낭자들은 -그것도 아주
단정한 옷차림으로- 교문 앞 구멍가게에서 핫도그를 사먹는 자율만이 주어져 있었다. 80년 초, 교복자율화 시국으로 모두 사복
차림으로 등교했지만, 예배당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남녀가 섞인 장면이 포착되면 학생부에 오그르르 불려왔다. 그 ‘사관과 신사’
구조 속에서 여고생들은 오로지 고지를 향한 강도 높은 학습만 강행했다. (그때만 해도 수험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10% 정도였으므로
나머지는 그냥 신기루 도전이었다.) 그렇게 입시와 사투를 벌이는 늦봄 5교시, 낭자들의 먹머루 눈꺼풀이 집단으로 사르르 내려앉을
시점이다.
- 1분만 자요. 네. 네.
천사표 표정으로 애원하면 두어 번 버티다가 못이기는 척.
- 그러면 3분만 주무시죠.
그 한 마디에 소녀들은 그대로 낭창낭창한 허리를 꺾었다. 58명이 삽시간에 쓰러진 청정 소녀들의 낮 시간이 진짜 아련하고 고즈넉했다. 풍향계 바람개비에 눈을 주며 서비스로 3,4분 더 여유를 더 준 다음.
- 눈을 뜨세요.
하면, 볼을 꼬집으면서 싸리회초리처럼 몸을 일으키는 입시 돌격대들의 실루엣 위로 어린 날의 여름 풍경이 겹치곤 했다.
60년대 국민학교 시절 여름날이었던가. 점심시간 이후 한 시간씩 강제로 잠을 재우는 교육부 방침이 있었다. 공을 차거나
자치기에 빠졌다가도 교정으로 새마을 노래가 울려퍼지면 모두 우르르 교실로 달려가 벌러덩 눕는 것이다. 사내아이들은 복도에 가로로
누워 잠을 잤고 여자 아이들은 교실 책상이나 의자를 맞대어놓고 잠을 잤다. 선생님들도 신문을 보다가 함께 잠 속으로 빠져들던
한낮의 취침 풍경을 천사표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마음만 먹었었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학교가 그렇듯 아슴아슴 풍경인 줄 알던 상태로 해직교사가 되어 절망 속에서도 가끔 예전의 필름을 되돌리며 시큰시큰 황홀에 빠지곤 했는데.
몇 학교를 돌아, 소도시 K학교에서 질곡의 삽화 한 토막.
복직 이후, 공립학교의 럭비공 특성과 캠퍼스마다 다른 질풍노도의 다양성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 주요인이다. 특히 그
학교에서의 수업은 잠퉁이들과의 전투였다. 수업 시작 10분쯤 지나면 사분의 일 가량이 책상 위에 고꾸라지는 바람에 날마다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다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그리고 연구수업 시즌인 오월 어느 날.
그 와중에도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치장’을 일체 금지시키겠다고 단언했지만 기실 압박감을 몰래 파묻는 중이었다.
- 교장님도 보시는 날인데 잘해야죠? 안 그러면.
길철이가 손바닥으로 목을 쌍둥 자르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열이 올라 일부러 뜨악한 표정으로.
- 평소와 똑같이 해라.
더욱 싸늘하게 잘라버렸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진짜 평소와 똑같게 했다, 가 아니라 좀더 오버했다, 가
아니라 많이 심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뒷자리에 늘어선 정장 차림의 참관인단 분위기에 눌려 최소한의 예법을 지킬 줄 알았는데 완전
착각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은 몇 놈은 차치하고라도, 길철이는 아예 교장님이건 참관 스승이건
아랑곳없이 만화 삼매경에 몰입하려는 준비 동작이다. 그보다 먼저 시작 3분쯤 지났는데 두환이가.
-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나왔기에, ‘욱’ 터지려는 뚜껑을 누르고 재빨리 보냈던 상태다. 이번에는 민수가.
- 머리가 아파서 양호실 좀.
이놈은 ‘하필 이때’ 하는 표정을 북 긁어주며 그대로 눌러 자리에 앉혔다. 그 좌충우돌 직전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참관하러 온 선생님들 대부분이 잡무 찾아 한 분씩 교무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참관인이 있건 없건 비디오 카메라가 그대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어쨌든 ‘평소 그대로’를 내세우려던 나는 완전히 팥죽이 되었다. 실수였다. ‘오늘만이라도 다르게 하자’라고
허심탄회하게 경각심을 주어야 했다.
나중 얘기지만, 비디오를 판독해보니 벗들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요소요소에서 똬리 트는데 장년의 평교사 혼자 노란 잣대로
연신 잠든 옆구리를 찔러대는 장면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퉁이 선수들은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도미노처럼 하나씩 머리를
박는 스크린 뿐이다. 완전히 졌다. 그 리얼 현장의 비디오 구경꾼은 국어 교사 한 사람뿐이었고.
- 선생님이 평소와 똑같이 하라고 했잖아요.
그 얘기에 참다가, 참다가, 그야말로 끝까지 참았다.
다음 장면은 중년의 어느 날, 장학협의회의 마지막 단계인 평가 회의.
장학님의 문장이 예상보다 한참 늘어지는 것이다. 미주알고주알 개똥철학까지 당겨지면서 스승들의 머리가 어항처럼
출렁이다가 책상 위로 엎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장 훈사가 끝난 줄 알았던 장학님이 다시 인쇄물을 돌리더니 성경
기도문까지 줄줄 읽어가면서 은총 나누기 최면에 빠지는 것이다. 그 때 나의 눈에 포착된 건 교감님 옆자리 거구의 교무님.
교무님의 농구공 두상이 새근새근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콧구멍으로 숨쉬는 소리가 커지면서 장학님의
주기도문 소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톤을 조율하며 박자를 만들어냈다. 그 ‘몰래 카메라’ 장면을 나 혼자 포착하며 웃음을 참느라
벌겋게 입술을 틀어막아야 했다. 마침내 평가회가 끝나서 스승들이 해방감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박수를 치는데 농구공 교무님은
그제야.
‘쁘이이이이잉’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을 열더니.
- 얼러, 집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면서, 뽀득뽀득 목을 돌리는 것이다.
푸헤헤헤헤헤헤헤.
폭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정작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이다. 교무실은 무인도처럼 고즈넉했고.
나는 모임이 예닐곱 개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남녀 혼성팀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초로까지 모임 과정의 이차구차 사연은
생략하고 - 아무튼 우리 조직의 한 팀이 1박 2일로 연수에 몰입하는 늦가을이었다. 남자는 큰방에서, 여성동지들은 칸막이문
작은방으로 숙소를 정했는데, 문제는 술이다. (우리 조직들은 대개 술 이외에 아무 특기가 없다.) 남성 숙소에 차려진 술판이
길어지면서 약골 사내부터 하나씩 보이는 공간마다 볏단처럼 쓰러지는 바람에 잠자리의 남녀 구분이 흐려진 것이다. 그래도 아낙네 팀과
한 지붕 아래에서 거(居)한다는 현실에 따땃한 기분도 들었는데 문제는 삼십 대 ‘김님’이라는 골드미스의 코 고는 소리였다.
방이 넓었고, 김님과 나는 7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언제부터였나, 잠귀가 유난히 옅은 내가 코 고는 소리를
느끼면서 소음과의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여기저기 열댓 명의 풀자루가 구겨진 아스라한 공간, 그 속에서 전전반측 뒤척이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니는 생김새와 완전 딴판이었다. 문학소녀 출신 아가위 눈빛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원시의 굉음이 터지는 것이다.
숨을 내뿜지 않고 빨아들이기만 하는 특이 여성 체질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무튼 버텨내야 한다, 크크 풋팟팟 포효의
굉음을 보리이삭 흔들리는 소리처럼 아삭아삭 소화시켜야 한다. 아무튼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뚫고 들어오는 저 ‘노동의 고동
폭탄’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으므로 나 홀로 이를 악물 뿐이었다. 나 홀로 주방과 가장 가까운 모서리에 고개를 박고 칼잠으로 눕힌 채
‘신이여, 나에게 기면증(嗜眠證)에 빠지게 해주소서’ 기도했지만 말짱 허사였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먼동이 트는 신새벽.
커튼 사이로 먼 동이 틀 즈음 모두 눈을 떴다. 마침내 김님도 깨어나더니 아삭아삭한 ‘익은 배 미소’와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로.
- 편안히 주무셨어요.
새벽 인사를 하며 나머지 동지들과 화사한 미소를 주고받는 중이다. 다시 예전의 양갓집 규수의 일상을 펼치는 창문 너머로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열쇠를 놓고온 오선생 이야기다.
모든 아파트가 그렇듯 그니네 현관도 안에서 고리를 걸면 바깥에서 열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 어쨌든 오선생은 고3
수험생 아들내미가 당연히 열어줄 것을 기대하며 느긋하게 벨을 눌렀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 응답이 없었다. 처음엔 깜빡 조는
중이려니 했다. 다시 문을 두들겼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분명히 몇 시간 전에 아들에게 ‘집에 간다’고 통화했는데도 ‘꿩
구어먹은 소긱’이라서 마음이 급격히 초조해졌다.
발길질로 문짝을 팡팡 차는데도 소식이 없자 이번에는 전화를 걸러 내려갔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아파트 입구
공중전화에 카드를 넣고 연신 다이얼을 눌렀지만 도통 감감 무소식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긴 거다. 화재 사고일까. 앞 동
꼭대기층에 올라가 계단 창문으로 살펴보았지만 화재의 흔적이 없으므로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도둑이다. 아니다, 무장 강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죽음’이란 단어가 ‘퉁’ 튀어올랐을까. 오선생은 화들짝 놀라며 아까보다 더 거칠게 문짝을
두들긴다.
나이 19세. 85킬로의 푸짐한 몸집에 태권도 3단.
아들은 무단 침입한 강도와 덩치를 믿고 싸우다가 예리한 ……아아, 오선생은 오슬소슬 떨고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사시미칼을 설레설레 지우고, 몽키스파너나 전기충격기로 대체시켰는데도 시뻘건 피를 흘리는 아들의 스크린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죽었구나. 그 순간 아들의 19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오선생은 혼자서 정신없이 뇌까리기 시작했다.
넌 착했다. 나의 모든 것이었다. 네가 울거나 공부하거나 밥을 먹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넘어지던 그 모든 게 나의
행복이었고 에너지였다. 다섯 살 때인가. 딱 한번 때렸다. 네가 TV에 네 시간이나 매달리다가, 아무리 밥을 먹으라고 다그쳐도
움직이지 않기에 ‘밥풀이 묻지 않은 밥주걱’으로 딱 한번 때렸던 기억을 진심으로 반성하며 손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다.
아파트 사람들이 ‘웬 일인가’ 갸웃대며 몰려와 오선생의 식은 땀 흘리는 몰골을 보며 창백하게 굳어버린다.
- 착한 아이인데.
아파트 다른 라인 사람들까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아파트 경비실 아저씨가 드릴을 가져온다. 타르르르 타르르르. 착암기 굉음과 함께 뚝딱뚝딱 해부된 자물쇠 꾸러미를 통째로 들어내었다.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학력고사 참고서에 코 박고 엎어진 채 복날 개처럼 드르렁드르렁대는 고3 수험생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아들은 아주 멀쩡했다.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뜨더니.
- 에이 시끄러워서 한숨도 못 잤네.
코딱지 후비며 인상을 구겼을 뿐이다. 사월과 오월의 접점, 오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초록을 보았다.
아내는 잠이 많다. 아들과 딸도 엄마를 닮아서 잠에 빠지면 도저히 일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버티는 경우는 책상머리에
있을 때뿐이다.) 그네들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15년 전쯤이 가장 바빴다. 두 아이를 키우랴, 전교조 해직교사 문제를 배낭처럼
달고 다니랴, 엄청난 분량의 술잔을 소화 시키랴, 게다가 아내의 늦잠 문제도 끼어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 전쟁 돌입을 위한 ‘기상
다그치기’는 주로 내가 시도했다.
또 봄이었고, 다섯 살 내 딸 주현이네의 ‘햇살 어린이집’ 봄날 시화전 주제는 ‘행복한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늘도 봄날이고 고사리 손을 잡은 엄마 아빠들의 표정도 봄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즐비하게 늘어진 시화를 살피며 풋내들의 깨가
쏟아지는 그림과 글자들의 감회에 젖는 중이다. ‘우리 집은 행복해요.’ ‘아빠도 행복하고 엄마도 행복하고 금붕어도 행복해요’
‘아빠 곰은 날씬해, 엄마 곰은 뚱뚱해, 아기 곰은 너무 귀여워’ 그런 웃음꽃 풍광들을 사월의 하늘로 번지는 중이다, 좋다.
그런데, 딱 한 편 이질적인 액자가 가로막는다. 내 딸의 시가 적힌 액자다.
선생님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엄마가 늦게 일어난다고 아빠가 베개로 때렸어요.
아빠, 엄마를 계럽히지 마세요.
여버, 빨리 일어나세요, 해요.
그런 리얼 문장이 있었다. 세월이 쏜살처럼 흘렀고 ‘고뇌하는 요정’은 지금 등줄기 시퍼런 돌고래 젊은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가끔 상큼했던 젖내나는 동시를 떠올리며 눈시울 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