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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5대 원리: 1 오직 성경, 2 오직 그리스도, 3 오직 은혜, 4 오직 믿음, 5 오직 하나님의 영광 |
1483. 11.10.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더(자영농민)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01.-1505.5.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05.7.2.
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
1505.7.17.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8.
겨울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독일 지역 수장인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불려와 교양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윤리학」에 대해 한 학기 강의하였다.
1510.
종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당시 '교황의 교설(도그마)에 너무나 깊이 심취해 있던' 루터는 로마에서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공덕에 참여하고자 미사도 집전하고 성당, 사원, 카타콤, '거룩한 계단'을 마치 '미친 성자처럼' 방문하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회고하기를 이 거룩한 도시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오, 로마여! 축복받은 도시여!'라고 외쳤다"고 하였다.
1511.-1512.
로마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1511년 여름에 다시 비텐베르크로 옮겨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3일 후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경신학 교수가 되었다.
1513.-1518.
그는 첫 성경 주해로 시편을 택한(1513-15) 뒤 이어서 로마서 강해 (1515-16), 갈라디아서 강해(1516-17), 히브리서 강해 (1517-18)를 계속했다. 수도원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용서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루터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초기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저술들, 옥캄의 윌리암의 신학 학파 등의 연구를 통해서 발전했다. 결국 그는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1517.10.31.(34살)
루터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걸었고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1518.4.26.
95개 논제 발표 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가톨릭 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루터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어거스틴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후에 로마에 이단고소를 했다.
1518.10.12.-1518.10.14.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이 만남은 면죄부의 돈과 관계있는 푸거 가문의 집에서 일어났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사들보다 오히려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1519.7.4.-1519.7.14.
라이프찌히 논쟁 - 엑크 신부가 공개적으로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찌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인다.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찌히 대학을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회의(1414-18)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엑크는 라이프찌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6.24.
이 날에 발표된 교서에서 교황 레오10세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하였다.
1520.8.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은 외부적인 개혁을 다룬다. 루터는 세속정부가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데 주도권을 취하도록 권유하였다. 영적계급이 세속계급보다 우월하다는 중세적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제사장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루터는 교황주의가 '세 개의 담들'을 세워 개혁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만인 제사장설"은 이 담들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1. 영적 권위자들이 세속 권위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는 만인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2. 교황만이 성경의 최종적 해석자라는 것 - 사람은 다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성서해석에 있어서 무오인 것은 성경이다.
3. 교황이 공의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 니케아 공의회의 경우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한 것으로, 영적인 지배자가 아닌 세속적인 지배자가 소집한 것이다.
1520.10.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신학 자체의 중요한 개혁, 특히 성례전 교리 및 집행과 관련된 개혁을 다룬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그 권력의 근거로서 '일곱 성사'를 창안하고 이용해 왔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특히 가톨릭의 성만찬론 비판에서 세 가지 '포로 상태'를 말한다.
1.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하는 것
2. 화체설
3. 미사가 희생제물이라는 것
한편 루터는 성사의 수를 일곱에서 세례와 성만찬, 두 개의 성례전으로 줄였다. 루터가 생각하는 성례는 다음의 세 가지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례전을 통해서 신앙이 강화되어져야 하며, 이것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약속(언약)이며, 이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1520.10.10.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1520.11.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는 두 개의 극단적인 명제를 다룬다.
1.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2.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복음이 주는 절대적인 자유와 이웃을 향한 절대적인 섬김의 모습 사이에는 전혀 갈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크리스천은 개인의 내면이 자유로워질 때, 다른 사람에게 대한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1520.12.10.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루벵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1521.1.3.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가 로마교황 레오10세에 의해서 공포되었다.
1521.3.6.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현자를 선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5세 황제는 루터에게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초청장을 보내었다. 루터는 이 회의에 참석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1521.4.17.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하여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고,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 첫 번 질문에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으며, 두 번째 질문에 하루의 여유를 더 요청했다.
1521.4.18.
다음날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카를 황제는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법으로도 죄인이 되었다. 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레데릭 현자가 미리 주선한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그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1521.12.-1522.9.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이 기간동안 성경 주해,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그리고,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루터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던 멜랑히톤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고전어 학자였지만 1521년에 루터의 신학을 ‘신학 총론’라는 책을 통해서 체계적인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1522.3.6.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그의 대학교수 동료인 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해서 설교하였다. 비텐베르크의 소요 문제를 복음적으로 잘 해결한 루터는 개혁을 위해 같이 힘쓸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1524.
이후로 농민전쟁과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은 개혁의 속도를 지연시키고 개혁의 일부 추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였다. 루터의 개혁 운동은 1517년- 20년 사이에, 가톨릭과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칼슈타트, 토마스 뮌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
1-25),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25)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1525.6.13.
루터는 42세에 되는 해에 16년 연하의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와 결혼을 했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526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개최, 카를 5세는 1529년 제2회 국회를 소집하여 루터를 파면한 보름스협약의 엄수를 명령하였다. 이때 다수의 가톨릭파가 카를 5세의 조치를 찬성한 데 대하여 소수의 그리스도교파(5대제후, 14도시)는 종교문제를 다수결로 정하는 부당성을 비난하는 항의서(프로테스트)를 제출하였다. 신교도를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는 유래가 여기서 생겼다.
1527.
수도승으로서의 혹독한 고행, 아우그스부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에서 보냈던 압박의 시간들로 인해 루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만성질환에 시달리던 그의 병이 1527년에는 더욱 심각해져 설교도 중단해야 하는 일까지 생겼으며, 8월에는 비텐베르크에 전염병까지 돌았으며, 이 때, 루터는 다른 병이 걸렸었다.
1527.-1528.
병마와 우울증과 싸우면서도 루터는 교회 방문길에 나섰다. 1527부터 28년까지 작센 지방의 교회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찰하는 동안 발견한 교인들의 영적 무지는 충격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가톨릭으로 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복음의 자유가 부여하는 도덕적 책임을 깨달으며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방문에서 돌아온 루터는 교인들의 교육을 위해 '소교리문답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썼다. '소교리문답서'는 가정에서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공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대교리문답서'는 특히 어른과 교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1529.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에서는 쯔빙글리(1484-1531)가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특히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단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에 불과했으나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이미 1524년 이후로 여러 신학자들 간에 진행되어 왔었는데 이러한 신학적 분열은 개혁 진영의 분열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헷세의 필립공은 신학의 일치를 이루려 1529년 10월 1일부터 4일간, 말부르크 회담을 주선하여 신학자들을 초청하였다. 말부르크의 회담에서 신학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15개 조항'중 대부분에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마지막 조항의 마지막 부분인 성만찬에서 '주님의 참 몸과 참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실재로 임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1530.6.20.-1530.11.19.
한편 카를 5세는 이듬해 개신교도들과의 논쟁을 종식시키려 아우그스부르크 국회를 소집하였다. 모든 것이 법과 정의에 따라 진행될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작센의 선제후인 요한은 소집에 응하면서 먼저 루터와 일단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국회에서 제출할 "토르가우 조항"을 작성케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으로 알려지게 될, 그의 신앙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결하였다.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은 루터의 조언을 기초로 그의 제자인 멜랑히톤이 작성했다.
1531년 2월
독일의 루터파를 중심으로 한 슈말칼텐 동맹 체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으로, 헤센 백작, 작센 선제후(選擧侯)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제후와 말부르크, 브레멘 등의 도시 사이에 6년 기한으로 체결되었다. 1536년 안할트 ·포메른 ·뷔르템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하노버 ·함부르크 등의 도시도 가맹하여 독일 그리스도교 세력의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위스 개혁교회의 분열 때문에 힘이 약화되었고 황제는 종교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슈말칼덴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교측은 대패를 당하고 이 동맹도 해체되었다. 쯔빙글리는 이 시점에 카펠 전투에서 사망했다.
1545
로마 카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 개시됨(1563년까지), 반종교개혁운동 시작, 로욜라의 예수회 활동 시작
1546.2.18.
파란만장한 삶을 산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일기 63세였다.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루터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독생자를 주셨으니…"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의 몸이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루터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성(城)교회에 안치되었다.
[출처] 루터(M. Luther)생애와 사상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