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순례 04.나라 호류지(상)

[地藏行者]

<사진설명>정문에서 바라본 호류지 전경. 멀리 오층탑과 남문이 나란히 보인다.

호류지는 고대 일본과 한국의 두 왕자, 즉 쇼토쿠 태자와 여창 왕자의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는 사찰이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쇼토쿠 태자가 수많은 살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섭정의 지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아버지를 위해 훌륭한 절을 짓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백제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머리가 잘려나간 아버지 성왕의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했던 왕자 여창은 백제왕이 되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불상으로 조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환생한 땅 일본에 아버지의 조상을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이곳 호류지는 백제 위덕왕과 일본 쇼토쿠 태자라는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사내의 부친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지금부터 그들의 드라마틱한 역사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서기 550년경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한강 지역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진흥왕, 백제에서는 성왕이라는 야심만만한 군주들이 서로를 향해 칼끝을 좁혀가고 있었다. 김포평야를 끼고 있는 비옥한 땅이자 중국과 연결되는 관문인 한강 지역은 삼국 중 어느 나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의 심장부였다.

고구려 남하정책에 엄청난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연맹을 맺고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들은 고구려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격했다. 결국 백제는 551년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격해 옛 영토 6군을 회복하고, 신라도 한강 상류의 죽령 밖 10군을 점령했다. 하지만 2년뒤 백제는 갑작스런 신라의 침략을 받고 고구려로부터 회복했던 한강 하류의 옛 영토를 상실했다. 이 땅은 백제인들에게 있어서는 비류 왕자를 비롯한 조상의 얼이 스며있는 성지와 같은 땅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백제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스물 아홉 패기만만한 백제 왕자 여창은 아버지 성왕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모아 한강지역으로 진격했다. 먼저 553년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한 여창 왕자는 554년 신라 서라벌에서 추풍령을 넘어 신주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점인 관산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이곳이 포위되면 추풍령 이북의 땅이 모두 고립될 위기상황이었다. 이에 진흥왕은 전력을 다해 관산성 수비에 온힘을 기울였고, 전투는 나날이 치열해져만 갔다.

이때 신라군은 백제 성왕이 오랜 전쟁동안 고통을 겪고 있을 아들 여창을 격려하기 위해 극비리에 관산성으로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신라군은 곧바로 성왕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일본서기』는 당시 신라가 나라의 모든 군사를 징발해 성왕의 퇴로를 막았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성왕은 퇴로가 막힌 채 신라군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백제에 대한 분노에 불타오르던 신라는 백제 성왕을 고도(苦都)라고 하는 천한 노비의 손으로 참수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는 목도 없는 시신을 백제로 돌려보냈다. 백제 성왕의 목은 경주 북청이라는 관청의 계단 밑에 묻혀 신라인들의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자신의 탓으로 목숨을 잃고 목마저 달아난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어야했던 태자 여창. 그가 흘려야 했을 피눈물을 어찌 가늠할 수 있으랴. 그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이제 속세를 떠나겠노라고, 그리하여 승려로서의 삶을 살겠노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국왕을 잃고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여창의 출가를 눈물로 만류했다.

“저하마저 이 나라를 저버리시면 저희 백성들은 이 땅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야 합니다.”

<사진설명>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기려 만들었다는 호류지 구세관음상.

왕자 여창이 결국 출가를 포기하고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백제 27대 위덕왕이다. 위덕왕은 보위에 오른 직후 100명의 젊은이들을 출가시키고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부여 능산리에 절을 지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상을 본떠 ‘구세관음(救世觀音)’이라는 이름의 불상을 조성했다.

이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나 바닷길을 건너 일본 땅으로 다시 이어진다.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위덕왕은 자신의 아들 아좌 태자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일본 땅에 다다른 아좌 태자는 “일본 땅에 성인이 한 분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에게 인사드리기를 원한다”며 당시 섭정의 위치에 있던 쇼토쿠 태자와의 접견을 청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쇼토쿠 태자는 즉시 아좌 태자를 궁궐 안으로 들게 했다. 쇼토쿠 태자를 본 아좌 태자는 크게 놀라면서 엎드려 큰절을 했다.

“크게 자비로운 구세관음께서 동쪽 해 뜨는 나라(日本)에 오셨으니, 앞으로 수승한 가르침을 49세까지 펴시면서 부처님의 등불을 밝히고 연설하시게 됩니다.”

아좌 태자는 쇼토쿠 태자를 보는 즉시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해서 만든 불상인 구세관음상과 쇼토쿠 태자의 모습이 똑같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백제로 돌아간 아좌 태자는 아버지 위덕왕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내 아버지가 왜(倭)에서 불법을 전하는 관음으로 현현하셨구나.”
위덕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본떠 지극정성으로 조성한 구세관음상을 일본으로 보내 호류지에 안치토록 했다.

여기까지가 일본 고대문헌 『부상략기(扶桑略記)』와 『성예초(聖譽抄)』에 기록된 구세관음이 호류지에 건너가게 된 배경 이야기다.

아좌 태자는 이후 일본에 머무르며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아좌 태자가 그린 ‘성덕태자와 두 왕자 상’이라는 그림은 지금도 호류지에 남아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가 자신의 아버지 요메이 천황을 기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조성한 사찰이다. 언젠가 아버지를 위해 만세에 길이 남을 사찰을 세우리라 다짐했던 쇼토쿠 태자는 호류지를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수많은 사찰 건축가와 기사, 사신과 스님들을 초빙했다. 백제로부터 구세관음상이 도착한 것은 사찰이 완공되기 3년 전인 604년이다.

구세관음상이 안치된 몽전(夢殿)은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팔각정으로 손꼽힌다.

이 전각이 몽전 즉 ‘꿈꾸는 방’이라 불리게 된 것은 쇼토쿠 태자가 명상을 하다 꿈속에서 부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설화를 기려 지었기 때문이다.
1천여 년 전 일본과 백제의 두 왕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호류지와 구세관음은 이렇게 하나의 운명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졌고,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두 나라의 깊은 불연을 입증하는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은 백제도 신라도, 아스카 시대도 역사 저편으로 흘려보냈다. 위덕왕의 애통함을 간직한 능산리의 절은 이제 이름조차 잊혀진 황량한 절터로 남았고, 최근 그곳에서 출토된 용봉 문양의 아름다운 향로(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만이 부왕의 죽음을 비통해했던 여창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구세관음을 친견하고 나오니 몽전의 처마 끝으로 오후의 햇살이 포말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 사찰 중에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왕자들이 조성한 사찰이 유독 많다. 그만큼 두 나라의 불교는 부모자식간의 깊고 질긴 인연 속에서 피어난 것이랄 수도 있겠다.

몽전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인연이 참으로 깊고 오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 살아생전 아버지의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모든 자식 된 이들의 공통된 마음이 아니겠는가.

지금쯤 일본으로 떠난 여식 걱정에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내 아버지의 얼굴이 구세관음상 위로 흐릿하니 겹쳐지고 있었다.

地藏信行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