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에 우리 집은 자개장롱을 큰맘 먹고 장만했었다. 검은 옻칠을 바탕으로 화사한 공작 두 마리를 자개로 문짝에 큼직하게 아로새긴 자개장롱이다. 얼마 전에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아내가 그것을 버리고 가자고 할 때 나는 펄쩍 뛰었다. 그 시절 백 만 원이 넘는 고가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장롱과 함께 한 내 청춘 시절의 추억조차 고스란히 지워져버릴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해묵은 아파트를 사서 리모델링을 하고 이사하였다. 인테리어를 주관하는 사람은 손재주가 놀라운 목수였다. 아내는 그 사람이 예전에 고급 자개장롱을 만드는 목수였다고 나중에 들려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요즘은 자개장롱을 구하는 이가 없어서 직업을 리모델링의 인테리어로 바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특별한 세공 기술이 필요한 자개장롱이 천덕꾸러기가 아닌 골동품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나는 아내가 오랜 정을 들인 낡은 자개장롱을 버리지 않은 것에 무엇보다 고마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나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의 젊은이들 사이에 초콜릿처럼 달콤하나 쉬 녹아버리는 사랑보다는 은근하면서도 깊은 옛 사람들의 사랑이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소설가 P씨가 생각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부산에 사는 여학생을 펜팔로 사귀었다고 하였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마 가을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어느 대학교의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대회에 나가 시를 써서 그는 장원을 하였다. P는 소설도 쓰고, 더러는 시도 쓰면서 대학 시절을 문학도로서 습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산의 여학생과는 사흘이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대학 2학년, 아니면 3학년이었을까. 그는 그 때까지 써 모은 시들을 시집으로 내고 싶었다. 아직 문단에 등단하지도 않은 그에게는 시집을 내고 싶다는 것은 안타까운 열망일 뿐이었다. 그는 모조지를 한 묶음 사서 시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하였다. 그의 누나가 시 편편을 타자로 쳐주고 표지는 그가 손수 만들어 비단으로 장정을 하였다. 모두 150 페이지나 되는 제법 볼륨 있는 시집이었다. 그 시집을 내게도 자랑스레 보여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시집의 제목이 무엇이었던가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을 부산의 여자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사정밖에는.
P는 그 뒤 부산에 한번 놀러가서 그 여자 친구를 만나고 온 눈치였고, 그 이후로 그들은 사이가 소원해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었다. 그 뒤 P는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고 이듬해에 고향의 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취직해서 나와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부산의 여자 친구가 먼저 결혼하게 되었고, P는 그로부터 5년 뒤에 결혼하였다고 하였다.
지난 달에 나는 전주에 가서 P를 만났다. 40 년도 넘는 세월을 우리는 금방 뛰어넘어 다시 고등학생으로, 홍안의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요즘은 소설만 쓰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그는 빙긋이 웃고 잠시 말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시를 곧잘 쓰던 그였으므로 '소설만 쓰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P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 내 시집 『저녁 노을에 서다』를 본 적이 있던가?"
그것이었다. 그의 누나가 타자로 쳐주고 그가 장정을 한 시집, 부산의 여학생에게 선물로 부쳐주었다는 시집. 그는 가방에서 낡은 수제품의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니, 어떻게 이것이 P의 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나도 이 시집을 40 년만에 다시 보게 된 셈이지. 사연은 이 다음 내 소설을 기대해주게."
갑자기 나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 사정이야 어떻든 이 낡은 책 한 권을 40 년간 고이 간직해온 사람의 마음씨에 나는 그만 목이 메이는 것이었다.
첫댓글 그 소설이 궁금합니다.
사십여 년 전 펜팔을 통해 받은 마음 몇 통
태워버린 손이 야속합니다
아~~ 너무 좋은 글
가슴에 담아봅니다. 저도 목이 메입니다.수필은 이렇게 써야 되는구나, 깨달음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