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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30 함라 수동마을 3부잣집을 방문하다≫
익산에서 가까운 함라면에 99칸 고가 3가구가 있는지는 11/26 백제의 숨결 행사로 둘레길을 개방하는 홍보 팜플랫을 보고서야 알았다.
99칸 3부잣집은 1900년대 함라에서 만석군의 부호로 부호답게 99칸 집을 짓는데 경복궁을 지었다는 목수를 불러다가 당시 최고의 금강산목재로 최고의 목공기술자로 건축했다니 함라지역에서 큰 부자라는 이해 할수 있겠지요.
99칸 집을 짓는데 목재와 목재 연결부분이 못이 하나도 않들어가고 깍아서 이으매를 전부 맞추었다니 당시 목공기술은 최고라고 할수 있으리라.
99칸 3부자집이 있는 유명한 함라마을은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고 부를 가져온다는 와우산이 마을전체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부자가 많은 마을이었는데 그때의 영화는 간곳이 없지만 그 흔적인 돌담과 가옥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해영가옥 안마당에서 사진을 한컷찍다. 안채를 보니 웅장했던 옛모습은 간데없고 사람이 살지않고 있어 모든문이 굳게 잠겨 있다>
<관리가 되지않아 건물이 훼손되고 있는모습이다. 건물은 일제시대건물이라 일본풍이 역력하다>
<언제심은 소나무분재인지 세월속에 소나무도 기울어지나 보다>
<조해영가옥입구에 피라칸타의 주홍색 열매가 탐스럽게 느껴져 사진한켯을 촬영하다>
<조해영가옥밖 돌담길에서 사진 한켯 착칵. 옛것을 느낄수있는 한적한 돌담길이 요즘에는 더 좋다>
<김육불망비>
아래 김육불망비석은 조해영가옥 입구에 세워져 조해영가옥과 함께 영욕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 비석의 건립년대는 조선 효종10년 1659년으로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비는 기단, 비신, 이수로 구성되었으며 기단은 화강암,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의 전면에는 중앙에「영의정금공육경요보민인덕부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그 좌측 하단부에 「산부대(山不大) 상공(相公) 해부심(海不深) 고금(古今)」이라는 명문과 후면에 「기해(己亥) 이월(二月)」이 음각 되어 있다. 이수에는 양각으로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전면 중앙에는 두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주변을 이무기의 몸체가 감싸고 있다.
이수의 후면 중앙에는 국화무늬가 있고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담장 밖에서 김안균가옥안 열녀문을 찰칵하다. 열녀문은 과부의 수절을 기리거나 여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붉은 문을 말한다>
<그옛날 부를 나타내는 넓은 장독대이다.>
<마루 한쪽을 살펴보니 과연 옛날 만석꾼부호를 표현하듯 10여개의 두지가 마루에 놓여있다>
<집안대지가 무려 2500여평이나 되어 당시 대부호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이제는 그옛날의 명성은 사라지고 정부에서 보조를 받아 건물을 보수하는 형편이다. 큰고택에서 사람살기가 불편하여 관리하는 후손은 한쪽귀땡이에 작은 건물을 지어 살고 있다>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
근대 최고의 명창으로 불리는 임방울의 호남가(湖南歌) 중 한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함열하면 지금의 함열읍을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임방울이 지칭하는 함열은 지금은 삼부잣집 돌담길로 유명한 함라(咸羅)의 함열리를 말한다.
함라의 함열은 역사적으로도 깊이가 있는 고장이다. 1409년(조선 태종9년)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安悅縣)이라 하였다가 7년 뒤 다시 함열현으로 복구되어, 이후 조선 5백년 동안 현청(縣廳)소재지로서 관아가 이곳에 있었으며,
1895년(고종32년) 함열군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익산군 함라면으로, 1995년 도농통합으로 익산시 함라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관아지에는 동헌(東軒), 내아(內衙), 책실(冊室), 향청(鄕廳), 장청(將廳), 객사(客舍), 질청(作廳), 형리청(刑吏廳),사령방(使令房), 통인청(通引廳), 현사(縣舍), 향교(鄕校)등이 있었으며, 현감아래 6방(吏戶禮兵刑工房)이 지방행정을 수행하였고, 함라노소의 함열현 선생안, 호남읍지, 함열현지에는 1453년(단종 1년)이후 현감의 명단이 기록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렇듯 깊이가 있는 고장 함라의 함열리는 부자도 많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조해영, 김안균, 이배원 가옥이 그 증거다.
한 마을에 서로 붙어있는 이들은 모두 만석꾼 집안으로 집 규모 또한 90칸이 넘었다고 하니 마을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가는 대목이다.
함라마을의 돌담길에 들어서면
♬마을입구에 제일먼저 눈에띄는 조해영 가옥
★임천(林川) 趙씨, 정읍군수 지낸 조한기 3만석 거부, 조해영은 1만석 상속, 조해영 가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을 이른다. 조해영의 13대조가 함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 씨 집안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 씨 집안이 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이다. 조해영의 고조부부터 시작한 부(富)는 증조부 조한기(1903년 사망)에
이르러 3만석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조한기는 사천군수에 이어 정읍군수를 지내며 선행을 많이 베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읍군수 재직시 군청 건물이 없자 사재를 출연하여 건물을 짓고, 흉년으로 백성이 굶자 사재 500석을 나눠주기도 해,
조정에서는 정읍군수의 품계를 올려주고, 정읍군민들은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때부터 조 씨 집은 ‘정읍집’이라 불리게 된다. 택호(宅號)가 정해진 것이다. 조한기의 아들이자 조해영의 증조부인 조준식(1926년 사망)은 구한말 중추원의관 벼슬을 했다.
큰아들 조해영은 아버지 조용규(1882~1953)로부터 1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조용규가 자식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자상속에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조해영의 아버지 조용규는 서울에 집을 사 자식들을 교육을 하였다. 서울에 자식교육을 위한 가옥역시 대단했다. 12대문 집인 이 집은 탁지부대신을 지낸 이용익 대감의 소유로 종로구 당주동에 위치했다고 한다.
★조해영 家 고조부부터 단계적 건축, 이배원가옥 모델은 거짓
이른바 조해영 家(전라북도문화재자료121호)로 불리고 있는 지금의 함열리 집에 대한 건축이야기도 흥미롭다. 일부에서조해영 가옥이 일제강점기 때 농장을 경영해 부를 축적하고, 이배원 가옥을 모델로 지어진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조해영의 동생 조교영은 밝히고 있다.
조해영 家는 조해영의 고조부부터 단계적으로 지어졌으나 실제 조해영이 지은 것은 없다. 동쪽채는 고조부가, 큰방채는 증조부가 지은 것이다. 안채와 양옥채는 할아버지가, 새방채와 신당, 농장채는 아버지가 지었다고 조교영은 증언한다.
특히 조해영의 할아버지는 안채와 양옥채를 지을 당시 궁궐을 짓던 당대 최고 목수를 불러들여 3년에 걸쳐 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름도 생소한 양옥채는 무엇일까.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듯 한식, 일식, 양식이 혼합된 건축양식이었는데 아쉽지만 지금은 헐리고 없다. 이 건물은 앞면에 양옥형식을 도입하여 카페트를 깔았으며, 왼편은 다다미를 설치하고, 오른편은 한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내의 가구와 목욕통 등 소품은 탁지부대신 이용익의 집에서 가져온 서양식, 일본식 물건들로 채워졌다고 하니 궁금하기 그지없다.
가마곳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가마곳간이란 요즘으로 치면 주차장을 말한다.
두 명이 메는 2인교부터 4인교, 8인교가 이곳에 보관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헐리고 없다. 매사냥을 위한 사람도 고용했다고 한다. 순창사람인 박종근을 입주시켜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조해영의 아버지는 매를 동원해 사냥에 나서고, 조해영은 5연발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섰다고 하니 조 씨 家의 영화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석꾼답게 농장창고도 대단했다고 한다. 창고의 규모가 무려 100평에 달했으나 지금은 이도 헐린 상태임.
★농지개혁, 한국전쟁으로 쇠락의 길
지금 12채의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채, 새방채, 농장채, 소슬대문, 행랑채이고 나머지 7채의 건물은 헐려 아쉬움이 있다.
영화를 누리던 조 씨 家가 이렇듯 쇠락에 이른 것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 그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이후 가세가 급전직하하여 생계가 더욱 더 곤궁해지자 영화를 자랑하던 12채의 집마저 뜯어 팔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조교영은 밝혀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금은 후손들이 모두 떠나고 남아있는 건물은 조해영의 막내아들 조인호(덕성여대교수) 씨 명의로 등기가 되어있다. 정부는 전국 10개의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조 씨 家를 비롯한 함열리 삼부잣집 길이다.
만석꾼의 영화를 자랑하던 집들은 일부는 헐리고 폐허가 되어있는데 새빨간 피라칸사 열매만 그때의 영화를 추억하는듯 애처롭게 피어있다
♬김안균 가옥. 이집은 들어가 볼수 없다. 후손들이 외지에서 살고 있어 대문이 잠겨 있다.
이 집의 건축년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규모를 보면 대지가 2,318평에 건평만 188평이 되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家屋)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는데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狀)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배원 가옥. 여기도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이 집은 현 관리자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이씨집 외에도 당시 함라에는 소위 만석군으로 일컬어지는 두명의 부호 즉 김씨집(김안균가(家))과 조씨집(조해영가(家))이다. 이 집은 세 집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1918년, 大正7)으로 김안균가(家)와 조해영가(家)의 모델로 작용하였으며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건립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 뒤쪽 공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목조 와가로 장대석 두벌대 기단 위에 주좌를 높게 치석한 방형 초석을 놓고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했다. 기둥은 모서리를 둥글게 쇠시리 하여 모접기 하였다. 평면은 좌측부터 건넌방, 대청, 웃방으로 이어지며 웃방에서 전면으로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돌출 된ㄱ자집이다. 이 집은 평면상으로 전후 퇴집 구조이나 가구구조는 1고주 5량가로 배면 평주에서 고주 중간에 대들보를 끼우고 고주 머리가 직접 종보와 중도리를 받게 했다.
옛노래에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 라는 가사처럼 이곳 3부자집을 보니 옛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풍속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인데…’. 성하의 계절에 쏟아지는 바늘침 같은 햇빛 속에서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수동(壽洞)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실감하게 된 <호남가>의 한 대목이다. ‘함열’하면 수동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익산시 함열읍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함열은 엄연히 함라면 소재지를 가리킨다. 함라면 소재지를 흔히 ‘함라마을’(교동·안정·수동·천남·행동·감마마을을 포함함)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함라마을은 없다. 양심 있는 부자들 ‘인심은 함열’ 입증 함라면 소재지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수동마을은 장삼을 입고 염주를 두른 스님이 두 팔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라는 함라산을 서쪽으로 하고 들어앉은 마을이다. 윗마을이란 뜻으로 ‘머리골(首洞)’이라 하던 것이 ‘목숨 수(壽)’자로 바뀌었다. 수동은 ‘식골’ ‘숫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으뜸가는 마을이란 뜻이라 한다. 특히 마을이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큰 부를 이룰 명당터라고 이장님은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수동마을에는 소문난 부잣집들이 많다. 만석꾼으로 알려진 임천 조씨 집안의 조해영 가옥, 김해 김씨 김안균 가옥, 수동마을 바로 옆인 천남마을에는 경주 이씨 집안의 이배원 가옥 등이 있다. 수동마을엔 이런 부농 가옥을 중심으로 문인과 예술인들이 머물렀으며 그 외에도 많은 식객이 끊이지 않아 매일 풍악이 울리고 육물 다루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창 임방울도 조해영 가옥에 자주 머물렀고 보릿고개나 춘궁기엔 걸인들과 식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5년 3월3일자를 보면, <益山咸悅面(익산함열면) 사는 良心(양심)잇는 富者(부자), 구차한 사람에게 삼천원을 긔부/ 乞人(걸인)으로 成市(성시)한 咸悅, 밥을 구하는 수백여명의 동포, 집마다 괴객의 답지로 대번창>이란 기사가 있다. 1932년 6월24일자 기사도 있다. <貧寒(빈한)한 同胞(동포) 爲(위)하야 集中(집중)되는 各層(각층)의 同情(동정), 百三十餘名(백삼십여명)에 二個月間配食(2개월간배식)가 益山咸悅里(익산함열리)의 三氏(삼씨).> 실로 ‘인심은 함열’이라는 말을 입증하는 기사들이다. 걸인·식객·예술가 발길 이어지던 ‘열두 대문 집’들 수동마을에 먼저 정착한 집안은 임천 조씨 집안이다. 수동마을은 임천 조씨 씨족마을로 현재도 50여 가구 중에서 40가구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 조해영 집안은 일제시대에 농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확장했다. 현재 지방문화재 자료 제121호로 지정된 조해영 가옥은 이 무렵(1918년)에 건립된 것이다. ‘열두 대문 집’이라 불릴 만큼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헐리거나 해체되어 팔리고 현재는 몸채·부속채·별채만 남아 있다. 그 다음에 정착한 집안이 김해 김씨 집안이다. 그 중 김안균 집안은 원래 가난한 선비집안이었으나 길에 쓰러진 스님을 치료해 주고 그 보답으로 스님이 정해준 자리에 묘를 쓴 후로 기울었던 가세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김안균의 조부가 진사가 되고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함화농장을 설립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무렵(1922년)에 지은 집이 현재의 김안균 가옥(지방 민속자료 제23호)이다. 전북에서 가장 규모가 있는 가옥이며 익산에 남아 있는 고가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건물이다. 긴 행랑채를 갖고 있는 이 집을 마을 사람들은 김진사댁이라고 부르는데 주인이 서울에 있어 현재는 빈집이며 출입이 어렵다. 바로 곁 천남마을엔 이배원 가옥이 있다. 원래 이 집안은 임피에 살았으나 먹고살 게 없어 웅포로 가다가 함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 주막 주모가 누룩을 팔라 하여 작은 초가를 짓고 함라에 정착했고 완주군 고산 누록을 가져다 팔아 기반을 잡았다. 그 후 배를 장만하여 군산과 웅포의 나루를 통해 장사를 했는데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던지 배에 싣고 온 엽전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고, 커다란 곳간이 엽전으로 가득 찼다고 하는데 실제로 곳간 자리에서 엽전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배원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1925년 당시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하여 부를 확장했고 1918년 이배원 가옥(익산시 향토유적 10호)을 지었다. 이 집을 모델로 김안균 가옥과 조해영 가옥을 건립했다고 하는데 원래는 여러 채였지만 모두 헐리고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원불교 함열지소로 사용되고 있음)만 남아 있다. 이배원의 큰아들인 이집천은 1920년대에 함열향교 옆 함라산 자락에 경사진 산세를 이용하여 서벽정(棲碧亭) 등 3동의 별장을 지었다. 공간 배치가 뛰어나 승경지로서도 손색이 없어 당시 전국에서 손꼽는 별장으로 알려졌단다. 당시에 별장 사진을 담은 엽서도 제작하여 돌렸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하겠다. 당시 이집천은 자신이 직접 쓴 서벽정 현판을 걸 정도로 서예가로도 유명했는데 당대 서예가였던 해강 김규진과도 교우가 깊었다고 한다. 서벽정이 얼마나 알려졌던지 일제 시대에는 이리에서 이곳까지 소풍을 왔다고 한다. 별장으로 오르는 오작교 같은 다리가 2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옛날의 그 화려한 별장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고 별장 문 돌기둥 4개와 이배원의 손자가 1984년에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세웠다는 비석만이 덩그마니 남아 있을 뿐이다. ▲ ▲ 이배원의 큰 아들인 이집천이 함열향교 옆 함라산 자락에 지은 별장 서벽정은 일제 시대에는 이리에서 이곳까지 소풍을 왔던 승경지였다. 지금은 기둥 4개만 남았다.
상하 분별 못하는 놈, 불효하는 놈, 게으른 놈은 ‘읍강법’으로 체포 수동마을은 조선시대 함열현의 중심지로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895년에 제작된 함열현 고지도를 보면 당시 관아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주춧돌 하나 찾을 수 없는 빈 땅으로만 남아 있고 함라면 번영회와 함라면주민자치센터에서 세운 안내판과 주변 밭에 널린 기와편이 당시의 관아지를 보여줄 뿐이다. 관아지 객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은 허균이 43세 때(광해군 3년) 과거부정사전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는데 자원하여 유배를 와서 머문 곳이다. 이곳에서 허균이 쓴 《성소부부고》에 ‘관사는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써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당시 이 곳 관아는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동마을의 진짜 매력은 무엇보다 옛 담장일 듯 싶다. 수동마을의 옛 담장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3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골목마다 이어지는 옛 담장을 보며 어슬렁거리는 맛이 각별하다. 담장 둘레만 300m가 넘는다는 김안균 가옥 뒤편으로 돌아 마을 안쪽 골목길로 가면 요즘의 인위적인 문화재 담장이 아닌 진짜 옛 담장을 만날 수 있다. 요즘 한창인 능소화가 늘어진 담장 앞에서는 발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집천의 별장이었던 서벽정 아래에는 별장을 관리하는 권씨 성을 가진 집이 있는데 현재는 양옥으로 바뀌었지만 그 담장은 그대로 남아 있다. 권씨가 쌓았다는 그 담장은 여간 예쁜 담장이 아니다. 그 골목길을 찬찬히 걷다 보면 ‘함라노소(咸羅老所)’라는 현재의 경로당 같은 건물을 만나게 된다. 300여 년 전인 1687년(숙종 13년) 8월에 수동마을 노인들이 향약이나 동약같이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노소이다. 특히 정월 15일 군수가 노소의 승인을 얻어 불량배를 경계하는 읍강법을 두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상하 분별 못하는 놈, 불효하는 놈, 게으른 놈을 체포하는 등 노소를 중심으로 마을의 규율이 자율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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