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유주막이란 나루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한가지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영의정을 지내던 유영경의 형 유영길은 그 당시 임금이었 던 선조와 사돈간이었으며 호는 월봉이라 했고 예조판서를 지내던 인물인데 낙향을 해서 이곳 팔봉에 와 있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해서 관직이 마땅치 않으므로 모든 직을 사퇴하고 이곳에 와서 자적을 하게 되므로 동생인 유영경은 부득이 팔봉 을 자주 찾아와 형의 신상을 살피며 위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팔봉은 유영경의 왕래가 많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실은 형님의 은거지를 드나드는 것을 남이 모르게 한 짓이지만 영의정의 거동이 그렇게 비밀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영경이 한 번 행차할 때면 20명, 때로는 30명의 벼슬아치들이 드나들게 마련이다. 그들이 팔봉으로 출입하는 경로를 보면 한양 광나루에서 큰 배를 타고 충주 합수나루까지 와서 작은배로 윗단월(현 유주막 )까지 가서 보행으로 풍동을 거쳐 가든지 물이 많을때는 배편으로 가게 되는 셈이 다. 유대감이 자주 이곳에 온다는 소문으로 관계사관들과 유씨문중의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지방인사들이 끊일날이 없이 드나 들었으니 이곳은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 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부근의 경치가 볼만해서 노루목을 거쳐 수주까지는 구경꾼들 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므로 가장 호경기를 이루는 곳이 객방(여관)이나 술집 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씨네 때문에 이 주막거리가 번창 한다고 말들을 하니 그로 인해서 이곳을「유주막거리」라고 호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느때 유대감이 경상도에 일시 체류하게 되어 행차하는 도중 팔봉에서 하루 를 머물때의 일이다. 월봉이 원래 검소하다는 것을 동생도 잘 알고 있는터이지만 식사며 의복등이 지나 치게 초라했다. 유대감은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경상도로 향했는데 경상도에 가서 체류하는 동안에 우선 식량과 필목 등을 두어 바리 실려서 형님 댁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싣고 온 관리들이 취지를 말한 다음 물건을 내리려고 하자 월봉은 펄 쩍 뛰며 못내리게 하고는 "이렇게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인사를 한 다 음 피로도 하고 시장들도 할 것인즉 쉬어 가라는게 도리인줄은 아나 물건을 내집에 다 잠시라도 들여 놀 수는 없다며 가다 요기나 하라면서 노잣돈을 주어 도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짐을 싣고 왔던 관리들은 진퇴양난이었으나 너무도 강경한 태도인지라 하는 수 없 이 문강리 산 고개를 다시 넘어 가면서 "이 무거운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도로 넘어 야 한담"하고 불평을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나무꾼들 사이에는 어느새 이 고개를 「도루고개」라고 불리워 왔는데 언제 부터인지「돌고개」로 와전되고 말았다.
그 후 유영경은 형님의 산 교훈을 명심하고 노력하여 청백리로서 역사를 빛낸 인물 이 된 것이다. 팔봉에는 월봉선생이 자기 수양과 후진들에게 강학을 목적으로 초은 정이란 정자를 세운바 있었고 그 옆에다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었는데 향나무는 지 금도 자라고 있으나 정자는 퇴락하여 없어진지 오래이다. 1979년에 충주미덕학원이 사장인 안동준씨가 유영길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분이 정자를 지었던 자리 에다 육각정을 건립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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